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015.05.31] 하나님 사랑의 의미

by 새길 posted Jun 0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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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오경자


하나님 사랑의 의미

(누가복음 15:21-24, 29-32)

 

 

2015531일 주일예배

오경자 자매

 

[아들이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잔치를 벌였다.

(중략) 그러나 그는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이렇게 여러 해를 두고 아버지를 섬기고 있고, 아버지의 명령을 한 번도 어긴 일이 없는데, 나에게는 친구들과 함께 즐기라고,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 버린 이 아들이 오니까, 그를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습니다. 아버지가 그에게 말하였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 누가복음 15:21-24, 29-32 -

 

 

새길교회에서 이 단에 오르는 것은 사실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용기를 내서 여러분들 앞에 선 것은, 첫째 이유는 지난번 조성심 자매께서 말씀하신 대로 교회에서 요청을 받는 것은 무조건 한다는 새길 공동체의 정신을 따라야 하겠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그래서 정경일 원장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바로 씩씩하게 답을 드렸습니다. 물론 곧 후회를 했습니다만. 사실 그 이유 말고도 제가 그동안 공동체의 여러분들의 말씀증거를 통해서 참 많은 것을 얻었기 때문에 저도 여기에 어떤 형태로든지 보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공동체의 여러분들의 경험과 생각을 담은 진솔한 말씀을 들으면서 개인적으로 좋은 경험을 많이 했습니다. 저와 같은 고민을 가지고 있는 분들의 말씀에서는 안도감과 위로를 받았고, 또 같은 문제에 대해서 저와 매우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움과 신선한 충격을 받고 저의 편협한 생각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마치 색색의 구슬들을 모아놓은 구슬 항아리가 색다른 아름다움이 있듯이 서로 다른 우리의 생각들이 모였을 때 새로운 의미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제 소박한 생각도 우리의 구슬항아리 속에 넣을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겼습니다.

얼마 전 길을 가다가 가로변 건물 2층 창문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고 크게 써서 붙여놓은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 건물 2층은 침례교회가 쓰고 있는데, 아마도 그 교회에서 창문에 그 글귀를 적어놓은 것 같았습니다. 그 길은 평소에도 자주 지나다니던 길이었으니, 아마도 그전에도 보았겠지만 무심코 지나쳤었던 것 같은데, 웬일인지 그날은 그 말이 마음에 남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가 아니라 당신을 사랑하신다라고 했으니, 인간들 모두를 포괄적으로 사랑하신다는 말이 아니라 바로 나를 직접 지적해서 사랑하신다는 직접적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면 과연 어떻게 사랑하신다는 말일까? 내가 어떻게 그걸 알 수 있을까?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증거, 징표는 무엇으로 나타날까?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사는 삶과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거나 외면하고 사는 삶은 어떻게 다를까?” 이와 같은 기독교인에게는 아주 기본적인 질문들이 새삼스럽게 마음속에 떠올랐습니다.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 소중하게 여긴다는 뜻이지요. 사랑을 받는다는 것은 큰 선물입니다. 어린 시절 부모와 정서적 유대관계를 잘 맺은 아이들, 즉 부모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아이들은 그렇지 못한 아이들보다 세상을 신뢰하는 마음이 더 크고 세상에 나아가서 새로운 것을 탐색하고 다른 사람과의 건강한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크다고 합니다.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끼면 자연스럽게 부모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커질 것이고, 부모를 닮고 싶은 마음, 부모가 가르치는 대로 살아가고 싶은 마음도 생길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같은 자녀인 다른 형제들도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굳이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빌리지 않아도 어린 시절에는 부모가 절대적인 존재로, 가장 가까운 존재로 생각되고, 부모를 닮고 싶어서 그 행동과 가치관을 흉내 내면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심리적으로 성숙되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도 부모의 사랑을 느끼는 것과 비슷한 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마음 깊이 느낀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고 하나님의 같은 자녀인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도 자연스럽게 따라 나올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모든 것의 출발점이고 근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는 것이 쉽지 않을까요? 하나님의 사랑에는 조건이 붙어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떠어떠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떠어떠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단순한 메시지를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제 자신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이 없는가, 자문했을 때, 부끄럽게도 수없이 의심하고 많이 흔들렸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창문에 그 말을 크게 붙여놓았다는 것, 그렇게 강조를 하고 있다는 것은 그 말씀이 중요함과 동시에 우리들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이해하고 마음으로 확신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과 그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누가 복음 15장의 돌아온 탕자비유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치시기 위해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는 집을 나갔다가 돌아온 아들을 맞는 아버지의 기쁨이 하이라이트입니다. 죄를 짓고 떠났던 아들을 아무 조건 없이 기쁘게 받아주는 아버지 이야기에서 우리는 큰 치유의 메시지를 봅니다. 하지만 저는 오늘 그 치유 메시지의 뒷 배경, 즉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떠났던,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탕자 아들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은 둘째 아들이 재산 분배를 요구하고 분배된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가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당시 유대인들 간에는 아버지가 사망하기 전에도 아들들에게 재산 분배를 할 수 있고, 그 경우 장자에게 2/3, 차자에게 1/3을 나누어주는 것이 관행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관행에 따라서 아마도 아버지는 둘째에게 그에 해당하는 재산을 나누어주었을 것이고, 둘째는 집을 떠납니다. 문제의 둘째 아들은 단순히 머리를 식히거나 여행을 위해서 집을 나선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버지에게 재산의 분배를 요구해서 받아가지고 떠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사실상 아버지에게 등을 돌리고 가족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마음으로 떠난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 집은 상당한 재력을 갖춘 집안인 듯하고, 앞뒤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둘째 아들이 특히 고생을 하거나 어려운 환경에서 지낸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여유 있는 집안의 둘째 아들로 객관적으로는 불만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둘째 아들로 하여금 그런 당돌한 요구를 하고 집을 떠나게 하였을까요?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생각해보면 아마도 둘째 아들은 원래부터 모험을 좋아하는 성향이 있어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기회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에 끌렸을 수도 있습니다. 먼 나라에서 아버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즐기고 싶은 젊은이다운 욕구의 유혹에 끌렸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쩌면 가족들에게특히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는 듯한 아버지와 형에게보란 듯이 크게 성공해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컸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는 선택을 하게 된 이유를 무엇보다도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찾아보고 싶습니다. 아들러(Adler)는 출생순위가 성격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하면서 둘째는 첫째가 이미 자리를 잡은 후에 태어나게 되므로 처음부터 강력한 라이벌에 맞닥뜨린다고 하였습니다. 장자인 형에게는 집안 내에서 특별한 지위가 인정되었을 것이고 둘째 아들의 입장에서는 단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형이 집안 내에서 특별한 위치를 보장받고 여러 가지 기득권을 누리는 것을 견딜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자신도 형 못지않게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고 있는 둘째에게 항상 형을 앞세우는 아버지의 태도가 정말 서운했을 것이고, 자신은 아버지에게 어떤 존재인가, 과연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기는 하는지? 의문을 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흔히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고 고통은 면하게 해주지 않겠는가?”는 생각을 합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해주고 나만을 특별한 존재로 취급해주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연인에게도 사랑의 증거를 거기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그러한 기대를 했었다면 장자인 형과 달리 자기를 상대적으로 소홀하게 대하는 듯한아버지가 과연 나를 사랑하시기는 하는지의구심을 품을 수 있지 아닐까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 서운함이 생길 수 있고, 이것이 집을 떠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흔히 어린아이 같은 자기중심적 기대를 합니다. “나를 사랑한다면 나만을 특별하게 취급해주고 나를 중심에 놓고 내가 원하는 모두 것을 들어주고 내게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은 피할 수 있도록 막아주지 않을까.” 그리고 이러한 기대를 하나님의 사랑에도 그대로 적용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뜻하지 않는 불행을 당해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께 매달리는데 하나님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실 때,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 하나님이 과연 우리를 사랑하시는가 하는 의구심이 생길 수 있습니다. 특히 고통 속에서 하나님에게 매달리다가 절망할 때, 정신적으로 큰 시련을 경험하리라고 생각합니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님의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은 그 분이 바깥 분을 잃으신 후 서너달 만에 다시 끔찍하게 아끼던 아드님을 교통사고로 잃으면서 겪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의 체험을 담은 책입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그 책의 구체적인 내용은 기억에서 많이 희미해졌지만 그 제목, <한 말씀만 하소서>는 머리에 생생하게 박혀있습니다.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고자 처절하게 몸부림치는 모습을 그대로 읽을 수 있지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은 욕구가 더 강해지고 더욱더 간절하게 하나님에게 매달리게 됩니다. 그리고도 하나님께 답을 얻지 못하면, 극도의 서운함과 분노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할 수 있겠지요. 부모의 사랑을 믿지 못하는 아이들이 방황을 하거나 잘못된 길로 들어가기 쉽듯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우리 앞의 시련과 유혹 앞에서 버틸 수 있는 힘이 약해지게 됩니다. 둘째 아들의 모습에서 그런 인간적인 약함을 볼 수 있습니다.

 

저도 제 안을 들여다보면서 둘째 아들의 모습을 봅니다. 자신보다 더 많은 축복을 누리는 듯한 형제, 친구, 이웃을 보면서 왜 내게는 그런 축복을 내려주시지 않는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섭섭하고 억울하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는지요? 그리고 어려움을 겪을 때에 왜 하필 내게 이런 고통이 닥치는가, “Why me?” 라고 하나님께 묻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지요? 고통 속에서 절규하는데도 침묵하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과연 신은 존재하는가하는 의심을 품은 일은 없었는지요? 우리 속에는 모두 둘째 아들의 모습이 있기에 둘째 아들의 서운함과 아픔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예상할 수 있듯이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은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습니다. 누가복음은 둘째 아들이 겪는 여러 가지 고난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에는 말을 아낍니다. 아마도 여러 가지 판단 실수도 있을 테고, 유혹에 넘어갈 수도 있겠지요. 게다가 기근이 들면서 더욱더 둘째의 처지는 험해져서 급기야는 유대인들이 혐오하고 꺼리는 돼지치기가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을 겪으면서 둘째 아들의 마음에 큰 변화가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오기로 결정을 합니다. 누가 복음에는 그가 스스로 돌이켜(He came to himself)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라고 합니다.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로 한 계기가 배고픔과 고생뿐이었을까요? 둘째 아들은 자신의 죄가 하나님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뜨린데 있는 것으로 보았고 자신은 이미 아들로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을 잃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집을 나가기 전에는 장자인 형에 비하여 미흡한 아버지의 사랑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었을 듯한 둘째 아들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스스로 깨닫고 난 후에는 자신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음을 느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기를 결심했고,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기쁘게 맞아들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기 위해서 쓰신 세 가지 비유에서 길 잃은 양이나 잃어버린 은전은 자신의 의지로 길을 잃었거나 없어졌던 것이 아닌데 반하여 탕자 아들은 자신의 선택으로 집을 떠났습니다. 따라서 그 후에 겪은 고생은 어떤 의미에서는 인과응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들을 껴안고 입을 맞추며 아들의 신분을 확인해주는 로브와 신발을 가져다주게 하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함으로서 기쁨을 표현합니다. 아버지를 버리고 집을 나갔던 탕자 아들도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면 기쁘게 맞는 아버지의 사랑을 통해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해주시고 있습니다. 사랑의 조건과 자격을 따지는 인간 사회에서의 사랑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에는 어떠한 자격 조건, 전제 조건도 없다는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를 맞는 아버지의 기쁨과 환영 잔치가 이 탕자 비유의 클라이맥스지만 저는 뒤따르는 큰 아들의 이야기에 더 생각할 내용이 많은 것 같습니다. 들에서 일하다 돌아온 큰 아들은 집에서 벌어지는 잔치에 놀랍니다. 집을 나가갔던 동생이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오니 기쁘게 맞이하는 아버지에게 그동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온 자신에게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새끼 한 마리 준 일이 없었는데,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 송아지를 잡고 환대하느냐고 서운한 마음을 표현합니다.

 

여기에서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착한 아들, 믿음직한 장자로서 아버지를 모셔온 큰 아들이 집을 나갔다고 돌아온 동생에 대한 아버지의 환대를 보고는 반발하는 모습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참 뜻에서 벗어나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동안 아버지의 뜻에 따라 생활을 해온 것이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서 아버지의 사랑과 인정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사랑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동안 성실하게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는 것을 강조하는 그의 모습에서 자신이 그동안 성실하게 살아왔으므로 적어도 방탕한 생활을 한 동생보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더 받을 자격이 있다는 교만을 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무엇이든 조건이 붙습니다. 심지어는 사랑도 조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부를 잘하면 상을 받고, 착한 일을 하면 칭찬을 받고, 열심히 일하면 인정을 받고. 여기에 익숙해지면 무엇이든 얻기 위해서는 주어진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사랑도 조건이 있다고 생각하고 사랑받기 위해서는 열심히 그 조건을 맞춰야 한다고 믿게 됩니다. 공부 잘하고 부모의 말을 잘 따라야 부모의 사랑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큰 아들이 자신이 더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것은 이러한 인간 세상에서의 통념을 생각해보면 너무 쉽게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노력이 특별히 인정받지 못하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과 마찬가지로 취급될 때, 서운함,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 부당함에 대한 분노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심지어는 성실하게 노력하는 태도까지도 애초부터 우리 것이 아니었고, 모두 주어진 것이라는 것임을 기억할 때 자신이 남보다 사랑받을 자격이 더 크다고 믿는 큰 아들의 생각은 엄청난 교만임을 깨답습니다.

저 자신을 가만히 들여다볼 때, 제게도 큰 아들과 같은 교만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남보다 많은 것을 누리면서 은연중에 그것이 내가 노력한 바에 대한 정당한 대가라고 생각하고, 나보다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은 나만큼 성실하게 노력하지 않은 탓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이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제가 30여 년 전, 처음 대학에서 가르치기 시작할 때 어느 학생이 면담을 와서 유학을 가고 싶은데 집안 형편이 유학비용을 마련하기 어렵다면서 자기보다 못한 친구들은 부모의 도움을 받아서 유학을 가는데 그런 기회를 주지 못하는 자기 부모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저는 대학을 마친 후의 유학까지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는 말과 함께 유학은 자신이 노력으로 해결해보는 것은 어떻겠느냐고 조언하면서 내 주변에는 부모의 도움 없이 장학금을 받아서 유학을 한 사람들이 많다, 나 자신도 부모의 도움을 기대한 적이 없었다.” 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그 말에 학생은 얼굴이 붉어지면서 갑자기 정색을 하면서 선생님의 그런 가치관도 부모님께 받으신 것 아닌가요?” 라고 반격을 했습니다. 너무 의외의 반응이라서 순간 당황을 했었는데, 그 학생의 곧 울 것 같은 얼굴, 크게 상처받은 듯한 표정이 지금도 생생하게 생각이 납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저는 그 학생을 격려하려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지만 그 학생에게는 너는 왜 자기 능력으로 해결할 생각을 하지 않느냐, 나는 그렇게 했는데.” 라는 말로 들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큰 아들과 같은 교만이 끼어들어가서 의도하지 않게 그 학생에게 마음에 큰 상처를 주었던 것 같습니다.

요즈음 우리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의 갑질이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남들보다 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소위 들이 자신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자신들의 갑질이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는 정당한 행위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을에게 대한 미안함도 갑질을 자제할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을에게는 갑의 존재 자체, 갑의 사소한 말이나 태도에서 마음에 큰 상처를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갑들은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교만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한 이웃에 대한 진정한 사랑은 들어오기 어렵지 않을까요?

 

큰 아들의 항의에 대한 아버지의 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너는 그동안 나와 함께 있었지 않느냐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있었던 것 자체가 보상으로 볼 수 있다는 의미이겠지요.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각각이 모두 소중한 존재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받고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귀한 시간을 가질 기회를 얻은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가장 확실한 징표이고 그 속에서 감사하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의 축복이고 사랑의 증거임을 기억해야 하겠지요.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큰 축복의 형태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믿지 못하고 계속 확인받고 싶어 하는 마음, 각자 가치의 기준을 만들어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덜 받고 있지는 않는가, 혹시 자기보다 자격이 부족한 다른 사람이 더 많은 축복을 받고 있지는 않은가, 쉼 없이 살피고 따지는 마음, 너무 인간적인 모습이지만, 바로 그것이 모든 번민의 근원이고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는 길이 아닐까 합니다.

 

제 마음 속을 들여다보면서 둘째 아들과 같은 어리석음과 첫째 아들과 같은 교만이 숨어있어서 하나님 사랑의 참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게 하고 있을 때가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어리석음과 교만은 우리 마음 속 깊이 자리하고 있어서 어쩌면 우리가 노력을 해도 뿌리를 뽑는 것은 쉽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매일 매일 자신의 마음속을 살피면서 노력한다면 예수님 비유의 큰 아들에게 아버지가 한 말씀처럼, “하나님과 함께 있는축복과 기쁨을 느끼면서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당신의 큰 축복과 사랑을 이미 받았으면서도 저희의 어리석음과 교만으로 인하여 이를 의심하고 괴로워할 때가 많음을 고백합니다. 저희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기쁨의 삶을 이룰 수 있도록 그 어리석음과 교만의 마음을 끊어낼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새길로고.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