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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붓다의 땅에서 다시 만난 예수

(마태복음 6장 24절)

 

2011년 8월 28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정경일 형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습니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됩니다.

여러분은 하느님과 맘몬을 아울러 섬길 수 없습니다.

- 마태복음 6장 24절

 

 

정복자 예수

 

지난 여름은 제게 특별했습니다. 석달 동안 스리랑카, 인도네시아, 태국을 여행하며 그리스도인, 무슬림, 불자들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제 논문을 위한 연구가 여행 목적이었지만 학문적 연구 이상의 영적 순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행을 시작할 무렵 우연히 ‘인도네시아 교회협의회(CCI)’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 한 분이 제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습니다. “요즘 한국 교회는 종교적으로 인도네시아를 ‘정복’하려는 것 같아요.” 그뿐이 아닙니다. 인도네시아 족자카르타에서 ‘인터피데이(InterFidei)’라는 종교대화 모임을 방문했을 때도 그곳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도대체 한국 교회의 선교가 얼마나 공격적이면 무슬림들도 아닌 동료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그런 이야기를 듣게 되는 걸까요?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아시아에 전하고 있는 예수는 ‘정복자 예수’입니다. 이 정복자 예수는 서구 식민세력을 영적으로 후원하는 댓가로 군사적 지원을 받은 선교사들이 아시아에 강제로 이식한 예수입니다. 그는 식민지배를 지원했고, 아시아의 종교와 조화하는 대신 지배하려 했으며, 사랑이 아닌 폭력으로 개종을 강요했습니다. 그럴수록 정복자 예수는 아시아인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고, 결국, 식민역사가 끝나면서 대부분의 아시아 나라에서 ‘청산’되었습니다. 이런 구시대의 정복자 예수를 오늘날 휠씬 더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태도로 전하고 있는 한국 교회의 시계는 어느 방향으로 흐르고 있는 걸까요?

 

식민권력의 지원을 받은 정복자 예수의 선교가 무려 사백여 년 동안이나 전개되었음에도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교는 여전히 소수 종교이고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물론, 수의 많고 적음이 중요한 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건 그리스도교가 아시아인의 마음과 삶에 육화하는 것입니다. 그럴려면 먼저 식민역사에 협력한 죄책을 참회해야 합니다. 다행히, 오늘날의 많은 서구 교회들은 과거의 죄책을 참회하고 아시아의 종교와 대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교회는 서구 교회가 한국에 이식한 정복자 예수를 아시아에 재이식하는 데 열심입니다. 이제 아시아인들은 ‘서양인 정복자 예수’ 대신 ‘한국인 정복자 예수’와 갈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건, 아시아인들이 한국 교회에 반감을 가지면서도 한국 연예문화에는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인도네시아 학자, 학생들과 처음 만나 인사하는 자리에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여기저기서 “오~” 하는 환성이 터져 나왔습니다. 한류 덕분이었습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한국 연예인들과 같은 국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더 큰 환대를 받았습니다.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최소한 현빈 정도는 알겠는데, ‘무슨 주니어’인가의 ‘최 아무개’ 아냐는 식의 질문에는 말문이 막히곤 했습니다. 아무튼, 그런 한류의 현실을 경험할 수록 제 마음은 더 서글퍼졌습니다.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라는 제목의 뮤지컬도 있는데, 한국 교회가 전하고 있는 정복자 예수는 아시아의 슈퍼스타이기는 커녕 한국인인 저도 잘 모르는 어느 한류 스타보다도 인기가 없습니다.

 

이미 정복자 예수에게 실망한지 오래였기에 인기 없는 그의 처지에 대해 조금의 연민도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가 서양인이든 한국인이든 정복자 예수는 제가 믿고 따르는 ‘그’ 예수가 아니었으니까요. 인도네시아를 떠나며 저는 다시 한번 정복자 예수와 분명하게 결별했습니다.

 

황금 붓다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정복자 예수에게 실망한 채 다음 여행지인 태국으로 향했습니다. 불교 국가인 태국에서는 참여불교 지도자들인 술락 시바락사, 담마난다 스님, 오이폰 콴캐우 등을 인터뷰할 예정이었기에 정복자 예수를 정화해 줄 평화와 무소유의 붓다를 만날 거라는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인터뷰를 위해 치앙마이, 방콕, 나콘파톰 등을 돌아다니며 가장 많이 만나게 된 건 평화와 무소유의 붓다가 아니라 ‘황금붓다’였습니다! 거대하고 화려한 사원마다 금빛 가사를 입은 황금불상들이 있었고, 물질적 부를 욕망하는 불자들은 불상들에 금박을 꾹꾹 눌러 입혀 놓았습니다. 어떤 불상들은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마치 금빛 ‘미이라’ 같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불상에는 눈에 수백 겹의 금박을 입혀 놓기도 했습니다. 그런 눈먼 붓다, 세상의 고통을 못 보는 황금붓다는 제가 찾고 있던 지혜와 자비의 스승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제 스승이 되려면 먼저 눈을 떠야 할 텐데, 눈을 뜨기에는 그 눈을 덮고 있는 금박이 너무 두꺼워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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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태국 불교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서구 그리스도교의 ‘번영복음(Prosperity Gospel)’에 상응하는 ‘붓다사업(PutthaPanit)’입니다. 말 그대로 붓다를 내세워 부적을 팔고, 점을 치고, 주술적 의례를 하면서 돈을 버는 상업적 불교입니다. ‘참여불자국제네트워크(INEB)’의 사무총장인 솜분이 “오늘의 태국인들은 불자들이 아니라 자본주의자들”이라고 비판할 정도입니다. 이처럼 ‘붓다사업’이 지배하는 현실에서는 재가불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승려들도 가난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대부분 가난한 집안 출신인 승려들의 출가 동기는 안락한 삶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승려가 된 이들은 개인과 사원의 부를 늘리기 위해 불교의 가르침을 남용합니다. 예를 들면, 이생과 저생에서 복을 누리기 위해 쌓는 가장 좋은 공덕은 승려를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거라고 가르칩니다. 결국 붓다는 사고 파는 상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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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태국 불교가 물질만을 좇는 건 아닙니다. 테라바다 불교의 명상수행 전통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높은 수행력으로 존경받는 스님들도 있고, 사원을 찾아 명상하는 재가불자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황금붓다 앞에 그들과 함께 앉아 명상하면서 제 마음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황금붓다의 평화로운 미소 위로 가난한 이들의 고통스런 표정이 겹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태국 불교는 ‘외적 평화’ 없는 ‘내적 평화’만을 추구하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불교 국가이면서도 세계 5위의 음주율, 성매매, 여성억압, 가난, 정치적 부패로 점철된 사회적 고통을 수행자들은 상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깨달은 이들’이 ‘가난한 이들’의 땅을 빼앗아 사원을 짓고, 그곳에서 내적 평화를 위해 명상합니다. 그렇게 ‘세속적 물질주의’와 ‘영적 물질주의’가 서로를 먹이며 살찌우는 동안 중생은 더 깊은 고통의 수렁으로 빠져듭니다.

 

그런 태국 불교의 금빛 그늘을 보면서 제 마음은 길을 잃었습니다. 정복자 예수에게 좌절해 붓다의 땅을 찾아온 저는 이제 황금붓다에게 다시 좌절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드렸더니, 담마난다 스님은 “권력과 물질은 늘 함께 하는 것”이라고 일깨워 주셨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식민권력’의 종교적 표현인 정복자 예수와 ‘물질주의’의 종교적 표현인 황금붓다는 다른 것 같으면서도 무척 닮았습니다. 어쩌면, 그 둘은 하나의 맘몬이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다른 옷을 입고 나타난 우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너희가 나를 해방하리라!

 

치앙마이 인근 매림의 ‘정의와 평화를 위한 국제 여성 센터(IWP)’에서 불자 여성 평화운동가인 오이폰과 깊은 대화를 나누고 난 다음 날 아침 치앙마이 시내의 수안독 사원(Wat Suan Dok)을 찾았습니다. 그곳의 ‘몽크챗(Monk Chat)’센터에서 스님들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몽크챗은 스님들이 영어로 외국인들과 대화하는 프로그램입니다. 오이폰으로부터 태국의 스님들이 얼마나 물질을 탐하고, 권위적이고, 사회적으로 무책임한지를 듣고 상심했던 저는 스님들에게 묻고 싶었습니다. 가난한 집 출신의 스님들이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모른척해서 되겠냐고, 외적 평화 없이 내적 평화만 찾아도 되는 거냐고…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날은 몽크챗 센터가 닫는 날이어서 스님들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 스님이나 붙잡고 이야기할 수는 없고, 또 다리도 아파서, 사원 안쪽의 작은 불당에 들어가 앉았습니다. 거기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겨우’ 4미터 높이의, 황금붓다가 있었습니다. 그도 여느 황금붓다들처럼 평화롭게 미소짓고 있었습니다. 그 불상을 말없이 올려다 보는 데,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도 세상의 고통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화롭게 미소만 짓고 있어서요. 슬픔 속에 그에게 말했습니다. “내 안의 그리스도인이 정복자 예수를 따르지 않는 것처럼 내 안의 불자도 황금붓다를 따르지 않을 겁니다.” 그를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불당 밖으로 나오는 데, 문득, 무슨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누군가 불경을 읽고 있는 소리였습니다. 하지만 제게는 그 황금붓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 순간, 김지하 시인의 ‘금관의 예수’가 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너희가나를해방하리라.” 그 황금붓다도 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다시 보니, 그 불상의 표정은 ‘미소’보다는 ‘슬픔’에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미어지는 가슴으로 붓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어떻게요? 왜 그리스도인인 제게 이러시는 거죠? 당신이 가르친 건 ‘자력구원’ 아니에요? 스스로 그 황금옷을 벗고 나오시면 되잖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 깊어진 슬픔으로 그를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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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몽 사원에서 다시 만난 예수, 그리고 붓다

 

슬픔에 휩싸여 수안독 사원을 나온 저는 오이폰이 꼭 가보라고 한 우몽 사원(Wat Umong)을 향해 걷기 시작했습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우몽 사원은 조용한 숲 속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사원은 참여불자들이 때때로 찾아와 수행하며 내적 힘을 기르는 사원입니다. 물론 거기에도 황금붓다들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친 감촉의 돌붓다들이 더 많았습니다. 환경운동을 하는 스님들이 계(戒)를 주어 보호하고 있는 나무들도 도반처럼 저를 맞아주었고요. 마음이 조금은 더 고요하고 평화로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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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내적 평화야 황금붓다들이 있는 사원에서도, 화려한 사원 뜰 보리수 그늘 아래서도, 심지어 혼잡한 카오산 거리에서도 얻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때, 오이폰이 우몽 사원에 가거든 꼭 그림들을 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사원 미술관에 들어갔는데..., 그곳에 발을 들여놓자 마자 저는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제일 처음 저를 맞이한 건 놀랍게도 예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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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미술관에는 불자 화가가 붓다와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묘사한 벽화들이 서로 잘 어울려 있었습니다. 그 벽화들을 떨리는 가슴으로 따라가던 저는 예수의 그림 하나 앞에 무너져 내리듯 와락 주저앉았습니다. 그 그림 위에 적혀 있는 예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여러분은하느님과맘몬을아울러섬길수없습니다.” 그제야 가슴에 맺혔던 게 풀리면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붓다의 땅에서 너무나 그리웠던 예수를 다시 만난 것이었습니다. 권력과 물질의 노예이기를 거부하고 무력하고 가난한 이들과 하나 되었던 가난하고 낮은 자 예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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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폰은 우몽 사원에 가서 그림들을 꼭 보라고 했으면서도 거기에 예수 그림이 있다는 걸 왜 말해주지 않았던 걸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뭔가를 의도했던 것 같습니다. 그 전날 오이폰에게 예수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그가 답했습니다. “예수는 가난한 자를 위해 산 가난한 자였던 것 같아요.” 불자인 그의 눈에 비친 예수는 인간이 된 하느님도, 왕 중의 왕도, 부활한 그리스도도 아닌, 가난하고 낮은 자였습니다. 그것이 불자인 그에게 가장 감동적인 예수의 독특성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낮은자 예수에게 감동하는 불자는 오이폰만이 아닙니다. 이 조각은 스리랑카의 ‘뚤라나 대화와 만남 연구센터’ 뜰에 있는 “사마리아 여자와 예수”입니다. 흥미롭게도, 불자 스님이 만든 조각입니다. 알로이시우스 피어리스 신부님은 그 스님에게 복음서의 예수 이야기를 들려주고는 어떠한 구체적인 주문도 없이 그저 그 스님이 느낀대로 예수를 조각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스님은 깊이 명상한 후 자신이 불자로서 듣고, 보고, 느낀 예수를 이렇게 형상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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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조각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몸을 숙여 물을 손으로 받아 마시고 있는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사회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스리랑카는 불교국가임에도 인도의 사회문화적 영향을 받아 카스트 제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 카스트에서도 배제된 ‘불가촉천민’은 물을 컵으로 마실 수 없습니다. 지금 예수는 유대인들에게 불가촉천민이나 마찬가지인 사마리아인에게, 그것도 사마리아인 공동체에서조차 배제되어 땡볕 대낮에 물을 길러 나와야 했던 ‘불가촉천민 중에서도 불가촉천민’인 이 여자에게 겸손히 몸을 숙이고 손으로 물을 받아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 스님을 가장 감동시켰던 것이 바로 이 예수의 가난과 겸손이었던 겁니다.

 

그동안 제가 만나 온 불자들은 불교의 지적 가르침과 영적 수행에서는 어떤 부족함을 느끼는 것 같지 않습니다. 자연히, 그리스도교 ‘신학’이나 ‘영성’에 큰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정복자 예수의 교리적, 영적 배타성에는 오히려 반감조차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가난하고 낮은 이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그들 중 하나로 살았던 예수에게는 깊이 감동합니다. 그것은 붓다나 다른 종교적 성인들에게는 없는 예수만의(!) 독특성이기 때문입니다.

 

아시아의 가난한 불자들은 정복자 예수에게서는 위협을 느끼지만 낮은자 예수에게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도 ‘그들처럼’ 가난하고 낮은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 낮은자 예수가 위협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지배’입니다. 스리랑카의 ‘그리스도인 노동자 연맹’의 사무총장인 위라싱거와 대화하며 그것을 더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연맹이 창설된 때부터 이미 불자들이 조직의 절대 다수였습니다. 그래서, 1980년대에 조직의 이름을 바꾸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먼저 제안한 이들은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불자 노동자들이 이름을 바꾸는 것을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를 만든 이의 이름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함께 하며 지배에 저항하는 이의 이름이라고 주장하면서요.

 

그렇게 아시아의 가난한 불자들은 그들과 고통을 함께 하는 가난하고 낮은 자 예수를 이미 보고, 만나고, 따르고 있었습니다. 정작 그 ‘낮은자 예수’ 대신 ‘정복자 예수’를 따르고 있는 이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런 대조적 현실은 선교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예수를 보고, 만나고, 따르게 하는 것이 선교라면 오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한 선교 대상은 그들 불자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인지도 모릅니다.

 

가난한 불자들은 우몽 사원의 그 예수 그림에 적혀 있는 가르침을 “여러분은 다르마와 맘몬을 함께 따를 수 없습니다”로 읽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해서, 맘몬을 거부하고 하느님과 다르마를 섬기고 따르는 낮은자 예수와 붓다가 친구가 된다면, ‘황금붓다’도 ‘금관의 예수’처럼 해방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물론 예수와 붓다는 많이 다릅니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예수가 권력과 물질에 ‘맞서는’ 삶을 살았다면 부유한 왕의 아들로 태어난 붓다는 권력과 물질을 ‘포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예수가 태생적으로 ‘낮은자’였다면 붓다는 자발적으로 ‘낮아진 자’였습니다. 또한 피어리스 신부님의 성찰을 빌려 말하면, 예수는 ‘가난한 자를 위한 투쟁’에 헌신했고 붓다는 ‘가난해지기 위한 투쟁’에 헌신했습니다. 하지만 권력과 물질에 맞서는 실천과 그것을 포기하는 실천은 둘이 아닙니다. ‘맞서는 실천 없는 포기하는 실천’은 고통의 구조를 바꾸지 못하고, ‘포기하는 실천 없는 맞서는 실천’은 하나의 권력을 다른 하나의 권력으로 교체하게 할 뿐입니다. 정의를 통해 평화를 만드는 예수와 평화를 통해 정의를 지속시키는 붓다가 친구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 위대한 스승이 그들의 ‘다름’을 간직한 채 친구가 될 때 사랑과 지혜가 만나고, 외적 평화와 내적 평화가 균형을 이루고, 저항과 초탈이 하나 되는 구원과 해방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 겁니다.

 

반면 정복자 예수와 황금붓다는 결코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둘은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서로에게 더욱 적대적입니다. 더 많은 권력과 물질을 욕망하며 서로 다툽니다. 어쩌면, 그들이 친구가 되지 않는 게 세상에는 더 좋은 일입니다. 다른 종교의 옷을 입었을 뿐 맘몬을 섬기는 데서는 차이가 없는 그들이 친구가 된다면 세상은 더 큰 고통을 겪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낮은자 예수와 낮아진 자 붓다는 서로 다투지 않습니다. 그들은 맘몬의 지배를 극복하는 길을 함께 걸으며 일하는 도반입니다. 서로의 다름을 통해 서로를 보완하는 예수와 붓다의 우애를 느꼈을 때 비로소 제 마음이 평화로워졌습니다. 그것이 우몽 사원에서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깨달은 이들의 공동체

 

저는 방금 우몽 사원에서의 체험을 ‘깨달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오만하게 들릴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말한 것은 누구나 깨달을 수 있고, 그 깨달음이 취약성과 가능성을 동시에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나와 모든 존재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가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면 자연히 그들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들 중에서도 가난하고 나약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사랑’은 깨달음의 가장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제가 우몽 사원에서 다시 만난 가난하고 낮은자 예수는 우리 새길인들에게는 낯선 이가 아닙니다. 그는 지난 24년 간 우리가 고백하고 따라 온 바로 ‘그’ 예수입니다. 저는 새길이 ‘이미’ 만났던 낮은자 예수를 붓다의 땅에서 불자들의 도움으로 ‘다시’ 만났을 뿐입니다. 1987년 3월 8일, 고통의 현실에 ‘눈을 뜨고’ 가난한 자에게로 ‘회심’한 그리스도인들이 새길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날은 새길이 공동체적으로 깨달은 날이었습니다. 그날, 마치 깨달음을 이룬 선(禪) 수행자들이 게송(偈頌)을 짓듯이, 새길의 깨달은 그리스도인들도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의 소식을 선포하신 것이 바로 복음과 선교의 핵심이라고 믿기에 우리도 고통 당하는 이웃을 사랑하고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몸과 마음, 정성과 물질을 바치려고 합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여린 새싹처럼 취약성과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습니다. 조건만 맞으면 씨앗은 싹을 틔웁니다. 하지만 그렇게 돋아난 모든 싹이 자라나는 건 아닙니다. 물과 양분을 주며 가꾸는 수고가 지속될 때에만 그 싹이 자라나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꽃을 피우고 세상을 먹이는 열매를 맺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꾸는 것을 게을리하면 싹은 금새 말라 죽고 맙니다.

 

우몽 사원에서 가난하고 낮은자 예수에게 눈을 뜨고 기쁜 마음으로 세상으로 돌아오던 길에 한 가게에서 곱게 말려 채색한 보리수잎을 팔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걸 보고 제 안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욕망은 “갖고싶다!”였습니다. ‘깨달은 지’ 삼십 분도 지나지 않아 제 안에서 소비와 소유의 욕망이 다시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깨달았다고 해서 맘몬의 유혹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건 아닙니다. 깨달은 이도 수행을 계속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는 수행이란 우리 마음 안팎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늘 마음챙겨 보고, 이해하고, 대하는 것입니다. 예수가 “늘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가르치면서 뜻한 것도 그런 지속적 마음챙김의 수행이었을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맘몬을 섬기지 않고 하느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 마음챙김,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는 수행은 홀로 보다는 여럿이 함께 할 때 훨씬 더 쉽고 효과적입니다. 붓다가 깨달은 후에 상가(sangha)를 만들고, 예수가 광야체험 후에 하느님나라 공동체를 만든 것도 깨달음의 싹을 가꾸고 기르는 수행을 더불어 함께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4년 전 새길의 깨달은 그리스도인들도 공동체를 만들며 다짐했습니다.

마침내 이 땅위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뤄지는 그날을 향하여 오늘도 외롭지만 힘차게, 괴롭지만 기쁘게,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를 가꾸어 나가기로 결단합니다.

 

작은 보리수잎 하나에도 그만 마음이 흔들렸던 저는 앞으로도 맘몬의 유혹을 수없이 만날 겁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늘 우몽 사원에서의 깨달음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붓다의 땅에서 불자들의 도움으로 다시 만난 낮은자 예수에게로 돌아가 맘몬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겁니다. 새길도 맘몬의 유혹을 받을 때마다 늘 깨달음의 그 날로 돌아갈 거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뤄지는 그날까지 힘차고 기쁘게 살아갈 힘과 용기를 얻을 겁니다. 그렇게 깨달음의 싹을 가꾸고 기르는 새길 공동체와 함께 수행할 수 있어 마음이 든든하고 행복합니다.

 

하느님,

‘가난한 자를 위한’ 삶,

‘가난해지기 위한’ 삶 속에서,

우리도 예수처럼

.유.롭.게. 해 주십시오.

낮은자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
    강현숙 2011.09.02 17:26 (*.96.86.41)

    샬롬! 이덕주목사님 말씀도 올려주세요. 부탁드려요.

  • profile
    새벽바다 2011.10.03 13:46 (*.69.43.31)

    참으로 많은 깨달음을 주는 좋은 글이요, 강론이라고  생각합니다. "붓다 없이 나는 그리스도인일 수 없었다"는 책과 더불어, 시간 나는 대로, 다시 한번 깊이 읽어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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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011 [2011.11.06] 고통 가운데서 얻은 희망 6 2011.11.09 김선민
27 2011 [2011.10.30] 하나님 나라와 교회 2011.11.02 김창락 목사
26 2011 [2011.10.23] JESUS’ MODEL: DIVINE - HUMAN PARTNERSHIP 2011.10.28 James Massey 목사
25 2011 [2011.10.16] 오직 한 일, 앞에 있는 것 2011.10.19 김경재 목사
24 2011 [2011.10.09] 예수님께 배우는 기도 2011.10.11 최혜영 수녀
23 2011 [2011.10.02] 우리시대의 뜨거운 돌 2011.10.11 구미정 교수
» 2011 [2011.08.28] 붓다의 땅에서 다시 만난 예수 2 file 2011.08.30 정경일
21 2011 [2011.07.31] 선하게 산다는 것은 2011.08.12 노은기
20 2011 [2011.07.24] 용서하지 않을 권리를 포기합시다 2011.07.28 홍만조 목사
19 2011 [2011.07.17] 무거운 짐 - 걱정 근심의 십자가 file 2011.07.28 김용덕
18 2011 [2011.07.03]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는? 1 2011.07.15 이영교
17 2011 [2011.06.19] 나는 청춘이다. 2 2011.06.24 홍철의, 박민혜
16 2011 [2011.06.12] 성령강림의 의미 2011.06.17 권진관
15 2011 [2011.05.29] 고통 3 file 2011.06.02 강경희
14 2011 [2011.05.22] 내 안에 계시는 하느님 1 2011.05.26 오강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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