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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서진한 목사

찢어진 성전 휘장

일상에 기댄 비상, 세속에 깃든 거룩

(민 17:12-13, 막 15:37-38, 고전 3:16-17)

 

2012년 11월 25일 주일예배

서진한 목사

((재)대한기독교서회)

 

 

1

 

오경, 복음서, 서신서 세 본문의 내용은 다 성전(성막)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하고 솔로몬 대에 이르러 웅장한 성전을 세우기 전까지 이스라엘은 성막에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자 상징이며, 이스라엘 그 자체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이 있으므로 자신들은 결코 외세에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도 하였습니다. 성전은 전능하고 거룩하신 야웨가 머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서 본문은 예수께서 큰 소리로 숨을 거두시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두 조각으로 찢어졌다고 전합니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마태, 마가, 누가 곧 공관복음서는 모두 다 이 전승을 전합니다.

일반적으로 예수 이야기가 전승되어 복음서의 형태로 정착하는 과정에서,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전승조각들은 탈락하거나 변형되거나 유사한 의미를 가진 다른 전승군으로 옮겨져 편집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점을 감안한다면 세 복음서가 다소 분위기는 다르지만 같은 보도를 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합니다.

 

마가복음이 기원후 70년경에 편집되었다고 한다면, 여기에는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을 초토화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었으리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것은 마태나 누가 복음에도 그대로 반영되었을 것입니다.

 

성전에는 휘장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서에서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고 말하는 성전 휘장은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을 말합니다. 이 휘장은 거룩한 곳[聖所]과 지극히 거룩한 곳[至聖所]을 구별하여 나누는 커튼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휘장은 흰 실로 꼬아 만들고 그 위에 청색, 홍색, 자색 실로 날개가 넷 달린 ‘그룹’을 수놓아 만들었다고 합니다.

 

성전 구조는 복잡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광야시절의 성막의 구조를 따르고 있습니다. 성막은 ‘바깥마당/성소/지성소’의 3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성전의 경우에는 마당에도 이방인의 뜰, 여인의 뜰 등이 딸려 있습니다만, 성막과 마찬가지로 마당은 백성들이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성소는 제사장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입니다. 성소에는 일곱 갈래의 촛대와 향을 피우는 단, 떡을 놓는 상 등이 있었습니다. 지성소에는 야웨께서 앉으시는 시온좌(座)와 나무로 짠 상자에 순금을 입힌 법궤 등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성소는 야웨께서 정좌해 계시는 곳입니다.

 

이 지성소는 오로지 대제사장만이, 그것도 일 년에 단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몸을 씻고 세마포를 입고, 숫양으로 제물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지성소에 들어가 백성들의 속죄를 빌었습니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은 길이가 18m, 폭이 8m 정도였다고 하니 엄청난 크기입니다. 그리고 휘장의 두께 역시 상당하여서, 꽤나 무거웠던 모양입니다. 이 휘장을 들어서 매다는 데 제사장 300명이 동원되었다고 합니다.

 

이 휘장은 거룩한 곳을 차단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거룩’이란 본래 신의 것으로, 거룩하지 않은 인간에게는 무섭고 불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민수기에서는 성막에 가까이 다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죽어나갔고, 백성들은 모세에게 우리를 다 죽일 셈이냐고 불평합니다. 성막, 성소, 지성소를 훼손하거나 부정하여 죽어나간 사람들의 기록이 성서에 적지 않습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두 아들(제사장)도 그런 이유로 죽어나갔습니다.

 

이 휘장은 하나님의 영역과 사람의 영역을 구분하는 상징물입니다. 그것은 거룩함과 거룩하지 않음을 나눕니다. 그런데 그 휘장이 찢어져버리면 거룩한 영역이 훼손되고 맙니다. 거룩한 영역과 거룩하지 않은 영역의 구분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영역이 없어지면 성전은 이미 성전이 아니게 됩니다. 이스라엘에서 ‘성전’은 구별된 지성소가 있기 때문에 성전입니다. 구별된 영역이 사라진 성전, 그것은 단지 사람이 지은 건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더는 성전이 아니다.’ 성전의 무효화! 그것이 세 복음서 저자들이 말하려는 본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2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선언은 신앙생활을 오래한 분들에게는 하도 많이 읽고 들은 구절이라서 별 감흥이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선언은 상당히 도발적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를 쓴 때가 기원후 52-3년경이라고 봅니다. 그 당시는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하던 때였습니다. 그 성전은 이스라엘의 중심이자 상징으로 우뚝 서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교회의 시작이자 본원이던 예루살렘 교회도 있었고, 사도행전에 따르면 베드로 등의 사도들도 예루살렘 성전을 드나들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의 지배하에서 유대교는 종교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그 종교적 권력은 예루살렘 성전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의 권위가 시퍼렇게 살아 있을 때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스라엘의 상징적 중심이자, 이스라엘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예루살렘 성전이 멀쩡히 버티고 있는데, 그 성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여러분이 성전”이라고 합니다. 이른바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위험천만한 도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복음서들이 성전 휘장이 찢어졌다든지,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세우겠다고 했다는 등의 다소 성전 모독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지만, 그것은 로마 군대가 유대 땅과 예루살렘을 짓밟고 성전을 초토화한 이후, 그러니까 성전이 완전히 파괴된 뒤의 상황을 전제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편지는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할 때 쓴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성전”이라는 이 위험한 도발은 ‘중심 이동’입니다. 거룩한 ‘곳’에서 거룩한 ‘것’으로, 거룩한 ‘공간’에서 거룩한 ‘존재’로, 거룩함의 중심을 옮긴 것입니다. 이제 거룩함은 특정 장소에 매인 것이 아니라, 신앙인들에게, 신앙의 공동체에 깃든 것이 되었습니다. 종교사적으로 보아도 파격적인 이동, 놀라운 전환입니다.

 

3

 

인류 역사에서 종교란 언제나 ‘거룩함’ 위에 세워집니다. 거룩함, 신성함, 그것은 종교의 근거이자 근본 요소입니다. 신의 거룩함을 체험하는 것이 종교체험이고 신앙은 바로 그 체험 위에 놓여 있습니다. 신앙은 신학의 논리나 교리 체계의 결과물이 아닙니다. 도리어 신학이나 교리는 종교 체험을 정리하고 논하는 것입니다. 그 종교 체험의 알갱이는 거룩함의 체험입니다.

 

그런데 이 ‘거룩함’의 체험이란 것은 일상에서 매번 재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대부분의 종교는 신의 거룩함을 체험한 장소나 거기 관련된 상징물을 중시하게 됩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종교에는 신성함과 거룩함이 체험된 장소, 혹은 그 신성함의 상징물이 있는 곳, 곧 신성하다고 여겨지는 장소, 이른바 성지(聖地)나 성소(聖所)가 있게 마련이고, 그 성지나 성소는 종교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신심을 가진 자들은 그 성지나 성소를 향하여 순례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디에 흩어져 있든지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했습니다. 티베트 불교 신도들이 오체투지(五體投地), 머리, 두 팔, 두 다리, 말하자면 온몸을 땅에 내던지면서 오지의 험로를 수개월씩 걸려 하는 순례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종교란 게 무엇인가 하는 생각으로 숙연하게 혹은 처연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무슬림들은 매일 다섯 번씩 정해진 시각에 자신들의 성지를 향하여 엎드리고, 성지순례를 꿈꿉니다. 인도의 힌두교도들은 갠지스 강을 향하여 순례합니다. 신성한 강물이 자신을 정화해준다고 믿습니다. 우리의 민속신앙도 다르지 않습니다. 뒷산 큰 바위 아래 초를 놓습니다. 거룩한 나무를 색실들로 묶고 그 앞에 돌을 쌓습니다. 범신론적 종교이든 유일신을 믿는 종교이든, 고등종교이든 아니든 대다수 종교는 성지, 성소를 중심으로 삼아 유지됩니다.

 

그런데 복음서는 성전 휘장을 찢음으로써 ‘거룩한 장소’를 없애버립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따르는 ‘당신들이 거룩한 장소‘ 곧 성전이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장소를 말하지만, 이때 장소는 이미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은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곳은 이제 어느 장소가 아니라, 삶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장소는 사라졌습니다.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전환은 장소에서 존재로의 전환만이 아닙니다. 비상(非常)에서 일상(日常)으로의 전환이기도 합니다. 비상한 곳에 머물던 신이, 특별한 곳에 머물던 거룩함이 매일의 삶 가운데 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이 사람 안에 거하신다는 말은 동학에서 한울님이 내주하신다는 말에서처럼 인간의 존귀함을 가리키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부분이 전혀 없다고 할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바울의 말의 초점이 거기에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전이라는 어휘의 역사적, 문학적 맥락 역시 그런 생각에 방점을 찍어주지는 않습니다.

 

거룩함이 일상 가운데 있다? 이것은 심각한 일입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곳,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곳, 모세조차 ‘이곳은 거룩한 곳이니 네 신발을 벗어라’는 말씀을 들어야 했던 곳, 함부로 접근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죽어나갔던 그 거룩한 곳, 두려운 곳, 결코 일상적일 수 없는 그곳이 이제 저와 여러분의 나날의 삶 가운데 놓여 졌습니다. 그 신성하고 특별한 곳은 사라지고, 제 허접한 일상만 남았습니다. 이제 그 비상함은 제 일상에 기대어 있습니다. 제 일상의 한복판에 있습니다. 그 거룩함이 내 속된 하루하루의 한복판에!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솔직히 저는 이 말씀을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저는 이 말씀이 싫습니다. 정말로 싫습니다. 먹고 싸고 다투며 사는 제 삶이, 지지고 볶는 이 인생이 어찌 성전이 된단 말입니까? 저더러 지성소를 품은 성전이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러나 실제의 저는 성전에 못 미쳐도 한참 못 미치는, 아니 도저히 미칠 수 없는 존재입니다. 거룩함과는 멀어도 너무나 먼 제 삶 어느 구석이, 세속에서 헛갈려 돌아가는 제 하루의 어느 구석이 지성소가 된단 말입니까? 저는 이 말씀이 너무나 불편합니다.

 

결국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던 성전휘장이 찢어졌다는 말, 그것은 ‘거룩의 완화’가 아니라 ‘거룩의 철저화’였습니다. 그 ‘철저화’ 앞에서 저는 몹시 불안하고 불편해합니다.

 

4

 

루마니아가 공산치하일 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지하감옥에서 옥살이를 한 범브란트 목사가 자신의 수난과 신앙에 대해 쓴 책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하운동』. 그 책에서 범브란트는, 옥중에서 들은 이야기를 하나 들려줍니다.

 

한 동네에 탐욕스럽고 거만하며, 안하무인인 부자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 사람은 동네 목사를 만나면 얼굴에 침을 뱉곤 했습니다. 그가 죽어 하나님 앞에 불려갔습니다. 그의 앞에는 커다란 천칭 저울이 놓여 있습니다. 천사들이 그 부자의 ‘죄’를 무수히 들고 나와 천칭의 한 쪽에 얹었습니다. 그 죄가 너무나 많고 무거워서 저울의 반대편은 허공으로 치솟았습니다. 부자는 난리가 난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이 사람의 ‘선행’을 저울 반대편에 쌓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들은 달랑 눈물 두 방울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 눈물은 어느 수난절에 부자가 성만찬에 참여하며 처음으로 흘린 눈물방울이었습니다. 그때는 왠지 자신도 모르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이 가슴에 아프게 닿아 눈물을 글썽였던 것입니다. 천사들은 죄가 쌓인 반대편 접시에 그 눈물을 얹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저울은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의자를 돌려 앉아 등을 보인 채 고심하십니다. 그 사이 부자는 저울에 얹힌 죄 가운데 하나를 몰래 숨겼습니다. 저울이 눈물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아앉으면서 진노하셨습니다. 자신 앞에서도 이런 짓을 하다니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면서, 천사들에게 말하셨습니다. ‘누가 이 사람을 변호하겠는가?’ 천사들은 침묵했습니다. 변호 불가입니다. 그때 한 천사가 자신들 중에는 없지만, 혹시 이 사람이 살던 동네의 목사는 어쩔지 모르겠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가 불려왔습니다.

 

목사가 하나님 앞에서 부자를 변호합니다. 그 요지는 이렇습니다. “하나님! 이 사람은 저와 마주칠 때마다 제 얼굴에 침을 뱉고 저를 모욕했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이 사람을 용서하였습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용서하시지 못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저와 자리를 바꾸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목사의 말을 들은 하나님께서는 너무나 기뻐하시면서, 부자를 용서하고 그 목사를 칭찬하며 곁에 두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목사는 예배 중에 왔다며 돌아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를 말해주는데, 그중에 하나는 눈물 두 방울의 무게입니다. 눈물 두 방울의 무게는 그 부자가 지은 어마어마한 죄의 무게와 맞먹습니다. 무지 무거운 눈물입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무거웠으면 그 숱한 죄에도 불구하고 변론도 필요 없이 부자를 천국으로 직행시켰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무거운 눈물입니다.

 

아닙니다. 눈물 자체가 그리 무거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그리 무겁게 다루셨습니다. 그토록 무겁게 인정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눈물을 거룩한 것으로 인정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과 연관시켜 말하면, 그 부자의 눈물 두 방울은 그의 지성소가 되었습니다. 곧 마르고 곧 배신할 눈물이 말입니다. 이것이 이 오래된 이야기의 뜻 가운데 하나입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이 지저분한 현실 가운데서 이득만을 좇아온 자신을 보며 문득 흘린 회한의 눈물에, 끝내 믿는 바대로 살지 못한다는 자책의 한숨 가운데, 이 땅의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보며 눈시울 뜨거워지는 연민, 그것이 싸구려 연민이고 동정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자기 말과 어긋나는 자기 삶에 대한 성찰이 찌르는 가시의 통증처럼 묵직하게 남아 있는 배 아래쪽 어딘가에, 아마 그곳에 하나님은 지성소를 두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허접한 것에 기대어서 ‘너는 나의 성전이다.’라고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빈약한 자리에 정좌하시려나 봅니다. 참 왜소한 곳에 비집고 앉으시려나 봅니다.

 

부서지기 쉽고 찰나적인 곳, 좁고 좁은 곳, 이슬처럼 사라질 그 허망한 곳, 바로 배신당할 수도 있는 그곳에 하나님은 자리를 잡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왜소한 절대자입니다. 이 허망한 존재의 한구석에 기댄 초라한 전능자입니다.

 

물론 바울은 ‘여러분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라는 말에 이어 한 마디를 더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파괴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멸하실 것입니다.” 자신을 거룩하게 하라는 경고입니다. 멸하실 거라는 무서운 말도 덧붙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간이 노력한다고 한들, 자신이 거룩하다고 자부할 사람이 이 땅에 얼마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자신을 내세울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도 외쳤습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그러니 멸하실 거라는 경고는 어찌 보면 엄포 같습니다. 자식을 결코 이기지 못하는 부모의 엄포 말입니다. 그 엄포에는 애태움, 혹은 슬픔이 묻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속된 우리 안에 거하실 곳을 찾는다는 말은 그래서 하나님의 슬픔 같은 것을 느끼게 만듭니다.

 

5

 

한국교회의 추락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있다고 했던가요? 한국교회의 추락 속도가 어마어마한 것 같습니다. 이미 한국 그리스도교는 부패, 숭미 극우, 부정과 불법, 후안무치, 반진리, 반이성주의 등등의 이미지로 대표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거룩함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지성소를 파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생각하면, 이런 행태를 보일 수가 없습니다. 여의도 정치는 그래도 언론에서 떠들고 검찰이 수사에 나서면 꼬리를 내리고 철수하거나 사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법원 판결도, 언론의 비판도 다 소용없습니다. 총회의 결정도 무시합니다. 그러고도 건재합니다. 패거리 세력만 있으면 비판하는 쪽을 억압하면서 버팁니다. 오히려 더 큰소리칩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자기네 편만 드는 무뇌신(無腦神)입니다. 이런 그리스도교는 지성소를 파괴하고 그 지성소에 계신 하나님을 살해한 것입니다. 독신(瀆神)의 그리스도교, 살신(殺神)의 그리스도교입니다.

 

어떤 이들은 한국 그리스도교의 이런 행태, 이런 신앙양상의 뿌리를 선교사들에게서 찾기도 합니다. 선교사들의 근본주의적, 혹은 보수주의적 경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2세기가 지난 지금도 선교사 탓하는 것은 좀 지나친 듯합니다.

 

이 뿌리는 우리 한국 내부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해방이 되자,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옥에서 고초를 겪던 옥중성도들이,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주도하고 신앙을 훼손한 지도자들을 향하여 회개와 자성을 촉구하였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공직에서 물러나 사죄하고 반성해야 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사죄만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깊이 참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사참배를 결의한 자들은 힘과 세를 모아 옥중성도들을 내쫓습니다. 옥 안에서 고초를 겪는 것보다 밖에서 타협하면서 교회를 지킨 것이 더 힘든 일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말입니다.

 

여기에는 옳고 그름, 진리와 비진리는 없습니다. 오로지 세력과 권력만 있을 뿐입니다. 오늘날 교회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의로운 것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의로운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기준조차 사라졌습니다. 오로지 힘과 권력, 세력이 의(義)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도의 머리 숫자와 돈, 그것이 선(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성장이 지고의 가치가 됩니다. 성장만 하면, 교인만 늘면 모든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성장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합니다. 그것이 신앙에 부합한가 아닌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성소를 없애고 하나님을 내쫓은 그리스도교, 거기에는 바울의 말처럼 파멸이 뒤따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 파멸에는 하나님의 슬픔이 짙게 깔려 있을 것입니다.

 

‘교회’를 말하기는 쉽습니다. 비판하면 됩니다. 그러나 그 교회 한가운데 있는 나를 비판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나’입니다. 내게서도 지성소가 사라진 것은 아닌지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내 속 어디에 지성소가 놓여 있는지를 끊임없이 묻는 것이기도 합니다. 내 속에 지성소가 있기는 한지, 있다면 어떤 상태인지를 묻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작고 누추한 지성소, 더럽혀지기 쉬운 그 지성소를 끊임없이 돌아보고 살피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은 자신의 부족함과 동시에 하나님의 슬픔을 느끼는 것입니다.

 

새길교회는 오늘을 대림절 첫주로 지킵니다. 대립절은 메시야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길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여러분은 이 절기의 뜻을 메시야기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러 오신다, 억압과 분열과 대립에서 해방하러 오신다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기뻐활 절기입니다. 그 생각이 맞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속된 일상의 나날을 사는 우리 가운데에 ‘거룩한’ 하나님이 자신의 거처를 두려고 오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성전’ 삼아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아기’로 오십니다. 결코 거룩하지 않은 우리의 품에 ‘거룩’이 아기의 모습으로 안깁니다. 우리의 추하고 허약한 손에 안긴 초월자. 그래서 대림절은 두렵고 떨리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이 한 주 동안, 조심스레 나의 지성소가 내 삶 어디쯤에 있는지, 어떤 상태로 있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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