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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진관

"삼위일체적 삶 -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요한복음 17:20-24, 로마서 8:26-27)

 

 

2002.11.24

권진관 형제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 요한복음 17: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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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 로마서 8:26-27



21 세기 초 한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대두된 화두 중의 하나는 "참여"라는 단어일 것입니다. 이전의 사회에서는 마음놓고 정치나 사회적 결정과정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사회, 정치, 경제의 모든 것들이 공작정치로 움직여졌기 때문에, 1970-80년대 동안에는 시민적 참여의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시민사회란 것이 없었습니다. 오직 국가와 국가에 의해 지도를 받았던 경제(영어로 directed economy)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시민들은 민중이었습니다. 민중이란 말은 눌리고 소외되고 참여가 박탈된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 당시에는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들이 주도적으로 국가와 기업에 대하여 투쟁하였습니다. 당시는 국가와 기업이 민중을 억누르는 것에 대항해 인권을 부르짖었던 지식인들을 민중신학자, 민중사회학자, 민중경제학자 등이라고 부를 정도로 민중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상황이 많이 바뀌었는데, 국가가 경제를 통제하던 시기는 지나가고, 이제 경제계는 많은 자율성을 가지게 되었을 뿐 아니라, 과거와는 거꾸로 경제계가 국가와 세상을 지배하는 시기로 변했습니다. 특히 지구화된 경제 구조 속에서 초국적 자본은 우리나라의 경제를 좌우하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시민사회도 커졌습니다. 그래서 많은 지식인들이 시민사회에 참여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민사회에 참여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정치계와 언론으로부터 관심과 호응을 받고 애용되고 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출세하려면 시민운동에서 빛을 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 동안 억눌렸던 민중들 중에서 가장 먼저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아마도 중간층 혹은 중산층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지식인들이 시민사회를 매개로 하여 사회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을 우리는 이른바 시민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들이 참여하는 운동을 시민운동, 혹은 시민사회운동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시민사회의 발전에 의해서 가능해졌던 것입니다. 시민사회란 국가와 경제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가질 수 있는 자유의 공간, 자발적 참여의 공간으로서, 그야말로 public 한 것 즉 공중적인 것들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주장하는 참여의 공간을 말합니다. 시민사회의 확장으로 말미암아 중간 계층, 지식인 계층들은 많은 힘을 얻었습니다. 이 시민운동은 사회가 점점 더 민주화되어 가면서 좀더 확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이웃 일본보다도 더 역동적이고 희망적인 이유는 아마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민주화를 스스로 쟁취했고, 경제 성장도 스스로 이룩해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리하여 '하면 된다'고 하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번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월드컵에서 체력적으로나 경험적으로 우리보다 훨씬 앞선 유럽의 강호들을 파죽지세로 무너뜨린 것은 전대미문,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대단한 국민적 응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월드컵 세계 4위라고 하는 이러한 놀라운 결과는 어떻게 보면 국민적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중산층 혹은 중간층의 대두가 21 세기의 특징이며, 이들의 주체적 참여가 그 내용과 형식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학생들이 설익고 투박한 지식을 가지고 사회를 비판하였지만, 오늘날에는 대단한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TV나 우아한 포럼이나, 각종 정부 위원회, 각종 민간단체 위원회 등에 나와 사회의 문제들을 진단하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학생들이 사회문제를 제기했다고 감옥으로 잡혀가고 고문도 당했지만, 요즘에는 지체 높은 박사님들, 교수님들, 전문가님들이 나와서 대접받아가며 우아하게 돈도 벌어가면서, 또 출세의 길도 넓히면서, 사회 문제를 논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많이 바뀌었습니다. 중간층의 능동적 참여가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고, 우리 교회도 중산층 지식인 교회로서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며칠 전 동아일보 문화면 (11월 22일 금요일 A15면)을 보니까 독일의 비판이론철학자인 악셀 호네트 프랑크푸르트대학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시민사회를 둘러싼 논의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시민사회 모델이 중산층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나 아렌트로부터 영향을 받은 이 흐름은 신사회에 대한 개인의 참여만을 중시할 뿐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경제적 기반에 대해서는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시민사회론은 사회적 약자를 어떻게 도와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 언론이나 강단을 통해서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입이 막혀 있습니다. 이 수많은 사람들은 말하는 것보다는 먹는 게 더 급하기 때문에 말하는 것과 참여하는 것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그럴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 속에는 한편으로는 침묵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약자들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우아하게 사회의 주인으로 참여하고 있는 지식인들, 중간층들, 그리고 힘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갭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가 우리들의 고민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인가 이것이 오늘 제가 여러분들과 생각해 보고자 하는 주제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70-80년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이것은 분명히 퇴보일 것입니다.

저는 우리 동네 열쇠와 구두를 고치는 가게를 하는 아저씨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제가 교수인 것을 압니다.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더군요. "교수님은 걱정이 없겠어요. 검사 친구들이 있으니까 겁날게 뭐가 있겠습니까? '야, 이 사람 좀 잡아 가둬 줘'하면 잡아넣어 줄 게 아닙니까?" 사실 저는 검사 친구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 구둣방 아저씨의 눈에 비친 우리 사회는 아직도 힘있고 배운 사람들이 떡 주무르듯이 주무르는 사회인 것입니다. 눌린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눌려 있습니다. 그들의 입은 봉해져 있고,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생활전선과 노동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참여는 사치하기만 한 것입니다. 그러니 '우아한' 시민사회가 성장, 발전, 확장되었다고 해서 좋아만 할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웃이 무거운 짐을 지고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들이 잘 나간다고 해서 그들을 잊어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힘있는 사람들, 지성인들이 더 사회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좀더 신중히 생각하고 책임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들이 가져야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삼위일체로부터 배워야 한다고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삼위일체의 요체는 "내가 그 안에 있고, 그가 내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들 사이에 깊은 관계가 있음을 표현할 때 누구 안에 들어와 있다고 말합니다. "그대 있음에 내가 있네"가 삼위일체를 가리킨다고 봅니다. 아내라는 말은 "안에 있는 나"라는 뜻을 가졌다고 생각되는데, 아담이 하와를 가리켜 내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라는 한 것도 이와 상통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부부들은 서로 아내라고 부르는 것도 좋을듯합니다. 내가 그 안에 있다고 할 때, 여기에서 나와 그는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다름이 있지만, 서로의 안에 들어가 보는 것입니다. 단순히 들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아예 들어가 머무르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의 관계입니다. 성부는 성자 안에 거하며, 성부 성자는 성령 안에 있습니다. 성령은 다시 성부를 알고, 오늘의 말씀에 나오듯이 성부는 성령의 마음을 압니다. 다른 인물 사이에 서로 안에 있음을 표현하는 말로 Empathy(감정이입)라는 말이 있습니다. Empathy는 잠시 동안 동일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영속적으로 그의 입장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잠시동안의 역지사지(易地思之, 자리를 바꾸어서 생각해 보는 것)가 아니라 지속적인 역지사지를 가리킵니다.

 

로마복음서 8: 26의 말씀은 엠퍼시를 가장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 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서로의 안에 계시듯이, 성령은 우리 안에 들어오시되, 우리를 대신하여, 깊이 탄식하시며 간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표현이야말로 empathy를 가장 극적으로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하기를 empathy는 지식 중의 가장 높은 단계라고 했습니다. 엠퍼시는 함께 고통을 나눌 정도로 상대방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뿐 아니라, 함께 느끼고, 함께 고난을 지는 것을 말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성령께서는 고난 당하고 있는 피조물들을 느끼신다는 것 즉 feeling 하신다는 것입니다. 느낀다는 것은 안다는 것보다 더 포괄적인 말입니다. 의식하고, 인식하고 알 뿐 아니라, 느낀다는 것인데, 피조물의 고난을 함께 겪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복음서 기자는 "안에"라는 삼위일체를 가리키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이 사람들도 우리들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한 17:21)라고 말씀하시고, 이어서, "그것은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as we are one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사람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이 사람들을 완전히 하나가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 (같은 장 22, 23절). 22절에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라는 것은 수적(數的)으로, 실체적으로 하나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인격적인 다름 가운데 의지와 뜻과 목표에서 같다는 것을 말한다. 강한 유대와 코이노니아를 가르킵니다. 하나라는 말로 영어에서는 One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와 한 실체를 합하여 가리킵니다. 독일어에서는 이것을 나누어, 하나라는 것을 eins, 한 분 혹은 한 실체를 einer로 부릅니다. 여기에서 삼위일체는 einer 즉 한 실체이신 한 분이 아니라, 하나 즉 eins에 해당한다고 하겠습니다. 삼위들은 무한히 하나로 일치해 가는 세분을 말합니다. 하나는 하나됨이라고 하는 동명사로 생각해야 합니다. 삼위일체의 세 분은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 즉 서로 안에 거하면서 지속적인 순환 속에서 하나가 되는 분이십니다.

삼위일체적인 삶을 산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는 삶을 사는 것과 통합니다. 하나님이 완전한 것처럼 우리들도 완전해져야 하는데, 그것은 곧 유대가 있는 삶, 코이노니아 즉 사귐과 친교가 있는 삶을 살면서 이루어집니다. 오늘날 개인주의적인 경쟁시대 속에서 남들과 연대하는 삶을 사는 것, 그리고 그들 안에 들어가 보는 삶을 산다는 것은 혁명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아직도 많은 경우, 동류의 집단들끼리 모이고, 동류의 의식 속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중산층의 동류의 사람들이 모여 있는 시민사회, 사회적 영향이 있는 집단들과 손잡고 하는 시민운동은 한계가 있습니다.

오늘날 삼위일체적 삶을 산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서로 그 안에 들어가듯이 우리들도 내가 그에게 그리고 그가 내 안에 들어오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생존의 무게에 눌려 고개를 돌리지도 못하고 들지도 못하며 입문이 막혀있고 시민사회, 정치사회에 참여하는 것이 무한한 사치로만 보이는 그러한 억눌린 사람들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눈으로, 그들의 느낌으로 세상을 보고 느끼는 것이 삼위일체적 삶입니다. 또한, 그들을 얽어매어 놓고 있는 사회-정치-경제적 구조와 조건을 바꾸는 것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생각뿐만 아니라, 행동에 옮기는 것, 이것이 바로 삼위일체적 삶이요, 성령을 따르는 삶일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그들이 내 안에 있게 하는 삶, 그리하여 나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세상을 보며, 그들의 탄식을 함께 나누는 것이 크리스천 지성인들의 참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아버지 안에 계시고 아버지는 당신 안에 계시며,
성령을 보내셔서 당신의 뜻을 이 땅에 계속적으로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삼위일체이신 당신의 사랑에 보답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분열된 우리 사회 속에서 하나됨을 이루는 우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잊고 지내지만,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의 어둠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삶의 무게가 너무나 무거워
참여의 시대에 참여한다는 것이 한갓 사치에 불과하며,
자기 표현의 시대에 자기 표현의 길이 막힌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고난 당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을 위해 깊은 탄식으로 간구하고 계십니다.
당신께 감사 드립니다.
늘 감사하는 마음에서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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