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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만자

"근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갈라디아서 3:28)

 

2007.08.05

최만자 자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 갈라디아서 3:28

 

지금 우리는 아프간에 억류되어 있는 한국청년들의 무사귀환을 하루하루 애타게 기다리며 보내고 있다. 두 사람의 희생자에 대한 비통함을 말할 수 없지만 제발 더 이상 희생 없이 그들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원하고 있다. 성서 아모스서에 보면 하나님이 열방을 심판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심판은 하나님과의 계약관계를 기준으로 하지만 다른 이방나라들의 심판은 ‘인도주의’를 기준으로 심판하고 있다. 지금 인질을 억류하고 있는 탈레반이나 인질석방을 위한 수감자와의 교환을 거부하고 있는 아프간 정부와 그 배경 세력인 미국은 모두 인도주의의 기준에 의해 심판받아야 할 태도들을 취하고 있다. 지금은 모든 것에 우선하여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인질석방에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여러 측면으로 한국 기독교와 현 세계의 흐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해야 할 것만 같다. 그동안 이번 사건에 대한 몇 여론들(인터넷을 통한)을 살펴보았더니,

첫째로, 많은 사람들이 한국 기독교가 그동안 펴 온 선교정책이 변화되어야 함을 지적하였다. 선교가 개 교회 중심적이며 산발적이고, 또한 선교에 대한 진지한 성찰 없이 피 선교지의 문화와 언어에 대한 이해도 제대로 하지 않고 매우 자기중심적이라고 비판하였다.

둘째로, 한국 기독교의 선교 태도가 매우 오만하여 상대편에게 상처를 주고, 거부감을 주고 적대감을 심기도 한다는 것이다. 문화적 우월주의에 빠져서 특히 동남아 지역 선교에서 상대지역을 무시하고 한국 기독교를 이식(implant 식)하는 방식의 선교를 한다는 점이 비판되었다.

이는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기업이 동남아 지역으로 퍼지면서 저질렀던 횡포의 형태와도 유사한 것으로 대상지역으로부터 상당한 거부감을 일으켰을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망신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대량화하여 물량적 위협을 가하는 횡포를 저지르고 있음도 비판적으로 지적되었다. (인터넷에서는 여기서 지난 해 아프간 수도 카불에 1,000명이 넘는 한국교인들이 ‘평화행진’을 하는 대형집회를 했는데 이것도 반 기독교 정서를 유발한 요인으로 지적하고 있다.)

세 번째로는 한국의 파병이 한국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한국의 보수 기독교 집단이 국익을 위해 파병을 부추기면서 광화문 앞에서 대형 집회를 열고 미국의 파병 요구에 크게 동조하였는데 그래놓고 선교라는 이름으로 그 곳에 갔을 때 거기서 안전을 바랄 수 있겠는가 라는 것이다. 곧 파병 동조가 한국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의 한 원인이 됨을 알고 반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모든 지적들이 타당하다고 생각하면서 한국교회는 이 차제에 자신을 철저히 돌아보고 잘못된 선교행위를 반성하며 방향 전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를 더 근원적으로 보면 이런 사태는 아프간 탈레반과 이들을 테러리스트로,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는 미국의 날카로운 대립구조가 그 근원이라고 본다. 이는 세계적으로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근본주의 사상에 근거한 세력들 간의 다툼이며 한국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이에 편승되어 있다. 지금은 세계가 이 ‘근본주의 사고의 횡포에 고통 당하는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이 근본주의 사고를 넘어서는 세상을 구축해 나가는 노력이 우리 모두에게 절실히 요청되고 있다. 고 안병무 선생님은 한국 기독교의 평생과제가 근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생전에 늘 말씀하시던 것이 생각난다.


지금 세계적으로 팽배해 나가고 있는 근본주의의 특성은

― 현재 당면하는 위기의 문제들을 해결하는 길은 자신들이 절대적 진리라고 믿고 있는 근본적 진리에 의해 철저히 개혁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 개혁에의 강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

― 근본주의자들은 매우 활동적이고 공격적이며 자신들이 설정한 도덕과 이상적인 규범들이 도전 받으면 반 신앙적이라고 규정하면서 악이요 사탄의 세력이며 사탄의 역사라고 정죄한다. 부시가 몇 나라들을 ‘악의 축’이라고 운운하는 표현 방식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 이슬람 근본주의는 이런 특성을 가지고 반 서구, 반 제국주의, 그리고 미국의 헤게모니에 반대한다는 기치를 내세우고 배타적인 민족주의 담론을 형상하고 있다. 이들에게 타협은 없으며 단순한 확신에 확고히 선 극도의 배타성을 갖고 있다.


기독교 근본주의는 1800년대 말 미국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세계가 급격히 산업사회로 이행되면서 이전의 가치 기반들이 흔들리고 새로운 사회 문화의 변화가 일어났고 이에 자기 신념에 대한 도전에 위협을 느끼면서 그런 도전들을 이단시하고 악으로 규정하고, 기독교의 근본을 절대 고수해야 한다는 신념을 확고히 하면서 전개되었다.

개신교 근본주의는 5대 강령 고수를 근본신념으로 확고히 한다.

① 성서는 무오하다. ②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 ③ 예수의 속죄를 믿는다. ④ 예수의 부활과 재림을 믿는다. ⑤ 기적의 정통성을 믿는다.

특히 성서무오설을 가장 중요한 무기로 내세우며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성서를 해석하는 것에 근거하여 판단한다.

근본주의자들은 강한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으며 종교적 순수성, 정통성을 내세우고 다른 것을 모두 악으로 간주하여 타협, 대화, 불용의 극단적 배타성을 가지는 것이다. 무엇보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이에 근거하여 모든 것을 판단, 규정하기 때문에 생활 속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게 됨에도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김경재 교수님이 새길기독사회문화원 포럼에 초청되어 한국교회를 진단하면서 가장 큰 문제가 성서무오설에 근거한 문자주의적 해석과 한국 기독교의 배타성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정말 그것이 문제이다.


결국,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곳에는 폭력, 대립, 전쟁, 갈등, 테러, 납치와 같은 사건들이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자신의 규정 외에는 모두 악으로 간주된, 진리는 오직 하나라는 태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대화나 타협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 기독교는 대체로 근본주의 신앙이 지배적이다. 특히 근본주의가 강한 교단은 예장합동(비주류), 예성, 고신, 하나님의 성회 등이다. 한국 기독교 신앙 형태는 대체로 다음의 특성들이 존재되어 왔다.

① 정통주의 신앙 ― 이는 기독교 선교 초기에 미국 선교사에 의해 전수된 것으로 엄격한 교리주의, 배타적 교리주의가 한국 유교사상과 결합되어 한 전통신앙 형태로 자리 잡았고 이는 나중에 근본주의 사상과 자연스레 결합되었다.

② 경건주의, 부흥체험 신앙 형태는 18세기 화석화된 신앙에 반기를 들고 시작된 감리교의 유형으로 경험적이고 체험적인 신앙을 강조한다. 부흥 각성운동으로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있었던 대 부흥 성령운동의 영향으로 아직도 한국 개신교의 한 정통신앙 유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③ 성장주의 신앙 유형은 1970년대 교회 성장론과 한국에서는 3박자 축복론이 결합되었는데 이는 자본경영의 논리가 교회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설교도 종교선전이며, 교회 조직도 업적중식(암웨이 식)으로 모든 것을 성과, 업적(이를 축복이라 함)으로 결론짓는다. 부와 물질을 추구하고 경쟁 논리와 확장, 성공 논리가 지배하며 대형화를 추구한다.


한국 교회는 위의 3가지(근본주의까지 4가지) 신앙유형이 모두 혼재되어 있다. 그래서 열정적, 체험적이면서 배타적, 독선적이고, 또 업적지향, 신비체험 지향의 신앙형태를 함께 가지고 있다. 성서무오설을 철저히 고수하고 문자적 해석에 목을 맨다. 또 선민의식이 강하며,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의 지상명령에 충실하여 세계선교에 열을 올려서 현재 1만 6천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다. 강한 선민의식과 절대적 진리를 가지고 있고 오직 이 기독교만이라고 생각하고 한국 기독교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되었다는 자만으로 선교하면서 한국식 기독교를 이식하여 나가고 피선교 지역 전통, 문화는 무시한다.


다시 말하지만 근본주의가 지배적인 상황에서는 대립, 갈등, 전쟁, 폭력이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근본주의를 넘어서야 한다. 함께 더불어 사는 세상을 열어가기 위해서이다.

지금 시대는 무엇보다 공존의 삶, 윤리가 요구되는 세상이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삶이 필요한 때이다. 생태계의 위기가 얼마나 심각한가! 지구 온난화, 사막화의 위협을 시시각각 느낀다. 또 20세기가 남긴 상처들이 얼마나 깊은가. 그 상처들을 치유할 때가 21세기인 것이다. 폭력의 위협이 심각한 이 때에 우리에게는 더불어 사는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지금도 사람의 삶의 모습들이 다양한 차원으로 확대되고 있으며 인류가 생존하기 위해 서로 충분히 대화하고 협력하고 평화를 지향해야 할 때이다.


이제 근본주의 신앙에 매인 한국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실존을 돌아보았다. 지금은 한국 기독교가 오직 믿음의 열정으로 기독교를 자기 방식, 자기 중심으로 확장할 때가 아니라 그동안 저지른 과오를 반성하고 깊은 자기 성찰과 수련을 할 때에 이르러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도 기독교가 나만이 진리의 길이라고 말 할 세상이 아니다. 세상은 많은 진리들로 열려 있고 모두 함께 어우러져 있어 서로 대화하고 협력해야 한다. 선민의식에 사로잡힐 때가 아니라 함께 더불어 평화를 찾아나가야 할 때이다.


오늘 읽은 성서본문 갈라디아 3:28은 사도 바울이 이 본문에 인용한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입교 시 <세례 의식문>이다. 요즈음 우리의 세례식 때는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는다.’는 교리 중심의 고백을 하지만 초대교회에서는 삶의 질서의 새로운 결단을 고백하고 있다.

그 당시 이교도였거나 이방인이었거나 간에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들어올 때 나를 이 공동체에서 새로운 질서로 살겠습니다라고 고백을 한 그 고백문이 바로 이 내용이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일상세계, 사회적 역할들에서 가졌던 가치기준을 모두 내어 던지고 수정하여 변화된 새로운 자세로, 행동으로 살아갈 것을 약속하는 고백문이다. 모든 인종, 계급, 성의 차별 없는 평등세상의 규정을 이제 내 삶의 근거로 받아들인다는 고백이다. 이 갈라디아 3:28은 개인들에 관한 진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자아규정으로 이해된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모든 세례 받은 이들의 평등,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라는 차별 없는 공동체로 자아를 규정하였던 것이다.


당시 그리스-로마세계 도시 안에 살면서, 노예제, 성차별, 인종차별이 지배적인 그 사회 안에 살면서 그 문화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새로운 가족으로 새 질서에 근거한 새 삶을 사는 것을 선포하였다. 그 시대의 대안적 연합체로서 그리스도인은 기존의 가부장적 가족제도와 긴장, 전통가치들과 긴장과계를 만들었던 것이다. 기독교가 당시 1세기 그리스-로마 세계에 급속히 전도된 것이 어쩌면 이 새 질서의 공동체성에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 유대 남자는 물론 그리스 남자들도 “내가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 야만인이 아닌 그리스인으로 태어난 것을,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태어난 것을, 여자가 아닌 남자로 태어난 것을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던 현실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 가치, 새 질서의 공동체에 있음을 대안으로 내었던 것이다. 당시의 모든 막힘들도 모두 열어놓은 질서이다. 지금 기독교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근본주의적 신앙으로 계속 훈련되면서 교인들은 점차 왜곡되어졌다. 혹자는 개인 신앙이 순수하고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무엇이 잘못인가하고 반문하기도 한다. 물론 순수한 개인 신앙을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속한 기독교 역사에 대한 책임을 져야하며 그러한 역사, 사회의식이 결여된 신앙의 순수함과 열정이 얼마나 왜곡된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내는가를 알아야만 한다.


초기 공동체가 당시 사회에 막혔던 관계들의 담을 다 허물었듯이 지금 기독교는 이 시대의 막힌 기독교 모순들을 모두 허물고 자신을 열어야 한다. 초기 공동체가 대안사회의 가치를 제시했기 때문에 소아시아를 거쳐 유럽대륙으로 확장되어 갈 때 당시 사회에 희망 잃은 이들에게 소망을 주는 새 힘이 될 수 있었고 그래서 세계적으로 뻗어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며, 특히 한국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며 지금 세상에 우리가 대안 공동체가 될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대립과 갈등을 넘어 평화, 대화, 협력의 세상으로 나갈 힘을 주는 새로운 종교로 거듭나야 함을 절실히 깨달아야 하지 않겠는가? 근본주의를 넘어서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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