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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선민

 

고통 가운데서 얻은 희망

(마태복음 5:4, 로마서 5:3-4)

 

2011년 11월 6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김선민

 

 

들어가며

몇 주 전, 한완상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고부터 걱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간증을 언젠가는 하게 될 거라 생각했었고, 한편 바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도둑처럼 때가 올 줄은 몰랐습니다. 잠시 망설였지만, 알지도 못하는 신학이론을 말하라는 게 아니라, 살아온 이야기를 글로 썼듯이 말로 하면 된다 하시는 한 선생님께 더 못하겠다고 말씀드리면 교만일 것 같았습니다.

하기로 마음먹고 나서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첫 번째로, 제가 지내온 인생이라는 게 사건은 많고 구성은 엉망인 막장드라마 같아서, 저 스스로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잘 통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본 다른 분들의 간증은 인생의 어떤 일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만나는 이야기였는데, 제가 겪은 일들은 너무 다양해서 간증이라는 형식에 적절하게 배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제가 최근 직장에서 하는 일이 너무 바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인생에서 가장 바쁘고 활기찬 시간에 간증이라는 사건을 배치하신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지난주에 그 뜻을 알았습니다. 틈틈이 써놓은 글들을 한데 모아서 다시 읽기 시작하자, 저는 제가 겪었던 상처들의 무게에 다시 눌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바쁘지 않아서 지난 한달 내내 이 간증을 생각했다면, 전 여기에 깔려서 질식했을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그냥 담담하게 제가 겪어왔던 일들을 풀어놓으라는 뜻이고, 이렇게 제 상처들을 내려놓고, 또 한걸음 앞으로 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 무게를 그냥 견디기로 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1964년 5월 서울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제 유년의 기억은 “배 아픈 것”에서 시작합니다. 언뜻언뜻 기억나는 어렸을 때 장면은 가끔 배가 아파서 떼굴떼굴 구르던 것, 그러다가 아버지 등에 업힌 것들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나서, 다른 아이들도 배 아프다고 양호실을 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누구나 배는 그렇게 아픈 거구나 했습니다. 몇 달에 한번씩 그렇게 아프다가 또 그 때를 넘기면 말장하곤 했습니다.

교육열이 높았던 부모님 덕분에 공부는 크게 뒤쳐지지 않게 할 수 있었고, 약사였던 어머니 영향으로, 의과대학에 진학했습니다. 대학에 들어갔을 때는 1982년, 너무나 암울했습니다. 교정에서 웃음소리 한번 내보지 못하고 지내던 저는 이른바, 학생운동권에 속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의과대학을 지속하면서 학생운동을 하기란 어려웠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전 의사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지금은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지만, 나만 잘 사는 길을 선택했다는 죄책감은 오랫동안 남아서 비교적 최근까지 저를 괴롭혔습니다. 하지만, 저는 환자 보는 것을 참 좋아했습니다. 특히 내과실습을 돌면서 의대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첫 질병

문제의 그 날은 그렇게 행복하게 내과 실습을 돌 때 찾아왔습니다. 그때는 실습학생들이 조를 짜서 전공의 선생님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병동 실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병아리가 어미닭 쫓아다니듯, 훌륭한 선생님들과 재미있고 알차게 일주일동안 병동실습을 하고 마치는 금요일 저녁, 고생한 우리에게 선생님들은 환송회를 해주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들과 저녁을 먹는 도중에 평소에 아프던 양상으로 배가 아파왔습니다. 배 아프다고 말하면 저만 이차에 안 데려갈 것 같아서 저는 말을 안했습니다.

10분, 20분 지나자 배가 너무너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로 너무 아파지자, 그때는 배가 아프다는 말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전 응급실로 실려 갔습니다. ‘담관낭종’이라는 진단이 내려졌습니다.

선천적으로 담도가 약간 늘어나 있으면서, 어린 나이에 담석이 생기는 병입니다. 그냥 두면 계속 복통을 느끼다가, 나중에 그 부위에 암이 생기기도 하는 병이랍니다. 저도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끝없는 고통으로

일사천리로 입원과 수술을 하고 행복하게 지낸 것은 딱 일 년이었습니다.

일 년이 지났을 때 다시 복통이 왔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했지만 이번에 새로 온 복통은 멈추질 않았습니다. 수술이 잘못되어 이번엔 담도가 아주 막혀버린 겁니다. 재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번에는 배를 열고, 담도 안에 ‘T’자 모양 관을 삽입하고 그 관의 긴 쪽을 배 밖으로 내어 놓은 채로 좁아진 담도가 늘어나기를 기다리면서 세월을 보내는 겁니다.

링거주사 맞을 때 쓰는 줄 같은 고무호스가 덜렁덜렁 배 밖으로 나와 있는 것이 상상이 되시는지요? 그것도 스물두 살 어린 아가씨 배에 말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옆구리를 창에 찔리셨다는데 나도 예수님 반열인가?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는 본과 4학년 봄, 결국 휴학을 해야 했습니다. 제 인생에 처음으로 멈춤 혹은 좌절이란 단어가 찾아온 것이었죠. 어처구니없었지만 시간은 흘렀습니다. 몇 달을 그렇게 지내고 관을 제거했습니다.

하지만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고 한 달 만에 다시 통증이 왔습니다. 이번에는 담도에 염증까지 와서 고열까지 동반했습니다. 다시 수술을 할 수는 없다고, 이번에는 피부 밖에서 큰 바늘로 담도까지 구멍을 내자는 결정을 했습니다. 뜨개질바늘같이 굵고 긴 바늘로 뱃속 깊이 구멍을 낸 후, 구멍의 지름을 조금씩 늘이는 겁니다. 그래서 만들어진 트랙으로 관을 넣어서 다시 배 밖으로 빼내는 겁니다.

바늘이 담도에 이를 때 느낌은 이렇습니다. 처음에 마취제를 피부에 놓을 때엔 따끔합니다. 그러고 나서 큰 바늘을 피부에 넣을 때엔 둔탁한 느낌이 듭니다. 이어서 바늘은 복막을 뚫습니다. 그때는 꼭 배가 터지는 것 같습니다. 이어서 간을 뚫게 되는데, 이번에는 세상이 터지는 것 같았습니다.

문제는 제가 일 년 전에 수술을 했기 때문에 보통 사람과 담도의 위치가 좀 다르다는 거였습니다. 몇 번을 찔러도 바늘은 들어가야 할 자리에 들어가질 않았습니다. 처음 몇 번까지는 헤아렸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그렇게 일곱 번 까지는 세었는데 다음은 기억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 때에 제 마음에 떠오른 찬송가 한 곡이 있었습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

저는 그때까지 교회에는 다니지 않았지만, 기독교 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다음 날 교수님은 간을 2/3 가량 잘라내자는 결정을 하셨습니다. 도서관에는 우리의 학우 김선민이 간 절제술을 받는답니다. B형 혈액을 구합니다. 하는 종이가 나돌았습니다. 저를 돌보던 어머니가 갑자기 기억을 상실하셨습니다. 너 지금 왜 병원에 와 있는 거니? 난 약국을 보러 가야하는데 하는 말을 반복하셨습니다. 서울대병원 입원실 8층에서는 제가 고열에 시달리고, 응급실에서는 어머니가 정신과 교수님을 만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하는 단어는 지옥이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저를 단련하기 위해 주신 것이라고 밖에는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결국 엎치락뒤치락 의사결정의 번복 끝에 간은 자르지 않았고, 다시 관을 넣을 수 있었고, 항생제로 열은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배에 관을 넣고 기약 없이 지내는 날들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두들 이번에는 휴학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그냥 그 관 꼽은 채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그 관을 똬리 틀듯이 돌돌 말아가지고 배 옆에 딱 붙이는 겁니다. 그러고 거즈를 위에 붙여놓고 좀 헐렁한 원피스를 입으면 감쪽같습니다. 그때는 제가 훨씬 더 날씬했으니까 사람들은 몰랐습니다.

우수한 성적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졸업을 했고, 인턴도 마쳤습니다.

하자구나 하니 일상은 차라리 쉬웠습니다. 그 관을 꼽고 가장 귀찮은 것은 목욕과 하루 한 번 씩 해야 했던 소독이었습니다. 물론 통 목욕은 못합니다. 대신 샤워는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자주 샤워하고 소독해야 피부가 산뜻하고 뽀송해지니까 더 하게 되죠.

문제는 끝을 알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제까지 이 관을 갖고 다녀야 하냐고 여쭤보면 교수님은 우리나라에서 몇 년 갖고 산 사람도 있었다는 대답으로 끝을 흐리셨습니다. 세계 기록은 20년이었습니다. 논문에는 이 병을 비극적인 질환(tragic disease), 혹은 임상적인 악성 질병(clinical malignancy)라고 기술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이후 막막하다는 단어를 쓰지 않습니다. “막막하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나 쓰는 단어였습니다. 그렇게 대책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저는 소독하다가 그냥 관을 확 잡아 빼 버렸습니다. 이 상황을 종식시켜줄 사람은 저 스스로밖에 없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리고는 소독하다가 실수로 빠져버렸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물론 그러면 안 되는 거였습니다. 관을 빼고 나서도 한참을 더 시름시름 아팠지만,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다가 한 2-3년 지나고 나서부터는 괜찮아졌습니다.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그것과 마주하고, 벗하고, 그러면서도 제가 해야 할 일, 배워야 할 것들을 계속하는 습성을 저는 그때 익힌 것 같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 어려움의 한 가운데를 걸어온 제 자신에게 박수를 쳐주고 싶다는 생각은 사실은 올해 봄이 되어서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어려움을 물리적으로는 정면 돌파했지만 심리적으로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을 부정한 겁니다. 고열과 복통에 시달리다가 열이 떨어지고 마약성 진통제가 없어도 지낼만해지자, 저는 그 사실들을 의식에서 싹 지워버렸습니다. 난 어려움을 겪은 게 아니다. 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그러니 난 아무렇지도 않다. 하고 말입니다.

세상에 그럴 수가 없는 거죠. 차라리 그때 그 어려움과 좌절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였다면, 더 빨리 극복하고 뒤에 겪은 어려움들 가운데 일부는 겪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근데 전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당하지 않은, 정말로 낯선 고통의 상황에서, 제가 아픈 사람, 이른 바 “쭉정이”란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 제 앞에는 매우 피곤한 인생이 펼쳐졌습니다.

우선 저 자신과 남들에게 더 엄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 스스로도 남도, 사지육신 멀쩡해서 자기가 하는 일을 게을리 한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결혼도 그랬습니다. 의사가 되는 것 자체와 남들처럼 시집가서 아이 낳는 것은 제 인생 최대의 목표가 되었습니다. 인턴 마치기 전에 결혼했습니다. 결국 아이도 둘을 낳았습니다.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일들에도 불구하고, 그 때 그 상황에 처한 저와 결혼해 준 아이들 아빠에게 감사하는 마음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저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환자 보는 것을 좋아하는 저였지만, 당시 건강상태로는 병원에서 며칠 밤씩 당직을 해야 하는 임상과목을 하겠다는 엄두를 내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기초의학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남들 하는 것은 모두 따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 덕분에 결국은 뒤늦게 가정의학과 수련을 다시 받았고, 그러고도 한참 더 공부를 한 끝에 결국 보건의료정책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게 행복이라는 것이 찾아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에, 문제의 사건과 저는 다시 마주해야 했습니다.

 

의사들 파업에 반대하여

한국 보건의료역사에 있어서 2000년은 그 어떤 다른 해와도 비교할 수 없는 해입니다. 2000년 7월. 여러 가지 보건의료개혁법안 가운데 하나인 의약분업이 실시되었습니다.

여름이 되자 의사, 약사, 정부, 정치권, 시민단체 들의 대립이 점차 고조되어 갔습니다. 의사들의 파업이란 단어가 일간지에 오르내릴 때에도 설마 파업까지? 했지만, 불행히도 파업은 시작되었습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의사들이 파업을 할 때 제 마음은 여전히 환자였던 겁니다. 나를 돌봐주어야 할 의사들이 파업을 한다는 사실에 전 슬펐습니다.

아이 아빠와 파업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크게 싸움을 하고 난 새벽, 전 일필휘지로 글을 썼습니다.

제발 파업하지 말자고 썼습니다. 빨리 병원으로 돌아오라고요. 정말 그 글을 쓰면서 내내 울었습니다. 그 글은 남편에게 쓰는 편지의 형식으로 했습니다. 다 써서 동이 트기 전에 그걸 신문사로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글에는 파업에 동참한 의사들에 대한 원망이 실려 있었기 때문에, 제 이름을 실을 수는 없었습니다.

한 일간지에 일면 탑으로 실렸습니다. 무기명의 글이 반향을 일으켰다고들 했습니다. 의사들도 마음이 많이 움직였고, 시민들은 글에 감동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신문에 글이 실린 다음 날인가, 한 공중파 방송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습니다. 이름이 실리는 게 무서워서 무기명으로 냈는데, 방송 인터뷰 할 수는 없어서 전 싫다고 했습니다. 모자이크 처리해 줄 테니 꼭 만나서 이야기를 하자던 방송작가는, 인터뷰를 다 마치고 나자, 파업에 반대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이냐, 양심에 어긋나는 일이냐고 제게 물었습니다. 말문이 막혔습니다.

결국 8시 뉴스에 두 번째 꼭지로 아주 크게 제 얼굴이 나갔습니다.

뉴스에 나가니, 원고를 실었던 신문사에서도 인터뷰요청이 왔습니다. 그리고 또 대문짝만한 기사.

의사들과 관련된 모든 인터넷 게시판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폭력적인 댓글이 어떤 것인지 절절하게 깨닫게 되는 날들이 지나갔습니다. 밤이 깊어지다 못해 동이 터 오는데, 시시각각 밑에서부터 댓글이 올라옵니다. 사방 누군지도 모르는 자객들과 싸우는 것 같습니다. 게시판에서 이름을 밝힌 사람은 저 하나. 나머지는 모두 익명입니다. 글에는 내용이 없습니다. 모두 욕설입니다.

사람들은 쉽게 말합니다. 인터넷을 뭐하러 들여다보고 의미 없이 던지는 욕설에 마음을 다치느냐고요.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 욕으로 도배가 될 걸 알면서도 게시판을 외면하지 못합니다.

그 아픈 기억은 당시의 다른 기억들과 함께 의식 저 아래로 숨어버렸다가, 최근 들어서서야 비로소 복원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건 단어 그대로 유혈이 낭자한, 상처였습니다.

그 일을 겪고 나서 전 의료계에 깊은 환멸을 느꼈습니다. 한편으로는 여러 분야의 정책 연구를 하면서 늘 가치의 문제와 맞닥뜨렸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것들을 설득하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그것은 논리 이전에 가치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건강이라는 것을 인간이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로 볼 것인가, 아니면 국가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볼 것인가에 따라 같은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은 천양지차였으니까요.

그때 마침 한 지인으로부터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게 생기는데 거기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거짓말 안보태고 일분도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또 새로운 고통들

하지만, 인권위에 가기로 하고 나서 바로 일주일 뒤에 제게 다른 고난이 찾아왔습니다. 아이들의 아빠가 이혼을 원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유이기도 했고, 어느 것도 이유가 아니기도 했습니다.

인권위로 직장을 옮기고, 싱글맘이 되고 한 삼년이 지나서 또 저는 대장암 3기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이쯤 되면 제 인생을 왜 막장드라마라고 칭했는지 이해하실 겁니다. 아이들은 아빠에게 보내야 했습니다. 다시 세상에 나올 것이라는 기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2년 가까이 두문불출 연락두절인 상태로 외부와의 연락을 끊었습니다. 동창들 사이에서 저는 죽은 사람으로 알려졌습니다.

수술을 받고 나서 2년이 되던 2006년 4월 저는 다시 세상에 나왔습니다. 지금의 직장인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일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제가 하는 일은 전국의 병원과 의원의 질적 수준을 평가해서 국민들에게 발표하는 일입니다.

지독하게 말 안 듣는 저는 그때까지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다. 물론 분명 대학 본과 3학년 때, 방사선과에서 지옥 불구덩이 같은 시술을 받으면서 저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했고, 아픈 것 낫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종교는 아니라는 생각을 해서, 교회에 못 갔습니다. 더 이성적인 상황에서 교회에 가자 하고 말입니다. 정말 교만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교만이 많은 어려움을 또 불러왔지만, 그 어려움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제가 있을 것 같지 않기 때문에 후회는 안합니다.

 

결국 교회에

암 수술을 받고 나서 아빠에게 보냈던 큰 아이는 2년이 채 안되어서 제게 돌아와야 했습니다. 몸과 마음이 말라비틀어져서, 손에 쥐면 바스락하고 부서져 버릴 마른 낙엽 같은 모습을 한 큰 아이를 제가 다시 데려왔을 때가 어쩌면 제 절망의 가장 극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아이 역시 독립된 인격체이기 때문에 제 간증에서 아이의 말을 하지는 못하는 것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2008년 어느 봄 날, 그렇게 상처받아 웅크린 아이의 손에 이끌려 저는 교회에 가기 시작했습니다.

그해 봄, 저를 감싸던 그 따스한 기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구름위에 있는 듯 한 느낌, 테헤란 로에 있는 저희 집 창가에 앉아 있노라면, 지나가는 차 소리가 모두 천사들의 나팔소리처럼 들리던 기억, 사람들을 볼 때마다 저 사람은 하나님에 의해 들림을 받은 사람인가 아니면 앞으로 받을 사람인가만 보이던 생각. 제게 들려오는 모든 견해와 느낌들이 하나님의 말씀처럼 들리던 때를 지나왔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말씀드릴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요. 그저 때가 되었을 따름이라는 것, 모든 것은 저를 위해 예비하신 그 분이 마련하셨다는 것 밖에는 제가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 저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의지라는 것의 실체를 느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최근의 나는

교회에 가기 시작하고 나서, 이제 만 3년 8개월이 되어옵니다. 하나님과 처음 만난 그 꿈같은 시간들을 보내고 나서도 참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것들을 풀어놓는 것이 간증이라는 것을 잘 알지만, 그건 앞으로 천천히 나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근 2-3년 사이, 많은 분들로부터 좋은 일 있느냐, 혹은 좋은 사람 생겼느냐는 말씀을 듣곤 합니다. 그중 제가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은 편안해 보인다는 겁니다. 가끔은 저를 부잣집에 태어나서 어려움이라고는 하나도 모르고 자란 유복한 된장녀로 오해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여러 가지 외부적인 요인들이 작용을 했겠지만, 제 모든 것을 끄집어내서 하나님께 내려놓고 답을 구하는 기도를 매일 매일 했다는 것, 그러면서 저 스스로가 용서되고 저도 이 세상에 나와서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가치가 분명 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는 것, 그러고 나서 다른 이들의 아픔이 마음의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는 것, 세상은 참 아름답고 살만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부서지며 나아가면서 가능해졌다는 것 정도를 제가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대장암을 졸업했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바로 엊그제까지도 저는 슬픔과 분노, 불안, 갈망과 같은 감정과 싸워야 했습니다. 3년 째 하는 새벽운동이 이제는 버릇이 되었지만, 러닝머쉰 위에서도 저는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그저 감성이 예민해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바로 이번 여름에도 저는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는, 가슴이 산산조각 나는 것 같은 이별과 고통들을 겪어야 했습니다. 질병이나 이혼과 같은 사건으로 긴 세월 고통을 받다보면, 그 사건으로부터 벗어난다 해도, 일상의 곳곳에 흔적을 남깁니다. 여전히 저는 그런 사건들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여전히 저는 슬프고, 외롭고, 마음 아프고, 때로는 절망합니다. 하지만, 그런 슬픔과 분노 불안 갈망의 한 가운데를 걸어오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것들을 획득했다는 사실 또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통에 빠지게 될 때 이렇게 슬픈 날들을 견딜 가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애통의 한 가운데에 있을 때에는,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이 눈에 보입니다. 말은 안하고 있어도 마음이 애통한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게 제 눈에 보이면서 사람들이 안쓰러워 보입니다. 그들에게 저는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딴청을 피우는 동안 제 슬픔을 잠시 잊기도 합니다. 제 슬픔인지 옆 사람의 슬픔인지 경계가 모호해지는 순간도 옵니다. 물론 제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걸기 시작하면, 옆 사람의 슬픔은 분명 조금 옅어집니다. 상대방이 느끼고 있는 애통의 감정을 제가 현재 진행형으로 느끼고 있기 때문에, 그럴 때 전하는 위로나 공감은 다른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깊어집니다. 반대로 제가 애통의 한가운데에서 누군가의 위로를 맛보았을 때에, 사람이 천국에 들어서면 바로 이런 느낌을 받겠구나 하고 확신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애통에 빠진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로하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를 잘 압니다.

이렇게 남들과 위로를 주고받는 소통을 하면서 애통의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그러고 있는 저 자신이 참 대견해집니다. 아, 이 시간들을 견딜 가치가 있구나 하고요. 저를 슬프게 하는 문제는 하나도 해결이 안 되었지만, 세상과의 따뜻한 접점이 더 넓어지는 거죠. 그렇게 제가 먼저 세상을 사랑하다 보면, 어느 새 세상도 절 사랑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기특한 것들! 하고 미소 짓고 계시는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런 것들은 제게 애통이 없었다면 느낄 수 없는 행복입니다. 제게 고난을 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기말 고사

마지막으로 최근에 제가 겪어야 했던 고난과 제가 그 통로를 어떻게 통과했는지를 말씀드립니다. 이 글은 지난 초여름 지인에게 썼던 편지입니다.

=========

S님,

혹시 스팀-다리미 아세요?

다림질하면서 뜨거울 때에 단추 하나 누르면 김이 푸욱~하고 나오면서 옷에 물기가 번지는 거요. 아시죠?

지금 꼭 스팀-다리미를 가슴에 댄 것 같이 마음이 아픕니다.

그냥 쿨 하게 말로 하자면, 큰 아이가 아파요. 아주 쪼금.

많이 아픈 건 아니고, 한쪽 눈 시력이 하루 사이에 갑자기 떨어졌어요.

원래 시력이 좋았기 때문에 아주 안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시력이라는 게 갑자기 떨어지면 불편하거든요. 더구나 요즘 아이는 기말고사를 치르고 있어요.

이럴 때에는 시신경염을 의심한답니다.

어제 검사를 잔뜩 하고 왔는데 금요일에 또 검사를 해야 한답니다.

정확한 통계는 말할 수 없지만,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라면 한번 그러다가 낫는 경우가 많지만, 전신질환을 동반하는 경우라면 평생을 고생해야 합니다. 정말 무서운 병이지요.

식자우환이라고 이런 병이 흔하지 않다는 것, 예후는 다양하다는 것을 아는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요, 이 병은, 특히 아직은 걱정하기에 이르다는 것도 알지만,

그래서 제게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담대하게 임할 텐데요,

아이에게 이런 것이 찾아오니까 정말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아이에게 준 상처가 하늘에 닿게 생겼는데요.

눈물도 꼭 스팀다리미에서 증기가 나오듯이 남들은 안보이게 흐르지 않을 정도로만 나고 있어요.

S님,

기도가 많이 필요한 병이예요.

앞으로 예후가 다양하거든요.

아이가 아픈 엄마의 마음이 어떤지 제가 절절하게 느껴서 의료보장에 더 힘쓸 수 있게 하시고,

제가 썩인 엄마의 마음이 어땠는지 늦게라도 알 수 있게 하시고,

그래도 제가 의사라서 아이가 말한 즉시 삼차병원에 보낼 수 있었고,

아이 아빠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병원 교수라서 가자마자 진료 받을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고 있어요.

S님, 이건 정말 S님 앞에서 폼 잡자고 드린 말씀은 아니예요.

감사해야 하나님이 기쁘게 응답하시는 것을 제 경험으로 체득했거든요.

S님도 이미 중보기도 하고 계실 것으로 믿습니다.

=========

그러자 S는 제게 짧은 위로의 편지를 보냈고, 전 다시 이런 메일을 보냈습니다.

=========

슬픔과 상실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겠지만요,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것들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오묘한 법칙인 것 같아요.

눈물은, 눈이 아니라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고여 옵니다.

그렇게 마음의 압력이 올라가면서, 때로는 절망하게 되고, 때로는 원망하게 됩니다.

남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기를 원망하기도 하고, 하다하다 안 되면 하나님을 원망하죠.

하지만, 그럴 때 가만히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모든 슬픔과 상실에는 그것과 함께 하나님이 주신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실 그 동안 제 인생을 가만 들여다보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슬픔은 없었습니다.

다만 그 의미를 빨리 발견하느냐 나중에 발견하느냐는 차이가 있지만요.

아마 제 인생에 상실이 없었다면 전 너무나 추한 모습이 되어 있었을 겁니다.

지금보다 훨씬 더 공격적이고, 남을 이해하지 못하겠지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비판하기만 할 거구요.

이 나이 먹고, 직장동료, 가족, 친구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건 모두 제가 겪은 상실의 덕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겪는 상실이나 고통은 제가 겪은 고통과는 또 다르네요.

이런 설명으로 마음의 압력이 잘 내려가지 않아요.

당분간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 올라온 이 압력과 벗하고 살아가야 할 것 같아요.

S님,

한참을 울었습니다.

하지만, 눈물이 나면 터질 듯이 올라가던 마음의 압력이 조금은 꺼지지요.

그리고 현실적이 됩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저보다 병에 더 잘 대처할 사람이 있을까요?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큰 병원에 연이 없는 것도 아니고,

병원 사람들 저라면 모두들 존중하고,

합리적인 의료이용이야 제 전공이고요.

더 큰 것은 아이에 대한 끝없는 미안함이지요.

밥을 너무 못 해먹여서 그런 건가,

비타민을 안 먹여서 그런가,

집이 너무 멀어서 그런가,

하겠다고 고집하는 아르바이트를 말려야 하나,

어려서 너무 마음에 상처가 남아서 그런가,

예쁘다고 아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남들에게 자랑해서 그런가,

이런 비현실적인 생각들이 꼬리를 뭅니다.

하지만, 애써 마음을 바꿉니다.

글을 쓰고 말을 하면, 그 글과 말이 다시 생각을 규정하게 되는 것 같아요.

감사기도를 드리면 그 감사는 다시 현실이 되는 것 같고요.

그래서 이런 기도로 편지를 맺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지난 날 아이에 대해 가졌던 미안한 마음을 다시 돌아보게 하시고,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하시고,

다시 상실이 찾아올 수 있음에 대해서 자각할 수 있게 하시고,

그래서 겸손함이 무엇인지 새로 알게 하시고,

뛰어가다 멈춰서 돌아볼 수 있게 하시고,

삼가 기도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하시고,

인간으로서 살아감에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게 하시고,

딸과의 관계를 돌아봄으로, 부모님과의 관계를 다시 정립할 수 있게 하시고,

다른 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아픔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하시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이 어려워하는 이들을 이해하게 하시고,

제 어려움을 나눌 수 있는 동료를 보내 주신 것,

참 감사합니다.

제게 아직 노동할 수 있는 힘이 남아 있고,

제게 아직 병원에 갈 수 있는 돈이 남아 있고,

제게 예쁜 딸이 있고,

제가 아직 앞을 볼 수 있고,

제게 찾아왔던 병으로 인해 팔 다리를 못 쓰게 된 것이 아니고,

제게서 아직 지적 능력을 거두어 가지 않으셨고,

제게 아직 아이를 돌볼 수 있는 능력을 남겨주셨고,

제게 저를 위로할 수 있는 동료를 허락하셨고,

제가 그 감사를 글로 표현할 수 있게 통로를 허락하셨고,

아이에게 좋은 음식을 해주지 못하지만, 언제든 어려운 일을 제게 털어놓을 수 있게 하시고,

운전해서 아이를 데려올 수 있게 하시고,

이루 다 말로 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제게 허락하신 이 은혜에 감사합니다.

=========

다음 날 병원에 간 아이에게서 천만 다행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시신경염은 아니었고, 다만 저를 닮아서 난시가 있는데, 어렸을 때에는 모르고 있다가 성인이 되어서 알게 된 거라고, 안경을 쓰면 된다고요. 갑자기 알게 된 것도 흔한 일이랍니다.

바로 그 다음 주 전 대장암 수술 후 7년에 종지부를 찍는 병원 방문을 했습니다.

아이가 기말고사를 치는 동안, 전 7년을 마치는 기말시험을 치른 것 같았습니다.

이번 시험은 괜찮게 본 것 같은데, 죽는 날까지 내내 잘 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제 아픔들을 다른 이들에게 내려놓으면 무너져 내릴 것 같았습니다. 이렇게 늦게나마, 뻣뻣하게 날선 긴장과 상처로 웅크린 마음을 내려 풀어놓을 수 있게 하심에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 당신의 사랑을 받아 마땅한 존재라는 것을 언제나 기억하게 하시고, 그런 충만한 사랑 가운데에서, 함께 살아가는 모든 형제자매가 당신께서 눈물로 사랑하시는 자식이라는 것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애통 가운데에서도, 한줄기 여름 바람 같은 위로와 사랑을 주고받는 저희들 되게 하시옵소서.

죽으심으로써 우리의 죄를 사하신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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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인숙 2011.11.11 12:42 (*.32.219.233)

    자매님의 간증을 공동체원과 공유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듣는 내내 진실되게 전하려는 자매님의 마음이 느껴짐, 듣고 있는 자신의 부끄러움,  감사함 등이 교차하는 시간이었답니다. 고통과 애통을 관통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깊게 느낄 수 있었어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닌 달을 직접 보는 느낌이요. '애통하는 자의 희망'을 잘 깨닫게 해 주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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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일영 2011.12.06 11:18 (*.75.244.36)

    지난주에 못 뵈었네요.설교하시는주에 해외엘 나가있었지요.설교를 올려주셔서 잘 읽었습니다.욥기를 읽고 있는 느낌 이었어요.감동 과 함께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자신의 이야기들을 모두 드러내기가 쉽지 않았을텐데요.앞으로의 삶에 하나님의크신 사랑과 은총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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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pe 2012.06.11 13:09 (*.162.62.210)

    최근 심야토론에서 논문조작해서 발표한 일명 화이트녀 김선민이 맞는지 모르겠군요. 믿는 사람인 줄 몰랐지만 같은 믿는 자로서 너무 부끄럽네요. 논문 자료를 그것도 공영방송, 국민이 보는 TV에서 태연하게 조작하여 발표하시다니 학자의 양심, 그리고 믿는 사람으로서 어찌 그리할 수 있느지.... 또 불신자들이 비난에 변명할 수 없습니다. 그 김선민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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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11 19:41 (*.122.170.6)

    이 분이 심야 토론에 나왔던 그 유명한 화이트녀 시군요...

    거짓자료 가지고 나와서.. 통계적 유의성도 없는 자료 가지고 나와서 국민들을 호도 하시는 분이..

    교회에서 간증을 한다라...

    정말 가식적이시군요..

    의사들 파업할 때, 본인만이 의인인척 하는 모습도 참 기가 막힐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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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섭 2012.06.12 00:27 (*.209.7.162)

    hope(*.162.62.210), 헐(*.122.170.6) 씨에게

    말씀증거 란은 우리 교회로선 매우 소중한 장입니다. 말씀증거 내용과 관련이 없는, 사회적 이슈를 갖고 와서 재뿌리기식으로 댓글 다는 것은 씨의 진정한 의도에 대해 의문점을 들게 할 뿐 아니라, 씨 측의 소속집단에 대해서까지 부정적 인상을 남깁니다. 그리고 "~녀"식의 명명은 여성에 대한 비하적 언사에 해당합니다. 정식으로 쓰려면 자신의 본명과 직업을 적시하고 정면으로 쓰기 바랍니다. 뒤에서 "~녀"라는 여성비하적 낙인이나, 뒤에서 댓글질하는 그런 유치한 대응하지 마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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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창엽 2012.06.17 13:08 (*.134.86.145)

    첫째.

    물론,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쓰면서 별명을 써도 상관 없습니다. 특히 정권을 비판하는 일은 개인에게 공연한 피해가 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별명을 쓸 수 있도록 해야겠지요.

    하지만, 불특정 다수가 한 개인을 비판할 때는 실명으로 당당하게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주장이 정당하다면 뒤에 숨지 말고 손들고 똑똑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둘째.

    남의 의견을 공격할 때는 적절한 자리에서 적절한 시점에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님들께서는 건강보험제도와 의사들의 의료수가에 대한 사안을 비판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인터넷을 뒤져서 그 일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의 교회 게시판에 들어와서 말씀증거(설교) 아래에 이런 식으로 찍찍 휘갈리고 가면, 님들께서 주장하는 일에 도움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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