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_btn
2012
2012.10.04 15:14

[2012.09.23] 신앙인의 불신앙

(*.39.124.36) 조회 수 4947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한인철 목사

신앙인의 불신앙

(렘 7:1-11, 마 7:15-23, 약 2:14-17)

 

2012년 9월 23일 주일예배

한인철 목사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교목, 교수)

 

 

Ⅰ. 들어가는 말

 

요즈음 개신교가 수상합니다. 일반 교인들보다는 교계 지도자들이 더 수상합니다. 그 중에서도 제가 속한 감리교가 가장 수상합니다. 어디 가서 제가 기독교인이라고 밝히는 것도 창피스럽고, 더군다나 제가 목사라는 말은 행여 욕 들을까 무서워 감히 말을 못 꺼냅니다.

 

미국 L.A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주 작은 교회를 목회하는 제 후배목사의 사모가 다운타운 쇼핑몰에서 조그만 부스 하나를 차려놓고 장사를 했답니다. 어느 날 낮에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은 한 신사가 물건을 사러 왔는데, 누가 봐도 영락없는 목사 같더랍니다. 그래서 목사 사모 입장에서 친근감도 있고 하여, 혹시 목사님이신가요? 하고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이 분이 자신을 홱 돌아보며 이러더랍니다. “내가 사기꾼처럼 보인단 말이에요?” 그 날 저녁 이 사모는 남편 목사에게 이 이야기를 하며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저는 지금 또 다른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엘에이에서만이 아니라, 머지않아 한국에서도 비기독교인들 사이에 회자되지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흔히 말합니다. 오늘의 시대는 종교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종교를 걱정한다고... 특별히 오늘의 한국 사회가 기독교를,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지도자들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상황을 생각하면서, “신앙인의 불신앙”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II. 개신교의 현주소

 

여러분들도 이미 들어서 아시겠습니다만, 비종교인들의 종교에 대한 호감도 조사를 한 적이 있는데, 1위가 불교, 2위가 천주교, 그리고 3위가 개신교였다고 합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종교가 이 셋이니, 개신교가 한국의 비기독교인들에게는 가장 비호감이라는 뜻이 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2010년 2월에 인터넷 기독교 뉴스매체인 ‘뉴스앤조이’에서, ‘비기독교인인 당신은 왜 개신교를 싫어하십니까’ 하고 물은 적이 있었습니다. 네티즌들이 18일부터 22일까지 5일 동안, 무려 509개의 댓글을 실었습니다. 이 분들이 무엇을 지적했을까요? 여러분도 그 대답을 상상해 보시면서, 이들이 지적한 바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인터넷 신문 담당자들이 509개의 댓글을 7개의 범주로 요약했습니다.

 

첫째로 ‘개신교인은 말 따로 행동 따로’다. 둘째로 ‘개신교인은 사랑은 없고 욕심만 가득’하다. 셋째로 ‘개신교인은 권력과 결탁되어 있다,’ 넷째로 ‘개신교에는 수준 미달의 목사들이 많다.’ 목사인 저로서는 아주 뜨금한 대목입니다. 다섯째로 ‘개신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며 타종교에 배타적’이다. 여섯째로, ‘개신교는 헌금을 강요하고 재정을 불투명하게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개신교는 끼리끼리 놀고, 끼지 못하는 사람은 왕따시킨다.’ 물론 모든 개신교인이, 그리고 모든 목회자가 그런 것은 분명 아닐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지적들은 새길교회에는 크게 해당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지적들은 일반교회의 현상을 놓고 보면, 상당부분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인터넷에 올라온 내용은 매우 노골적이고 적나라하지만, 그 내용을 소개하지는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비기독교인들이 개신교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은, 개신교의 교리 자체가 갖는 문제점에 대한 것이 아니라, 개신교인들이 교회 안팎에서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대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III. ‘신앙인의 불신앙’이라는 말의 함의

 

저는 이러한 개신교인의 현상을 ‘신앙인의 불신앙’이라고 이름 붙이고, 오늘 설교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개신교인들은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에 걸맞는 삶을 살지 않고, 예수를 믿지만, 예수께서 사셨던 것처럼 그렇게 살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점을 지적하는 것이 여러분에게나 저에게나 모두 부담이 되겠지만, 이것이 오늘날 개신교인들의 솔직한 현주소입니다.

 

저는 이렇게 된 교리적인 이유에 대해, 전에 새길교회 강연에서 세 가지로 지적한 바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개신교인들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높이고 나서, 예수는 하나님이니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 수 있지만, 우리는 죄인이니까 그렇게 살 수 없다고 스스로를 정당화한다고 지적했습니다. 둘째로, 예수는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으니, 우리는 예수를 믿기만 하면 되지, 굳이 예수처럼 살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고, 예수처럼 살지 못하는 자신을 합리화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셋째로, 만약 그렇게 해서 구원받은 우리가 또 다시 예수처럼 살려고 한다면, 그것은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 된 마음이고, 더 나아가서는 믿음으로 구원받으려는 것이 아니라 행함으로 구원받으려는 것과 같다고 하면서, 예수처럼 살려는 노력을 원천봉쇄한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이것이 그 요지였습니다. 기억나시는지요?

 

그런데 오늘 저는 이러한 교리적인 이유에 덧붙여, 또 다른 중요한 문제 하나를 지적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믿는 것과 사는 것 사이에 시간적인 거리를 두고, 그것을 정당화하려는 개신교인들의 일반적 태도에 관한 것입니다. 우리는 거의 의식하지 못한 채, 이렇게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지는 못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점차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지금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저를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물론 저처럼 똑같이 말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개신교인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아마 거의 다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신학을 전공하고, 목사가 된 저 역시도 상당히 오랜 기간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 혹은 이러한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이 오늘 여러분과 함께 생각해보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IV. 믿기는 하지만 살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 달라. 이것이 이해될 수 있는 말일까?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지는 못한 나를 너그럽게 이해해달라’는 이 말이 정말 이해될 수 있는 말일까?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 사이에 시간적인 거리를 두는 것이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일까? 상당히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에, 어쩌면 이러한 질문이 기독교인들을 너무 몰아세우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삶의 결핍현상을 보이고 있는 오늘의 한국 개신교가 처한 현실을 생각한다면, 이 질문은 ‘신앙인의 불신앙’을 불식시키기 위해, 반드시 물어야 할 매우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 선생님과 제자가 있습니다. 선생님이 보기에, 자기 제자가 자신을 거의 신뢰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 늘 제자에 대한 의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눈치 챈 제자가 어느 날 말합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합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선생님의 뜻을 따르지 않게 되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시간이 지나면 저도 선생님의 뜻을 따를 때가 오지 않을까요?’ 이런 제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하는 제자에게 어떻게 반응을 보이실지요? 제가 보일 반응은 분명하지만, 너무 격해 보여 말씀드리지는 않겠습니다. 우리 새길교회에는 선생님들이 많으신데, 여러분 제자가 이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과연 이 제자가 여러분을 신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지요?

 

저는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말은, 이해해 줄 수 있는 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지금은 믿기만 하지만, 나중에는 믿은 대로 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말도 역시 양해사항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엄밀히 말해 하나님을 믿지 않는 단적인 증거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신앙인의 불신앙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형태라는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다는 말은, 정확히 말해, 하나의 경험을 가리키는 이중 언어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달리 말하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지 안 사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복음서 전체를 통해 예수께서 시종일관 강조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믿음은 믿는다는 말을 통해서 믿는 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비근한 한 예를 들어볼까요? 여기 한 기독교인이 있습니다. A라는 직장에 꼭 취직하고 싶은 데, 취직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와서, 그 직장 실력자인 B라는 사람에게 돈 5,000만원만 주면 취직이 가능하다고 귀띔합니다. 그래서 그 돈을 주고 취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교회에 감사헌금을 바쳤습니다. 이 사람은 과연 하나님을 믿는 사람일까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분은 분명 하나님을 믿는다는 신앙의 자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분이 기독교인이냐고 묻는다면, 사람들은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이 분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할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 사람에게 신앙의 자의식이 없어서가 아닐 것입니다. 그 신앙에 걸맞는 삶이 없어서일 것입니다. 그 분의 삶을 보면, 그 분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돈을 믿었고, 돈의 힘을 믿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유사한 사례들을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그리고 우리 삶의 주변에서 매일같이 목도하고 있습니다.

 

V. 믿음과 삶 사이에 시간적 거리를 두는 이유

 

사람들은 이 때, 이렇게 변명하고 싶어 합니다. ‘나는 분명 하나님을 믿고는 있지만, 아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지 못할 뿐이다. 나도 신앙이 무르익으면,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은 상당히 그럴 듯해 보이지만, 엄밀히 말해, 자신의 불신앙에 대한 객쩍은 변명에 불과합니다. 단언컨대, 신앙과 삶 사이에는 시간적인 거리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은 믿고, 나중에 믿은 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은,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은 하나의 경험을 가리키는 동시적인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격식을 갖춰 말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의 내적인 근거이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외적인 표현이라는 말입니다. 이 때문에 지금은 믿고, 사는 것은 나중에 하겠다는 것은, 기독교 신앙에 관한 한, 진실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이 부담스럽기 때문에 만들어낸, 구차스런 변명에 불과합니다.

 

VI. 성서 이야기

 

오늘 읽은 마태복음 본문은,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고 안다는 말입니다. 본문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고까지 말합니다. 열매 맺지 않는 나무는 나무로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말일 것입니다. 예수의 말씀이 매우 매정하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나무의 진실입니다. 나무는 좋은데, 열매가 없는 것을 이해해달라, 이것은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좋은 나무가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반증일 뿐입니다.

 

야고보서는 이 점을 적절한 예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헐벗고 배고픈 사람들이 있는 데, 이 사람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는 것이 없으면서,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니 당신들이 따뜻하게 입고 배부르게 먹기를 바란다고 말한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논지를 덧붙여 볼까요? 나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지만, 지금 당신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해주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달라고 한다면, 과연 그 분들이 이해해 줄 수 있을까요? 어쩌면, 이것이 한국의 비기독교인들이 개신교를 향해 던지는 비판의 핵심일지 모릅니다. 이에 대해 야고보서 저자는,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라고 단적으로 말합니다.

 

VII. 나가는 말

 

오늘 말씀을 맺겠습니다. 어떤 분이 제게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당신의 설교를 들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제가 교우들을 편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아픈 부분을 자꾸 건드린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저도 그렇습니다. 저는 설교를 할 때마다, 저의 설교가 부메랑이 되어 제 가슴을 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의 설교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에 따른 삶이 우리를 아무리 힘들게 한다 하더라도, 그 때문에 이것을 비켜갈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불의가 이미 만연해있고, 게다가 불의를 행하고도 살아남기 힘든 세상에 이제 우리보고 어쩌란 말이냐? 아마 이런 질문이 저절로 나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분들에게는 성서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그 뜻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는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실 것이고, 그렇게 사는 삶에 가장 적절한 미래를 반드시 열어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믿고, 그 분을 우리들 삶의 중심에 모시고, 그 분의 뜻을 따라 오늘도 당차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고자 하는 새 길 아니겠습니까? 모쪼록 여러분이 가고자 하시는 그 새 길 가운데,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설교자
35 2012 [2012.12.02] 시천주의 믿음과 우리 사회의 갱생 2012.12.07 이은선 교수
34 2012 [2012.11.25] 찢어진 성전 휘장 : 일상에 기댄 비상, 세속에 깃든 거룩 2012.12.05 서진한 목사
33 2012 [2012.11.11] 너의 담을 허물라 2012.11.15 이상익
32 2012 [2012.11.04]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2012.11.09 김재성 목사
31 2012 [2012.10.28] 왜 광야로 데려가시려 하는가? 2012.11.03 김경재 목사
30 2012 [2012.10.21] 밥상을 차리신 예수 2012.10.26 조은하 교수
29 2012 [2012.10.07] 놀이와 초월 2012.10.12 구미정 교수
28 2012 [2012.09.30] 충실한 제자의 요건 2012.10.04 권진관
» 2012 [2012.09.23] 신앙인의 불신앙 2012.10.04 한인철 목사
26 2012 [2012.09.16] 세 남자 이야기 2012.10.04 최만자
25 2012 [2012.09.09] 홀로서기 그리고 공감 2012.09.15 이휘주, 김호성
24 2012 [2012.08.1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2012.08.31 최만자
23 2012 [2012.07.29] 긴 호흡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2012.08.23 박득훈 목사
22 2012 [2012.08.05]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file 2012.08.08 이선근
21 2012 [2012.07.15] 장애를 통한 은혜 2012.07.20 김용목 목사
20 2012 [2012.06.24] 어찌하여 역사를 이렇게 주관하십니까, 하나님 2012.06.27 한완상
19 2012 [2012.06.17] 70년 포로생활과 바사왕 고레스 2012.06.19 한인섭
18 2012 [2012.06.10] '말고' 이야기 2012.06.14 백소영 교수
17 2012 [2012.05.20] 자라나는 믿음, 의연한 삶 2012.05.24 오강남 교수
16 2012 [2012.05.13] 주님의 사명 2012.05.17 육근해 관장
Board Pagination Prev 1 2 Next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