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015.07.26]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by 새길 posted Jul 28,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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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추응식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다

(요한복음 14:7-9, 로마서 1:20)

 

 

2015726일 주일예배

추응식 형제(신구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이다. 이제 너희는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 그분을 이미 보았다.” 빌립이 예수께 말하였다. “주님,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좋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하고 말하느냐?”]

- 요한복음 14:7-9 -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 로마서 1:20 -

 

 

 

텔레비전을 사러 백화점에 갑니다. 매장에 가면 당신이 생각하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모든 제품들이 선명한 화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현재 뿐 아니라 10년 후에도 지금처럼 선명한 화면이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을 뜯어서 내부를 본 들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소비자는 삼천리 TV’대성 TV’ 같은 생소한 이름 대신 익숙한 삼성이나 LG 같은 브랜드를 선택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는 제품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의 이미지를 구매하게 됩니다. 비단 이것은 특정 제품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의 대부분 상품이 그러합니다.


이것은 공급자와 수요자가 가지고 있는 정보차이 때문입니다. 정보의 비대칭성이죠. 공급자가 가지고 있는 전문지식을 소비자가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에 소비자는 공급자가 제공하는 이미지를 구매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피로회복엔 박카스’, 박카스를 마신다고 피로가 회복되겠습니까? ‘젊음을 마시자! 코카콜라!’ 콜라를 마신다고 젊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다’, ‘미인은 잠 꾸러기라는 말들이 제품을 아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런 말들은 힘 있는 자들이 만들어내는 우상입니다. 이들은 이러한 우상을 유통시키고 세뇌시키기 위해서 정보의 비대칭성을 강화시키고, 정보의 유통경로를 독점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이러한 광고 문안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이런 시장구조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실체를 만나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미지를 만나고 있습니까? 우리가 원치도 않는 광고 문안을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어느 듯 외우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세뇌 당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실체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신학지식이 많은, 혹은 하나님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듯한 집단이 제공하는 이미지를 그리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랫동안 하나님을 불러 왔습니다. 어떤 이는 온 인생을 하나님과 함께 하며, 하나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습니다. 성서는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본 사람도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데 보이지 않는 그 분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부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름도 모습도, 시작도 끝도 없는 그 무한자를 찰나를 살다가는 우리가 어떻게 그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신비이겠지요.)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는 제각각 하나님을 그리고 있습니다. 개인 또는 집단별로 자기 하나님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마치 실체를 본 듯 말하고 있습니다. 서로 자기의 하나님이 옳다고 주장하다가 갈라서기도 하고, 나라 간에는 전쟁도 불사하고 있습니다. 초상집에서 밤새도록 울다가 누가 죽었지?’하고 묻는 것 같은 황당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이런 신비와 불가해성을 내세워 하나님과 사람의 간극을 넓혀왔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과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연약한 존재로서의 비대칭성을 강화해 온 것입니다. 그런 다음, 교회와 성직자들은 하나님에 좀 더 가까이 있는 것으로 설정함으로써 일반신도와의 거리를 넓혀 왔습니다. 이런 구조 속에서 교회와 성직자들은 그들만의 하나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 자신들도 그 이미지 속에 편입시켜 우상화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화된 이미지는 교회의 각종 집회와 조직을 통해 유통시켜 왔습니다. 가끔 높은 강대상에서, 우렁찬 목소리로 말씀을 전하는 기독교 TV 방송의 목회자들을 보면, ‘너희들이 모르는 것을 나는 많이 알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너희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을 나에게는 많이 들여 주신다.’ 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결국 교회는 그들이 만든 정보를 독점적으로 유통하기 위해 세상과 교회를 유리시키고, 교회 밖으로 귀를 열지 못하게 해 왔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정보에 관한 비대칭적 구조를 강화하는 교회의 가장 큰 죄악은 왜곡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는 것입니다. 너무 거룩하고 높아서 감히 가까이 할 수 없는 하나님과 그에 비해 창세 때부터 죄인의 피가 이어져 오는 태생적 죄인인 사람. 이 엄청난 하나님과 사람의 간극 속에서 맹목과 순종이 최선의 미덕이라고 가르치며, 오직 교회와 성직자만이 이 간극을 좁힐 수 있는 독점적 능력을 부여받은 듯이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제품의 이미지를 만들어 시장을 지배하고자 하는 기업과 같이, 작위적인 하나님 이미지를 만들어 신도를 장악하는 수직적 지배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 지체들의 자치가 아닌 목회자의 통치가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하나님과 사람간의 정보 비대칭구조를 깨러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대로 말하고, 왜곡시키기 때문에 직접 보여주러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을 그리면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이것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가장 큰 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요한복음 147-9)에서는 명료히 말씀하십니다.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 하고 말하느냐?”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희들은 그렇게 오래 예배당을 다니고 성서를 읽었고,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았으면서도 나의 모습을 두고 서로 다투느냐?”

 

내가 방금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고 해서 지금 내 생김새, 내 외모가 하나님 모습이겠느냐. 나는 하나님의 본성이다. 너희들도 사람이 만든 하나님의 이미지 대신 하나님의 속성을 찾아라. 사람들의 형식은 오히려 쉬운 길이고, 하나님의 길은 좁은 길이다. 삼위일체든 다원론이든 뭐라고 말해도 좋다. 오직 너희들 속에 하나님의 본성을 품어라. 그것으로 너희를 살게 하라.”

 

예수님은 하나님 본성의 압축파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공생애 삶은 그 압축파일을 풀어서 하나하나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직접 사시면서 보여주신 하나하나의 파일들을 열어보고, 그 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본성을 내 속에 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역사적 예수를 먼저 만나고자 하는 것은 사람에 의해 변질되는 않은 하나님의 본성을 배우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지난 번, 새길교회 창립 기념 토크-콘서트에서 길희성 선생님은 평신도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신학을 공부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저는 단순히 학문으로서의 신학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사람들이 만든 왜곡된 하나님의 이미지에 기대는 어리석음은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누가 만들어서 주입시켜 준 하나님의 이미지가 아니라 삶 속에서, 성서 속에서 스스로 하나님을 주체적으로 만날 수 있어야 한다는 있어야 한다는 말씀으로 이해했습니다.

 

또 오늘 읽은 성서 로마서 120절에서는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Qualities),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모습은 교회와 성직자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이어서 세상 속의 하나님 섭리를 보면 다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이 안 보여서 조금 맘대로 했습니다라고 변명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새길교회에서는 종종 신앙생활을 위해 생활신앙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예수님은 오셔서 생활하셨습니다. 웃기도 하시고, 화도 내시고, 슬퍼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좀 일찍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생의 마감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셨습니다. 왜 나를 버리시냐고 부르짖으시다가 결국 다 이루었다하시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속의 하나님의 속성 중에 백미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 보고 깨달아라. 한 사람은 세상의 가장 낮은 곳까지 와서 이렇게 죽는다.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 속에서 나도 죽는다. 그러므로 이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맘대로 말하지 마라.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살아서 하나님이 지으신 만물처럼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한다.”

물론 저는 몸이 다시 사는 것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예수의 죽음을 지금 현재적 실존으로 느끼는 것 자체가 제 속에서 부활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예수가 돌아가실 때,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것은 복음서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초기 새길교회의 정체성을 말할 때 만인제사장과 함께 많이 들었던 구절입니다. 지성소를 열어젖힌 휘장의 찢어짐은 교회 안과 교회 밖, 성직자와 평신도, 하늘과 땅의 경계를 허물고, 은밀한 곳에 계시면서 몇 사람과 내통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온 세상의 만물 속에 하나님을 훤히 드러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또한 예수께서 이 땅에서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을 들을 때마다 안됐다라는 우리말을 떠올립니다. 이 말을 저는 만물 속에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대표적인 하나님 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안됐다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동사로는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의미가 있고, 형용사로는 어떤 것이 불쌍하여 마음이 편치 않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이 두 의미를 같은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불쌍하게 느껴지면 그것은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불완전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불쌍하여 마음이 편치 않은 개인적 감정을 넘어서서 객관적으로 무언가 일이 잘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의 불완전함이 되어 무언가 되도록 해야 한다는 당위가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안됐다라는 마음이 생기면, ‘되도록행동해서 예수님처럼 다됐다’, ‘잘됐다’, ‘다 이루었다라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종교를 넘어 우리가 다같이 사용하는 이 말 속에 하나님 나라의 지향점이 있습니다. 안됐다고 느껴지는 것을 되도록 하면, 그곳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나라 대신 기분 좋은 곳이라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만물 속 깨달음과 관련하여 제 경험 하나 말씀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지난 겨울 라오스 방비엥에 갔을 때, 가장 먼저 들어 온 것은 병풍처럼 이어져 있는 신비스런 기암절벽 산이었습니다. 저는 그 절벽 바로 아래까지 가서 그 신비스런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1.JPG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무작정 산을 향해 나 있는 낯선 시골길을 달렸습니다. 꽤 먼 거리를 달려 비교적 산 가까이 왔을 때, 이제 저 언덕만 넘어서면 절벽 아래서 그 신비를 확인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그런데 그런 언덕을 몇 개를 넘어도 길을 계속되고 절벽에는 접근이 되지 않았습니다. 해도 지려하고 또 돌아가는 길을 잃어버리면 어떡하나 걱정 되어, 아쉽지만 자전거를 돌렸습니다.

 

돌아오면서 보니까 제가 산 가까이 갔을 때부터는 산 쪽으로 다가간 것이 아니라 산과의 일정거리를 두고 산을 따라 가면서 한참을 달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 내 생애에 나의 하나님을 뚜렷이 만나는 것은 어렵겠구나, 이럴게 늘 알려고 하다가 생이 끝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 돌아오는데 갑자기 저 앞에 산이 보였습니다. ‘나는 드디어 길을 잃어버렸구나, 산을 뒤에 두고 왔는데 앞에 산이 보이다니두려움이 생겼습니다. 마침 그때 사람이 지나가서 물어보니 제가 가는 길이 맞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갈 때는, 그 산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산을 지나면서 보니 산들이 일직선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둥글게 펼쳐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눈앞에 펼쳐져 있는 산을 찾아 앞으로 계속 갔지만, 사실은 둘러싸인 산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 하나님! 제가 하나님 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면서 돌아왔던 기억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성서 한 구절 읽고 마치겠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거울로 영상을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마는,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부분밖에 알지 못하지마는, 그 때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아신 것과 같이, 내가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2)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될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법을 신실히 배워, 서로 사랑하는 가운데 우리도 모르게 , 하나님!’ 이라는 말이 나오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새길로고.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