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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2012.02.08 10:36

[2012.02.05] 순례자의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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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장윤재 교수

 

순례자의 하나님

(창세기 12:1-4)

 

2012년 2월 5일 주일예배

장윤재 교수

(이화여자대학교)

 

우리 크리스천들이 종종 잊고 사는 것 하나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본래 순례자의 종교, 나그네의 종교라는 사실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였고, 모세가 나그네였으며, 엘리야도 나그네였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에 아예 나그네의 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철없이 그를 따르겠다고 나서던 어떤 젊은이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서 “머리 둘 곳조차 없는” 길손임을 일러주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회심한 바울은 일생동안 시리아로, 소아시아로, 그리스로, 그리고 로마로 떠돌이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청교도 시인 존 번연(John Bunyan)이『천로역정』이라는 책에서 크리스천의 생애를 나그네로, 순례자로, 그리고 이민자로 표현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한 가지 더욱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하나님이 바로 ‘나그네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특정 장소의 신이 아니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언제나 유랑하는 이스라엘 백성보다 한 발 앞서서 산으로, 들로 옮겨 다니시던 나그네의 신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고 난 후에 두고두고 겪은 시련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가나안 토착종교인 바알종교와의 대결이었습니다. ‘소유’를 뜻하는 ‘바알’이라는 이름의 신은 ‘텃세’의 신이었습니다. 특정 지역과 주민을 지배하는 ‘터줏대감’ 신이었습니다. 때문에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야훼 하나님을 그와 같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토착화 과정의 하나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예언자들이 분연히 일어났습니다. 하나님 당신께서도 이스라엘이 거창한 성전을 세워 거기에 당신을 ‘모시려’ 할 때에 달가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순례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하나님은 나그네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일까요. 기독교 신앙의 모범을 보여준 초대 교회 크리스천들은 스스로를 ‘거리의 사람들’이라 불렀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나누면서 그들은 특정한 지역이나 혈통, 계급이나 성별에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자유인이나 종이나, 남자나 여자나,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고 고백했습니다. (갈 3:28) 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 전체를 관통해 흐르는 한 분명한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의 하나님이 순례자의 하나님이시며, 그 하나님은 오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는 길손들을 축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11장까지는 우주가 탄생하고 인류가 생겨나 끊임없이 그 문화를 발전시켜 가는데, 그것이 점차 인류의 파멸로 귀결한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장부터 마지막 50장까지 돌연 인류사의 무대가 메소포타미아의 한 작은 땅 팔레스타인으로 좁혀집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의 이야기가 바로 그것입니다. 장대한 우주의 파노라마가 불과 몇 십 명에 그치는 아주 소수의 사람들의 방랑기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 극적인 장면의 전환이 시작되는 본문이 바로 오늘 읽은 창세기 12장 1절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원래 ‘갈대아 우르’라는 곳에 살았습니다. 우르라는 지역은 당시 메소포타미아인의 생각에 의하면 세계의 중심지였습니다. 오늘의 뉴욕과 같다고 할까요. 여기서 출발한 아브라함은 정처 없이 떠돌다 팔레스타인의 가나안 지역으로 들어옵니다. 이곳은 당시 세계의 변두리 중의 변두리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의 방랑은 ‘중심으로부터 주변으로의 이동’이었습니다. ‘다수자의 문화’로부터 ‘소수자의 문화’로의 일탈이었습니다. 그의 여행은 정착과 안정으로부터의 탈출이었습니다. 기성의 가치와 규범에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미지의 세계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어디로 갈지 알지 못하고 떠났습니다. 다만 떠났습니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자기의 결정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무어라 평가할 지 상관하지 않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성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새 역사’가 시작됨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문명사가 파멸로 귀결되는 그 지점에서 바로 아브라함의 일탈과 순례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사가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한 새로운 ‘세계종교’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세기의 대표적 철학자의 한 사람인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는『종교론』으로 번역된 그의 저서 Religion in the Making 1장 6절 ‘인간의 향상’ 편에서 이 세계의 종교를 ‘부족종교’와 ‘세계종교’로 구분했습니다. 부족종교의 목표는 보존입니다. 그래서 거기서는 신의 의지 살피기 및 신과의 거래가 중심이 됩니다. 결국 신앙은 신과의 외교(거래)가 됩니다. 이런 종교 아래서 신앙인들은 자기네들끼리의 사교에 머뭅니다. 하지만 이와 달리 ‘세계종교’는 여행/순례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자리를 떠나 세계를 여행하면서 고등종교로 나아간다고 했습니다. 이런 종교에서의 목표는 자신의 것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님과의 거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로움에 비추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만약 오늘의 한국교회와 크리스천들이 이 사회 속에서 하나의 배타적인 사교집단으로 비추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아브라함의 순례로부터 획득한 세계성을 상실하고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한 한 부족종교로 전락한 때문은 아닐까요.

 

순례자는 영어로 "pilgrim"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은 라틴어의 "per agrum"인데, 그 뜻은 ‘들판을 가로질러’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성스런 목적을 위해 대지를 걷는 나그네의 모습을 떠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순례란 버스에서 내리는 것입니다. 기차에서 내리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두 발로, 영혼의 나침반을 따라 ‘대지를 걷는 것’입니다. 걷되, ‘천천히 걷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속도’에 집착하는 시대입니다. 사실 속도, 즉 "speed"라는 말처럼 오늘 우리 문명의 병든 곳을 정확히 표현해주는 말도 없습니다. 영어권에서는 각성제 류의 마약을 바로 "speed"라고 합니다.

체코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그의 유명한 소설『느림』에서 우리시대 스피드의 의미를 이렇게 짚어낸 적이 있습니다.

 

속도는 기술혁명이 인간에게 선사한 엑스터시의 한 형태다. 오토바이 운전자와 달리, 뛰어가는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육체 속에 있으며, 끊임없이 자기 발에 생긴 물집들을, 그리고 가쁜 자신의 호흡들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이 기계에게 속도의 능력을 위임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이때부터 그의 고유한 육체는 관심 밖에 놓이고 대신 그는 비신체적 속도, 순수한 속도, 속도 그 자체, 속도의 엑스터시에 몰입하게 된다.

 

참으로 깊이 있는 성찰입니다. 쿤데라는 이어서 속도와 기억, 속도와 망각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만일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무언가를 생각하려고 하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고 하지요. 이럴 때 어떻게 하십니까?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을 늦춥니다. 생각해내기 위해서입니다. 느림은 곧 생각과 하나라는 말입니다. 반면에, 길을 가다가 자신이 겪은 어떤 끔찍한 일이 떠오른다고 하지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하십니까? 저도 모르게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빨리 그 생각에서 달아나기 위해서입니다. 빠름은 곧 망각과 하나라는 말입니다. 빠르면 잊게 됩니다. 빠르면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스피드는 곧 망각이고, ‘생각 없음’이며, 한 시대에 대한 순종이자 굴종입니다 .

 

유대인으로서 20세기 나치의 폭력을 몸소 경험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나치의 끔찍한 폭력이 인간의 ‘사유하지 않음’, ‘생각 없음’에서 나온 것임을 증언했습니다. 악명 높았던 전범 아이히만(A. Eichmann)의 재판과정을 추적하여 쓴『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그녀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고발합니다. 아이히만은 처음부터 악마적 존재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 없음’이 ‘사유하지 않음’이 그를 히틀러의 반인륜적 범죄의 하수인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순례길은 걷는 길입니다. 느리게 걷는 길입니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 느림은 곧 ‘생각하기’이고 ‘성찰하기’이며 이 시대를 넘어서려는 ‘초월하기’입니다. 그래서 느림은 우리 시대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문제제기이고 새 문명에 대한 멋진 상상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걸어야 합니다. 두 발로 이 땅을 천천히 걸으십시오. 우리의 인생길은 ‘도로’가 아니라 ‘길’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도로는 질주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특히 고속도로는 어느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의 이동만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거기에는 시작과 끝이 존재할 따름입니다. 과정은 생략되어 있습니다.. 오직 쫓고 쫓기는 추격전만이 있을 뿐입니다. 뒤차에 쫓기고, 옆차에 쫓기고, 그러다가 결국은 자기 자신에게 쫓깁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길은 오솔길과 같습니다. 그 길에는 아름다운 꽃이 피어있기도 하고, 진흙탕 길도 있으며, 힘들게 오르다가 쉬이 내려갈 수도 있는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을 걸으십시오. 천천히 걸으십시오. 그 순례가 나를 치유하고 이 시대를 치유할 것입니다.

 

스페인에는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라는 순례길이 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라는 뜻입니다. 산티아고란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던 야고보의 라틴어식 이름으로, 성 야고보라는 뜻입니다. 이 순례길은 과거에 예루살렘과 로마에 이어 유럽의 3대 순례지로 번영했던 곳인데, 오늘날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있는 이베리아 반도 북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꼼포스텔라 성당’까지 가는, 수백에서 수천 킬로미터의 여러 다른 길들을 가리킵니다. 한국 사람들은 보통 프랑스 생장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북부지방을 걷는 약 800킬로미터의 여정을 가장 선호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부산에서 신의주까지 정도가 되며 기간은 한 달 남짓 걸립니다. 이 순례길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2년 전 개봉한 영화 The Way를 한번 보시면 좋습니다. 배우 Martin Sheen이 주연했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조난사한 아들을 대신해 이 길을 완주하며 생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아들과 만나고 또 자기 자신과 만나는 한 아버지의 이야기가 감동적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이 순례길을 다녀오신 한 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순례길 곳곳에는 ‘알베르게’라고 하는 숙소들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 가면 소박하지만 잠을 잘 수도 있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례자들은 처음에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들을 잔뜩 싸서 등에 지고 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나름대로 줄이고 줄여서 꼭 필요한 것들만 담는다고 했는데도 어느새 가방은 묵직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몇 개의 알베르게를 거치면서 순례자들은 비로소 버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한 알베르게에서 다른 알베르게까지 오직 빵 두 쪽과 물 한 모금이면 충분하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비로소 버리고 비우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서서히 우리의 인생길 역시 그렇게 버리고 비우는 길임을 깨닫는다고 합니다.

 

저는 크리스천들에게 순례길은 ‘창조적 크리스천’이 되기 위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창조적 크리스천이 되기 위해 순례를 떠나야 하고 우리의 순례길에서 다음의 네 가지를 버려야 합니다. 첫째로, 길들여진 습관에 대한 익숙함입니다. 둘째로, 과거의 업적에 대한 도취입니다. 셋째로, 이미 획득한 소유에 대한 집착입니다. 그리고 넷째로, 미래에 대한 불안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새 생명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를 과감히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창조적 크리스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새 하늘과 새 땅의 겨자씨가 될 수 있습니다.

 

한국의 큰 신학자 고 안병무 선생님은 그의 마지막 책이 된『너는 가능성이다』에서 우리 인간에게는 세 가지 형이 있다고 했습니다. 거미형, 개미형, 그리고 나비형 인간입니다. 거미형은 지식과 경험의 거미줄을 쳐놓고 먹이가 걸리기를 기다리는 인간형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창조적인 고려도 미래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의 여지도 없습니다. 자기가 쳐놓은 기득권에 도전이 오면 진실여부에 상관하지 않고 폭력적으로 대항합니다. 개미형은 자기의 먹을 것만 부지런히 모으는 인간형입니다. 기존의 자리 안에 만족하고 그 안에 자기만의 행복과 쾌락을 위해 땀 흘려 일하는 인간형입니다. 마지막으로 나비형은 꽃을 찾아 꿀을 모으기 위해 언제나 이동하는 인간형입니다. 나비는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습니다. 보금자리를 틀지도 않습니다. 언제나 꽃에서 꽃으로 이동합니다. 한 현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새로운 역사의 가능성을 추구합니다. 안병무 선생님의 마지막 책이 된 이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비형 인간이 많을수록 우리 민족과 국가 그리고 교회에 희망이 있다고...

 

저는 또한 우리의 순례길을 바다는 건너는 항해로도 비유하고 싶습니다. 호모(Homer)의 오디세이(Odyssey)는 오디세우스(Odysseus)의 방랑과 모험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을 읽다보면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향을 향해 배를 띄우는 오디세우스에게 키르케(Circe)라는 이름의 마녀가 ‘사이렌(Siren)’이라는 바다요정을 조심하라고 경고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사이렌은 너무도 달콤한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바다의 요정입니다. 민방위 훈련 때 울리는 사이렌도 바로 이 이름에서 따왔습니다. 이 사이렌의 모습은 ‘반인반조(半人半鳥)’, 즉 반은 사람이고 반은 새인 모습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 요정의 모습을 익히 알고 계십니다. 못 보셨다고요? 만약 생각이 안 나시면 오늘 예배를 마치고 댁에 돌아가시는 길에 스타벅스 커피숍의 로고를 한번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거기 그려져 있는, 긴 머리의 여자가 바로 그 사이렌입니다. 실제로 스타벅스의 창업자는 ‘사람들이 내 커피숍 앞을 지날 갈 때 그 누구도 내 집 커피향기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의미에서 사이렌을 로고로 정했다고 합니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당신은 사이렌이 사는 곳을 지나게 될 걸세. 유혹하는 존재지. 조심성이 없는 사람들은 가까이 다가갔다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만다네. 왜냐하면 사이렌은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들판에 누워 달콤한 노래로 뱃사람들을 유혹하거든. 하지만 그의 주위에는 희생제물이 된 사람들의 시신으로 가득하다오. 그러니까 당신은 이 사이렌을 그냥 지나쳐야 해! 당신의 선원들이 사이렌의 노래를 듣지 못하도록 아예 왁스로 귀를 틀어막아야 해!

 

하지만 이 엄중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은 사이렌이 부르는 달콤한 노래에 빠져 하나씩 하나씩 바다로 떨어집니다. 오디세우스마저도 그 달콤한 유혹에 혼이 나가 거의 죽음에 이르렀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게 됩니다.

 

그런데 결국 이 무서운 사이렌을 물리친 사람은 오르페우스(Orpheus)였습니다. 음악하시는 분들은 귀에 익숙한 이름이지만, 동물이나 새, 그리고 산천초목까지도 음악으로 매혹시켰다는 바로 그 하프의 명인 오르페우스 말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오르페우스가 사이렌을 이긴 방법입니다. 그가 어떻게 사이렌을 물리쳤을까요.

 

오르페우스가 배를 타고 항해를 시작합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너무도 달콤한 노랫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사이렌의 노래입니다. 그렇게 주의를 줬건만 그의 선원들이 차례로 이 노래에 넋이 나가 바다에 떨어집니다. 그 때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하프 앞으로 달려갑니다. 그리고 하프를 켜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사이렌의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달콤한 죽음의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선원들이 하나씩 둘씩 그의 노래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결국 그들이 탄 배는 죽음의 앞바다를 무사히 빠져나가게 됩니다. 그 때 처음으로 싸움에서 진 사이렌은 그 자리에서 돌덩이로 변하고 맙니다. 오르페우스가 이긴 것입니다. 노래로 노래를 이긴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달콤한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로 사이렌을 이긴 것입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순례길은 바다 위의 항해로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항해길 앞에는 반드시 사이렌의 노래와 같이, 달콤하지만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유혹이 존재할 것입니다. 순례를 그만 멈추고 이제 쉬라는 유혹이 늘 따라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억지로 우리의 귀를 틀어막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유혹은 우리 내면을 통해 공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례길에서 우리가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유혹자의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를 불러야 합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한 찬송가의 가사처럼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 맑은 가락이 울려나”야 합니다. 찬송을 부르십시오. 유혹하는 자가 부르는 달콤한 노래보다 더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를 부르십시오. 그렇게 늘 찬송을 부르며 힘차게 우리의 노를 저어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순례길은 땅을 걷는 길이기도 하고, 바다는 건너는 항해이기도 하지만, 또한 하늘을 나는 비행으로도 비유할 수 있습니다. 눈을 들어 하늘을 보면 계절마다 수 천 수 만 리 길을 비행하는 기러기들을 통해 우리의 순례길에서 소중한 배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밀튼 올슨(Milton Olson)은 기러기의 이동생태를 깊이 연구한 학자입니다. 그는 기러기의 이동비행에서 네 가지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첫째, 기러기들은 V자형의 형태를 유지하며 비행하는데 (밑에서 보시면 V자이지만, 함께 날면서 옆에서 보시면 뒤 따르는 기러기는 조금씩 위에 위치합니다) 그 이유는 장거리를 날기 위한 에너지를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앞에 나는 선두 기러기의 날개 및 뜨는 힘, 즉 양력에 의하여 바로 뒤에 오는 기러기의 힘은 훨씬 줄어들게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비행하게 되면 혼자 날 때보다 무려 72%나 멀리 날 수 있다고 합니다. 둘째로, 앞서 날던 선두 기러기가 피곤하게 되면 이 기러기는 맨 뒤로 돌아가고 대신 바로 그 뒤를 따르던 기러기가 앞으로 나아가 선두를 인도하여 대열을 유지한다는 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리더십의 순환이고 협동입니다. 세 번째로, 긴 거리의 비행 중에 맨 앞의 리더 기러기는 뒤따르는 기러기들이 지치지 않도록 늘 격려의 울음소리, 즉 "honk" 소리를 계속 낸다고 합니다. 영어로 기러기의 울음소리를 뜻하는 "honk"는 자동차의 경적소리를 의미하기도 하지요. 어떤 조직에서 리더의 격려와 칭찬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마지막 네 번째로, 대열에서 날던 기러기 중에서 한 마리가 아파서 뒤처지거나 총에 맞아 땅에 떨어지면, 반드시 두 마리가 대열에서 빠져나와 뒤쳐진 동료를 도와준다는 사실입니다. 낙오된 동료의 죽음을 확인하거나 혹은 소생하여 다시 날 때까지 곁을 지켜준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랍고 감동적입니다.

 

아프리카에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빨리 가려거든 혼자 가라. 그러나 멀리 가려거든 함께 가라.”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의 믿음의 순례길은 혼자 빨리 가는 길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멀리 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기러기의 비행과 같습니다. 오직 하늘의 별자리와 지구의 자장을 참고삼아 수 천, 수 만 리 길을 날아가는 기러기의 비행과 같습니다. 우리 새길교회 교우님들의 순례는 기러기의 비행을 닮으면 참 좋겠습니다. 앞선 순례자들이 험한 바람을 헤쳐주어 뒤 따르는 순례자들의 길을 열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러다 지치면 뒤 따르던 순례자들이 앞서 나가 모진 바람 헤쳐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앞선 순례자들은 계속 "honk" "honk", ‘아자, 아자’ 격려해주시고 칭찬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의 머나먼 믿음의 순례길에서 낙오하는 분이 생기더라도, 그 분들이 다시 소생하여 본진에 합류할 때까지 땅에 내려가 끝까지 돌보고 감싸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우리 새길교회의 순례자들은 한 분도 낙오함 없이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도달하시면 좋겠습니다.

 

경애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나그네란 누구입니까? 나그네란 ‘새로운 변화에 열린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나그네의 하나님이신 것도 바로 이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옛 것에 집착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새 일을 꾸미십니다. 이사야 43:18-19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과연 누가 이 은총에 가장 잘 응답할 수 있겠습니까? 네,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이동하는 사람입니다. 순례하는 사람입니다. 버릴 줄 아는 사람입니다. 비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물론 떠남은 아픔입니다. 우리는 같은 것을 즐기고 안정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젊음입니다. 혹시 오늘 제게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는 나이의 기준이 몇 세인지 애매하다고 물으신다면 제가 요즘 유행하는 한 개그 프로그램의 ‘애정남’(애매한 것을 정해주는 남자)의 흉내를 내어 지금 정해드리겠습니다~! 사실 제가 아니라 성서가 정해드립니다. 크리스천이 순례의 길을 떠나는 나이는? 네 답은 바로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무작정 떠난 그 때의 나이입니다. 그 때 아브람의 나이가 75세였다고 창세기 12:4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서에서는 75세가 청년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75세 이하인 분들은 두 말 하지 마시고 순례의 여정을 준비하십시오. 하지만 75세가 넘으신 분들도 아브라함이 100세에, 사라가 99세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언약 앞에 나이가 어디 있습니까!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여행은 모르는 데를 가야 건강하다고 하지요. 크리스천들이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약속의 미래 앞에서 여행의 꿈으로 잠을 설치는 젊은이들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경애하는 새길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순례를 멈추지 마십시오. 한국 기독교의 새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새길교회의 순례가 곧 한국 기독교의 희망입니다. 순례는 신앙의 본질입니다. 아니 신앙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 조그만 터전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이기십시오. 길들여진 습관의 익숙함, 과거의 업적에 대한 도취, 이미 획득한 소유에 대한 집착, 그리고 미래에 대한 불안을 버리고 비우십시오. 교회생활 오래했다고 신앙 수업을 다 마친 것처럼 종교적 안일함에 빠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순례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오늘도 당신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하나님의 새 생명의 길을 가는 길손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순례자의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의 순례길에 친히 우리와 동행해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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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2012 [2012.02.19] 순간의 선택 1 file 2012.02.21 최현섭
28 2012 [2012.03.4] 내가 나인 것은 2 2012.03.06 길희성
27 2012 [2012.03.11] Pax Romana와 Pax Christus 1 2012.03.12 한완상
26 2012 [2012.03.18] 이와 같이 하라(원본요약) 2012.03.20 이문식 목사
25 2012 [2012.04.01] 예수의 하나님 2012.04.03 정양모 신부
24 2012 [2012.04.08] 부활과 십자가는 하나 2012.04.10 권진관
23 2012 [2012.04.22] 하나님 나라 2012.04.24 윤여성
22 2012 [2012.05.06] 모태공간, 어머니 교회 file 2012.05.08 최만자
21 2012 [2012.04.15]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2012.05.17 김회권 교수
20 2012 [2012.05.13] 주님의 사명 2012.05.17 육근해 관장
19 2012 [2012.05.20] 자라나는 믿음, 의연한 삶 2012.05.24 오강남 교수
18 2012 [2012.06.10] '말고' 이야기 2012.06.14 백소영 교수
17 2012 [2012.06.17] 70년 포로생활과 바사왕 고레스 2012.06.19 한인섭
16 2012 [2012.06.24] 어찌하여 역사를 이렇게 주관하십니까, 하나님 2012.06.27 한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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