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015.05.17]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by 새길 posted May 22,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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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희헌 목사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사도행전 5:27-32)

 

 

20155175.18 광주민주화운동 35주년 기념예배

김희헌 목사(낙산교회)

 

[그들이 사도들을 데려다가 공의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신문하였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소. 그런데도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소.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였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은 여러분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분을 높이시어 자기 오른쪽에 앉히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십니다.”]

- 사도행전 5:27-32 -

 

 

오늘은 517일입니다. 16일과 18일의 사이에 있는 이날은 마치 한국사회의 오늘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516일은 정치군인들이 반란을 일으켜서 4.19를 통해서 커지고 있던 민주주의의 꿈을 질식시킨 날입니다. 반면에 518일은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시민들이 국가폭력에 맞서 싸운 날입니다. 5.165.18은 정반대되는 역사의 모습을 보여주지만, 이 둘은 한 역사 안에서 서로 이어져 있습니다. 5.18의 시민학살을 주동한 세력이 바로 5.16의 후속세력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517일은 두 개의 정신이 교차하는 날이요, 그날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선택과 결단이 요청되는 날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요청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5.16이라는 폭력과 죽음의 상징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절실합니다. 현재 우리 사회는 5.18의 학살과 다른 모양이기는 하지만, 비슷한 시대적 아픔과 비극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바로 그것입니다. 5.18과 세월호를 비교해서 이렇게 표현하더군요. 5.18이란 국가가 국민에게 결코 해서는 안 될 일을 자행한 사실을 가리킨다면, 세월호는 국가가 국민을 위해서 반드시 해야만 했던 일을 하지 않은 사실을 말한다고요. 둘 다 비극입니다.

 

올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3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국가가 국민을 상대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시대의 아픔과 비극이 치유되기보다는, 증오의 정치를 통해서 증폭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것은 정치의 실패이지만, 그 뒤에 종교의 실패가 있고, 더 나아가 총체적인 인간의 실패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절망적인 생각마저 하게 됩니다.

 

우리는 오늘 부활절 마지막 째 주일예배를 드리면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이 역사에 예고된 부활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파편화된 인간이 다른 사람의 상처를 싸매주며 새롭게 거듭나는 부활, 탐욕으로 눈이 먼 종교가 참회의 눈물로 마음을 씻고 갱신하는 부활, 이권투쟁의 포로가 된 정치가 비통한 지경에 놓인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일에서 자신의 본분을 찾는 부활, 우리는 그런 부활의 증인이 되기를 꿈꾸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이 했던 경험을 잇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의 제자들과 그들을 박해하는 정치/종교의 권력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원래 예수의 제자들은 스승이 비통한 지경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무서워서 도망가 버린 비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속의 그들은 더 이상 권력자들의 억압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한 사람들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맘에 부활한 예수가 찾아오자, 그들의 삶에는 시련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그 시련을 뚫고 갈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시대는 힘없는 민중이 죄인이 되어야만 했던 시대요, 민중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죽임을 당해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 참혹한 시대를 견디기 위해서 그들은 준비를 해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변경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들은 자기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타인을 이용해서 자신의 풍요와 안락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을 끝내고, 공동체를 통해서 자기 생명을 꽃피우는 방식으로 인생을 재조직했다는 말입니다. /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이 새로운 삶의 방식이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 역사의 무게를 오랫동안 견디기는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그런 실험을 가능케 한 순수한 인간정신은 오래토록 교회의 본래적 모습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이 사건과 비견됩니다. 최근에 전남대 철학과 김상봉 교수가 [철학의 헌정]이라는 제목의 책을 통해서, 광주항쟁의 의미를 철학적으로 규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분은 5.18을 가리켜, “오로지 타인의 고통에 목숨을 걸고 응답하려는 용기에 기초한 연대의 공동체우리가 지행해야 할 영원한 꿈이라고 표현합니다.

 

광주민주화 운동은 한국역사에 기록된 복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민주화운동에 처음 불을 댕긴 학생들, 그리고 계엄군을 몰아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택시기사들, 그들에게 밥을 지어 먹은 시장의 상인들, 헌혈하기 위해서 몰려든 남녀노소의 시민들, 그들 모두가 자신을 내어주면서 자신을 세워나간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남을 살리기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는 것,’ 이것은 실로 복음이요, 성경(12:24-25)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광주에서 살던 시민들은 이 복음을 19805월의 역사에 사건으로 새겼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통해서 형성된 이 복음사건은, 하지만 지난 30여 년 동안 우리사회를 물들인 신자유주의 문화로 인해 이제는 희미해지고 말았습니다. 이 경쟁과 약탈의 문화에서는 남을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는 것은 어리석은 행위로 풀이되고 맙니다. 우리 사회는 복음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광주를 다시 기억하고, 그 사건의 의미를 다시 증언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특히 5.18의 정신을 모욕하는 소리가 조장되고 있는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역사의 복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 사건을 모욕하고, 그 심장에 못을 박아서 죽이려고 합니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너그러운 품에서 살아남은 5.16의 잔존세력들입니다. 오늘 우리 민족은 5.165.18 사이에서,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요청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처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면서, 수많은 기적을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들이 만든 기적이란 시대의 질병을 고치는 것이었습니다. 시대의 질병은 그 사회의 밑바닥을 사는 민중들의 몸뚱이를 통해서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은 식민 질서의 착취와 약탈로 인해서 민중들의 일상이 되어 버린 배고픔과 육신의 질병과 억울함 등을 통쾌하게 치유해갔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방식의 삶을 살아가자, 그들은 사랑을 받으면서도 위험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민중들이었고, 그들을 위험시한 사람들은 정치종교의 지배자들이었습니다. 이 양자 사이에서 제자들은 항상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의 선택은 민중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히고, 잡혀가서 심문을 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그런 상황 속에서 활동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전해줍니다. 27~28절을 보면, 제자들이 의회에 잡혀가서 심문을 당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잡혀온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그대들에게 그 이름(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하였거늘, 그대들은 그대들의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렸으니, 그대들은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씌우려 하고 있소.”

 

우리는 여기에서 제자들의 활동 가운데, 대제사장들을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되, 그 가르침을 온 예루살렘에 퍼뜨리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의 골자는 30~31절에 나온 내용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대들이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살리셨습니다. 이분을 하나님께서 자기 오른쪽에 높이 올리시고, 영도자와 구주로 삼으셔서,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고 죄 사함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종교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피에 대한 책임을 묻는 정치적인 추궁이자, 영도자와 구주를 누구로 삼을 것인지를 선택하는 민감한 행위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를 가리켜 두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영도자(새번역), 임금(개역성서), 지도자(공동번역)라는 단어는 원어로 아르케고스’(Ἀρχηγός)라는 말인데, 이 단어는 예수를 죽인 대제사장들을 일컫는 아르키에류스’(ἀρχιερες)와 대비됩니다. 여기서 제자들은 아르케, 근본토대또는 최고원리를 뜻하는 아르케’(ἀρχη)가 누구에 있는가, 그것은 유대의 최고지도자인 대제사장에 있지 않고, 예수에게 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심문하고 있는 적대자들에 대한 직접적인 반박입니다.

 

또한 구주(개역, 새번역) 또는 구세주(공동번역)으로 번역된 단어는 소테라’(Σωτρα)입니다. 이 말은 당시에 구원/소테리아(σωτηρία)를 주는 존재를 말합니다. 이 말은 로마의 황제에게 사용되던 말이었는데, 제자들은 소테라가 황제가 아니라 십자가 달려 죽은 예수라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오늘날에는 종교적인 고백처럼 들리겠지만, 당시의 상황에 놓고 본다면 분명히 정치적인 강령에 가까운 것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선언을 한 다음에 32절에서 오늘 말씀의 제목으로 삼은 제자들의 마지막 고백이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합니다.” 여기서 증인이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마르투스’(μάρτυς)인데, 그것은 단지 사실 확인을 해주는 증언자(witness)을 의미한다기보다는, 그 진실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목숨까지도 내놓는 순교자(martyr)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라는 말은 단지 어떤 사실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진실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저항할 것임을 선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이 예수의 제자들을 제자답게 하는 것인지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무언가를 증언하는 것인데, 그 증언은 새로운 제도의 도입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새롭게 출발하는 정신에 관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도입한 새로운 제도로서의 공동체를 가리켜 교회,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고 했고, 이 제도가 처음에는 공동소유라는 공산주의적 원리를 취했기 때문에, 철학자 마르크스 이후로 이 에클레시아라는 제도 자체가 인류가 건설할 최종적인 목표지점인 것처럼 추앙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의 제도로서의 기원을 따진다면 새로운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본래 에클레시아라는 모임은 기원전 5세기 아테네에서 신분과 관계없이, 2년 동안의 군역(軍役)을 마친 모든 남자들에게 열려진 상대적으로 민주적인 의회 제도를 가리키는 것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에클레시아라는 제도 자체에 있지 않고, 이 에클레시아라는 공간에서 어떠한 정신이 세워지고, 그 정신에 의해서 무엇이 증언되는가 하는 점에 있는 것이지요. 예수의 제자들이 모인 에클레시아에서 중요했던 것은, 28절에서 대제사장이 그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엄중히 명령했던 바로 그것, ‘예수의 죽임 당함과 그의 부활에 관한 증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절 이후에 교회가 가진 핵심적인 믿음인데, 그것은 역사와 우주만물의 새로움을 기약하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이 약속에 대한 믿음이란, 당시의 로마식민지 체제를 지탱하고 있는 거짓 이데올로기에 대한 폭로와 그 죽임의 질서에 대한 저항을 수반하는 것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정신의 출발, 그것에 대한 증언이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출발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과 증언 위에서 이뤄졌고, 이 공동체의 일원이 된 사람은 (거짓 이데올로기의 정신적 노예상태를 극복하고) 새로운 신앙의 주체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 1010절에서 고백한대로, “마음으로 믿어서 정의(δικαιοσύνην)에 가닿고, 입술로 고백해서 구원(σωτηρία)에 이르는 경험을 한 주체적인 정신의 소유자가 되어서, 제 삶의 주인으로서, 참 된 평화를 위한 삶의 모험을 전개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이런 대담한 모험적 삶을 살게 되기까지에는 애틋한 과거사가 있었습니다. 스승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함께 엮일까봐 무서워서 도망을 간 그들에게 부활한 스승이 나중에 찾아왔습니다. 오늘 본문이 담긴 사도행전과 동일한 저자로 알려진 누가의 복음서 마지막 부분(24:45)을 보면, 부활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찾아와서 해주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복음을 깨닫도록 그들의 마음을 완전히 열어주신(διανοίγω, open fully)” 것입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은, 이미 부활한 시점에서 한 것이라고 할 수 없는, 논리적으로는 맞지 않는 당부의 말입니다. 그것은 오늘 본문30, 32절과 대칭을 이루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째 되는 날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실 것이며, 그의 이름으로 죄를 사함 받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전파될 것이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마르투스다.” (24.46-48)

 

그러니까 누가복음의 끝에서 부활해서 나타난 스승이 제자들에 마르투스가 되라고 했던 당부를 오늘 사도행전 본문에서 제자들이 수행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스승은 너희는 이 일들의 증인이다고 말했고, 제자들은 우리는 이 일의 증인입니다.”고 화답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 둘 사이에는 제자들의 믿음에 커다란 발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삶에서 이루어진 진보인데, 그 진보는 제자들이 스승인 예수의 피로 써진 역사를 기억하고, 그것을 증언하고, 그 증언이 유발하는 대결을 회피하지 않음으로써 이룩된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그런 대결이 엿보이지만, 사도행전 4장에서도 첨예한 대결이 나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잡혀서 감옥에 갇혔는데, 그들을 잡아온 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격분을 했다고 나옵니다. 왜 그랬는가? “예수의 부활을 내세워서 죽은 사람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부활을 선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풀어주면서, 협박을 하지요. “절대로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합니다(18). 죽임을 당한 자의 비극적 진실을 영원히 감추려는 거짓 세력들의 상투적인 협박입니다.

 

그러자 베드로와 요한이 응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일인가를 판단해 보시오.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소.” 그것은 오늘 본문 29절에서 반복됩니다.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제자들은 이렇게 위험을 감내하는 결단을 하면서 스스로 신앙의 주체로서 일어서고, 스승이 당부한 증인/마르투스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예수의 제자로서 그들이 가진 정체성은 오직 증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증언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에 얽힌 사연입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의 피로 써진 역사에 대한 증언입니다.

 

감옥에 갇혔던 제자들이 풀려나서 동료들과 함께 만나서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문이 사도행전 424~29절에 나와 있는데, 거기에는 스승의 당부대로 증인/마르투스가 되고자 했던 제자들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이렇습니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주님... 오늘날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가, 이방사람과 이스라엘 백성과 한패가 되어 이 성에 모여서, 주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대적하였습니다주님, 이제 그들의 위협을 내려다보시고, 주의 종들이 참으로 담대하게, 주님의 말씀을 말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들이 드린 이 기도는 그들의 삶이 되었습니다.

 

이 예배를 드리는 우리들 또한 예수의 제자들이 가졌던 고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2천 년 전 예루살렘에서 그 시대의 진실을 밝히고 지켜가는 증인이 되고자 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우리 시대의 진실을 밝히고, 정의와 평화의 증인으로서 사는 것이 신앙인으로서의 커다란 사명입니다.

 

철학자 니체는 피로써 쓰는 자는 읽혀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암송되기를 요구한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예수의 십자가에 얽힌 사연을 제대로 암송하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의 마음속에 불타던 하나님나라의 꿈을 잃어버렸습니다. 오늘날의 한국사회는 피로 써진 민주주의의 역사를 암송하지 않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35주년을 맞이하면서, 그 피로 써진 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한 증인이 되어 살아가는 일은 이 시대를 사는 신앙인의 중요한 책임일 것입니다. 아픔을 당한 사람들과 동행하면서, 정의와 평화의 증인이 되려는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의 삶 속에, 생명의 주님께서 늘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새길로고.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