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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만자



소통하도록 이끌며 희망과, 능력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사도행전 2:1-4)



201969

주일예배

최만자 자매(새길교회 신학위원)



[오순절이 되어서, 그들은 모두 한 곳에 모여 있었다. 그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길이 솟아오를 때 혓바닥처럼 갈라지는 것 같은 혀들이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 사도행전 2:1-4 -



오늘은 교회력에 의해 지키는 성령강림 주일이랍니다. 우리는 매주일 모든 생명들이 서로 소통하도록 이끌며, 고난과 절망 속에서도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운 희망과 능력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성령에 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형식적으로 암송만 하나요? 아니면 어떤 심정으로 이 고백을 하고 있는지요? 사실 성령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고 모습도 없어 성령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성령의 은혜를 갈구하는 사람들도 많고 다양한 성령임재의 체험들도 넘쳐납니다. 저는 이 어려운 성령 이야기를 범위를 좁혀 처음 교회를 시작하게 한 성령강림을 중심으로 함께 생각을 나누고자 합니다.

 

신약성서 사도행전 2장 전체에 기록된 성령강림의 사건은 이렇습니다. 예수 승천 후 열흘이 지난 날, 이 날은 유대인들의 유월절 마지막 날 오순절이어서 제자들이 예루살렘의 한 곳에 모였는데 그 때 거센 바람과 함께 불의 혀 같은 성령이 각 사람 머리 위에 임하였고 성령이 충만해진 이들이 성령이 시키는 대로 방언으로 말하였고, 여러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이를 보고 어리둥절, 신기해하면서 혹자는 저들이 술에 취하였다고도 했습니다. 이때 베드로가 설교하기를, ‘이들이 술에 취한 것이 아니라 주의 마지막 날의 구원의 은혜를 얻은 것이라 하면서 요엘서 2:28-32을 인용하여 그 마지막 날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을 모든 사람들에게 부어주며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종말론적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형태는 매우 초기 단계의 전도 설교의 유형으로 보이는데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 확신을 여기에 반영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의 생애를 알리고 그의 죽음, 부활이 구약성서가 약속한 계시의 성취이며 예언자들이 예언한 메시야가 바로 예수임을 시편들을 근거로 증명합니다. 이 예수를 유대인들이 죽였으므로 회개하고 세례 받고 공동체에 들어와 죄 사함을 받으라고 합니다. 이 베드로의 설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되었으며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 새롭게 출발한 공동체의 모습은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고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고 모자람이 없었답니다. 날다마 한 마음으로 성전에 열심히 모이고 집집이 돌아가면서 빵을 떼며, 순전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고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으로 맨 처음 교회가 이렇게 시작 된 것입니다. 이 초자연적 현상을 동반한 성령강림과 처음교회 모습은 오늘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성령강림 현상과 원시교회 모습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 번째는 성령강림 직전 예루살렘 한 곳에 모인 제자들에 대한 생각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구원자라고 철썩 같이 믿고 따랐던 스승이 치욕스러운 십자가 처형을 당했고, 그와 한 패거리로 몰릴까 전전긍긍 하며 좌절과 공포와 절망에 휩싸여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 그들의 두려움이 가시기 전에 예수는 홀연히 승천하였고 기댈 곳 없이 안절부절 열흘을 지났을 것입니다. 더욱이 스승을 배반했고 그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어리석음, 부족함 등으로 부끄러움과 회한에 가슴 치며 몸 둘 바를 몰랐을 것입니다. 하여 예수가 머물라고 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저들에게는 불안과 위협의 장소여서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지난날 잘못을 애통하며 회개하는 마음이 깊었고,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이 이제사 신기하게 새롭게 깨달아지기 시작했을 듯합니다. 예수를 따라다니며 한자리 권세나 누려볼까 했던 과거의 제자의식과는 천지 차이의 의식이 생겼고 따라서 이제부터는 그 일에 온 힘을 다해 몸 바쳐야겠다는 각오도 단단해지기 시작했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서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면서 한 마음이 되었고 선한 능력을 느끼고 간구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깨달음에 이르니 예수의 죽음이 억울한 죽음임을 직시하게 되었고 오히려 이 예수가 구약에서 계시한 메시야임을 증거 해야겠다는 사명이 생겼습니다. 학자들은 이 베드로의 설교 내용에 예수가 구약에서 예언한 메시야란 증거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흔적이 있다고 합니다. 이런 열정의 마음이 점차로 커 가던 그들에게 불같은 성령이 강림하였고 저들은 용기와 능력을 가진 존재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특히 베드로는 스승을 부인했던 수치심과 번번이 저지른 실수들로부터 이제는 자유로워진 사람으로 재탄생 한 것 같습니다. 안병무 선생님은 이 상황을 저들 내면 깊이에서의 깨달음이 초자연적 힘을 쏟아내는 현상을 일으켰다라고 표현합니다. 하늘의 힘은 우리의 간절함과 절박함 안으로 들어오는 것인가 봅니다. 즉 제자들이 절망 가운데서도 깊은 성찰을 통한 새로운 깨달음을 가졌을 때 결국 새 역사를 시작하는 힘을 얻게 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분명한 형태로 우리 역사 속에 들어왔고 이 부족한 제자들을 통해 인류사를 다시 시작한 사건입니다. 이제 제자들은 더 이상 부끄럽고 부족한 자들이 아니라 성령의 힘 안에서 새 역사를 이루는 역군이 되었고, 성령은 그리스도 교회의 삶과 성장과 그 방식을 이끄는 힘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성령 강림의 원동력은 제자들의 뉘우침과 깨우침이었구나 생각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은 일방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내면에서 새로워지고자 하는 힘과의 만남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시작되었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사역은 역사 안에 있는 교회의 사명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생각 해 보는 것은 성령이 불의 혀 같이 거센 바람 같이 임하였고 제자들이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을 하였다는 기록입니다. 바람, 불같은 표현은 성서 전체에서 성령의 상징으로 자주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확실한 자기 계시의 모습이 그러한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너무 많아 여기서 다 언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방언을 말한 현상에 대해서는 자세히 생각하고자 합니다. 그 때 여러 곳으로 흩어져 살고 있던 경건한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고자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는데 무려 15개 지방이 열거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각각 자기네 지방 말로 제자들이 방언을 하는 것을 듣고 어리둥절, 신기하게 여겨 놀랐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인데 우리들 각각 태어난 지방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면서 놀라기도 하고 더러는 저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조롱하기도 합니다.


이 방언 현상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자 함은 성령의 강림은 곧 방언체험과 신유 은사를 받음이라는 이해가 한국교회 안에 너무나 팽배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았다하면 곧 방언의 은사를 받는 것으로 연결시키고 또 방언 받기를 열광적으로 간구하고 방언 받기 위한 훈련을 하는 등 방언에 극도로 집착하는 현실이 허다하여 방언에 대한 오해와 혼란을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방언을 받았으니 하늘의 권력을 가지게 됐다라는 등의 생각들이 난무하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박영돈 교수는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이란 그의 책에서 지금 한국교회의 성령에 대한 왜곡된 이해와 열정을 안타깝게 그리고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 분은 칼빈, 풀러, 웨스터 민스터 등의 철저한 보수적 신학대학원에서 성령론을 전공하고 지금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교수로 있는 분입니다. 그는 성령 충만은 십자가의 고난을 통과 하여 오는 은혜인데 그 십자가 없이 성령 충만 만 구하면 부흥이 아니라 재앙이 임할 것이고, 십자가 고난을 모르는 사람의 손에서 그 능력은 부패한 육신의 일들을 증진시키는 힘으로 남용되는 무서운 사태가 발생 할 것이라 경고합니다.


오순절 운동의 신학적 뿌리라는 책을 쓴 도널드 W. 데이턴도 방언은 일반적 종교현상이라 하면서 방언에 전념하는 것은 오순절운동에 대한 적합한 이해를 저해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오순절 교단에서도 성령을 방언 받는 것에 집착하는 잘못을 지적합니다. 바울 사도는 열광적 황홀경적 방언 현상에 대해 개인의 은사로는 생각하지만 교회 공동체에 덕이 되지 못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차라리 예언의 은사를 구하라고 권합니다. 제자들의 철저한 뉘우침과 새로운 깨달음에 대한 숙고는 전혀 없고 성령강림의 초자연적 현상에만 집착하는 한국교회 현실이 안타깝기 그지없는 것은 이런 신앙행태가 예수의 복음을 왜곡시켜 그 본질을 훼손시키고 세상에 더 큰 죄악들을 초래하는 요인으로 작용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방언이 원시교회 성령강림 때의 확실한 체험이요 교회형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음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왜 교회 시작의 중요한 시점에 성령강림은 방언현상을 수반 하였을까요? 학자들은 저자인 누가가 방언현상을 소통의 사건으로 받아들여 예수 운동의 전파와 확장이라는 선교적 사건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많은 학자들은 이 현상을 언어와 소통의 문제와 관련시킵니다. 특히 김진혁 교수는 오순절에 여러 지역에서 모인 사람들이 제자들의 예수증언을 알아들을 수 있게 성령의 능력이 방언현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즉 방언은 초자연적 기적현상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사건을 전파하기 위한 소통의 사건에 중심을 두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이 사건을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과 연관 짓습니다. 하나의 언어만 사용하던 인간이 하늘까지 닿는 탑을 쌓고 자기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자며 저들 교만을 단일 언어와 연결 시켰지요. 그러나 하늘의 벌로 언어의 혼란이 오고 소통의 장벽에 막히게 되어 온 지면으로 흩어져 문명을 이루며 살게 된 이야기 입니다. 김 교수는 의사소통에 실패한 인간들은 서로가 낯 선이가 되어 형제 살해의 폭력이 일어나고 타락한 인류가 온 땅으로 흩어졌고 죄가 온 땅을 덮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강림의 언어 소통 사건은 그 소통을 통하여 폭력, 살해의 옛 질서와 전적으로 다른 평화와 사랑의 새 질서를 세상에 가져오신 예수를 모두에게 전하고 알린 한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 된 것입니다. 방언은 그 소통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이제 온 땅은 예수의 평화와 사랑, 곧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임을 암시하고 여러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그것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이해하여 소통되었던 예수 운동 전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실제로 오순절 성령강림에 함께했던 많은 지역으로부터 온 경건한 유대인들, 이방인들이 예수 사건을 방언을 통해 충분히 알고 깨닫게 되어 자기 사는 지역으로 돌아가 이를 전파함으로서 초대교회 선교를 더 빠르고 가능하게 하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신적 능력과 소통하는 신비한 경험이기도 하지만 성령강림의 방언은 이를 훨씬 넘어서는 소통을 통한 선교적이며 사회 역사적이며 공동체적 의미를 갖는 영적 경험의 사건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교회시작의 방언은 단순한 종교적 신비의 현상만이 아니라 온 세계에 새로운 세상 창조, 새로운 세상 질서를 가져온 예수를 전파하는 하나님 나라 선교의 사건이며, 방언은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렸고 새로운 세상의 질서와 가치를 공유 할 수 있게 했고 그래서 새 질서를 지향하는 새로운 인간 집단을 탄생케 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세 번째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 바로 새 공동체의 새로운 삶의 모습입니다. 이 새로운 공동체는 종말론적이며 급진적입니다. 종말론적이라 함은 지금의 모순된 질서가 끝나고 하나님의 평화, 자유의 질서가 시작되는 새로운 때를 말 합니다. 두 가지의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베드로가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여 알려준 바대로 하나님의 영이 남녀노소 남종 여종 등 사회 계급적 신분이나 남녀의 차별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내려져서 저들 모두 예언하고 환상을 보고 꿈을 꾸게 된다는 것이지요. 김 교수는 이 공동체는 그동안 소위 인류문명을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불가피하다면서 정당화 시켜왔던 각종 사회적 구분과 소외의 원리를 넘어서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성을 누리는 새 세상을 제시하고 지향 한다고 해석합니다.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의 영은 중요한 사명과 직책을 감당하는 왕이나 예언자 같은 정치, 종교, 군사 지도자에게 내려졌는데, 요엘 예언자는 종말에는 모든 사람위에 하나님의 영이 부어진다고 합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이를 영으로 말미암은 메시아적 민족의 다시 태어남이라 표현합니다. 성령이 부어진 새 공동체는 우리 안에 내재한 차별과 배제 같은 악함이나 일상적 욕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완전히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꿈꿀 수 있는 모든 상상력을 펼치게 합니다. 차이를 만드는 폭력의 세상 질서로부터 벗어나 차이를 없애는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 세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성령을 받은 새 공동체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메시야적 세상을 이루는 선한 능력, 선한 힘으로 우리 안에 공동체 안에 함께합니다.


또 하나의 특징은 바로 공동소유 형태의 삶입니다. 성령을 받아 시작한 공동체의 삶은 공동생활과 물질을 공유하는 모습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한 형제자매들과 모든 것을 나눠 쓰고,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말라고 합니다. 칼 바르트는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중요한 세 가지 결정적 기적이 있는데 1)무로부터의 창조 2)동정녀 탄생 3)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인의 등장이라 하면서 이는 바로 사도행전에 나오는 공동체적 나눔의 삶, 곧 이 원시 공동체의 출현을 신앙의 기적이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처음 공동체의 모습이 공동생활과 물질의 공유일까요?


성령 받은 중요한 결과는 새로운 인간성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령 받기 전과 후의 삶이 변화되는데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지요. 그 새로운 인간성은 온전한 자기중심성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삶의 질서를 받아들인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가치 중심이 전환되고 삶의 방식의 변화를 가지며 그 삶의 방식은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성령강림은 개인중심주의를 넘어선 공동체적 인간으로 나아가게 하였습니다. 공동소유의 인간성은 사랑과 자유와 평등과 생명의 가치들을 모두 포괄한 인간성을 가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이 공동소유의 방식은 바로 예수의 경제 질서를 따라서 사는 삶이 됩니다. 예수를 만난 삭개오는 토색한 것의 네 배를 갚겠다며 새 사람이 됩니다. 부자 청년이 율법을 다 지켰다 할 때 예수는 가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근심하고 떠나갔지요. 예수의 경제 질서는 마태복음 20장의 포도원 일꾼의 품삯 이야기에서 더욱 확실합니다. 건강하고 집도 가깝고 자유로운 사람은 아침 일찍 일하러 올 수 있지만 몸이 불편하다거나 집이 교통 불편한 먼 외진 곳에 있다거나 아침에 식구들 밥 챙겨주고 아이들 유치원, 학교 보내고 병든 부모님 식사며 종일 지낼 조건들을 챙겨 놓고 와야 하는 주부는 일찍 일터에 올 수 없고 오후에나 겨우 일하러 나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모두에게 똑같이 하루를 살아갈 품삯을 지불해 주었지요.


성서의 사상은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와 돌봄, 약자 우선의 생활 조건을 만드는 것을 율법의 중심이요 복음의 중심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학적 윤리적 중심주제입니다. 다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지향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가난한자, 갇힌 자, 병든 자, 목마른 자들과 예수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가톨릭에서도 개신교에서도 매우 불편한 것이고 심지어는 종북이나 공산주의라는 프레임을 씌웁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와 박정희 후예들은 공산주의 포비아들이지요. 혁명이 아닌 자발적인 형태로지만 경제의 공유형태를 시작한 그리스도교가 공산주의를 맹렬 비난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제대로 알지 못함을 스스로 폭로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성서에도 무식하고 예수와도 상관없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레시페의 주교 돔 헬더 카미라는 말하기를 가난한 이에게 먹을 것을 주면 사람들은 나에게 성자라고 박수를 친다. 하지만 왜 가난한 이가 먹을 것이 없는가를 질문하면 나에게 공산주의자라고 소리치기 시작한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한국교회 현실입니다. 한국교회와 사회는 먹을 것을 주는 것조차도 종북이라 비난하지요. 성령이 함께하는 사람은 자기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새사람이 되고 함께 모두 잘 사는 경제 질서를 따라 사는 삶을 하게 됩니다.


성령강림 사건을 이렇게 정리해 보면서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오늘의 한국교회와 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 자신을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 나와 교회와 사회를 새롭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성령강림 원동력을 제자들의 뉘우침과 깨우침이라 했는데 우리의 뉘우침과 깨우침이 없이 우리의 새로움은 당연히 이룰 수 없겠지요. 또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결코 내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제자들은 철저하게 뉘우쳤고 급진적인 종말론적 깨우침을 가졌고 성령이 함께하셨습니다. 이 일에 나 자신이 가능하겠습니까, 한국교회가 가능하겠습니까, 사회 경제 구조가 가능하겠습니까? 최근에 새길에 오셨던 은혜공동체 같은 교회들은 이 강퍅한 시대에 성령의 불씨를 받은 새 인간성들의 출현이 아닐까 싶어졌습니다.


지금의 우리 현실은 마치 성령강림 직전의 제자들 상황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갈가리 찢겨있는 사회분열, 무고한 이들의 죽음과 폭력의 난무, 윈윈의 복음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부만 늘려가는 양의 탈을 쓴 이리들의 경제구조, 너무도 뻔뻔스런 성범죄자들과 그들과 결탁된 사법의 권력들, 대책 없는 여성혐오, 눈앞의 이익과 자기만의 생존과 세력유지를 위해 만드는 털끝만큼의 양심가책도 없는 가짜뉴스들과 거짓증언들, 엽기적인 사건 사고들, 인성교육 제대로 할 곳도 없는, 무엇하나 마음 붙일 곳 없어진 이 세상에서 눈 감고 우리끼리만 사랑하고 재미있게 지내자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제일 한심한 것은 우리사회 구조악의 근원지인 분단의 현실을 이대로 고착시키려 하고 전쟁의 위협을 이대로 또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되는 행태를 앞장서 하는 것이 예수이름을 팔며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현실 앞에서 우리의 뉘우침과 깨우침은 더 처절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요즘 일부 교회 지도자들이란 사람들의 행태를 보면 한국교회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성령강림 이전의 제자들의 상태에서 좌절하고 있습니다.


이런 고민에 잠겨 있을 때 정진홍 교수의 종교현실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이란 제목의 글을 읽었습니다. 그는 오늘의 종교가 살육에 이르기까지 하는 현실을 보면서 종교가 평화를 위해 기여하기 보다는 갈등을 야기하는 주체로 지속되어 왔고 인류를 파멸로 이르게 할 수도 있겠다고 우려합니다. 그는 생각의 지평을 새롭게 하는 북유럽 신화 엘더 에다(Elder Edda)"를 얘기합니다. 세상이 최종 파멸로 운명 지워져 온갖 종말의 전조들이 나타나는데 바다건너 거인들과 우리를 지켜주는 신들이 싸우게 되고 결국 그 신들이 모두 살해당하며 세상이 끝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현실을 신들도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세상은 당대의 신과 인간, 그리고 그에 적대적이던 부정적인 힘들을 모두 아우른 채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 파멸의 이야기는 아무런 논리적 연계도 없이 새 세상의 이야기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딘의 몰락 후에 오시는, 내가 감히 그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아무도 그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그 누구보다도 높은 분의 다스림 아래에서 ....... 새 세상이 열린다이런 신화입니다.

 

신의 죽음마저도 포함하는 종말이 진정한 종말이고 그래야 비로소 처음이 비롯한다는 이 이야기는 미처 생각지 못한 의미를 줍니다. 정교수는 우리는 흔히 신에 의한 심판과 재생. 절대적인 것에 의한 터득과 완성을 말하지만, 그러나 기존의 신이나 절대도 실은 이제까지의 그리고 지금 여기의 망가지고 온전하지 못하게 된 현실에 기존의 신도 책임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과 그 신으로부터 말미암는 온갖 진리라는 것과 규범들을 쫓아 살겠다고 애써온 것이 우리의 정황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삶과 더불어 그 종교조차 한심한 상황이 되어버린 것이라면, 그 신과 그 절대도 이 삶의 종말 앞에 면책 될 수 없다라고 합니다. 오직 요청되는 것은, 혹은 여기서 지금 우리가 기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새로움뿐이라는 것이 이 신화의 결론입니다.


지금의 한국교회를 보면서 우리를 보면서 다만 새로움을 간절히 기다리게 됩니다. 성령 강림 직전 무력과 좌절에 빠져있는 우리들에게 뉘우침과 깨우침을 주는 선한 능력으로 정의로운 능력으로 완전히 새롭게 하는 성령의 강림을 간절히 정말 간절히 기다리게 되는 오늘 오순절입니다.

 

신화는 그렇게 끝난다 하더라도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겠습니다.

 

성령이여 완전한 새로움으로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감싸주시고 절망 속에 있는 우리에게 새로운 희망과 능력을 주소서.”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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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6 2019 [2019. 04. 14]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file 2019.04.16 박요셉
1085 2019 [2019. 04. 07] "봄" file 2019.04.12 임동숙, 이상길, 최서희, 김문음
1084 2019 [2019. 03. 10] “백년의 기다림” 2019.03.22 김정수
1083 2019 [2019. 03. 03] “내가 새길을 걷는 것은” 2019.03.08 김영란 외 8명
1082 2019 [2019. 2. 24] 우리는 '스스로 섰'(獨立)는가? 2019.03.02 이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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