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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홍순택

"산 자를 위한 죽음"

(시편 39:4-7)

 

2007.11.25

홍순택 형제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 시편 39:4-7

 

 

지난 월요일과 화요일 밤 갑작스런 함박눈이 쏟아졌습니다. 저희 집이 있는 경기 북부 지역에는 발목까지 빠지는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게다가 기온까지 많이 내려가서 며칠 동안 눈이 녹지 않아 마치 한겨울 속으로 갑자기 들어온 듯한 느낌을 주었습니다. 딴 세상에 와 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짧은 제 인생의 기억으로는 11월 중순에 이렇게 눈이 많이 내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하얀 눈과 추운 날씨는 세월을 한 달이나 훌쩍 앞당겨놓은 것처럼 느끼게 했습니다. 마치 어디 추운 겨울을 보내고 있는 마을로 여행을 떠나온 것 같은 느낌도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남은 11월 말과 12월 초의 세월을 순식간에 건너뛰어 12월 말 성탄절 즈음으로 시간이동을 해 온 것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그다지 춥지 않고 달력도 11월인지라 겨울이 곧 온다는 것을 생각만 하고 실감은 하고 있지 못했던 저와 제 아내는 겨울 준비를 위해 이것저것 점검하기 시작했습니다. 집주인에게 얘기하여 보일러의 낡은 부품도 교체하기로 했고 아내의 장갑도 하나 사기로 했습니다. 아이의 겨울 내복도 몇 벌 더 사야겠다고도 마음먹었습니다. 고마운 눈이었죠. 닥친 김에 월동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니 말이지요.


살다보면 이처럼 곧 다가올 것을 알고 있지만 막상 닥치기 전에는 전혀 대비치 못하는, 생각지도 못하는, 나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양 여기는 일들이 종종 있는 것 같습니다. 제게는 새길이야기 원고 마감일이 그렇습니다. 다음번 호에는 미리미리 잘 준비해서 넉넉한 시간을 갖고 취재하고 원고도 써야지 하는 생각을 14번 했지만, 정작 그렇게 실천했던 적은 두세 번 정도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다른 필진들게 원고 독촉을 하는 저 자신의 원고가 정작 맨 마지막, 그것도 출판 임박해서야 나오게 되는 경우가 태반이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그런 것들이 한둘 쯤은 있으시겠지요? 전 좀 많습니다만.

그리고 이런 것들 중에서 모든 인류에게 해당되는 공통의 것은 아마도 죽음이 아닐까요? 이번 11월 들어서만 제 가까운 인척 두 분이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수목들이 겨울을 준비하며 잎을 떨어트리는 계절이지요. 그래서인지 저는 어느해 가을보다 ‘죽음’이란 것을 좀 더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생각을 벗어나지 못해 오늘 말씀증거를 준비하게 되었구요. 게다가 지난 금요일은 저희 외할머니의 10주기 추도일이었습니다. 예년에는 외할머니 다니시던 교회의 목회자 분을 모셔 추도예배를 드렸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아들처럼 외할머니를 모셨던 사위인 저희 아버지께서 예배를 간단히 준비해서 드렸지요. 그런데 어제는 이도저도 사정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찌어찌하여 제게 숙제가 떨어졌습니다. 추도예배 준비해라.

죄송스럽게도 오늘 제가 준비한 말씀증거는 바로 그 숙제의 재활용입니다. 말씀드리는 내용은 제법 다르긴 하지만 같은 시편교독, 성서본문, 같은 말씀증거 제목, 같은 찬송을 목요일에도 사용했고 오늘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재활용 말씀증거를 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그날 추도예배는 이렇게 진행되었습니다. 함께 찬송가 뒤의 교독문 하나(시편 139편)를 읽고 외할머니께서 생전에 즐겨부르시던 찬송가 23장을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오늘의 성서본문을 함께 읽고 제가 짧게―5분 정도, 오늘은 그보다 길겠습니다만― 말씀증거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말씀증거 후 부를 찬송 434장을 부르고―434장은 저희 집안의 대표찬송이라고 할 수 있는 곡입니다. 저희 집안내 사람의 혼인예식 끝―기독교예식으로 진행될 경우―에는 꼭 이 찬송이 불려집니다. 제 부모님 혼인예식 때도 그랬고 제 혼인예식 때도 그랬습니다. 또 장례예식의 마지막에도 마찬가지이구요― 마지막으로 각자 외할머니와의 인연과 기억 남는 일을 떠올리는 묵상의 시간을 갖고 주님의 기도를 드리며 마쳤습니다.


금요일 저희 외할머니 추도예배 자리에 모인 식구들은 돌아가신 외할머니의 1대 후손, 2대 후손, 그리고 3대 후손들이었습니다. 1대 후손들이야 말할 나위 없이 참석하셔야 했지요. 저를 포함한 2대 후손들은 여든 넘게 건강하게 장수하신 외할머니 덕에, 더욱이 가족이건 가족 아니건 가리지 않고 특히나 정이 많으셨던 외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은 덕에 두세 시간 걸리는 길을 마다않고 추도예배 자리에 모이기를 주저하지 않는 가족들이셨습니다. 그런데 이분들 중에 절반은 교회를 다니시지만 절반은 소싯적 경험으로만 교회를 다니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하나 좀 더 고민에 빠졌습니다.

며칠을 고민하다 이런 내용의 말씀을 드리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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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종교들은 죽음을 더 잘 치루기 위한 의례, 죽음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의례들을 다 갖고 있습니다. 의례뿐만 아니라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게 문득 든 생각은―물론 다른 분들도 누구나 다 하시는 생각이겠지만― 죽음을 더 잘 치루기 위한 의례,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의례, 죽음과 죽음 이후의 세상에 대한 이야기들 모두가 죽은 자를 위한 것이기도 하겠지만 남아있는 산 자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죽은 이에게는 이미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지나간 일이 죽음이겠지요. 그리고 뭐 천국이든 지옥이든 또는 윤회이든, 분해되어 대자연의 흐름으로 흩어져 들어가든―그 중 어떤 것이 맞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이제는 자동적으로 그 흐름에 따라 흘러갈 뿐이겠지요. 그리고 이미 죽은 분들이 억울함이나 아쉬움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모든 존재의 어머니인 하나님 또는 하느님 또는 궁극적인 실재 또는 대자연의 품속으로 들어가서 평안을 얻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아무튼, 문제는 죽음의 감정을 느끼고 고통을 느끼고 죽음의 의미를 묻는 남아있는 자들, 산 사람들이겠지요.

그래서 오늘의 추도예배는 이런 자리가 아닐까 합니다.

1. 제일 먼저 돌아가신 우리들의 어머니, 할머니를 기억하는 자리이겠지요. 나와 맺어진 아름다운 인연을 떠올리는 자리이겠지요. 어찌보면 우리 인간은 고해(苦海)와 같은 인생 속에서도 그런 아름다운 기억들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이 자리는 외할머니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그 기억들을 되살리는 따스한 시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에요. 그런 점에서 외할머니께서 그분의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겠지요. 그분의 죽음은 이런 면에서 우리 산 자들을 위한 것이겠지요. 가정에서 유교식으로 제사를 드릴 때 요즈음은 보통 3대봉사를 합니다.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함께 살아 공존하며 서로 정을 직접 주고받을 수 있었던 윗대 조상들께만 제사를 드리는 것이지요. 그러기에 제사는 우상숭배도 아니고 비과학적인 허례허식도 아니고 추모와 기억의 장, 감사의 장인 것입니다. 추도예배라고 다르겠습니까.

2. 둘째로 외할머니의 죽음을 기억하며 가족들, 친지들이 모였습니다. 요즘 세상에는 설날과 추석 등 일 년에 겨우 한두 차례 모이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민족 고유의 명절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저녁 퇴근 후 늦은 시간에, 오는 데 몇 시간 가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릴 텐데도 이곳에 모였습니다. 우리들의 어머니, 우리들의 할머니께서 우리에게 주셨던 사랑 때문에, 많은 가족들이 모였습니다. 그분의 죽음이 남아있는 가족들의 우애의 끈을 두텁게 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신 것이지요. 외할머니께서 선물해주신 우애의 시간입니다.

3.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오늘 읽은 성서의 말씀과 연결되는 것인데요. ‘죽음’을 기억하며 모인 오늘 이 자리는 죽음의 시간, 그날이 언젠가는 내게도 다가올 것이라는 것을 떠올리는 자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난 그 순간만큼 살아있는 자들이 죽음의 문제와 직면하게 되는 계기, 인간 전존재를 흔드는 계기는 아마 흔치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이겠지만 그런 죽음의 순간, 죽음의 문제와 직면했던 순간들을 다시 기억하면서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생을 성찰하면서 내 삶의 욕심과 거품들을 닦아내는 정화의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외할머니 추도 예배 때마다 호흡이 끊어지신 외할머니를 업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던 일, 외할머니의 시신을 염할 때 염을 도우며 싸늘해진 외할머니의 시신을 만졌던 일이 계속 생각이 납니다. 제게는 이 날이 ‘죽음’의 순간, ‘죽음’ 그 자체를 매번 진지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기에 외할머니의 죽음을 기억하는 이 날은 바로 제가 죽음을 생각하는 날이고 외할머니의 죽음은 바로 저같은 산 자를 위한 죽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뭐, 이런 내용의 말씀을 드리고 참석한 가족들이 함께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기억하는 묵상 시간을 갖고 주님의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마쳤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습니다, 예수 믿어야 죽어 영생을 얻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외할머니의 죽음을 기억하는 자리를 빌어 어설픈 포교활동을 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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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먼 곳에 있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늘 우리와 함께 이 세상을 걷고 있는 동반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죽음을 가장 먼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던 것은 초등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그때 제 친할머니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매장하는 장례를 보고 집에 왔는데 그로부터 한동안 자려고 누우면 내가 매장을 당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오래된 한옥집이었고 저는 겨울이 아닌 한 마루에서 잠을 잤는데 그 높은 천장의 높이만큼 깊이 매장당하는, 제 얼굴 위로 흙이 떨어지는 꿈을 종종 꾸었습니다. 꿈 속에서도 아, 이렇게 죽어 매장당했다가 땅 속에서 다시 살아나면 어떻게 파헤치고 나갈 수 있을까, 얼마나 답답할까 등등의 참으로 어린이다운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후 한동안 죽음은 제 삶에 밀고 들어올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다 대학을 다니던 어느날, 성수대교가 끊어지는 사고가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저는 누나 학교 근처인 구반포에서 누나와 함께 자취를 하고 있었고 주중이나 주말에 집에 갈 일이 있을 때 종종 성수대교 위를 지나는 29번 버스를 타곤 했었습니다. 참사 소식을 들으며 아, 내가 떨어질 수도 있었겠구나, 죽음은 먼 곳, 먼 훗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팔짱을 끼고 길을 걷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죽음은 우리 주변에 넘쳐납니다. 한 발자국을 어디로 옮기느냐에 따라 죽음과 삶이 갈리기도 합니다. 생명과 공존하는 것이 죽음이 아니겠습니까.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성서에는 ‘죽음’이란 명사형이 새번역의 경우 150여 회 나오지만 거의 대부분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 대결하여 승리하길 원하는 것, 원수와도 같은 것, 어둡고 무서운 것 등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성서의 말씀에서는 죽음의 위협에 직면한 신앙인이 오히려 그 위협에서 단지 벗어나기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워하기만 하고 원수로 여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불순물들을 정련해내는 정화의 시간이 되기를 기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새번역으로 다시 한 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새번역>

4“주님 알려 주십시오. 내 인생의 끝이 언제입니까?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습니까? 나의 일생이 얼마나 덧없이 지나가는 것인지를 말씀해 주십시오.”

5주님께서 나에게 한 뼘 길이밖에 안 되는 날을 주셨으니, 내 일생이 주님 앞에서는 없는 것이나 같습니다. 진실로 모든 것은 헛되고, 인생의 전성기조차도 한낱 입김에 지나지 않습니다. (셀라)

6걸어다닌다고는 하지만, 그 한평생이 실로 한오라기 그림자일 뿐, 재산을 늘리는 일조차도 다 허사입니다. 장차 그것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7그러므로 주님,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내 희망은 오직 주님뿐입니다.” 이 시편은 전통적으로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며, 또는 후일에 그 당시를 기억하며 쓴 노래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전통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찌되었든 시편 39편 기자는 “인생 뭐 있어?” 하는 깨달음을 허무주의나 쾌락주의로 연결시키지를 않습니다. 그렇다고 언제 끝날지 모르는 짧은 인생 서둘러 무언가 업적을 쌓아 이름을 남겨 보자며 더 인생을 몰아세우지도 않습니다. 제가 느끼기에 시편 39편을 쓴 이는 죽음의 얼굴을 대면하고서 겸손과 비움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욕심을 버리는 길을 발견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주님 알려주십시오. 내 인생의 끝이 언제입니까?”라는 질문에서 엿볼 수 있듯이 죽음을 적, 원수로 여겨 두려워하고 미워하고 격멸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으로 여기고 인생의 욕심과 자만을 벗겨낼 수 있는 수행의 나침반으로 삼는 것 같습니다.



영하의 날씨도 겪고 눈도 내리고 하다 보니 나뭇잎들도 이제는 거의 남아있질 않습니다.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며 상실, 끝남, 죽음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되는 것이 요맘때인 것 같습니다. 차라리 한겨울이라면 이런 생각이 잘 들지 않을런지 모르겠어요. 이런 소위 철학적인 질문들, 감상이 많이 생겨나는 것은 우리 눈 앞에서 떨어지는 낙엽을 볼 수 있는, 우리 살로 추위를 느끼기 시작하는 요즈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가을의 끝자락입니다. 죽음의 계절 겨울로 들어가는 문턱입니다. 우리 인생의, 아니 이 세상 모든 생명체의 평생 동반자인 죽음이 가진 어둡고 깊은 풍부함을 외면하지 않는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낙엽을 떨구는 나무들처럼 내 인생의 거추장스런 것들을 떨궈내며 이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이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들 잘 아시는 시, 김현승 시인의 「가을에는」을 읽어드릴께요.



가을에는


김현승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落葉)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謙虛)한 모국어(母國語)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肥沃)한

시간(時間)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百合)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기도 드리겠습니다.


생명과 죽음의 주인이신 하나님. 죽음을 우리 생명의 동반자로 받아들일 수 있는 지혜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겸손하게, 욕심 없이 살게 하여 주옵소서. 겸손과 무욕(無慾)에서 우러나는 사랑과 자비의 향기를 풍기게 도와주옵소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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