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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009.05.14 07:17

[2009.05.03] 유혹을 이기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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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길희성

"유혹을 이기는 힘"

(마태복음 3:13~4:11)

 

2009.05.03

길희성 형제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 마태복음 3:13~4:11


 

5월은 실로 계절의 여왕답게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세계를 연출하고 있습니다. 산과 들이 울긋불긋 색채의 향연을 베풀고 있고, 작은 생명들이 어디로부터인가 나타나서 봄기운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지금 곧 천국이 이루어진다 해도 이보다 더 아름다울 수 있을까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단지 살아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 삶의 기쁨과 감사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아름다움을 더 깊고 넓게 느끼고 감상할 수 있는 인간으로 태어난 특권에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하나밖에 없는 이 지구를 더 아끼고 아름답게 가꾸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저절로 생깁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우리 인간들이 연출하고 있는 추한 세계를 볼 때는 환희보다는 분노, 희망보다는 절망이 우리를 짓누릅니다. 미국인들의 무책임한 주택 투기와 월가 투자은행들의 탐욕으로 촉발된 전 세계적 경제위기 속에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고 거리로 내몰리고 있으며, 약소국가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삶은 더욱더 고달파지고 절망적이 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위기는 경제 위기만이 아닙니다. 주택 투기도 결국 도덕의 문제이지만, 최근에는 부시 정권 때 행해진 비인간적인 잔혹한 고문 행위로 인해 나라의 도덕성, 그야말로 미국의 영혼마저 썩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투명경영을 외치면서 구제금융을 비판하고 신흥국들을 닦달하던 미국이 사상 최대의 구제금융을 시행하고 있으며, 툭하면 인권을 거론하면서 후진국들을 압박하던 나라가 정책적으로 물고문을 가했으니, 이제 무슨 낯으로 남의 나라 일에 간섭을 할지 참으로 난처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프가니스탄은 또 다시 탈레반의 손에 넘어갈 공산이 커지고 있으며 최근에는 핵보유국 파키스탄마저 그렇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습니다. 이라크가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고는 하나 결코 낙관할 수 없으며, 북한과 이란의 핵 문제가 언제 어떠한 위기로 치달을지 예측을 불허하는 상태입니다. 부족 간의 끊임없는 갈등과 무자비한 독재정권 하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아프리카 민중들의 절망적 이야기는 마치 당연한 일로 간주될 정도로 관심조차 끌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또 지금 이 순간에도 스리랑카 북동부에서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내전의 와중에서 인간 방패가 되다시피 하여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기 속에 공포의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습니다. 지구촌 곳곳이 만신창이가 되어 ‘세상에 참 평화 없어라’는 찬송가 가사가 새삼 마음에 와 닿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요즈음은 괴상한 신종 인플루엔자 (뭐라고 부를지 아직 세계 의학계가 우왕좌왕하고 있지만, 돼지들이 억울한 누명을 벗어가는 것 같다)가 지구촌을 불안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멀리 세계로 눈을 돌릴 필요 없이, 우리 국내 상황은 어떻습니까? 년 초에 용산 철거민 참사가 우리를 분노케 하더니, 뜬금없이 등장한 연쇄살인범 강호순 이야기가 한 동안 뉴스 매체들을 지배하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습니다. 곧 이어 돈 있고 힘 있는 자들의 노리개 생활을 견디지 못해 자살한 한 가엾은 탤런트의 이야기가 온 통 뉴스를 뒤 덮더니 우려하던 대로 하나마나한 수사로 슬그머니 사건을 종결하고 말았습니다. 각종 상납을 관행처럼 일삼아 온 경찰에 애당초 무엇을 기대한단 말입니까? 그런가 하면 언제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박연차라는 사람이 수사 선상에 오르면서 고구마 줄기 캐듯 줄줄이 비리를 캐내더니 급기야는 도덕성 하나로 정권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던 사람이 사람들의 뒤통수를 때리면서 '너마저'라는 배신감과 비애감을 안겨 주고 있습니다. 이왕 해먹을 거라면 좀 통 크게 해먹을 것이지 일국의 대통령이 창피하게 그게 뭐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입니다. 산 권력에는 삽살개요 죽은 권력의 비리 캐기에는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대한민국 검찰, 남의 비리는 잘 캐내지만 제 식구 비리는 감싸기에 급급한 대한민국 검찰의 이야기도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는 이번 박연차-노무현 사태를 보면서 새삼스럽게 돈과 권력 중 어느 것이 더 셀까라는 유치한 질문을 해 보게 되었습니다. 물론 둘 다 가지면 금상첨화일 것이고, 누구라 말하지 않아도 실제로 그런 운 좋은 정치인도 있고 또 그렇게 하려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여하튼 돈이 권력을 낳기도 하고 망치기도 하는 것을 보면 돈이 더 센 것 같고, 권력으로 돈을 벌기도 하고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고 돈 번 사람을 하루아침에 망하게 할 수 있는 것을 보면, 권력이 더 센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돈이 권력보다 더 오래 간다는 사실입니다. 권력은 세습이 안 되지만, 돈은 세습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북한만 빼놓고 말입니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있지만, 옛날 사람들은 뉴스라는 걸 별로 접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고사하고 국내 뉴스조차 소문 정도로 알까말까 별로 접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각종 매체의 발달로 인해 더 이상 눈과 귀를 막고 살 수 없는 현대인들로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절망적 뉴스들을 접하면서 인간에 대해, 그리고 사회와 역사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상을 잘 모르는 철부지들이나 낭만적 환상을 지닌 사람들, 아니면 그야말로 불굴의 신념과 무모할 정도의 용기가 아니고는 인간에 대해, 사회와 역사에 대해 희망을 가지고 살기가 정말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아예 뉴스에 귀를 막고 삽니다. 신문이라야 스포츠 신문이나 보고, 텔레비전은 뉴스만 나오면 아예 채널을 돌리고 드라마나 보다가 자는 게 마음 편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의니 평화니 사회니 역사니 하는 것은 아예 관심 끄고 나와 내 가족 하나 몸 건강하고 마음 편하게 살 궁리나 하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가 세상을 알면 알수록, 인간을 알면 알수록, 점점 더 회의적이 되고 비관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지난주일 우리는 배현주 교수의 해직과 복직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듣고 그래도 세상에 아직 정의가 살아 있구나, 세상이 그리 절망적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됐지만, 우리의 보다 일반적인 경험은 인간이란 본래 이기적 존재며 인류 역사란 치열한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역사, 아니면 누구도 알 수 없는 우연과 운명의 장난일 뿐, 무슨 의미니 희망이니 같은 것을 발견하려는 것은 부질없는 짓임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교회에 와서도 골치 아픈 세상사나 사회 이야기하기를 피하고 싶어 합니다. 누구나 다 알고 식상해 하는 ‘뻔한’ 이야기보다는 마음에 평안과 위로를 주는 이른바 ‘신령한’ 이야기를 듣기 원합니다. 아니면 적어도 험한 세파를 헤쳐 나갈 힘과 용기, 치열한 경경사회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법이 담긴 ‘강력한’ 메시지를 듣기 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새길 교회처럼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을 강조하는 교회, 신앙과 역사, 하나님과 정의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교회, 그리고 조용히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신앙을 강조하는 새길의 교우들은 엄청난 마음의 부담감과 양심의 괴로움을 안고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무슨 이렇다 할 구체적인 참여적 실천을 하는 것도 아니기에 마음만 더 답답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우리가 문제를 외면한다 해서 문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신앙은 결코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며 진정한 해결을 찾으려는 것입니다. 진실의 외면이 아니라 인간과 역사의 진실을 하나님의 순수한 초월적 시각에서 더 깊고 더 날카롭게 보고 대면하기 위함입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시고 인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나와 내 자식만 편하면 된다는 생각만으로 살 수는 없습니다. 만물을 창조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온 세상의 고통의 탄식에 귀를 열고 함께 아파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중생의 탄식을 듣는다는 자비의 화신 관세음보살처럼 말입니다.

저는 요즘 이런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문제의 답이 아니라 문제의 시작이라는 생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은 문제의 해결이라고 외치지만, 진정한 문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생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문제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회피하거나 쉽게 해결해버리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문제로서 바로 의식하는 데서 출발합니다. 일반 사람들이 문제로 보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의 눈으로 문제 삼고, 세상 사람들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것까지 하나님 말씀의 거울에 비춰보는 것이 신앙인들이 지녀야 할 의식이고 교회의 존재 이유입니다. 교회는 분명 세상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는 곳이고 당연히 그래야만 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 이야기를 기피하는 곳이 아니라 세상 이야기를 하나님의 시각, 예수님의 마음에서 하는 곳입니다. 교회의 초월적 담론은 세상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직시하는 담론이어야만 합니다. 인간의 문제, 사회와 역사의 문제를 하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시각으로 더 깊고 날카롭게 인식하고 더 근본적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의 자세입니다.

 

우리나라의 위대한 스님 보조국사 지눌의 말에, “땅으로 인해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야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의 본래 뜻은, 마음으로 인해 중생의 모든 번뇌와 고통이 왔기 때문에 마음을 잘 닦아 망심을 버리고 자신의 본래적 마음인 진심을 되찾아야 한다는 뜻이지만, 나는 그 말을 땅에서 넘어진 자는 땅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다시 말해서 세상으로 인해 넘어진 자는 세상 속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말로 취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죽어서 세상을 떠나기 전에는 결코 이 세상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한적한 시골 마음에 살아도, 혹은 깊은 산 속에 별장이나 암자 하나를 짓고 살아도 결코 세상을 피하지 못합니다. 공자님의 말씀대로, 사람은 싫으나 좋으나 사람과 함께 살지 새나 꽃과 함께 살지는 못합니다. 세상으로 인해 넘어지면 세상 속에서 다시 일어나야 하며, 세상으로 인해 상처 받으면 세상에서 치유 받아야 합니다. 수도원도 답이 아니고 자살도 답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현실 속에서, 사회 속에서 치열하게 삶을 사신 분입니다. 예수님 당시 종교 지도자들 가운데는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과 부조리한 역사에 절망한 나머지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사회를 등지고 사막 한 가운데로 들어가서 자기들끼리 경건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쿰란이라는 에센 공동체가 그런 공동체였으며, 세례 요한도 혹시 그런 부류에 속한 사람이었을지 모른다는 설도 있습니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문서 발견으로 꼽히는 사해사본이라는 것도 그들이 로마군의 공격 속에 황급히 피하면서 항아리 속에 담아 묻어둔 양피지에 쓴 구약성서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민족과 민중과 함께 고난의 역사 한 복판에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하시다가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입니다.

오늘 아침 봉독한 성경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사탄의 시험을 받고 이기신 이야기입니다. 이야기 내용을 되풀이 할 필요 없이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 기독인들에게 주는 메시지를 깨닫기 위해 몇 가지 사항만 지적하면서 그 의미를 새겨 보고자 합니다.

 

첫째, 이 사건이 예수님께서 공적 활동, 즉 하나님나라 운동의 사역을 시작하시기 직전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주목한 필요가 있습니다. 적어도 남을 위한 삶을 살려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사회 지도자로서 공적 활동을 하려는 사람이라면 -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통령에서부터 말단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정치하려는 사람이나 시민운동 하려는 사람들, 그리고 학교 교사나 종교 지도자들 - 은 먼저 사탄의 유혹, 특히 물욕, 명예욕, 권력의 유혹과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걸려 넘어짐으로 해서 자신도 패가망신할 뿐 아니라 공직을 더럽히고 아름다운 봉사활동이나 보람 있는 시민운동 자체를 욕되게 하는지 우리는 익히 알고 있습니다. 진보든 보수든 이른바 도덕성 없이는 아무리 좋을 일을 한다 해도 물거품이며 하지 않음만 못할 것입니다. 남을 구하려는 사람은 먼저 자기 자신부터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 적어도 유혹을 이길 정도의 힘은 있어야 한다는 진리를 오늘의 말씀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사람은 결코 완전할 수 없으며 누구나 사탄의 유혹을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도 그랬는데 우리들이야 더 말할 것 있겠습니까? 유혹을 받는 것 자체는 어쩔 수 없지만 유혹에 넘어가는 것은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유혹을 받는 것은 인간적이지만 유혹을 이기는 것은 더 인간적입니다. 첫 인간 아담은 유혹에 넘어갔지만, 둘 째 아담 예수께서는 유혹을 이기셨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는 새로운 존재, 새로운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인류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셋째, 예수께서 받은 시험은 평범한 일반인으로서 받은 것이 아니라,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후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좋아한다”는 확신을 얻는 경험을 한 후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나라의 백성이라는 자각, 우리가 근본적으로 하나님께 속한 자라는 자각이 강하면 강한 수록, 세상의 유혹에 더 민감할 수밖에 없으며 그 만큼 더 유혹을 받게 된다는 말입니다. 선을 행하려는 자만이 위선을 범하듯, 하나님의 자녀들은 더 세상의 유혹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진정으로 세상과의 싸움이 무엇인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지는 짐이며 동시에 특권입니다. 유혹을 받을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그가 받은 유혹에 동참한다는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것입니다. 이러한 자긍심이 우리로 하여금 유혹을 이기게 할 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 이 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본문의 말씀이 말해주듯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받는 유혹은 예수님이 받으신 유혹과 마찬가지로 사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리의 믿음을 단련하고 공고히 하기 위해 시험을 받도록 한다는 놀라운 사실입니다. 유혹하는 것은 성령이 아니고 사탄이지만, 유혹에 처하고 유혹과 싸워 이기게 하는 힘은 성령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를 줍니다.

 

다섯 째, 가장 중요한 사실은 사탄이 세 번의 시험 모두를 통해서 끈질기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거기에 공략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 우리의 주목을 끕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각과 확신을 흔들어보려는 사탄의 의도가 엿보인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고자 하는 삶의 방식을 흔들어보려는 의도입니다. 첫 번째 의도,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신념을 흔들려고 사탄은 “예수, 그대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대가 이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각과 확신 속에서 새로운 일을 도모하려 하지만, 너도 별 수 없이 우리 모두와 다름없이 세상에 속한 존재이며 세상의 아들이 아닌가? 네가 무슨 특별한 존재라고 나서느냐? 공연히 고생을 자초하지 말로 이 세상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처럼 세상과 타협하면서 적당히 살아라, 편하게 살아라. 그렇지 않으면 너의 팔자가 평탄치 않고 평생 고생만 하다가 갈 것이다. 아니, 제 명에 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하나님 아들이라는 생각은 아예 접어놓고 나와 함께 살자. 나처럼 살아라. 나에게 속한 자, 나의 자식이 되어서 편하게 살아라” 이렇게 사탄은 끈질기게 예수를 유혹하는 것입니다.

 

더 근본적으로, 사탄은 예수가 추구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의 방식을 바꾸려고 유혹합니다. “좋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하자. 네가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 천국으로 바꾸려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는 것 - 내가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과대망상증이지만 - 그것만은 내가 인정하마. 하지만 네가 정작 무엇으로 이 세상을 구하겠다는 말이냐? 보라, 너 방금 금식해보아서 알겠지만 배고픈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지 않느냐? 그대는 세상 사람들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모른단 말이냐? 저 굶주린 백성이 빵을 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안 들리는가? 그런데도 너는 엉뚱한 일을 벌이려 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 세상을 구하려는 메시아에게 빵을 바라고 기적을 바라고 있다. 돌을 빵으로 만들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것 같은 기적 말이다. 돈도 없고 명예나 인기도 없고 권력도 없는 네가 도대체 무엇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무엇으로 세상을 구하겠다는 말이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신 하나로 된다는 말인가? 하나님의 아들도 돈이나 인기나 권력 없이는 무력하고 아무것도 못한다는 것은 너는 모르느냐?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려 한다면, 우선 돈부터 마련하라, 기적의 쇼라도 연출해서 대중적 인기와 명예를 먼저 확보해라, 힘이 있어야 뭐라도 할 것 아니냐? 내가 쉬운 길을 일러 주마, 나에게 절하고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 네 꿈만은 내가 인정하지, 그러나 네 방식은 어리석고 무모하기 짝이 없다”고 사탄은 예수의 마음을 끈질기게 흔들어 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려는 사람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겪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일 것입니다. 돈 없이, 대중적 인기 없이, 권력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는 것을 좋은 일 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백성은 돈으로, 인기와 명예로, 권력으로 세상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순수한 믿음으로 세상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참으로 이 세상을 구하는 힘은 결코 돈이나 명성이나 권력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믿는 순수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해야 할 일은 먼저 돈과 명예와 권력을 확보하는 일이 아니라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답게 사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을 구하지 세상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라는 확신입니다.


세상에 악한 일을 하고 사는 사람들이 많지만 좋은 일 하려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목적과 수단이 일치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극히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교회가, 민주화운동 하는 사람, 시민운동 하는 사람, 그리고 공동선을 이루기 위해 각종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장 걸려 넘어가기 쉬운 유혹이 무언인지 분명한 것 같습니다.

여섯째, 그렇다고 돈과 명예와 권력이 필요 없고 그 자체가 악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라는 신명기의 말씀(8:3)을 인용해서 유혹을 물리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물론 우리에게 빵도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에서도 ‘일용할 양식’을 구하도록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지만 ‘빵으로만’이라는 말에는 빵을 모든 것으로 삼지 말라, 다시 말해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으로 삼지 말라는 경고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빵과 하나님을 경쟁하는 가치로 삼지 말라는 경고가 들어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순간 빵과 명예와 권력은 악으로 변합니다. 그것들 자체가 악은 아닙니다. 문제는 불의하게 얻는 빵과 명예와 권력입니다. 돈, 명예, 권력은 성실한 삶과 일의 결과로서 주어지는 것이지 목적으로 삼아서 추구해야 할 가치는 못 됩니다. 목적으로 삼는 순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얻으려는 유혹이 우리를 사로잡게 되는 것입니다.


불의하게 얻었다는 말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어기고서 얻었다는 말이며, 결국 이것은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하나님 위에 놓았다는 말이고, 결국 그것들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삼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와 명예와 권력은 목적이 되는 우상이 되어 우리를 지배하게 되고 결국 우리를 파멸로 몰아갑니다. 돈의 노예, 명예의 노예, 권력의 노예가 되어 끌려 다니다가 비참한 종말을 맞게 됩니다. 이것이 돈의 우상, 명예의 우상, 권력의 우상이 초래하는 필연적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합니다. 하지만 모든 선의 원천이신 하느님, 선 자체이신 하느님과 견줄 수 있는 피조물의 선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얻는 선은 이미 선이 아닙니다. 우리 속담에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것, 선에는 마가 끼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어쩌면 악에 넘어지기보다는 선에 넘어지기가 더 쉽습니다. 피조물의 선에 너무 취하고 집착하다가 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망각하고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섬기다가 스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패가망신하는 것입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자체가 악이 아니지만, 자칫 우상이 되기 쉽고, 그 순간 자기도 망하고 세상도 망하게 하는 파멸의 길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모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은 본래부터 하나님께 속하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늘 아버지의 말씀과 뜻에 따라 살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근본적인 인간관,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가르치시고 그런 삶을 몸소 보여주신 참 하나님의 아들이며 참 인간입니다. 그는 우리들처럼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으나 유혹을 이기심으로 인간을 새롭게 하고 세상을 새롭게 하고 역사를 바꾸는 강력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사탄의 유혹을 받고 이기신 예수님의 이 이야기는, 예수님에 관한 다른 이야기들과는 달리 이야기 자체의 성격상 다른 사람들, 즉 제3자가 목격할 수 있도록 일어난 객관적 사건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목격할 수 없었던 사건으로서, 예수님이 홀로 광야에서 기도하고 금식하시면서 들었던 사탄의 유혹의 목소리, 그야말로 예수님과 사탄 사이의 내면의 대화였고, 예수님 홀로 겪으셨던 고독한 싸움이었습니다. 치열한 영적 고뇌와 투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신의 경험을 예수님께서 후에 제자들에게 들려 주셨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탄은 결코 우리 밖에서 우리 주위를 맴돌다가 우리를 공격하고 넘어트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고 항시,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기회만 있으며 우리를 유혹하고 넘어트리려 합니다. 사탄과의 영적 싸움은 예수를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자녀 모두가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내면의 전쟁이며 투쟁입니다. 이슬람에서 지하드(jihad)라는 성전(holy war)이 중요하다는 말을 우리는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이슬람을 매우 호전적이고 전투적인 종교라고 생각하지만, 경건한 무슬림들은 한결같이 말하기를 진짜 지하드는 총과 칼을 들고 하는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려는 자신의 욕망과 치열하게 싸우는 거룩한 내면의 전쟁이라고 말합니다.

요즘 한국 교회와 기독인들의 신앙생활을 보면 이렇게 세상 유혹과 싸운다는 개념이 매우 희박해진 것 같습니다. 세상과의 팽팽한 긴장, 치열한 영과 육의 싸움은 모든 종교, 모든 신앙의 가장 기초적인 일이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신앙이 세상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세상을 이긴다는 개념이 세속적으로 성공하는 승리주의 신앙으로 변질되었고, 교회 생활은 그야말로 폼 나는 사회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출세의 방편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극히 소수이지만 거룩한 싸움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는 참된 신앙인들이 우리 주위에 있기 때문에 아직도 이 세상은 빛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어두워도, 모두가 사탄의 유혹에 밥 먹듯 넘어진다 해도, 영과 육의 치열한 싸움을 계속하면서 쓰러지면 다시 일어나고 또다시 쓰러지면 또 일어나서 선한 싸움을 계속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이런 사람들이 있는 한 세상에는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의인 단 열 사람만 있어도 그들 때문에 소돔을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이었음을 기억합시다.

첫째 아담은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는 유혹에 넘어가서 불행의 역사를 시작했으나 예수께서는 우리처럼 유혹을 받기는 했으나 유혹을 이기신 두 번째 아담, 새로운 존재(new being)가 되심으로써 인류의 희망이 되셨고 구세주가 되신 것이다. 예수 같은 존재가 실제로 이 세상에 살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존재,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린 것입니다. 인간에 대한 회의와 인생에 대한 비관을 넘어서 우리에게 희망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실로 참다운 인간으로 사신 분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를 대변하신 분 - 우리를 대신하신 우리의 대표 주자 혹은 변호인(advocate) - 이셨으며, 인간들 앞에서는 끊임없이 유혹에 넘어지는 우리를 용서하시고 일으켜주시는 사랑과 용서의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대신하신 분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하나님과 인간의 중보자(mediator)가 되셨다는 전통적 교리의 의미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을 대표하시고 대신하신 분, 인간 앞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신 분, 그럼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를 가져오시고 인간과 인간의 화해를 가져오신 분, 나아가서 인간과 모든 피조물의 화해의 역사를 가능하게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예수와 같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와 같이 성령에 의해 인생의 광야에서 유혹을 만나지만 성령의 힘으로, 말씀의 힘으로 사탄의 유혹을 이기는 삶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성령의 힘, 말씀의 힘으로 새롭게 태어난 인간이 아니고는, 그리고 계속해서 우리 삶을 인도하는 성령의 힘과 말씀의 힘이 아니고는, 이 거대한 세상 유혹과 집요한 사탄의 힘을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기 때문에, 이렇게 매주 모여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함께 고심하는 것입니다. 또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악한 자)에서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도 살고 세상도 구원하는 삶임을 확인하고 그렇게 살고자 함께 다짐하곤 하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부와 명예와 권력을 하나님의 선물로 받은 자도 있고, 그렇지 못한 자도 있습니다. 받은 사람은 받은 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은혜의 선물을 알아서 우상화 하지 말고 오직 감사하는 마음,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할 수 있다면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뛰어난 삶은, 예수님 자신이 보여주신 것 같이, 돈도 명예도 권력도 아무 것도 없이 맨손으로, 빈 영혼으로 오직 하늘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믿음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역사를 이루는 일입니다. 이것이 가장 순수한 하나님의 아들의 영성이고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고 비우는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옛 성인들이 갔던 길이며 간디나 테레사 수녀 같은 현대의 성인들이 가고자 했던 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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