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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2002.01.16 18:43

[1998.02.01] 희망의 근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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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진관

"희망의 근거"

(성서본문: 로마서 5:3∼5)

 

1998.02.01

권진관 형제

 

 

[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

- 로마서 5:3∼5





  올해는 범의 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난주일 TV에서는 호랑이의 생태에 대해서 방영하기도 했습니다. 호랑이는 먹이 사슬의 가장 꼭대기에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먹이사슬과 비슷하게 희망의 사슬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에게 희망을 가장 적게 주는 것에서 희망을 가장 많이 주는 것으로 주룩 나열해서 올라가 보면 그 맨 꼭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물음이 떠오릅니다. 저는 희망의 사슬 맨 꼭대기에는 하나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밑에 있는 것들 중에는 금은보화가 있을 수 있겠고, 요즘 같아서는 달러가 꼽힐 수도 있을 것입니다. 또 부동산이나 돈이 있으면 우리들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식이 희망의 원천이고 남편이 희망의 원천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에 작년까지 기본자산과 기금으로 헌금한 것을 모두 합하면 2억원이 된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희망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왕이면 한 10억원 정도 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희망을 가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돈도 좋고 달러나 금도 좋지만, 그것들만이 우리의 희망이 된다면 그것들은 갑자기 우리들의 우상이 되어 우리를 파멸로 이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 위에 진정한 희망의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신앙의 대상이 되는 하나님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종교와 하나님이 필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희망의 근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대량실업사태와 임금동결 또는 삭감 앞에서 무기력해진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나 노력과 관계없이 마치 운명적인 힘에 이끌려 좌절하며, 고난 당하고 있습니다. 그 모습에서 욥을 보는 것 같아서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욥기를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욥이라고 하는 인물은 자기 잘못 없이 고난 당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욥기는 욥이 친구 세 명과 논쟁하면서 자기가 죄 없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해 힘겹게 자신을 변호하는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극단적으로 말하면, 욥의 친구들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과 욥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은 그 이름은 같지만 서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왕년에 잘 나갔지만 지금은 완전히 몰락하고 건강마저 잃은 욥과 지금도 잘 나가고 있는, 잘 먹고 잘 사는 세 사람의 친구들 사이의 논쟁입니다. 욥의 친구들인 엘리바스, 빌닷, 소바르, 세 사람은 한결같이 욥이 무엇인가 잘못했기 때문에 고난 당하는 것이지 잘못 없이 당하는 고난은 도대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나는 잘못이 하나도 없다"고 단언합니다(욥 27:5). 그러면서 욥은 자기의 하나님을 내세웁니다: "나는 믿는다, 나의 변호인이 살아 있음을! 나의 후견인이 마침내 땅 위에 나타나리라"(욥 19:25). 욥의 친구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욥을 정죄 하는데, 욥은 자기의 하나님에게 자신을 변호합니다. 양쪽이 티격태격하는 것으로 욥기가 전개되는데, 욥기의 마지막에 이르면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욥의 손을 들어줍니다. 그 말씀을 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욥의 친구들이 솔직하지 못했으니 잘못했다는 것이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이것은 욥기 마지막 부분인 42장 7절의 말씀에 있습니다. 그것을 풀어서 생각해보면, 우리가 현실을 솔직하게 보고 그 앞에서 하나님을 고백해야지 현실을 교조적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욥은 자기 주위에 돌아가고 있는 사정을 아무 편견 없이 현실 그대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욥의 친구들은 잘못 굴러가고 있는데도 잘 굴러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현실은 엄연히 자기의 방식대로 흘러가는데, 무조건 잘 되어가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말하는 사고방식이 바로 교조적인 생각입니다. 이번 IMF의 위기를 낳은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실은 분명히 우리에게 불리하게 가고 있고, 위기로 치닫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현실을 무시하고 지금까지 잘 되어왔으니 앞으로도 잘 되어가게 되어 있다고 생각하다가 '꽝'하고 나가 떨어졌는데 바로 이러한 사고방식이 교조적, 교리적인 사고방식일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현실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자기들이 편하고 잘 나가니까 세상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청와대에서 갇혀 지내면서 구체적인 현실을 모르고 교조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김영삼 정부는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욥기에서 우리는 서로 다른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맹인 목사인 안요한 목사님의 일대기를 이청준이 『낮은 데로 임하소서』라는 장편소설로 썼습니다. 거기에는 안 목사의 교회 개척 당시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안 목사가 하는 교회에는 맹인들만 나오지, 정상인들은 오지 않았습니다. 오는 맹인들도 얼마 없어서 처음 그의 새빛맹인교회는 아주 실패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고민하고 있던 안 목사에게 중요한 깨달음이 왔습니다. 맹인교회를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부자교회의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자교회에는 부자 하나님이 계시고, 맹인교회같이 가난하고 초라한 교회에는 가난뱅이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름만 같았지 실제로는 다른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각각 자기의 형편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모시고 있는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실제로, 흑인들은 흑인 하나님을 믿고, 백인들은 백인 하나님을 믿습니다.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인 Ku Klux Klan들은 God is white라는 기치를 내세우면서 흑인들을 학대했던 것입니다.

  유명한 사회심리학자인 에릭 프롬은 세상에는 두 가지의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독재자와 같은 전능한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은 전능하셔서 모든 것과 모든 인간들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독재자와 같은 분입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무기력한 죄인일 뿐이고, 하나님의 은총만을 기다리는 피동적인 존재입니다. 욥의 친구들의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분일 것입니다. 에릭 프롬이 제시하는 또 다른 하나님은 인간적인 하나님입니다. 인간에게 힘을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고 같이 아파하는 하나님입니다. 인간이 발전하기를 원하고 약자들을 북돋아 힘을 주는 하나님입니다. 이 두 번째의 하나님은 욥의 하나님과 같다고 하겠으며, 예수의 하나님에 가깝다고 하겠습니다.


  이 모든 하나님들은 기독교라고 하는 포장 안에서 모두 같은 하나님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또 인도에 가서 보니까, 인도에는 신의 숫자가 자그마치 3,800만이 된다고 합니다. 거의 우리 나라 인구와 맞먹는 귀신들이 인도 국경 안에 살고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 인도 사람들은 훨씬 더 솔직한 데가 있습니다. 인도 사람들은 자기가 모시는 신이 누구인가를 이 3,800만의 귀신 중에서 분명히 선택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실제로 다른 신을 섬기고 있지만 너도나도 같은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활동하고 있는 현대의 새로운 신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특히 1990년대에 들어와 두드러지게 활동하는 신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세계화라는 귀신입니다. 이 하나님을 대신하고 있는 역신인 세계화는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IMF 체제 아래 있는 우리의 모든 생산산업들, 기업들은 이제 세계적 금융자본에 의해 지배받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들의 운명이 세계화된 금융자본의 지침에 의해 결정되게 되었습니다. 세계화된 금융자본이 전능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앉은 격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를 세계화가 찬탈한 것이지요. 모든 피조물의 운명이 이 새로운 신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IMF 위기 시대 이전에 우리는 세계화의 기치를 내걸었습니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한 세계화가 그 베일을 벗겨보니 실제로는 역신이었습니다. 그 세계화의 근본적인 내용은 다름 아니라 금융자본의 세계화였다는 것입니다. 존 케네스 갈브레이스라고 하는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는 그의 1995년의 저서인 『The World Economy Since the Wars』(전후의 세계경제)에서 세계화에 대해서 이렇게 썼습니다. "세계화란 다름 아니라 금융의 고도화이며 이렇게 고도화된 금융의 세계화이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그 세계화가 가지는 의미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세계화가 인간에게 가지는 의미는 '금융이 세계화된 세계'에서는 사상 최대의 파국을 향해 길을 닦아 가는 사람들, 바로 그처럼 파괴적인 사람들이 극도로 존경을 받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의 운명을 좌우할 뿐 아니라, 우리들을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는 이 세계화라고 하는 거대 괴물의 탄생은 산업혁명 이후 최대혁명이라고 불리는 '디지털 혁명'에 의해서 가능해졌다고 합니다. 엄지손톱 크기의 컴퓨터 칩이 1초 동안에 무려 5억 8800만개의 계산을 해 낼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이것이 더 빨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는 투자가들의 손을 거치는 외환 거래 액이 하루 1조 5000억 달러가 되는데 세계 증권가의 하루 거래 액은 무려 15조 달러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몇 백억 달러 때문에 파산된 한국과 같은 나라를 날리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을 것입니다.


  이 세계화라고 하는 거대한 괴물은 신화적으로 말하면, 크토닉 힘(Chthonic forces, 또는 땅의 힘)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시편이나 욥기에 나오는 전설적인 바다의 용인 라합, 또는 레바이아란이나 거대한 힘을 자랑하는 베헤못(욥40:17)과 비교될 수 있을 것입니다. 세계화는 우리들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듯이 보였지만 그 결과는 우리들을 파멸로 치닫게 할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예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당하고 있는 온갖 고통은 바로 그것의 전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는 것은 미래에 우리가 겪어야 할 식량난의 문제입니다. 지금도 밀가루와 설탕 등 모든 식량의 값이 오르고 있는데 이러한 추세는 지속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세계화에 마취되어서 점점 더 식량 생산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100%에 가깝게 식량을 자급 생산했던 우리 나라가 이제는 줄고 줄어서 25% 정도 밖에 식량을 자급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북한이 겪는 식량난을 우리가 겪을지도 모릅니다. 이율곡 선생이 임진왜란 전에 10만 대군양병을 주장했듯이 우리의 위정자들도 이러한 식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요즘 각 대학마다 전산정보, 컴퓨터 공학과 같은 것이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아무리 컴퓨터를 잘 만들고, 정보산업을 일으킨다해도 식량이 없으면 어떻게 살며, 옷이 없고, 에너지가 없으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모든 것이 헛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금융자본에게 최대이윤을 보장하는 방향으로 작용하는 세계화라는 전능자의 대리자는 인류의 모든 산업을 금융 자본의 극대이윤을 보장하도록 재편성시킬 것이며, 그렇게 되면 결국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 생산은 마비되고 우리는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앞으로 인류에게는 각양각색의 위기가 밀어닥칠 것입니다. 세계화 이후 지난 7년간의 세계 총 생산량은 너무 폭발적이어서 그것은 인류문명이 시작된 후 1950년까지의 1만년동안 누적된 총 생산량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생태계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생산량입니다. 그 결과로 인해 오늘날 엘리뇨라고 하는 이상 기후가 크토닉 힘 즉, 땅의 힘의 모습으로 일어나 전지구적으로 재앙을 미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많은 신들, 특히 오늘날 활보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화의 역신적인 모습을 내용적으로 구별할 줄 알아야 하고 거기에 대항하는 진정한 바른 신의 개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가장 진정한 하나님의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우리들의 삶을 위해 지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역시 성서는 여기에 대해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의지할 수 있고, 희망할 수 있는 진정한 신은 역사적 예수가 믿었고 의지했고 아빠 아버지라고 불렀던 그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주 특수한 방식으로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가 소개해 준 하나님은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 대제사장들이 소개한 하나님과 다른 하나님이었습니다. 모세와 위대한 예언자들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편린들만을 보여주었지만, 예수는 하나님을 가장 완전하게 소개해 주었습니다. 소개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계시라는 말을 쓰게 되는데,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역사 속에서 예수님만큼 하나님을 올바르게 계시하신 분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오늘날 우리들의 하나님 개념의 기준이요 표준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성령 하나님을 소개했습니다. 이 성령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 성령은 예수를 증거 합니다. 또한 성령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안에 부어 넣어 준다고 오늘 본문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는 자매 형제 여러분들께 이런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날과 같이 희망이 없고 절망이 우리를 억누르고 있는 이 때에 우리들에게 희망의 원천은 바로 성령이시라는 것입니다. 성령은 우리들 곁에 항상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들의 소원을 미리 아시고 하나님께 대신 기도해 주십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을 다해서 창조적인 삶을 살도록 힘주시는 분이며, 우리들이 주어진 생명을 가장 보람차고, 창조적으로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는 분입니다. 성령을 구체적으로 그릴 수는 없지만, 그분은 일종의 생명의 에너지, 즉 기(氣)로 계시고, 우리의 역사와 우주 속에서 우리가 요청할 때 다가오시는 일종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분은 그러나 단순히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인격적인 힘입니다. 그분 속에는 예수의 인격이 담겨 있습니다. 그분은 인격적이기 때문에 사랑의 힘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허망하고, 나를 배반하지만, 이 사랑의 하나님 성령은 변함없이 내 곁에서 나를 사랑하고 계신다고 증언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죽음과 파괴의 잿더미 속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용기를 부어주시고, 소망하는 것이 이루어지도록 힘주시는 분이며, 길을 열어주시는 분입니다.


  불가능 속에서도 희망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자연 세계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말라죽은 것처럼 보이는 작은 씨가 떨어져서 생명으로 움터 오르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인 것 같지만 그것은 성령께서 이루시는 기적이요 신비인 것입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좌절을 딛고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알건 모르건 모두 성령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성령을 받은 믿음의 사람은 종달새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봄철 푸른 하늘로 높이 솟아오르는 종다리와 같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도약해야 합니다. 또 높이 나는 독수리와도 같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치솟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가 어떠한 상황에 있다 하더라도 오히려 기뻐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 희망을 성령님께서 보증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은 고난과 시련 속에서 얻어지는 희망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 시간 허황한 곳에 희망을 두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성령 하나님을 붙들고 그분의 힘에 의지해야 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들을 창조적인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의 본문이 고난과 절망 속에 있는 우리들에게 진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오신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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