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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진관

"생명의 주 - 현실주의를 뛰어넘어 믿음의 결단으로"

(성서본문: 요한복음 11:28∼44)

 

1997.09.07

권진관 형제


[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자매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가 맞이했던 곳에 그대로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가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가서 뵈옵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이르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버니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얼마나 사랑하셨는가 하며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

- 요한복음 11:28∼44


  오늘의 본문은 죽은 라자로를 예수께서 살리신 일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은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대한 태도에 도전을 제기합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운명주의, 현실주의, 개인주의적인 삶에 대해 도전을 해올 뿐만 아니라 변혁도 가져오게 합니다. 그렇듯이 오늘 성서본문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먼저 몇 가지 개념을 들어 오늘의 우리의 삶의 모습을 그려보겠습니다.
   첫째, 노동이라는 개념입니다.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정치철학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활동 중의 하나를 노동이라고 했습니다. 노동은 생존을 위한 인간의 활동입니다. 노동하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빵을 얻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노동은 생명과 생존에 관련이 깊은 것으로 빵을 위한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한 우리는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삶이 노동으로만 채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즉 인간의 활동에 나와 내 가족의 빵을 위해 노동만을 할 것이 아니라 시간을 할애해서 자원봉사 등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노동에 묶여 생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노동할 수 있는 기회마저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합니다. 생존을 위한 현실에의 순응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경쟁체제 속에서 운명적으로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헤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노동으로부터 다소 해방된 활동으로서, 업적을 쌓는다는 개념입니다. 우선 노동과 업적의 차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업적은 우선 그 자취가 오랫동안 남는 활동입니다. 업적이 작품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소유격의 활동입니다. 누구누구의 업적, 그리고 누구누구의 작품입니다. 요즈음 거의 모든 대학에서 종합평가라는 것을 하고 있기 때문에 교수들은 자신들의 업적을 보고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업적이라는 활동은 노동이라고 하는 활동과는 다릅니다. 저서를 내는 것, 작품을 발표한다는 것이 업적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장 훌륭한 작품일수록 오랫동안 인류의 기억에 남습니다. 업적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역량을 다해 이루어 놓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최선의 분신이기도 합니다. 업적이란 바로 자기의 최선의 얼굴과도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업적이 우리의 활동 중 가장 가치 있는 것인지는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업적주의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활동이며 잘못된 활동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모든 것들을 나의 업적에 유용한가로 가치 기준을 삼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매우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중심주의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하면 교만으로 빠질 수 있습니다. 말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면서, 인간의 어떠한 아름다운 업적일지라도 그것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을 했음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루터는 인간의 가장 최선의 행위도 업적에 불과하며, 그 속에는 자기를 내세우는 교만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예수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우리가 노동에 노예상태가 되는 것을 염려하셨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노동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업적도 뛰어넘는 새로운 인간활동의 모습입니다. 바로 그 말씀이 오늘의 주제인 믿음의 행동입니다. 이 행동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는 행동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노동이나 업적으로가 아니라 믿음의 행동으로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난받는 자들을 위해 그들의 병을 고치시고, 가르치시고, 온갖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예수는 어떤 저작도 내지 않으셨고 어떤 정치적인 업적도 세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공적을 내세우지 않고 온갖 노예상태에 있는 인간들의 해방을 위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었습니다. 믿음의 '행동'의 특징은 그것이 기록되거나 업적으로 남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유형의 것으로 남지 않고 공중으로 산화되어 없어지고 맙니다. 자취를 남기지 않는 인간 행동의 양식입니다. 그것은 남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합니다. 남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는 행동, 그것이 바로 '생명의 길'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일입니다. 그것은 자기를 내세움 없이, 누가 알아주건 말건 자기 자신을 내어놓는 희생적인 활동이며 타자의 생명을 사랑하는 활동입니다. 이 믿음의 행동은 자기의 이름을 내세우는 업적이 아니라, 자기는 없고 오직 이웃의 아픔을 치유하고, 타자의 생명을 살리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의 이야기에서 이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 먼저 마르타와 마리아가 나오는 누가복음의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언니 마르타는 분주하게 손님을 대접하려고 준비하는데 마리아는 전연 자기를 도와주지 않고 예수의 발치에 앉아 그의 말씀을 듣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에 불만인 마르타는 예수께서 마리아의 행동에 대해 꾸지람 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마르타의 생각은, 마리아가 예수를 존경하고 그의 말씀을 따른다면, 지금 그분을 위해 나와 함께 봉사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마르타는 매우 현실적이며, 상황에 맞추어 최선을 다하는 관점을 가졌습니다. 그는 인간의 도리를 다하며,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언니가 아무리 바빠도 개의치 않고 마치 더 중요한 것이 있는 사람처럼 자신의 일에 몰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마르타의 현실주의적인 관점보다는 마리아의 행동을 더 높이 평가했습니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마르타와 마리아의 다른 점을 또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죽은지 나흘이 된 라자로의 소식을 듣고 찾아오셨습니다. 먼저 나와서 반기는 마르타와 예수 사이에 몇 마디 말씀이 오갔습니다. 마르타는 예수께서 빨리 오셨더라면 오빠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 말하면서, 그렇지만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죽은지 나흘이 된 지금 예수가 왔어도 결코 라자로는 살아날 수 없다는 마르타의 현실주의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이야기의 특징적인 것은 예수께서 마르타와 이야기하고 있던 장소에서 더 나아가지 않고 마리아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점입니다. 마리아가 와야 생명을 살리는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마르타의 현실주의적인 생각만 가지고는 생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비합리적이고 비현실적인 것같이 보여도 믿음의 결단과 자기 투신 없이는 결코 생명으로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그러한 믿음의 결단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예수가 부르고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벌떡 일어나 예수께 달려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곤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전폭적인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후에도 마리아가 합리적인 계산 없는 행동을 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일을 기억합니다. 마리아가 유월절 전에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뿌리고 자기의 긴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다시 마르타와 예수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돌을 치우라고 하신 예수의 말씀에 마르타는 그의 무모한 행동에 대해 현실주의적인 입장에서 말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네가 믿기만 하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내가 말하지 않았는가"라고 말씀하심으로 사람들이 돌문을 엽니다. 돌문이 열리고 그 앞에서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기도하십니다. "아버지, 제 청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제 청을 들어주시는 것을 저는 잘 압니다. 그러나 이제 저는 여기 둘러선 사람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주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고 이 말을 합니다." 그리고는 "라자로야, 나오라"고 외쳤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천으로 손발이 감긴 채 나왔으며 예수는 그를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이 생명 살림의 이야기가 우리 삶의 근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는 마르타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업적을 일으킬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의 생각에 죽은 지 나흘이 지났으니 시체 썩는 냄새가 날 것은 당연하며, 그를 다시 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예수는 믿으면 가능하다고 하였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생명 살림을 위해서 확신을 가지고 뛰어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뛰어들면 새로운 길이 보이며, 새로운 현실이 펼쳐질 수 있으며, 또 지금까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게 보였던 일도 가능해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삶을 돌아볼 때 우리는 패배와 실패, 좌절과 죽고 싶은 마음을 가질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험들이 오히려 나의 생명을 살릴 뿐만 아니라, 더 풍부하게 만드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라자로를 일으켜 세운 예수의 이야기는 우리의 과거의 경험들을 재조명하고 오늘의 삶에 새로운 희망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어두웠던 경험과 시간들이 이 이야기로 말미암아 밝은 시간으로 뒤바뀔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암흑시기가 이 생명의 이야기를 통하여 황금의 시기, 전성의 시기, 희망의 시기가 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이 이야기가 희망 없이, 생명력 없이 주어지는 대로 피동적인 삶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는 나의 이야기,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면 그 동안 과거의 운명에 대해 소극적으로 끌려왔던 우리의 삶이 변혁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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