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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009.08.03 10:14

[2009.07.26] 영성의 일곱 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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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지석

"영성의일곱 단계"

(에스겔 36:26, 요한복음 14:15~18, 로마서 8:26)

 

2009.07.26

정지석 형제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 에스겔 3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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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 요한복음 14:15~18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 로마서 8:26

 

 

오늘은 크리스챤이 추구하는 영성을 주제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영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정의가 있습니다만 저는 우리 삶에서 체험하는 영성에 관심을 두고 싶습니다. 미국인 중년 부인이 병이 들어 고통이 심해지고 절망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글을 ‘God is nowhere!’ (하나님은 없다)라고 적어두었다고 합니다. 병문안 온 신심 깊은 딸이 어머니가 적어 둔 글을 이렇게 읽었다고 합니다. ‘God is now here!'(하나님은 지금 여기 있다). 에피소드지만 기독교인이 추구하는 영성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삶의 와중에서 ’지금 여기에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영성, 이것이 크리스챤이 추구하는 영성입니다. 성서의 인물들이 증언하는 영성이 하나님 체험의 영성입니다. 야곱은 집을 떠나 나그네가 되었을 때, 광야를 고독과 두려움 속에 헤매는 중에 체험한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야웨께서 과연 여기 계시었거늘 내가 미쳐 알지 못 하였도다’. 요나는 물고기 뱃속에서 체험했던 하나님을 증거하고 있고 여러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체험의 기록이 성서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계속되는 체험의 기록을 우리는 써야 합니다.

요즈음 영성을 갈구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습니다. 종교인들의 입에서만 높은 게 아닙니다. 국가를 비롯하여 학교, 시민단체, 심지어 기업에서도 영성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최근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월가의 엘리트들이 뼈저리게 반성하는 것이 ‘우리에게 전략은 있었지만 영혼은 없었다’는 것이라 합니다. 영혼 없는 이윤 추구에 대한 반성인데, 이런 반성이 영혼을 가진 이윤추구를 하려는 것으로 변화되는 징표라면 좋겠습니다. 기업에서도 영성을 추구하는 경향은 이윤을 잘 추구하기 위해서라도 영성이 필요하다는 각성이 일어난 것이라고 보고 싶습니다. 최근 들어 미국 경영인들에게 많이 읽히는 책으로서 <최고 경영인 예수, Jesus CEO>이라든지, <착한 기업이 성공한다>와 같은 윤리경영을 강조하는 책이 많이 읽힌다고 합니다. 물론 이런 편리주의에 따른 이상한 결합이 영성을 너무 세속화하는 것이 아닌가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기업 같은 이윤추구 집단도 존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영성에 관심을 가져야만 되겠다는 각성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정부 공무원들도 학교 선생님들도, 그리고 시민사회단체에서 사회변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도 영성을 갈구하는 목소리를 쉬이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영성의 갈구는 기존 삶의 방식대로 계속 살 수 없다는 반성의 표현이라고 봅니다. 이런 흐름은 다만 개인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이고, 삶의 전반적인 반성의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 사회에서 이런 삶의 반성은 요즘 다시 일어나고 있는 귀농운동에서 그 일례를 봅니다. 어제 한 중앙 일간지는 ‘흙에 살리라 4050 - 귀농하는 사람들’을 특집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기자가 인터뷰한 49세 된 가장은 귀농한 이유를 ‘늘 쫒기며 사는 도시생활에서는 영혼의 목마름을 채울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펀드매니저로서 고액의 연봉을 받으면서 서울에서 비교적 물질적으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살 의미를 찾지 못한 것입니다. 영혼의 갈증을 채우는 삶의 길을 찾아 삶의 전환을 시도한 사람입니다. 그동안은 먹고 살아야 한다는 당위적이고 의무적인 삶의 현실에서 살았다면 이제 어느만큼 물질의 풍요를 가지게 되었을 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찾는 생명 존재론적인 갈망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내면, 즉 영성의 추구에서 삶의 길을 찾고자 하는 이런 흐름이 어느 정도 시대흐름으로 형성될지는 모릅니다만 지난 세기의 물질문명에 대한 반성이 내면 깊이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라고 봅니다.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이러한 영성에의 갈구는 생명에 대한 진지한 각성에 기반한다고 봅니다. 잘 살아야겠다, 진정 행복을 느끼며 살고 싶다는 이런 갈망은 근본으로 들어가 보면,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잘 살아야겠다는 각성에 기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간관계를 전환해야 하고 자연 세계와도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관계를 가져야 겠다는 재각성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오늘날 다양한 방식으로 위기에 처해있는 생명에 대한 진지한 각성이 일어나는 이 흐름을 저는 생명영성의 부활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생명 영성은 생명의 근원자, 생명의 창조자요 뿌리에 기반합니다. 그러므로 창조자 하나님을 ‘오늘 여기서(Here and Now)' 체험하는 크리스챤의 영성은 생명영성을 추구하는 영성이며 오늘날 희구되는 영성의 갈망에 대한 답변을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영성에 대하여 오늘 저는 한 영성가와 그를 따르는 영성 그룹의 일곱 단계 영성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힐데가르트는 12세기 독일의 여성 영성가로서 오늘날 여성 생태주의 영성의 선구자로서 평가되는 사람입니다. 그는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 영성을 일곱 단계로 삼아 매일매일 삶에서 생명력을 기르는 영성을 수련하고 추구하도록 길을 제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신앙을 일상 삶 속에서 구현하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일주일간 창조행위를 하신 것처럼 7단계로 이뤄집니다. 영성 일곱 단계를 기초로 오늘날 크리스챤이 추구하는 영성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1) 첫째 단계가 마음의 회개단계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첫 단계는 회개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는 공생애 첫 선포 말씀이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회개는 잘못이나 죄를 반성한다는 윤리적 의미는 회개의 소극적 의미입니다. 본래 그 신앙적인 의미는 하나님을 등지고 살던 삶에서 다시 돌아서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잘못을 반성한다는 소극적인 것보다는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세상적 삶의 방식과는 전적으로 다른 ‘삶의 전적인 방향 전환’을 하는 것이 Repent Metanonia가 진정으로 의미하는 바의 성서적 회개입니다.

회개는 크리스챤 영성의 첫 단계입니다. 우리는 회개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며, 새 사람이 되며, 중생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바리새인 가운데 선한 사람이었던 니고데모에게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을 때 성령으로 거듭나는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삶으로 전적인 전환을 하는 일은 성령의 일에 속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함은 거듭나는 중생의 체험을 위해 바라고 기도하며 그런 삶을 갈망합니다. 이 일은 영성의 첫 번째 단계가 됩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새로이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증언함에 있어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으로 줄 것이다’라고 합니다. 회개하는 영은 새 영을 우리 속에 두는 것입니다. 새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받는 것입니다.

회개는 흔히 개인적인 영성의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집단적 사회적 전 지구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때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하나님은 개인 차원의 회개뿐 아니라 민족적 회개를 원하셨습니다. 개인이 회개하기 시작하면 자연히 집단적으로 회개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세대는 집단적 사회적으로 전적인 방향 전환이 요청됩니다. 전 지구적 생태계 위기는 개인의 삶의 전환으로만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 지구적 차원의 회개운동이 일어나야 합니다. 예를 들면, 2000년을 맞이하면서 세계교회는 세계적 차원의 회개운동으로서, 부채의 악순환 속에서 극심한 빈곤과 영양실조, 내란과 질병 등으로 죽어가는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등의 부채 탕감 운동을 선포하고 전개했습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고 21세기 인류사회가 새로운 평화와 생명의 시대로 시작하자는 교회의 회개운동은 서구 강대국의 정치인 경제인들의 마음을 움직여, 부분적으로나마 부채 탕감을 하도록 했습니다. 완전히 새롭게 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운동은 여전히 진행 중이라 하겠습니다. 요한바오로 2세는 2000년 카톨릭 교회의 잘못을 회개한다는 선언을 하고 이슬람과 유태교 등 그동안 종교적으로 갈등해온 종교들에 화해를 요청했습니다. 개인적으로뿐 만 아니라 사회적 전 지구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회개운동은 오늘 우리 시대에 크리스챤이 계속 추구해야 할 매우 긴요한 영성입니다.

 

(2) 둘째 단계는 선한 일을 꾸준히 할 수 있는 올바른 분별력을 갖는 영성입니다.
매일매일의 일상 삶에서, 오늘날처럼 진리가 혼란스런 속에서, 우리는 어떤 일이 선하고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인지, 어떤 것이 이웃을 사랑하고 사는 일인지 분별하는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오늘 읽은 성서를 보면 요한복음서를 고백한 요한공동체는 이 세상 속에서 진리를 분별하는 일이 참 어려움을 알았습니다. 예수가 이 세상에 계실 때는 그를 따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물론 예수를 따르는 일은 그때나 지금이나 쉬운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그래도 무엇이 진리의 길인가를 두고 고민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고 그의 뒤를 따라가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때, 고아처럼 남겨져 버렸을 때, 이 세상 속에 마치 목자 잃은 양떼같이 되었을 때, 진리의 삶을 분별하며 살아가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예수는 진리를 분별하는 일에서 당신을 대신하여 도와주시는 영을 보내주시는데, 이것이 보혜사 성령입니다. 보혜사란 말 뜻은 ‘도와주는 자’, ‘격려해 주는 자’ ‘변호해 주는 자’입니다. 신자들이 든든히 서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성령의 역사를 사도 바울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로마서 8:26). 보혜사 성령은 오직 이를 체험한 이들의 공동 증언이고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은 모두 보혜사 성령의 역사를 강하게 체험한 것으로 나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은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이를 예수께서 부탁하여 보내주신 것이라고 증언합니다. 보혜사 성령은 영원히 신자들과 함께 하시는 영입니다.

크리스챤이 추구하는 영성은 진리를 분별하는 영성 입니다, 교회의 영성은 보혜사 성령의 영성이 임재함으로 진리의 영성을 드러냅니다. 사도바울은 이 땅의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증언했습니다. 교회는 예수를 대신하여 이 세상 속에서 진리를 증언하는 보혜사 성령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선포하지 못하는 교회는 보혜사 성령이 떠난 교회입니다. 교회란 이름을 달고 있어도 사교단체요 친목단체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런 교회는 존속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서를 증언한 요한공동체, 즉 요한교회는 보혜사 성령과 함께 하는 체험 속에서 진리를 선포하고 믿음을 지킨 교회였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7절에 보면,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저를 능히 보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세상속에서 진리를 분별하며, 선한 일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자들 개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속에 거하시는 보혜사 성령의 도우심으로 우리는 믿음을 유지하며, 분별력을 갖고 선한 일을 지속합니다. 진리의 영을 유지하고 실천하는 영성, 이것이 영성의 두 번째 단계입니다.

 

(3) 셋째단계는 겸손하게 자신을 돌아보는 영성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예수님에게 기초합니다. 빌립보서 2장 3절에 사도바울은 예수의 겸손한 마음을 표현하기를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이라 했습니다. 겸손한 마음은 기쁨을 충만케 하는 마음이라 합니다. 자신의 일을 돌아보면서도 동시에 남의 일을 돌아볼 때 기쁨이 충만해 진다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비결입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겸손을 아래로부터의 영성으로 본 분들입니다. 인간을 뜻하는 homo란 라틴어 말은 흙이란 humus란 단어에서 파생되었고, 또 흙이란 단어에서 겸손한이란 뜻의 humilis란 말이 나옵니다. 겸손하게 살려는 사람은 자신이 흙으로 만들어진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본래 보잘 것 없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의 은총으로 고귀하게 된 것임을 인식함에서 신앙인의 겸손은 이뤄집니다. 자기를 스스로 자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면서 하나님은 필요 없다는 데에 이른 것이 현대인의 교만이요 거만함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언제나 맨 밑바닥으로부터 자신의 존재근거를 인식하는 아래로부터의 영성입니다.

겸손은 비굴함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앙드레 지드는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비굴한 굴욕은 지옥의 문을 연다’고 비유합니다. 겸손과 굴욕은 천국과 지옥의 차이처럼 큰 것입니다. 겸손은 스스로 하는 자발적인 영성이라면 굴욕은 억지로 강요된 수치요 비참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권세 있는 사람들일수록 겸손하기가 어렵습니다. 자기 힘을, 자기 능력을 과시하고 싶고 또 과신하기 때문입니다. 권세를 잡으면 하루아침에 바뀌는 사람을 우리는 종종 봅니다. 권세 잡은 이들의 겸손이 어느 때보다 요청되는 오늘입니다.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로마서 13장 1절 말씀은 권세 잡고 거만하여져서 제 멋대로 군림하는 이 세상 권세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권세이니 제 권세인냥 해선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종종 세상 권세에 복종하라는 말씀으로 사용되는데, 저는 권세자들이 하나님께 복종함으로 보통 시민들 앞에 겸손하라는 말씀으로 봅니다. 크리스챤들은 일상에서 겸손의 영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부닥치는 사람관계에서, 가정의 부부관계나 부모 자녀관계에서, 직장의 상하관계에서 권력의 영성이 아니라 겸손의 영성을 추구해야 합니다. 겸손은 절대자 앞에서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에게서 우러나오는 영성이요 삶의 태도라 하겠습니다. 요즘 적든 크든 있는대로 힘을 과시하는 사람들이 많은 우리 사회에서 특별히 요청되는 영성이라 하겠습니다.

 

(4) 넷째단계는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영성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 사람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사람을 사랑하는 영적 원동력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보통 이기적으로 사랑을 합니다. 자기 욕망을 만족시키려는 자기 사랑을 하게끔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남을 사랑할 때도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어거스틴의 말대로 이 세상에는 두개의 사랑이 있는데, 자기 사랑과 하나님 사랑입니다. 모두들 자기 사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욕망 충족을 위해 세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나 중심의 이기적 욕망의 사랑이 아니기에, 하나님 사랑의 기반에서야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을 통한 이웃 사랑에 이르는 영성을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늘 이기적 욕망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하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서 성령의 도우심이 있기를 늘 기도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사랑의 영성은 나를 중심으로 한 이기적 사랑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영성, 그리고 이 세계 사람과 만물을 향한 크고 무한한 사랑으로 진보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이 추구하는 사랑의 영성입니다.

 

(5) 다섯째 단계는 세속사로부터 거리두기를 하는 영성입니다.
너무 세속사에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 신앙의 은총을 기쁨으로 누리는 일에 장애가 됩니다. 두 가지 형태의 세속사 집착을 우리는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합니다. 하나는 세속사의 성패를 신앙의 성패로 직결시켜, 하나님 복을 세상 복과 같은 것으로 만들어버린 세속사 집착입니다. 세속적 기복주의 신앙은 신앙의 타락의 징표입니다. 신앙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받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신바 구하고 두드리라는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구하는 것을 모두 기복주의 신앙이라고 멀리하고 비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하는 것은 하나님의 복을 오직 세속의 욕망 충족이나 자기야망의 실현과 일치시키려는 경향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신앙을 기복주의 신앙이라 하여 우리가 경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기 때문에 세상사를 떠나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다만 우리가 세상사에 깊이 젖어서, 신앙의 품위와 판단력을 상실한 채 무한 욕망으로 치닫는 것을 늘 경계할 수 있는 내적인 자기 규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속과 거리두기의 영성입니다. 다른 한편, 세상에 대한 지나친 책임감도 세상에 종속되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구원하고 변혁시키는 사명은 예수께서 위임하신 본질적인 복음의 사명입니다. 그러나 세상에 대한 염려가 지나친 엄격주의가 굳어지는 것은 끊임없는 기도의 성찰을 통해 극복해가야 합니다. 또한 심신의 지침과 여전히 변함없는 세상의 문제들에 직면하여 세상에 대한 냉소주의나 비관주의로 빠지는 것도 유혹 중에 하나입니다. 이런 유혹은 우리에게 다른 형태의 세상 거리두기의 영성을 요청합니다. 심신을 쉬며 새로운 힘을 회복하는 휴식과 피정이 좋습니다. 제가 아는 퀘이커들은 세계 곳곳에서 평화운동을 하는데, 이게 몇 년 한다고 성과를 보는 것이 아니어서 지치고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일을 겪으면서 퀘이커들은 이들을 회복시키는 영성센터를 설치하여,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새로운 영성으로 회복하도록 돕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세속과 거리를 두고 자신을 회복시키는 영성센터가 있어야겠습니다. 세상 염려와 걱정으로, 세상을 핑계대면서 한탄하고 사는 것도 신앙인으로서 복된 삶의 모습은 아닙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고 선언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한계와 죄악의 상황에서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좋은 것을 즐기고 기쁘게 누리며 살기를 원하시는 분인 것입니다. 세상에서 거리두기 영성은 오늘 우리에게 세상 욕망과 집착으로부터는 초월의 영성이요, 세상을 선하게 변화시키기 위해 세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참여하는 역사내적 영성을 갖는 것입니다.

 

(6) 여섯 번째 단계는 순종하는 영성입니다.
세상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순종은 세상 악을 향한 불굴의 저항입니다. 하나님께 하는 이 순종을 목숨을 걸고 하는 것으로 순명(順命)이라 합니다. 명(命)은 하늘의 명령입니다. 그 명령에 순종하기에 순명입니다. 수도하는 공동체, 즉 수도원이나 수녀원에서 가장 중시하는 삶의 덕이 순명입니다. 수도자들은 공동체 형제들의 요구에 순명하고 스승과 공동체의 전통에 순명합니다. 이 순명의 태도는 공동체를 견고하게 유지하는 영적 힘입니다. 공동체를 경건하고 평화롭게 하는 이 공동체적 순명의 영적 뿌리는 우리가 하나님께 순명하는데서 나옵니다.

순명의 영성은 자칫 오해되기 쉬운 말이 됩니다. 공동체는 각성된 개인의 예언자적 비판의 소리를 통해 끊임없이 갱신되어야 하는데 자칫 순명하란 말이 예언자적 영성을 막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순명의 영성은 예언자적 영성과 갈등 관계인 듯 보여도 사실은 상호보완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자기 뜻에 거슬리면 소리치고, 공동체 안의 사랑의 연대감을 깨뜨리고, 불신이 싹트고, 파벌이 형성되어, 결국 공동체를 망하게 하는 것은 예언자적 영성과 거리가 먼 것입니다.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공동체는 차라리 망하는 것이 좋다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그 공동체는 하나님의 신앙공동체가 아니며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아니며,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예언자적 소리를 내는 것은 하나님께 순명하는 영성의 표현입니다. 이 목소리를 깊게 공감하여 들을 줄 아는 것도 순명의 영성입니다. 인간의 소리와 하나님의 소리를 분별력 있게 듣고 들어야 할 소리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자신의 뜻과 마음을 접고 순명하는 데서 공동체는 일치가 일어나고 영성이 깊은 능력의 공동체가 됩니다. 순명의 영성은 단순히 침묵하는 것이 아니요, 다른 이에게 자신을 열고 겸손하게 수용하려는 태도를 지키는 적극적인 침묵이요, 자신의 본래 뜻과 의도를 사랑의 하나님의 의지와 일치시켜 가는 것입니다.

 

(7) 일곱 번째 단계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영성입니다.
창조의 마지막 날, 새로운 창조를 위해 쉬심같이, 우리 신앙은 새 창조를 준비하는 것입니다. 새 창조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용서를 통해서 시작됩니다. 용서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온전한 일치에 들어갑니다. 용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원리입니다. 용서는 집나간 탕자를 맨발로 뛰어나가 무조건 받아들이신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용서를 통해 세계안의 부조리와 인간 사이의 악순환은 풀립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 인간은 자기 자신의 삶에서 결말나지 않는 문제를 하나님의 사랑에 맡기는 신앙에 이르게 합니다. 그런데 이 내맡김의 신앙이 수동적인 것 같으나 그 이상 적극적인 것도 없습니다. 포기 같지만 얻는 포기요, 낙관적 포기입니다. 자신을 하나님에게 열어두는 믿음의 최고경지라 하겠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쉬고 고요하게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세상 삶에서, 역사적 상황에서는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제 3자로서는 함부로 거론할 수 없는 말이 용서입니다. 그만큼 당사자들에게 민감한 말이며, 아픔과 상처와 분노와 희생을 겪은 사람들이 많고 현재에도 용서할 수 없는 일들이 여전히 진행 중입니다. 그러므로 입술로만 용서를 설교하는 일은 자칫하면 값싼 용서로 설교하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크리스챤은 용서를 증거해야 하며, 조건 없는 용서를 할 준비도 해야 합니다. 용서는 결코 값싼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 크리스챤에게는 무엇에 비할 수 없이 비싼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면서 용서를 하신 것이기에 그 값은 그 무엇보다 비싼 것 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는 능력을 부여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에 온전히 일치하는 영성이 일곱 번째 단계 영성입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성, 용서의 영성과 일치를 이루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영성의 일곱 단계는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평상시 신앙생활에서 늘 듣고 읽으면서 알고 있는 신앙의 길입니다. 특별하지 않은 신앙의 가르침을 특별하게 하는 것은 이를 일곱 단계 영성 수련의 지침으로 삼아 영성을 추구하는 삶을 노력하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생활주기에 맞춰 매일 매일 되새기면서 영성을 추구해 온 사람들이 오늘 이 세계에는 존재합니다. 일곱 단계 영성의 길이 오늘 우리의 영성 생활에 도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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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2009.05.17] 또 다른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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