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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2002.01.16 19:04

[1998.07.12] 나눔의 秘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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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인철 목사

"나눔의 秘意"

(성서본문: 누가복음 19:1∼10)

 

 

1998.07.12

한인철 목사

 

[ 예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 지나가시더라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서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쳐다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 뭇 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하더라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

- 누가복음 19:1∼10


 


  새길교회의 교우 여러분들과 말씀을 나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저는 한국의 실업 상황을 함께 염려하면서, 라는 제목으로 간단히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최근 우리 나라는 스포츠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프랑스 월드컵에서는 16강 진입에 온 국민의 관심이 집중되었다가, 첫 번째 제물로 삼으려던 멕시코에게는 3 : 1로 지고, 네덜란드에게는 5 : 0으로 지면서, 국민의 사기는 땅으로 곤두박질 쳤고, 급기야 차범근 감독은 현지에서 감독 직을 물러나야만 하는 불행한 사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 박세리가 US여자오픈골프대회에서 우승하면서, 98여자프로골프협회 챔피언십에 이어 2개의 메이져대회 연속 우승이라는 것이 알려지자, 이번에는 골프의 규칙이나 용어조차 모르는 일반 국민들까지 모두가 덩달아서 기뻐하는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골프라는 것이 한국에서는 아직 사치스러운 스포츠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고려하면, 이것은 분명 기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현대의 스포츠라는 것이 상업주의에 기초되어 있다는 것을 국민들이 모르고 있는 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국민들이 스포츠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때로는 땅으로 곤두박질 쳤다가 때로는 미칠 듯이 기뻐하는 것은 오늘의 한국 현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은 듯 합니다. 최근의 스포츠는 IMF 경제관리체제 하에서 패배주의로 물들어 있는 한국인의 숨통을 트여주는 돌파구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근 정부연구기관의 전망에 따르면, 올해 말에는 실업률이 7.3%까지 치솟아 실업자수가 160만 명에 이르고, 이러한 고 실업사태는 내년 상반기에 절정에 이른 후, 앞으로 3, 4년간 지속될 것이라고 합니다 (한겨레, 98.6.12). 그러나 이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업률이나 실업자 수가 이보다 훨씬 웃돌 것이라고 보고 있고, 고 실업사태도 정부 예측보다는 훨씬 오래 지속될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러한 실업시대에 교회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문제는 분명한 데, 대답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이 문제를 생각하기에 앞서, 저는 최근 있었던 심상치 않은 사건 하나를 상기해 보고자 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실업사태가 번져가면서 노숙자가 늘고 있습니다. 입 하나 덜자고 집을 나와 이름과 주소와 가족관계를 속이고 노숙하는 노인들이 있는가 하면,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허름한 옷을 입은 채 상자 위에서 잠을 청하는 중년층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공원에서 철도역에서 지하철역에서 동가숙서가식하고 있습니다.


  이런 와중에 며칠 전 '실직, 노숙자 대책을 위한 종교 시민단체 협의회'가 서울시의 대외비 문서인 '노숙자 특별 상담 세부계획'이라는 것을 입수해 공개했습니다. 이 계획에 따르면, 서울시는 지난 7월 10일 밤 11시부터 경찰병력 660명과 구청 직원 720명을 서울역 지하도와 종로 3가역 지하도, 영등포역 광장 등에 보내 노숙자 650여명을 차 22대로 모두 강제 연행한다는 것입니다. 서울시는 이들을 시청 뒤뜰로 데려와 새벽 2시부터 1시간동안 상담을 벌여 귀향/귀가 대상자와 노숙자 쉼터 입소자 및 부랑인 시설 입소자로 분류한 뒤, 시청 차 14대에 실어 새벽 4시 이전에 이송작전을 마무리한다는 것이 그 계획의 내용이었습니다.


  언뜻 보면 적절한 조처인 듯 보이지만, 여기에는 우리들 자신을 포함하여 안전지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시대 기득권자의 음모가 숨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시민단체 협의회는 서울시의 조치가 노숙자들을 '위험집단'으로 규정하려는 행위라고 했지만, 저는 그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서울시는 실업자의 노숙과 노식이 기득권자의 눈에 '볼썽사납다'고 보고, 이들을 사회로부터 격리하여, 한편으로는 이들을 사회의 중심에서 보이지 않는 변방으로 소외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실업사태를 은폐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계획은 새벽에 시행되도록 짜여져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외환위기를 은폐하려 했듯이, 이제는 실업사태를 은폐하려고 한다는 말입니다. 다행히 서울시가 이 계획을 유보했지만, 계획에서 드러난 소외와 은폐의 행위는 우리 스스로도 깊이 경계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스스로 아직은 안전지대에 살고 있고, 그래서 기득권 층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서울시의 계획에 동조하고 서울시와 야합할 소지가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지만, 노숙은 이 시대 실업자의 생존의 한 방식이 되었습니다. 노숙하는 실업자를 소외시키고 은폐하려고 하는 사람은 단순히 서울시만이 아니라, 이 시대의 기득권자입니다. 교회는 과연 어느 편에 서야하겠습니까? 기득권자의 편입니까 아니면 실업자의 편입니까?


  실업자의 편에 선다는 것이 단순히 마음만의 문제라면 모르겠거니와, 실천의 문제라고 볼 때 이 문제는 결코 단순치가 않습니다. 과연 기독교는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 저는 그 한 적절한 대답이 '나눔의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종교계 대표들로 구성된 '실업극복 국민운동'이 벌이는 '실업극복을 위한 천만계좌운동'과 같은 것은 나눔의 시의 적절한 표현이라고 봅니다. 十匙一飯의 정신을 따라 1,000만 임금노동자가 조금씩의 성금을 내어 내일의 자신이 될 지 모를 어제의 동료들을 격려하고 돕는 일은 이 시대에 마땅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곧 五餠二魚의 기적을 일으키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오병이어에 얽힌 일화 한 토막으로 머리를 식히고 지나가겠습니다. 신학교를 갓나온 어느 전도사가 설교 도중 원고에 없는 5병2어 이야기를 하려다가 그만 금방 생각이 나질 않아, "예수께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000개로 5명을 먹였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한 장로님이 "전도사님, 보리떡 5,000개로 5명 먹이는 것은 저도 할 수 있습니다"하고 짓궂게 전도사님의 실수를 지적했습니다. 실수를 깨달은 전도사님은 다음 주에 정정 설교를 했습니다. "예수께서 물 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였습니다." 다시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전도사님이 되 갚기라도 하려는 듯 물었습니다. "장로님, 장로님도 보리떡 5개로 5,000명을 먹일 수 있습니까?" 장로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물론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황한 전도사가 어떻게 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장로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지난주에 5,000개로 5명 먹이고 남은 것 있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남아 있는 보리떡은 없지만, 없는 중에 내놓은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는 5,000명이 아니라 200만 실업자를 격려하고 풀린 무릎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나눔은 이중적인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는 남을 구원하는 힘이요, 둘째는 자기를 구원하는 힘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나눔이 남을 구원하는 힘이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쉬운 데, 나눔의 보다 궁극적인 힘은 자신을 구원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눔은 남을 구원하는 과정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신을 구원하는 데 뜻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엄밀히 남을 구원하는 것과 나를 구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입니다.


  나눔이 남을 구원하는 힘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이미 많이 들어왔기 때문에, 구차스러운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단지 저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합니다. 제가 초등 학교 5학년 때의 일입니다. 저는 금호동 응봉산 꼭대기 판잣집 달동네에 살았고, 이웃 친구들과 마찬가지로 점심을 싸갈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자연히 점심 시간에는 운동장에 나와 하릴없이 철봉대에 몇 번 매달리다가 들어가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이었습니다. 늘 교실에서 학생들과 점심을 들던 선생님이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교실을 빠져 나오려는 저를 불렀습니다. 무심코 선생님께 다가갔더니, 옆자리에 앉히고는 도시락을 꺼내 밥과 반찬을 둘로 나눈 후 젓가락을 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억제할 수 없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물론 도시락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 날 오후 선생님은 저를 자기 집에 초대했습니다. 초대라고 했지만, 집에 들어서자마자 윗통을 벗어 젖히고는 목물을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저보고 윗통 벗고 엎드리라고 했습니다. 그 후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 해 겨울이 되었습니다. 성적표를 나누어주는 시간이었습니다.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평소 제 성적은 '미'가 주종을 이루었습니다. 가끔 있는 '우'는 다른 사람의 '수'에 해당되었고, '양'도 가끔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제 이름을 부르더니 성적표를 주며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고 했습니다. 성적표를 보니 정말로 '우수수'의 비율로 성적이 나왔습니다. 처음에는 선생님이 격려차 성적을 올려 준 것이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성적이 오를 만한 근거는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도시락을 나누어 준 후, 제게 중요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전에는 선생님이 무엇을 가르치든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성적표에는 항상 주의가 산만하다는 평가가 약방의 감초처럼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 도시락 사건 이후 선생님이 교실에서 가르치는 것들은 굳이 귀기울이려고 하지 않아도 저절로 귀에 술술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음식점 환기통에 연기가 빨려 들어가듯이, 선생님의 가르침이 제 머릿속에 빨려 들어오고는 잊혀지지가 않았습니다.


  저는 초등 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선생님 성함을 거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선생님은 정확히 기억합니다. 이 분은 제가 공부의 길로 들어서게 만들었고, 또한 목사가 되게 했습니다. 물론 단 한번도 저보고 공부하라고 한 적도 없고, 목사가 되어 보라고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저의 영혼의 아버지입니다. 그 분은 저를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그 사건도 기억하지 못할 것입니다. 도시락 절반은 정말로 보잘것없는 것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저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을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의 우연한 도시락 절반은 절반 짜리 저의 인생을 온전한 것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나눔은 가지지 못한 사람을 부유하게 하지는 못해도, 가지지 못한 것 때문에 자기 자신을 포기한 사람을 그 자신이 되도록 돌이켜 세우는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나눔의 보다 궁극적인 능력은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것을 삭개오의 경우를 통해서 느끼게 됩니다. 삭개오는 유대인으로서 로마제국주의 시절 제국 세를 유대인으로부터 거둬 로마에 바치고 그 사이에서 이익을 챙기는 세금쟁이였습니다. 그는 이 일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십일 세를 정확히 내지 않는 세리들을 율법을 속이는 자로 간주하여 유대인 공동체에서 소외시켰고, 열심 당들은 제국 세 거부운동을 하고 있던 터라 이들을 매국노로 취급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삭개오는 부는 축적했으나, 동족으로부터 받아야만 했던 따가운 시선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있던 그가 어느 날 예수를 만날 결심을 합니다. 문제는 키가 작아 뽕나무 위에서 군중 속에 가린 예수를 찾습니다. 아마도 예수는 삭개오를 이미 여러 번 본 적 있고, 그가 누구인지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며, 예수는 그의 집에 머무를 것을 요청합니다. 삭개오는 물론 너무 기뻐서 기꺼이 예수를 모셔들입니다. 이를 본 주변 사람들이, 아마도 바리새파와 율법학자들이, 예수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고 수군거립니다. 그러나 예수도 삭개오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런데 삭개오의 집에서 놀라운 사건이 벌어집니다. 삭개오는 느닷없이 예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탈을 했으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 이르면, 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과연 그렇게 하고서도 남은 것이 있을까? 남았다면 얼마나 남았을까? 우리는 얼마전 월 150만원 받는 7급 정도의 세무 공무원이 월 1억 원을 모았고, 8년만에 10억을 모을 것을 계획한 장부가 공개된 것을 보았습니다. 이 사람이 10년 뒤에 성공적으로 10억을 모은 후, 만약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갈취한 돈을 4배로 갚았다면, 아마도 모은 돈으로는 모자랐을 것입니다. 어떻든 삭개오가 제국주의 시대에 세리가 될 결심을 한 것은 부에 대한 그의 강한 집착을 암시하고 있고, 그에 따라 상당한 세금을 갈취한 것으로 보이는 데, 재산의 절반을 되돌리고, 남은 돈에서 갈취한 세금을 4배로 갚겠다고 했다면, 그것은 사실상 부에 대한 집착 자체를 포기하고 가난을 각오한 대단한 결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이 사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의 응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이 감격스런 장면을 보고서, 그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참 많이 들어온 말입니다. 예수는 삭개오의 행위를 보고 그의 행위가 '가난한 사람을 구원했다'고 말하지 않았다는 점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예수는 삭개오의 행위가 '그 자신을 구원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삭개오의 행위로 말미암아 누군가가 저의 어린 시절처럼 구원을 얻었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측면은 결코 무시될 수 없는 나눔의 능력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예수는 삭개오가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위대한 결단을 했다고 칭찬하지 않고, 네가 다른 사람에게 너의 것을 나눔으로써 네 자신이 비로소 구원을 얻게 되었다는 점에 초점을 맞춥니다.


  무엇이 삭개오를 구원에 이르게 했습니까? 그것은 그의 나눔의 행위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삭개오의 재산정도에 지나치게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가 삭개오에게 구원을 선포한 것은 삭개오의 재산규모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삭개오가 부에 대한 집착을 이제는 포기하고, 부를 쪼개어 나눔으로써 스스로를 비워낸 그의 위대한 결단입니다. 값싼 구원은 예수를 믿겠다는 말 한마디로서 신앙을 갈음하는 데서 옵니다. 그러나 값비싼 구원은 예수를 믿는 사람에 걸맞게 부와 물질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서, 부와 물질을 나눔으로써 비로소 하늘을 보고 하늘을 만나고 하늘의 소리를 따라 사는 새로워진 삶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최근에 우리가 신문지상을 통해 보았듯이, 위기의 때에 가진 사람은 챙기고, 없는 사람은 나눕니다. 정말로 돈이 많은 기업인들은 외국으로 돈을 빼돌리고, 실업의 위기에 처한 임금노동자들은 봉급에서 몇 퍼센트씩 떼 내어 동료의 고통을 분담하고 있습니다. 실업의 시대에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누는 일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넉넉해지면 나누겠다고 하는 사람은 영원히 나누지 못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아직도 부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나누기 위해서는 부에 대한 집착 자체를 포기해야 합니다. 나눔으로써 가난해진다면, 가난을 즐겨 살 줄 알아야 합니다. 부를 포기함으로써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면, 기독교인에게 그것 이상 영광스러운 일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나눔의 정도는 나눔의 가치를 결정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나눌 것인가 하는 것은 각자 하느님 앞에서 결정할 문제입니다. 나눔은 나누어 받는 사람을 구원하는 힘이 있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우리자신을 완성하고, 우리 자신을 구원하는 능력이라는 것을 깊이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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