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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2002.01.16 18:46

[1998.02.22] 텅빈 영혼의 위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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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정배 목사

"텅빈 영혼의 위험"

(성서본문: 누가복음 11:14∼26)

 

1998.02.22

이정배 목사

[ 예수께서 한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매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는지라 무리들이 놀랍게 여겼으나 그 중에 더러는 말하기를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고 또 더러는 예수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니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 너희 말이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 재판관이 되리라 그러나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그를 굴복시킬 때에는 그가 믿던 무장을 빼앗고 그의 재물을 나누느니라 나와 함께 하지 아니하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요 나와 함께 모으지 아니하는 자는 헤치는 자니라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가서 보니 그 집이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

- 누가복음 11:14∼26



  현대인의 영성을 주제로 한 새길교회의 겨울 수련 모임을 경험하게 하신 하나님께 먼저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하나님 말씀을 함께 생각하며 고민하는 성도 여러분들의 진지한 모습에 크게 감동되었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세 번에 걸쳐 나누었던 말씀들이 여러분들의 생각과 삶 속에 새로운 힘으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의 설교를 시작합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들을 고치시고 주변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는 기사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보고 예수의 적대자들이 예수를 향해 중상 모략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귀신의 세력을 물리치고 사람들을 귀신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예수의 행위에 대해 적대자들은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과 결합해서, 그의 힘에 의지하여 행하는 것이라는 모략을 일삼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러한 예수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귀신의 왕으로부터 왔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에 대한 예수의 답변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먼저 예수는 만약 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 귀신을 쫓아내었다면 지금까지 귀신을 추방했던 경험을 갖고 있는 너희 동료들은 누구의 힘을 의지하였던 것인가? 라고 반문합니다. 이러한 물음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예수의 의도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이런 문제를 가지고 분쟁하고 다투지 말자. 우리가 진정으로 관심해야 할 사안은 귀신을 찾고 그것을 사람들로부터 추방시켜내는 일이 아닌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인격 속에서 귀신의 실체가 밝혀지고 그로부터 자유케 되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일이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일이라고 예수는 생각하였던 것이지요. 실상 예수께서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신 이유는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예수의 능력에 의해 완전히 떠나감으로 몸과 마음이 깨끗하게 된 새로운 삶의 시작, 이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인 것입니다.


  본문 말씀을 좀더 읽어 나가면 우리는 오늘 말씀의 핵심 주제와 부딪치는 내용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의 힘을 통해서 쫓겨 나갔던 귀신이 여기저기서 새로운 거처를 찾다가 마땅히 거할 곳을 찾지 못한 채 옛날 자기가 머물렀던 그 사람의 마음을 기웃거린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와 보니 옛 주인의 마음이 깨끗하게는 비워져 있는데 어떤 것으로도 채워지지 않은 빈 그릇의 상태로 되어 있더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 귀신은 자기 외에 일곱 친구 귀신을 더 데리고 와서 처음보다 더 강하게 그 사람 속에서 악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본문 말씀에 대한 주석을 찾아보니 다음처럼 쓰여 있었습니다. "악한 영이 쫓겨나가면 그 집은 비워진다. 그러나 그 집을 그렇게 방치해 놓으면 안 된다. 빈집은 끝까지 책임 있게 관리하고 다스려야만 한다." 귀신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스스로 참 주인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텅빈 영혼의 위험, 곧 빈집의 우환으로 본문 말씀의 제목을 달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본문 말씀이 오늘 우리의 삶에 부딪치는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매일 반복되는 일상생활 속에서 누가복음 11장의 말씀은 다음의 메시지를 전해줍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크리스천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살고 싶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에 앉아 있고 이 시간을 성별하여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동기가 다르고 개인적 이유가 천차만별이긴 하겠으나 우리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와의 결정적인 만남의 순간이 있었고, 그 사건을 통해서 자기자신을 無(Nothingness)로,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으로 인정했던 삶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는 저마다 당당한 지위를 갖고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티끌과도 같은 존재이며 바람에 날리는 겨요, 상한 갈대로서 자신을 고백해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하나님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신다는 확신을 가져본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 때는 두려움보다 의욕과 용기가 넘쳤고, 거침없이 넘치는 사랑으로, 믿음으로 삶을 살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웃 종교인 불교에서는 초발심(初發心)이라고도 하지요.


  그러나 어느덧 책임져야 할 가정이 생기고 좋든 싫든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직장이란 사회적 관계에 얽매이게 되면, 그리고 삶이란 남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되는데 그 목표가 있는 것으로 이해되면서, 요즘과 같은 IMF 시대엔 실직의 위험을 겪으면서 우리는 정말로 두렵고, 가치 있는 근본적인 것을 추구하기보다는 현실적인 것에, 물질적인 것에 마음을 빼앗기게 되지요. 물론 이런 것이 불필요함을 말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단지, 근본적인 것을 비껴가며 처음에 붙잡았던 본 것을 놓아버린 채 곁가지 인생으로 살게 되는 우리의 모습을 지적해 본 것입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기계적으로 반복된 삶 속에서 우리는 윤기와 탄력을 잃어버린 푸석푸석한 쭉정이의 실체가 되어 버립니다. 그 동안 많은 업적을 쌓아보기도 했고 물질을 축적해 보았지만 우리 마음은 여전히 공허하고 허전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텅빈 인간, 그러나 가득 찬 인간, 없어도 좋을 것으로 가득 차 있으나 있어야 할 것을 비우고 사는 인간'이란 어느 시인의 구절이 가슴에 와 닿습니다.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우리 스스로 '안정된 기반'을 얻었다고 생각했지만 영혼의 참다운 불꽃이 꺼져버린 메마른 삶,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텅빈 영혼의 위험, 빈집의 우환을 느끼게 됩니다.


  어떤 소설가가 있었습니다. 소설가는 글을 씀으로 자신의 삶을 이루어 가는 존재입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 사람은 깊은 좌절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글을 씀으로 자신의 삶을 성취하려고 애썼지만 결코 자신의 삶이 될 수 없다는 한계에 부딪치게 된 것입니다. 이쯤 되면 글쓰는 사람에게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상태가 되어버리고 말지요. 그는 "나는 할 수 없다. 더 이상 한 줄의 글도 쓸 수 없다. 거짓된 글을 써서는 안 된다"는 절규를 하고 있었습니다. 절망 중에 있던 이 소설가에게 친구가 찾아 와서 한 산악인의 말을 들려주고 돌아갔습니다.


  알프스 최고봉을 올랐으며 여섯 대륙의 높은 산들을 등정해 본 경험이 있는 메스너란 산악인이었습니다. 그는 곧잘 "나는 산 때문에 병들었다"라고 말하면서도 언제든 많은 산을 오르곤 하였지요. 산에 오를 준비를 할 때마다 장비를 챙기면서 이 사람은 매번 울음을 터뜨리곤 했답니다. 정말 산에 오르는 것이 무서워서 운다고 했습니다. 너무 무섭고, 두려우면, 너무 많이 울게 되면 쌌던 장비와 짐을 다시 풀면서, "나는 할 수 없다"고 수십번 되뇌기도 했지요. 하지만 얼마 지나면 또 울면서 다시 짐을 챙기곤 하였습니다. 그에게는 산이란 두렵고 무섭지만 가야만 할 곳이었습니다. 하나의 산을 오를 때마다 이런 절망을 수없이 겪어야만 했습니다. 누군가가 "그토록 무섭고 절망스러운 기분이 들면 그만두면 될 것 아닌가" 라고 말하기도 하였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서움에 눈물을 흘림에도 불구하고 그는 떠났습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무서운 절망감에 울먹거리지만 막상 추락의 위기, 죽음의 사각지대에 홀로 서게 되면 오히려 삶의 전망이 새롭게 보인다는 경험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글을 쓸 수 없다고 절망하는 작가에게 친구는 이런 말을 덧붙이고 떠납니다. "누구에게나 무서워 울면서도 가야만 할 산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메스너라는 산악인의 '산' 같은 것이 누구에게나 하나씩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가야할 길을 분명히 갖고 사는 사람, 본질 근본으로부터 이탈하지 않고 두려워 떨면서도 가야할 길을 가는 사람, 두렵지만, 그 두려움을 넘어서면 절망만이 아니라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자유가 열린다는 것을 아는 사람, 바로 그것이 있음으로 해서 통곡을 하면서도 가야할 길을 가는 사람은 충만한 영혼의 소유자입니다. 결코 일곱 귀신이 들어올 수 있는 텅빈 영혼은 아닌 것이지요.


  성서가 말하는 귀신들린 자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자신이 가야할 곳을 가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사람을 일컫지 않습니까? 자기가 있어야 할 그곳, 자신이 발딛고 살아야 할 그 자리를, 자신이 걸어가야 할 목표를 찾지 못하고 떠도는 우리네 인생을 말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본래 죄를 뜻하는 히브리 원어 '하마르티아'가 목표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는바, 우리 모두가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실상 귀신들린 자의 상태와 다름이 없다고 보여집니다. 현대인이라 자부하는 우리들이 바로 근본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귀신들린 자이며 죄인이라는 것이지요.


  마땅히 가야할 길, 예수와의 만남을 통해서 삶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우리들이 어느덧 욕심, 욕망 때문에 가야할 길, 붙잡아야할 근본을 놓치고 이리저리 방황하고 헤매일 때, 그래서 예수를 알기 이전보다 삶이 더욱 혼동스럽게 느껴질 때 우리는 일곱 귀신의 실체를 내 안에서 재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현실 사이에서, 하나님의 한계 안에서 사는 삶과 하나님의 영역 그 밖으로 나아가려는 유혹의 와중에서 우리는 지금 더 큰 좌절과 갈등을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일곱 귀신이 우리를 더욱 어지럽고 혼동되게 만들어 놓는 상황이 아닐까요. 성서가 귀신들린 자의 처소를 공동묘지로 설명하고 있는 것은 삶의 터전인 마을, 곧 참다운 안식처로부터 벗어난 인간 존재의 덧없음을 지적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본문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오래 전에 보았던 영화 'City of Joy'의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이 영화는 정형화된 의사의 길을 포기했던 한 미국인이 가난하지만 기쁨을 느끼며 사는 인도 민중들을 만나면서 진정한 의사가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인도 여행 중 가난한 그러나 인간다운 인도의 민중들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관료주의, 물질주의에 찌든 미국사회에 절망했던 의사는 삶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미 의사의 길을 포기했던 그로서는 그들 앞에, 더욱이 병으로 고통받는 그들에게 의사로서 다시 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삶이 좋아는 보였지만 자신이 몸담고 그들과 하나가 되기에는 너무나도 벅차고 괴로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하지만 그들로부터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젊은 의사에게 한 여성 사업가는 이런 말을 하게 되지요. "삶에는 세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방관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그곳으로부터 도망치는 길이며 마지막 하나는 마주 부딪치는 것입니다. 삶에는 이 세 가지 길 밖에는 없습니다"라고. 회피하며 방관하는 자로서 자신의 삶을 살려했으나 이 젊은 의사는 인도 민중의 고통과 삶을 몸으로 품어 안으면서 오히려 자기 스스로 구원되어지는 경험을 그 영화는 감동스럽게 그려내었었습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예수와의 만남, 진리와의 만남의 경험이 있었던 우리는 가야할 길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점차 불분명해지고 있습니다. 방관하거나 그로부터 멀어져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이는 신앙을 말하지만 그것을 신조(Belief)로서만 받아들여 형식화되어가고 어떤 이는 자기 욕심을 채우는 수단으로 삼곤 하지요. 신앙의 실재(Reality)와의 만남이 점차 부재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진리를 알고도 진리가 두려워 마땅히 가야될 그 山을 방관하거나 피하게 될 때, 가야할 그 길 때문에 가지 않는 길을 남겨 놓은 우리가 남겨둔 그 길에 다시 마음을 빼앗길 때, 우리 삶은 더욱 더 갈등과 혼동으로 어지러워진다는 사실입니다. 성서가 말하는 일곱 귀신들린 상태가 이를 두고 하는 말인 것이지요.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자유하게 했으니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그리고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진리를 알게 되나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한다"고. 우리 모두 이 말씀을 붙잡고 텅빈 영혼의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는 귀한 삶을 이루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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