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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009.09.10 07:35

[2009.05.10] 이렇게 배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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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안인숙

"이렇게 배웁니다."

(마가복음 4:3~8)

 

2009.05.10

안인숙 자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 마가복음 4:3~8

 

 

이렇게 마루에 앉아 예배를 드리는 것이 얼마만인지요. 우리교회가 잠시나마 옛스런 형편으로 예배를 드리는 기간에 제가 여러분 앞에 선 것을 저는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 대한 기억 중에서, 교회에서의 학생회 시절을 빼놓을 수 없을 만큼 교회는 저를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대학시절에는 교회출석에 소홀했으나, 대신, 학교에서 기독학생회 일원으로 무의촌진료활동 등을 했습니다. 결혼하여 자녀를 낳고 그들을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양육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들은 저 처럼 교회에서 유초등부, 중고등부를 거치며 자랐고, 지금 그들은 성인으로서 진지한 기독교인들이 되었고, 새길교회를 다니는 부모인 저희 부부를 오히려 염려하는 보수교인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지난 수 십 년간 교회를 나름대로는 착실하게 출석하였습니다. 교회에서 교사도 하고 성가대에도 참여하고, 여선교회, 교육위원회, 선교위원회 등의 일을 감당했지요. 교회에 다니면서 이해가 안 되는 교리나 말씀들은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종교란 원래 도그마이다.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 즉 믿음이 있으면 갈등이 없다. 그러니까 믿음의 문제이다'라고요. 문제의식을 갖는 것이 허용되지 않으니까 어떻게든 합리화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하는 동안, 같은 개신교라도, 같은 한국교회인데도, 한국에 있는 교회와 미국의 한인교회의 문화적 차이를 느꼈습니다. 또한 미국 안에서도, 한국인교회나 서로 다른 인종들의 교회의 문화적 차이도 있지요. 오죽하면, 미국에서 인종적 나뉨이 가장 두드러지는 날이 일요일이라고 했을까요. 이런 문화적 차이를 보면서, 종교가 지리적인 한계에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보며 내가 가진 기독교신앙이 기독교 모습의 전부가 아닐 수 있고, 지리적인 여건 뿐 아니라 민족 혹은 인종이나 시대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즉 같은 성경을 보아도 그것을 해석하거나, 실천하는 방법은 한 교회가 위치한 사회의 문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면서, 종교 간의 차이 역시 이런 지리적인, 사회적인, 역사적인 영향 아래 놓이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와보니, 제가 어려서부터 익숙해 있던 교회문화도 달라져 있었습니다. 사회가 변모하니 교회도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대부분 많이 윤택해졌고 세련되어 졌습니다. 양적으로 성장한 많은 교회는 더 이상 가족과 같은 친밀감을 느낄 수 없기도 했습니다. 그 때 제가 다니던 감리교회는 그리 큰 교회가 아니라서 그런지 그런대로 교우들의 친교가 잘 이루어지는 교회였습니다. 이런 일을 보았습니다. 신년에 신임 집사와 권사 등을 임명하는 자리에서, 임명받는 사람들에게 그 가족들이 꽃다발을 준비하여 증정하는 모습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해졌습니다. 하나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하는 순간이, 오히려 그 임명을 축하할 일로 여기는 것처럼 제 눈에 비쳤습니다. 임명식에 꽃다발을 주고받는 일이 하나의 문화로 자리를 잡은 것 같았습니다. 신앙이 문화나 관습이 된다면 좋은 면도 있고 부정적인 면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문화의 힘은 강력하여, 반복하다보면 판단력을 잃게하고 내재화됩니다. 내재화된 생활양식은 역으로 우리의 행동이나 가치를 좌우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보다 사람들끼리 서로를 영광스럽게 하려는 경향은 어느 교회집단에서나 있겠습니다만 본말이 전도되는 정도라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교회의 직분을 얻기 위해 교회에서 봉사, 헌신, 예배드리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습니다. 이런 장면은 제가 기성교회를 미련없이 떠나게 했던 이유 중의 아주 작은 하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니던 교회의 목회자는 행정가이며 사업가 같았습니다. 설교말씀을 위해 공부하지 않고, 외양적 거룩함에 집중하는 그 목회자의 한결같은 설교에서 도전을 받거나 감동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무언가 답답함을 안고 생기없는 교회출석을 하다가, 새길교회가 창립 15주년을 맞는 시점에, 신문보도를 통해 새길교회를 알게 되었을 때, 저는 호기심이 발동하였습니다. 새길교회의 첫 인상은, 목회자가 없는데도 예배의 분위기는 엄숙하고 진지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배형식이나 내용면에서 다른 점이 생소하기는 하였지만요.

 

새길교회에서 저는 참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첫 번째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매년 봄․가을로 이어왔던 신학강좌를 정말 즐겁게 들었던 일입니다. (올해에는 예배처소 사정으로 실행되지 못함이 무척 아쉽습니다.) 지난 날, 성경을 늘 가까이 두어 많이 읽고 문자 그대로 믿으려고 했던 저는 신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던 상태라, 이런 지식획득의 기회는 제게는 천지개벽하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그 내용들을 다 이해하고 더 깊이 탐구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저는 신학적인 기본 지식이 일천했으니까요. 사십 여 년 간 교회에 출석하며, 설교가운데 이런 신학적 연구에 대해 한 번도 들려주지 않았던 많은 목사님들을 생각하며, 그저 회의없이 받기만 했던 수동적인 자세가 바른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 수도 있다고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오래 나의 이성은 기능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미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는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물론 그것에 책임을 묻는다면 제 자신도 그리 자유롭지는 못하겠지만요.

신학강좌의 주제는 매 회 달랐으며, 매우 신선하고 흥미로웠습니다. 몇 가지 들자면, 바울신앙과 신학, 평화신학과 사상, 타종교 즉 불교 혹은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관계에 대한 이해, 신약과 구약성서의 새로운 이해, 생명신학,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통해본 기독교사상 등 각 주제별로 탁월한 견해를 가진 전문가들을 모시고 아무데서나, 그리고, 자주 들을 수 없는, 한 신학교에서도 골고루 다 들을 수 없는 신학의 진수들을 들을 수 있었음은 새길에서만의 특권이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빠짐없이 들으려했습니다. 잘 알 수 없으니 질문을 할 수도 없었으나 점점 제 자신의 신앙이 변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가 가졌던 기독교 신앙 바탕이 서서히 뿌리부터 뽑히우는 듯 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가랑비에 옷이 다 젖는 격이랄까요.

 

말씀증거를 통해서도 많이 배웠습니다. 외부에서 오시는 말씀증거자들은 새길공동체 속에서 비로소 정말 하고픈 말을 한다는 듯이 귀한 말씀들을 하셨고, 공동체 내에서 평신도로서의 교우들의 말씀증거 또한 참 귀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갈등을 일으키는 면도 많았습니다. 가장 깨닫기 힘든 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해석이었는데, 이것은 사실 아직도 쉽게 정리할 수 있는 주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새길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들도 귀에 설었습니다. '역사적 예수', 혹은 '예수따르미' 등의 단어들도 그 정의가 아직 심리적으로 수용되지 않은 상태에서, 역사적 예수에 대해 선선히 인정한다거나 예수따르미의 본분을 다하자는 등의 어귀를 사용한다는 것은 수월하지 않은 일이었지요. 그러자니, 전에 가졌던 기독교교리 주변의 지식을 버릴 수도 없고, 새로 택한 교회에서 회자되는 개념들도 체득되지 않는 엉거주춤 상태가 꽤 오래갔습니다. 그래서 새길공동체에 한 일원이 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계속 배워야겠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읽기가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전에 이해하던 방식은 이제 저에게 더 이상 깨달음을 주지 못하고, 그렇다고 이렇게 읽어라하는 분명한 조언을 구하기도 쉽지 않으니, 성경이 저의 생활에 안내자 역할을 하며 신앙고백의 기준이 되는 것으로부터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주일날 교회오는 일이 즐거웠습니다. 그만큼 새로움에 대한 목마름이 컸던 모양입니다. 저는 교우들을 통해서도 배웠습니다. 자신의 신앙은 매우 다원적이지만, 생활은 수도자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교우, 말없이 교회를 뒤에서 섬기는 교우, 어느 때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설거지 도우미로 자원하는 교우, 새길교회를 위하여 새벽에 깨어 기도하는 교우, 먼저 와서 몸으로 뛰며 예배를 위해 준비하는 교우 등등 기존교회에서도 있는 똑같은 행위이지만, 그들이 새길의 식구라는, 새길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 사람을 바라보는 눈을 다르게 했습니다.

 

새길교회는 여성인 저에게는 양성평등적인 관점, 그것이 그저 관념이 아닌 현실에서 경험해 볼 수 있는 장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새길공동체가 완전한 양성평등이 실현된 곳이라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만, 적어도 그와 같은 가치가 부분적으로나마 존중되고, 실현하려는 노력들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여성신학이라는 말을 처음 듣고 혼돈이 일기도 했으나, 여성주의적 관점으로 성경을 읽을 수도 있겠다 생각하니 성경에 대한 도전이 다시 생기기도 하였습니다. 배우기만 하면 좋겠는데, 등록하고 3년가량이 되니 운영위원이 되라고 합니다. 당혹스러웠으나 정말 배운다는 심정으로 참여했고 2년간은 다른 교우들께 미안했지만, 베풀기 보다는, 조금씩 배워갔습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친교부장을 하라고 하시더군요, 친교부장은 구성원들을 잘 알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형성해야 하는데, 저의 성격은 그렇지 못해서 정말 심적으로 어려웠습니다. 한가한 시간이 나면 친구에게 전화해서 대화를 나누기 보다는 혼자 집에서 지내는 걸 좋아하고, 사람만나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인데, 부담감을 꾹 누르고, 그저 선배되시는 형제자매들의 권유에 순종한다는 자세로 임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교우들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예배가 끝나서 마음속으로 점검하면 교우 중 누가 오늘 오시고 또는 오시지 못했는가 알 수 있게 되었으니, 그동안의 훈련이 헛되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금년부터는 새로운 친교부장을 모시고 부원으로 활동합니다.

 

새길교회에 8년째 출석하면서, 교회의 일원으로 한 부분을 맡으면서, 교우들과 더 가까워지고 교회에 대한 애정도 커졌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깨닫는 것은 교회는 교회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연스럽게, 저는 제가 떠나온 기성교회에서 배운 것을 돌아보았습니다. 열심히 성경을 읽던 일, 성경말씀을 읽으며 꿀송이처럼 달게 느껴, 외우고 싶은 구절은 카드를 만들어 집 여기저기에 붙여 놓던 일, 눈물 흘리며 기도하던 일, 열심히 찬양하던 일, 찬송가를 1장부터 맨 끝에 있는 아멘송까지 다 불러보던 일, 주일 아침에 기쁜 마음으로 교회를 향해 40~50마일을 질주하던 기억 등등. 이러한 기독교인의 일반적인 행위들이 지금의 저를 형성했었었는데, 그것이 다시 소중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신앙인이라면 주일성수하여 예배드리고, 정성스럽게 헌금하고, 마음을 담아 찬송을 불러야할 것 같습니다. 이런 행위들은 형식입니다. 의식입니다. 제사행위입니다. 이런 ritual은 어느 종교나 다 있습니다. 가정이나 집단에도 있지요. 그러나 형식이라고 해서 다 의례적인 것은 아닙니다. 형식 속에 내용을 담는다면 매우 소중한 유산이 될 것입니다. 때로는 형식이 내용을 앞설 수도 있습니다. 피곤하고 귀찮아서 교회를 빠지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교회에 나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교우들과 친교의 시간을 나누는 것이, 지나고 보면 더 좋았던 것 같습니다.

저는 이제 다시 전에 훈련받았던 기억을 살려 성경을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삶 속에서 기도와 찬양의 습관을 되찾아야겠습니다. 본문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씨앗이 되어 다양한 성질의 땅에 떨어지는데 옥토에 떨어질 때 삼십배, 육십배, 백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사람의 마음밭이 옥토가 되어 많은 결실을 맺는 일은 단 번에 오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살아 온 세월 속에서 저의 마음밭이 때로는 길가와 같거나 돌짝밭일 때가 있었다고 봅니다. 제가 오랜 세월동안 교회를 다니며 옥토라고 생각했으나 돌이켜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성경말씀이 가슴에 다가오지 않을 때 제 마음밭은 돌짝밭과 같았을 것입니다. 옥토는 여러 형태의 마음밭을 겪고 거치면서, 갈고 또 갈아서 올 수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을 통해서, 또는 성경을 해석한 많은 신학적 지식을 통해서, 주변의 친지나 교우들을 통해서 저의 마음밭에 뿌려집니다. 많은 결실을 맺는다는 것이 물질적으로 부유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마음이 풍요로워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커지는 것,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마음, 자신을 존중하되 이웃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는 것, 자신의 삶을 만족스럽게 받아들이는 태도 등이 그런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지금의 저의 회심은 결코 원점으로의 회귀가 아닙니다. 새길에서 배운 좀 더 나은 가치, 즉 종교와 사회의 다원화, 양성평등적 사회의 추구, 새로운 시각에 의한 성경 이해, 수평적 사고방식에 의한 인간 이해, 하나님에 대한 이해, 예수와 성령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신앙의 근간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새길에서 열리는 여러 신학강좌나 포럼, 세미나 등의 기회는 새길교회 밖으로 활짝 열려있지만, 우선은 우리 새길의 식구들을 위해서 베풀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새길의 식구들이 최대의 수혜자입니다. 창립 1세대들이 언제까지나 우리의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이 주는 것만 받아 먹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새길의 정신을 이어나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교회다운 새길, 새길의 창립취지를 이어나가는, 대를 잇고자하는 의지가 있는, 공동체가 되지 않는다면 새길을 모색한다는 노력이 지속가능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전통을 지키며 새길의 정신을 잇기 위해서 저는 계속해서 배우는데 열심을 내고 싶습니다.
공동체를 한 인격체로 상정해 볼 때 그 여정이 때로는 씨앗을 싹 틔우지 못하는 길가일 때도 있고, 때로는 어려운 시대상황에 영향을 받는 돌짝밭이나 가시덤불 밭일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어려움들 속에 견디어 내려는 힘이 있다면, 옥토가 되리라 믿습니다. 그렇게 함으로 새길공동체는 옥토를 향해가는 새길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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