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2015.05.10] 어머니 노릇, 새길에 사는 날까지

by 새길 posted May 13,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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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지윤, 조혜자, 조성심


어머니 노릇

새길에 사는 날까지

(출애굽기 20:12, 에베소서 6:1-4, 시편 23)

 

 

2015510일 새길살림 헌신예배

*김지윤, 조혜자, 조성심 자매

 

[너희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주 너희 하나님이 너희에게 준 땅에서 오래도록 살 것이다.]

- 출애굽기 20:12 -

 

[자녀 된 이 여러분, 주 안에서 여러분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옳은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신 계명은, 약속이 딸려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하신 약속입니다. 또 아버지 된 이 여러분, 여러분의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훈련과 훈계로 기르십시오.]

- 에베소서 6:1-4 -

 

[주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 없어라.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신다. 나에게 다시 새 힘을 주시고,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내가 비록 죽음의 그늘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고, 주님의 막대기와 지팡이로 나를 보살펴 주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내 원수들이 보는 앞에서 내게 잔칫상을 차려 주시고, 내 머리에 기름 부으시어 나를 귀한 손님으로 맞아 주시니, 내 잔이 넘칩니다. 진실로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내가 사는 날 동안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 곳에서 살겠습니다.]

- 시편 23-

 

 

 

1. “어머니 노릇

_ 김지윤 자매

 

한혜원 자매님으로부터 여성과 모성이라는 주제로 나눔을 해달라는 제안을 받았을 때, 저는 제 자신의 간특했던 모성에 대해 참회하는 자리가 되겠구나, 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사랑하는 작가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책 <어느 시골신부의 일기>에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프랑스의 어느 작은 시골마을 본당에 부임해 온 젊은 신부는, 그 마을의 지주인 백작부부의 가정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하게 됩니다. 백작부부의 하나뿐인 외동딸이 부모를 원망하고, 심지어는 복수심에 자기 자신을 망치려는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던 것이죠. 신부는 그 가정의 고통의 중심으로 접근해 들어가다가, 그곳에는 백작부인의 깊은 상처가 자리 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백작부인은 오래전 애지중지하던 어린 아들이 죽자, 신에 대한 모든 기대를 접고, 겉으로는 예의바르게 처신하지만 그저 일상의 의무만을 감당하며 살아가는, 차가운 영혼의 소유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천국에서 아들을 다시 만나야 하지 않겠냐는 신부의 말에, 백작부인은 만족하신다면 우리를 다 눌러 죽여보시지!” 하며 하나님을 향한 악독과 증오를 쏟아내기에 이릅니다. 이런 걸 교회 용어로 시험 들었다고 하죠.

우리의 사랑스러운 주인공 신부는 물러서지 않고 진심어린 대화를 이어나가고, 결국 백작부인은 깊은 상처를 딛고 진정한 회심에 이르게 됩니다.

 

백작부인의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낯설지만은 않습니다. 제 입장에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란 자식을 잃었을 때만 쓸 수 있는 표현인 것 같습니다. 하늘이 무너지면 신에 대한 신뢰도 무너지고, 우리도 백작부인처럼 기꺼이 하나님을 법정에 세우려 들지도 모를 일입니다.

 

저는 사랑스럽고도 자랑스러운 자녀,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운 자녀를 한순간에 잃어버린 분들을 옆에서 지켜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들은 오랜 시간을 교회에 충성해온 중직자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애원할 겨를도 없이 그렇게 허망하게, 자녀분들을 먼저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어떻게든 그 상황을 이겨내려 애쓰셨고, 어떤 분들은 말없이 교회를 떠났습니다.

 

제가 그 당시 알 수 있었던 것은, 자식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나의 인생을 회복 불가능한 슬픔과 고통 속으로 몰고 갈수도 있는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고통을 승화 시킬 수 있다고요? 물론 승화 시킬 수 있겠죠. 그렇다고 해서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그런 비극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 그 이후로는 별다른 대책이 없는 듯이 보였습니다.

꼭 그런 극단적인 상황만이 우리 현실을 옥죄는 건 아닙니다. 부모를 만족시켜주는 상위 1%의 성적을 유지하는 자녀를 제외한, 나머지 99%의 자녀를 둔 부모들은, 대체로 불만스럽고, 답답하고, 난감하고, 입맛이 씁니다. 저 역시 수고하고 무거운 자식이라는 무거운 짐 덩이를 지고 끊임없이 남들과 비교하며 추키거니 내리거니, 냉탕 온탕을 왔다갔다, 우쭐했다가는 자존심 상해하는, 세상 사람들과 비슷해져 갔습니다.

 

저는 언젠가부터 누가 자식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어?” 내지는 누가 그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겠어?” 라는 식의 말이 거슬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추구하는 자유라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너도 아프고, 나도 아프고, 하나님도 아프고 다 아프니까 인생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위로가 되는 걸까? 나는 위로가 안 되던데?

 

저의 그것이 알고 싶다는 계속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두려움을 극복할 용기를 갈망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저는 인간의 모든 지식과 이해를 초월하는 절대적인 기쁨과 만족과 자유를 선사하는 것은 오직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며, “모는 것이 은총이란 말은 타협적 신앙의 주절거림이 아니라 끈질긴 밤의 끝에 그분께 완전히 굴복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어머니들은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가족의 안녕을 빌곤 했죠. 숭고한 사랑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제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모성은 이타적인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토록 필사적인 것입니다.

콜린 윌슨의 글을 잠시 인용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블레이크는 인간의 사고가 너무 실제적이라고 비난을 퍼 부었다. 실제적인 사고를 하는 한, 영감을 통해 얻은 종교의 진리도 미신으로 타락해 버린다는 뜻이다. 그의 시 유럽에서는 감옥에 갇힌 상태의 상징으로서 여성이 그려진다. 여성의 기질은 실제적이어서 모든 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며, 또한 처절하기 때문이다. ‘여자의 사랑은 죄라고 쓴 이유이다.”

 

저는 20대 중반에 첫 번째 회심을 경험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자녀를 낳고 키우는 사이, 블레이크가 지적했던 여자의 사랑이라는 덫에 걸려들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가 천국을 차지할 것이라고 하셨고, 또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가난이 싫고, 가난이 수치스럽고, 자식이 가난해지는 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염려하고 두려워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엄마인 나 자신은 괜찮지가 않으면서, 자녀에게는 괜찮다, 괜찮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괜찮다고 말씀하신 것은 진짜로, 정말로, 진실로 괜찮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인간의 모성에 견주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 빛으로 가득한, 완전한 사랑입니다.

 

 

 

2. “어머니 노릇

_ 조혜자 자매

 

얼마 전 서소문 역사공원에 갔다가 천주교 순교자비를 보았어요. 이전에 성인으로 추대된 103명의 순교자들의 이름에 많은 여성들의 이름이 있었는데, 그 이름들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김아기, 박아기, 한아기, 박 큰아기, 김업이라는 이름이었어요. 아마도 그 여성들은 이름도 없이 아기라고 불리다가 천주교 신자가 되면서, 세례명을 얻고 자신을 찾으며 열심히 헌신하다 순교했던 것 같았습니다.

 

어릴 때 이름을 가졌던 여성들도 어머니가 되면서 자기 이름을 잊고 사는 경우가 허다하지요. 바울사도가 빌립보서 37절에서, “나는 내게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모든 것을 오물로 여긴다고 하셨던 것처럼 많은 여성들은 어머니가 되면서 자기 꿈을 버리고, 자기 이름까지도 버리고,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자식을 위해 헌신하며 삽니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들은 자식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기억되기를 바라지도 않으면서 헌신합니다. 바로 그런 어머니의 헌신은 깊은 영성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안셀름 그륀 신부님은 말합니다. 어머니노릇은 세상에 나와 아무것도 혼자 할 수 없는 <가장 약한 자>를 돌보는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어머니는 집안에서 약자의 편입니다. 갓난 아이, 아픈 아이, 문제아, 장애아, 환자의 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약한 자의 편이 되어 치유해주셨던 것처럼 이요. 그러므로 어머니가 되는 것은 영적인 존재가 되는 거라고 하셨을 겁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는다고 저절로 어머니노릇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지금은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났던 것처럼 착각하지만, 처음 엄마가 되었을 때에는 엄마노릇이 참 많이 힘들었어요. 자신의 꿈을 접고 젊은 날의 시간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기저귀 갈아주고, 재워주고, 울면 업어주고 하는 쳇바퀴 도는 일상에 내주어야 하는 것이니까요. 게다가 아이가 우는 이유를 몰라 아이를 잘 달래지 못해 답답하기도 했었지요. 엊그제 어린이날을 맞아 한 신문에서는 지난 6년간 아동학대로 사망한 263명의 아이들 명단과 사망원인, 학대의 특징을 밝혔는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운다고, 말 안 듣는다고, 대소변 못 가린다고 학대받고 죽은 경우가 많았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난 아기를 한 인간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지만, 모든 감정노동이 그렇듯 이렇게 힘든 일이 사회적으로는 가치를 인정받지 못합니다. 최근 진화론에 <할머니 가설>이라는 것이 생겼어요. 여성들이 폐경이 된 것은 할머니가 아이를 낳기보다는 자기 손주를 함께 키워주는 것이 자손의 생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아프리카 속담에는 아이 하나를 키우는 데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그만큼 아이는 엄마 혼자 키우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나 사회는 어머니노릇을 당연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아이가 잘못될 때는 어머니에 대한 비난이 쏟아집니다. 어머니노릇은 어머니가 자기 안에서 스스로 가치를 발견해 내야만 하는 것이 되었어요.

 

여성들은 아이를 키워가면서 점점 자신보다는 아이를 먼저 생각하는 엄마가 되어갑니다. 어머니의 자아의 중심에는 자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식이 있습니다. 관계적 자아이지요. 누군가의 엄마라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엄마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머니들에게 성취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자식이 잘 되는 것, 남편이 직장에서 성공하는 것을 자신의 성취로 보았어요. 그것은 자기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요. 밥 잘해주고, 과외를 시킨다고 해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항상 불안하고, 가슴이 조입니다. 어머니들이 기도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지요.

 

어머니들의 기도 내용은 무엇일까요? 자기가 잘 되기를 바라는 기도는 몇 퍼센트(%)나 될까요? 어머니들의 기도는 아이가 잘 되게 해 달라고, 아이가 아플 때에는 아이대신 자기를 아프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입시철에는 더하지요. 3 엄마가 새벽기도에 가장 열심이지요. 대형교회에서는 수능시험 보는 날 수험생 엄마들이 모여 기도회를 하는데, 그때 엄마들은 눈물로 회개하며 간절히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자식이 신앙이 되어 버리고, 아이가 잘못되었을 때 그 책임이 마치 하나님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모성은 아름답지요. 그러나 아이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때의 조건없는 사랑은 아이들이 커 가면서 조건적 사랑으로 변질되는 것 같습니다. 최근 한국 엄마들은 전문화된 모성, 이기적 모성, 투쟁적 모성을 보여주고 있어요. 자녀에게 엄마의 인생까지 대신 살라고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모든 정보를 동원하여 과외를 시키고, 남과 경쟁에서 이기라고 부추깁니다. 아이를 감시하고 컨트롤합니다. 타이거맘, 매니저맘, 헬리콥터맘이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영성을 잃어버린 모성>이지요. 이런 어머니일수록,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을 달고 삽니다. 아이들은 누가 그렇게 키워 달랬어요?”라고 어머니를 지겨워하게 되지요. 아이들의 기억에는 첫 3년의 기억은 없습니다. 잔소리하고 닦달질하는 어머니의 기억만 남게 되지요.

 

그러나 결국 어머니들은 아이들이 자기 마음대로 커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이들에게는 자기들대로의 꿈이 있고 인생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지요. 어머니와는 다른 시대를 사는 아이에게 자기 생각만 강요할 수 없다는 것도 터득합니다. 그걸 부모가 일찍 알아차릴수록 아이들은 행복합니다. 진정한 살림이스트로서의 모성은 아이가 성숙하도록 도와주고, 개성을 찾게 하고, 자율성을 찾도록 돕는 것이지요. 더불어 어머니 자신의 삶을 살며 자기 이름을 살려내면서, 확장된 가족과 연대하고, 약자 편에 서는 것이지요. 가톨릭 여성 성인들이 새로 자기 이름을 가지고 헌신했던 것처럼 이요. 다시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시각을 바꾸어서 자식으로서의 우리를 생각해 보지요. 우리 모두 부모 없이 태어난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난 우리들은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어머니를 알아보는 생득적인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하지요. 융은 우리가 어머니 원형(archetype)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발달심리학자들도 태어나자마자 아기들은 엄마 목소리를 더 좋아한다고 밝히고 있어요. 뱃속에서 엄마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겠지만요. 그러면서 우리는 엄마라는 호칭으로 보편적인 어머니 역할을 기대합니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희생, 보살핌을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어머니의 인생에 울타리를 칩니다. 그러면서 어머니가 개인적인 욕망이나 꿈을 가진 존재라는 것, 어머니도 이름이 있는 개인이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 어머니를 둔 자녀도 어머니가 사회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는 관심이 없고, 자기에게 어머니역할을 어떻게 하느냐만 초점을 맞추지요.

 

그런데, 그 어머니역할은 너무 당연하게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일까요? 어머니의 헌신을 기대하면서도 어머니에 대한 고마움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자식에게 쏟는 정성은 지극하지요. 그런데 자기 젊음을 바쳐 우리에게 헌신하신 부모님에게는 얼마나 잘 하시는지요? 그래서 효도는 지켜야 할 덕목이 되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의 명령은 인간관계 명령 중 1순위가 되었습니다. 저절로 되는 자식 사랑은 명령할 필요도 없는 것이고요. 어버이 주일을 맞아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3. “새길에 사는 날까지

_ 조성심 자매

 

안녕하십니까? 조성심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우연히 마이크를 잡게 되어 합창대회, 입학, 졸업 축하, 체육대회, 회갑, 희수 등등 40여 년 동안 각종 행사를 해 왔지만 이런 이벤트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타고난 미모가 좀 있어서 머리카락이 좀 없더라도 봐 줄만 하시지요? 맨 머리로 새길에 설까하다가 놀라실 분들을 생각하여 모자 하나 썼습니다(혹 상상하기를 원하신다면 언젠가 정경일 원장님의 말씀증거에 저의 한 살적 사진에 주름살을 더한 모습).

 

지난 45일 부활주일 아침 교회에 오는 길에 뒤에서 받치는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교통사고 치고는 아주 경미한 사고였고 49일에는 결혼 후 스무 번째 이사가 예정되어 있었기에 이사준비에 더욱 맘이 쓰였습니다. 찾아간 정형외과 의사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기에 이사에 전념하다보니 허리가 빠질 듯이 아프다고 친구에게 이야기하자 친구는 한의원을 추천하였습니다. 다음 날 한의원을 찾아가 구토감이 좀 있으니 CT촬영을 하게 해달라고 부탁하였는데 촬영 후 CT를 보고 난 한의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빨리 큰 병원을 찾아가 보라고 권유하였고 긴급하게 대학병원에 가서 뇌에 6.5X4.9크기로, 그간 잘 키워왔던 뇌수막 종양을 429일에 떼어내고 이렇게 오늘 왔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때를 정확하게 맞추어 막힘이 없을 뿐 아니라 차고 넘치는 사랑을 받게 해 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를 위해 보내주신 새길의 자매형제분들의 사랑과 기도는 생명의 화살이 되어, 마치 에스겔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생명을 얻고 일어날 때 이렇게 일어나겠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감사드립니다.

 

2월 어느 날 살림 회장이신 한혜원 자매로부터 말씀증거를 부탁 받았을 때는 몹시 당황이 되었지만 새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는 새길정신에 입각하여 승낙을 하였습니다. 마침 27일 며느리가 둘째 손녀를 만나게 해주고 산후조리를 막 마친 때라, 주제는 새내기 할머니로 정했더랬습니다. 물론 주제는 바뀌었습니다.

 

불혹의 나이에 새길에 오게 된 어느 날, 구역설거지에 참여하여 열심히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뒤에서 아이고 이런 고급 인력이 설거지를 하고 계시면 되나요.” 하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함께 설거지를 하던 명망 있으신 교수님을 향한 소리셨습니다. 그 순간 새길을 찾아오는 저를 비롯한 많은 분들이 착각을 하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이름만 새길이지 자본주의 사회구조에 맞는 지위가 정해지는 한국의 여느 모임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요.

고급인력이란 각종 전문 분야에서 그 특성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닐는지요. 주방 특히 설거지에서 고급인력은 누구입니까? 최소한 10년 이상의 설거지 경력에다가 신속·정확·청결의 능력을 가진 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누구라고 말씀드려서 죄송하지만 추응식 형제님, 김영희 자매님 정도는 돼야 고급인력 아니겠습니까?) 제가 주방의 주인이라면 명망 있는 교수님의 설거지에는 최저임금인 5580원 시급도 아까워서 주기 싫을 것 같습니다.

 

새길 초창기에 인원도 많지 않고 교회에 대한 애착도 크셨기에 선배님들이 쏟아 부으셨던 그 열정·시간·재물로 인하여 오늘의 새길이 29세를 향해 가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새길에 들어설 당시는 새길을 찾아오는 숫자가 갑자기 늘어나면서 일이 많아지고 정착할 겨를도 없이 새길을 떠나는 분들이 역시 많았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 도움이 되기도 전에 떠나가고 하는 일들이 몇 년간 반복되면서 새길 피로도가 높아져 안타깝게도 처음에 가졌던 사랑들은 퇴색되고 새길의 살림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55일은 저와 남편의 결혼기념일로 살림 34년차에 접어들었습니다.

살림은 저희 윤씨네처럼 부지런한 몸종 하나만 있으면 되는 살림입니다. 새길에 나오면서 가족 모두가 살림에 관심을 갖고 쓰레기 정리를 비롯해 설거지 등 살림에 모두가 함께하는 살림법도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모쪼록 새길은 후자이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목사 없고, 건물 없고, 직분 없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도 예배 후 강당바닥에 흩어져있는 주보들, 종이컵들, 그저 사람의 눈에만 보이게 하는 정리정돈들.

 

이사를 여러 번 하다 보니 세사는 사람이 가져야할 덕목들을 알게 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주인보다 집을 더 아끼고 깨끗하게 유지 보수하는 거였습니다. 세를 오래 살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내가 그 장소에 머무는 동안 삶의 질을 높인다는 겁니다.

 

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하위 평가를 받는 미생 주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웬만해서는 꺾일 줄 모르는 아주 높은 자부심을 가지고 사는 특이한 종중의 한 사람입니다. 누구의 어떤 칭찬을 받는 것보다 자신에게 칭찬 받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 가령 화장실 청소를 하고 나서 묻습니다. ‘청소 잘했냐?’, ‘변기에 혀를 대도될까?’, ‘조성심 너 오늘 정말 잘했다.’ 이렇게 자신에게 말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살림을 도맡아 하는 것은 헌신이기보다는 제 삶 자체이기에 살림을 즐거운 마음으로 취미생활처럼 즐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새길 살림을 해 오신 분들, 지금 살림을 하는 분들, 앞으로 살림을 하실 분들 모두 이 같은 맘으로 살림을 도맡아 하시는 줄 잘 알지만, 성숙된 새길의 가족들은 서로가 주인 된 마음으로 새길을 알뜰히 돌보셔서 새길의 살림이 너무너무 재미있어서 살림살이를 서로 맡겠다고 다투는 그런 날이 오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횡설수설이었더라도 뇌수술 후유증으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주님, 새길살림 헌신예배의 말씀증거를 할 수 있도록 때를 맞추어 주심 감사드립니다. 형제, 자매님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아볼 기회를 주심도 감사드립니다. 이 사랑을 사는 날까지 간직하고 주님이 베푸시는 초장에서 맘껏 살아가겠습니다. 중환자실에 누웠을 때 건너편 기계음이 들렸습니다. ‘death clear death clear’ 누군가 이생을 떠났다는 걸 알았습니다. 지금 살아있는 이 시간 옆 사람의 손을 만지게 하시고 삶을 감사하면서 이번에 주신 교훈을 잊지 않고 살도록 도와주시기를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새길로고.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