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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영교
 

우리에게 맡겨진 달란트는?

(요한Ⅱ서 1장 1-6절)

2011년 7월 3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이영교 형제

 

 

부족한 사람이 말씀 증거를 맡는 다는 것이 크나큰 부담입니다. 말씀 증거라기보다는 고백이라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기도 하고 좋게 이야기 해주면 말씀의 나눔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준비하면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꽤 오래 전에 순서가 정해지는 데 그 때부터 언제나 말씀에 대해 염두에 두고 지내며 자주 생각을 하고 성경도 많이 읽게 됩니다. 홈페이지에서 이전의 말씀 증거들을 하나하나 찾아 읽어도 보고 영상을 틀어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면 경건하기 까지는 아니어도 조금 더 바르게 살고자 노력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니 오늘 제가 드릴 말씀이 없어졌습니다. 이미 성경에 다 있고 이전의 말씀 증거자들께서 다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성경을 읽어보십시오. 홈페이지에서 말씀을 다시 듣고 읽어보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열고 주위를 둘러보십시오.’라고만 하면 충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미 우리 모두가 알고 있고, 들어 보았던 상식적인 내용들을 발췌하고 정리해서 전해드리는 것으로 말씀에 갈음하고자 합니다.

 

제가 근래에 말씀을 들고 갑자기 눈물을 쏟은 경험이 3번 있습니다. 처음 두 번은 아마도 서광선 목사님과 김경재 목사님 말씀 시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새길교회가 한국교회의 희망입니다.’라는 내용의 말씀을 듣는 순간이었습니다.

세 번째 눈물과 그 의미는 뒤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마태복음 22장을 보면,

예수께서‘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 하였으니 이것이 가장 중요하고 으뜸가는 계명이다. 둘째 계명도 이것과 같은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한 것이다 이 두 계명에 온 율법과 예언서의 본 뜻이 달려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내용은 모든 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또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는,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라고 하며 마지막에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라고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려서부터 25년간 다닌 교회는 비교적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분위기였는데도 믿음이 우선적으로 강조되고, 믿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는 말씀을 중점적으로 들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사랑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만도한데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면 덜 중요시해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것이 실은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고 구체적으로 드러내어 보여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마 자기 자신도 스스로의 믿음에 대해 확신을 가지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잘 안 믿어지니까 자꾸 ‘믿씁니다! 믿씁니다!’라고 외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음보다는 사랑이 덜 관념적이고, 좀 더 구체적이라고 여겨집니다. 좀 더 쉬울 것 같기도 하고 눈에 보일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이 으뜸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들고 약간 편안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면 과연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야고보서 2장에서는 상당히 간단하고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것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서 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하고, 배부르게 먹으십시오 하면서, 말만 하고 몸에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는다고 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믿음에 행함이 따르지 않으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입니다. …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치고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그대가 보는 대로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함으로 믿음이 완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브라함의 의로움으로 여기셨다고 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고, 또 사람들이 그를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렀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대로, 사람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창녀 라합도 정탐꾼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내보내서, 행함으로 의롭게 된 것이 아닙니까?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과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간단명료하게 행함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랑에 대해서도 조금도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요한 1서 3장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소식은 이것이니,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한 사람이어서 자기 동생을 쳐죽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는 동생을 쳐죽였습니까? 그가 한 일은 악했는데,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해도 이상히 여기지 마십시오.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에 머물러 있습니다.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살인하는 사람입니다. 살인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 속에 영원한 생명이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압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자매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형제자매의 궁핍함을 보고도, 마음 문을 닫고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 속에 머물겠습니까? 자녀 된 이 여러분, 우리는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합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서 났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 우리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나님에게서 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봉독한 요한 2서 1장 6절에서도

사랑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계명은 다름이 아니라,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 안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 4절부터는 좀 더 구체적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위의 성경구절을 그냥 읽으면 너무 아름답고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를 생각하며 한 구절 한 구절을 정말 그대로 행동할 수 있나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짚어보면 현실에서 엄격하게 실천하기는 정말로 쉽지 않은 내용들입니다.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한 또 다른 대답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한 율법교사가 질문을 합니다.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 질문에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그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사라미아 사람이고, 또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이 강도 만난 사람입니다. 이웃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이웃 사랑인지 역시 간결하고 분명한 대답을 주십니다.

그러면 현대를 사는 지금 우리의 이웃은 누구일까요?

 

미국의 한 한국인 교수가 ‘불행한 한국, 몰락하도록 놔둘 건가’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글을 인터넷 매체에 기고했습니다. 그 글에서 한국의 여러 사회지표를 가지고 설명을 했는데 그것도 대부분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 매체에 보도된 기사들과 통계청 자료를 가지고 그 내용들을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어린이․청소년 '행복지수' 꼴찌

 

한국방정환재단과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는 5일 어린이날을 맞아 지난 3월∼4월 공동으로 전국 초등학교 4학년∼고등학교3학년 학생 6천410명에게 '2011 한국 어린이ㆍ청소년 행복지수의 국제비교'를 주제로 벌인 설문 결과를 4일 공개했다. 올해 집계된 한국 어린이ㆍ청소년의 주관적 행복지수는 65.98점으로, 세계보건기구(WHO)와 OECD가 각각 2006년과 2003년에 실시한 똑같은 내용의 조사 연구와 비교 분석했을 때 OECD 23개국 중 최하 점수다.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스페인(113.6점)보다 47.6점 낮고, OECD 평균(100점)에선 34점이나 모자란다. 한국 다음으로 낮은 헝가리(86.7점)와도 20점 이상 차이가 났다. 또 한국은 2009년 64.3점, 지난해 65.1점을 기록하는 등 3년 연속 OECD 국가 가운데 주관적 행복지수에서 최하위에 머물렀다.

 

아시아권인 일본과 중국과의 비교에서도 한국의 청소년이 느끼는 행복도는 크게 낮은 것으로 파악됐다. ‘행복한가?’란 질문에 ‘매우 그렇다’라고 답한 비율이 2006년에는 13.7%였고 올해에는 11.7%로 더 낮아졌다. 반면 일본은 그 비율이 32.3%, 중국은 39.1%로 한국보다 3배가량 높았다.

 

그리고 ‘행복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란 질문에 초등학교 4학년은 ‘가족’을 꼽은 학생이 54.4%로 가장 많았지만 고학년이 되면서 ‘가족’은 지속적으로 감소한 반면 ‘돈’이라고 답한 비율은 꾸준히 증가했다. 고2때는 ‘가족’과 ‘돈’의 비율이 24.8%. 25.2%였고 고3때는 ‘돈’이라고 답한 학생 비율이 26%로 가장 높았다. 주관적 행복지수는 학년이 높아질수록 낮아졌다.

 

이 기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한국은 적어도 OECD 국가 중에서 가장 불행한 어린이와 청소년이 사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먹고살기'가 꿈이 돼버린 역사상 가장 똑똑한 세대

 

조금 더 나이가 든 20대는 어떨까요? 지금의 20대가 일례로 영어실력은 아시아 최고수준이라고 할 만큼 우리 역사상 가장 능력 있는 세대라고 평가 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불행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그 상징적인 표현이 ‘88만원 세대’일 것입니다. 청년실업자는 35만 명에 달하고 20대 비정규직도 102만 명으로 급증했다고 합니다. 20대 비정규직은 평균 월급이 2007년 115만원에서 지난해 95만원으로 감소했고 정규직의 90% 수준에서 70% 수준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신규대졸자에 대한 대기업 취업자 수는 2005년 2만 3천명에서 올해 1만 7천명으로 줄었다고 합니다.

 

세계 최저의 출산율

 

여러 다른 요인들에 더하여 취업이 안 되고 수입도 줄어들고 따라서 결혼도 늦어지고, 결혼이 늦어지다보니, 출산도 줄이거나 포기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세계 최저 수준으로 1970년대 가임여성 1인당 출산율이 4.53명 수준이었는데 2005년에는 1.08명까지 떨어졌습니다.

 

세계 최고의 자살률

 

매우 심각한 우리의 사회 지표 중 하나가 높아지는 자살률일 것입니다. 2009년 인구 10만명 당 자살사망자수는 31.0명으로 전년대비 19.3%가 증가하였고 10대 이후 전 연령층에서 자살률이 증가하였습니다. 연령별 사망원인에서도 10대, 20대, 30대가 자살이 첫 번째였습니다.

 

1980년대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는 인구 10만명 당 자살사망자수가 8명 안팎이었습니다. 그 후 IMF 경제외기를 거치면서 18.4명으로 2배가량으로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2000년 이후로는 더욱 급격하게 상승하게 됩니다.

 

OECD 국가 자살률을 비교해보면 현실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2010년 기준으로 인구 10만명당 자살자수가 그리스가 가장 낮은 수준으로 2.6명이고 호주가 7.5명, 미국과 캐나다가 10.1, 10.2명이고 높은 편에 속하는 일본과 헝가리가 19.4와 19.6명인데 반해 OECD 표준인구로 환산한 2009년의 한국의 자살자수는 28.4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연령별 자살률 추이를 보면 더욱 심각한 상황을 알게 됩니다. 2009년도 자살자수를 연령별로 살펴보면 10대가 6.5명, 20대가 25.4명, 30대가 31.4명, 40대가 32.8명, 50대가 41.1명, 60대가 51.8명, 70대가 79.0명, 80대가 127.7명으로 연령이 증가할수록 그 숫자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남자의 자살률은 여자와 비교하여 최고 3배에 달할 만큼 높은데 2009년 80대의 남자 자살률은 213.8명이었습니다. 이 수치는 미국의 자살률의 20배에, 그리스의 거의 100배에 이르는 수준입니다. 다른나라에서는 4,50대가 최고치에 이르고 그 이후 연령층에서는 감소한다고 하는데 한국의 노인 자살률은 정말 말 그대로 ‘참혹한’ 상황입니다.

 

그에 대한 한 가지 설명은 노인들이 각종 질환을 앓으면서 나타나는 고통과 빈곤을 주된 원인이라는 것입니다. 질병과 빈곤으로 심한 고통을 겪고 가족들을 포함해 주변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는 것이 낫다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최근 발표한 ‘한국을 위한OECD 사회정책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이 심각한 노인 빈곤 문제를 안고 있는 몇 안 되는 국가라고 지적했다고 합니다. 노년층 빈곤율이 45%에 달해 OECD 평균인 13%의 3배가 넘고, 근로수입이 없는 노년층의 빈곤율은 70%로 OECD회원국 가운데 가장 높다고 합니다. 높은 경제성장률에도 빈곤층이 늘고 있는 것은 사회안전망 부족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실제 한국의 공적연금 급여 지출 비중은 2007년 기준으로 국내총생산(GDP)의 1.7%로 OECD 평균의4분의 1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범죄 발생률의 증가

 

복지 지출이 감소하면서 사회안전망이 약해지면 그에 비례해서 범죄가 늘어난다고 합니다. 한국의 범죄 발생률을 살펴보면 1985년 인구 10만명당 범죄발생건수가 2000건 수준이던 것이 2008, 9년에는 2배가 넘는 4500건 수준에 다다릅니다.

그러면 교회가 희망이 될 수 있을까요?

 

성직매매 교회에 희망 있는가

 

이것 역시 한 기사의 제목입니다. 내용은 현직 개신교회 목사가 한국 개신교계에 만연한 담임목사직 매매 실태를 고발하고 목사직을 반납하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안타깝지만 지금의 우리 한국 교회에는 성직매매 뿐 만아니라 여신도와의 부적절한 처신, 교회 재정의 유용, 교회내의 이중 계약서, 교단의 금권선거 등등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사회의 온갖 부조리가 존재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교회가 희망이 될 수 있느냐고 한다면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아이들은 세계에서 가장 불행하고, 청년들은 취업이 안되고 비정규직으로 몰락하고, 출산율은 세계 최저수준이고, 가장 많은 사람들이 자살하고, 특히 노인 자살률은 극심한 상태인데 교회가 희망이 되어주지 못한다는 것이 우리 대한민국의 실상입니다.

 

사람을 죽이는 사회

 

이 제목도 자극적인데 러시아 출신으로 한국학을 전공하고 한국에서 교수로 활동하다 현재는 유럽의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분이 기고한 글입니다. 이분이 유럽에 있으면서 ‘왜 한국 사람들이 그렇게 자살을 많이 하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고 합니다. 이분이 한국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계신 분인데 그 이유를 어떤 학문적인 해석으로도 설명하기 어렵고 자신의 체험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내용의 일부가 다음과 같습니다.

 

… 경제적 요인도 사회·문화적 요인도 작용하겠지만, 근본적으로는 자본주의가 철저하게 내면화돼 있는 최근의 한국 사회에서 사랑이 불가능한 것이 문제일 것이다. 타인을 위해 아낌없이 자기 자신을 내주는 것이 사랑이지만, 이 사회에서는 자신으로부터의 도피나 소유욕이 사랑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교회나 사찰마다 하나님 사랑과 부처님 자비가 외쳐지지만, 그 실상을 자세히 보면 성금이나 불전을 주어서 죄에 대한 면죄부나 이윤추구 정글에서의 성공에 대한 주술적인 보장을 사라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우리는 아이들을 사랑한다기보다는 아이 교육에 ‘투자’해 나중에 아이가 거둘 ‘성공’을 공동 소유하려 한다. 피 말리는 학습 경쟁에 내몰려 부모의 공포와 소유욕의 대가를 대신 치러야 하는 아이는, 살인적 체제의 ‘나사’로 전락하고 만 그 부모를 진정으로 사랑하기가 쉽겠는가? 입시학원이 된 학교나, 등록금을 약탈하고 시간강사나 환경미화원 등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악질적으로 착취하는 악덕 기업이 되고 만 대학에서 앎에 대한 순수한 사랑을 키울 수 있겠는가? ‘인건비 절약’이 주된 모토가 된 기업체에서 일하면서 자신의 노동을 사랑할 수 있는가?

 

도스토옙스키 말대로 사랑이 불가능한 세계가 지옥이라면, 우리는 지옥살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지옥에 떨어진 인간들이 자살이라는 방법을 통해 지옥을 절망적으로 벗어나려 한다는 것은 과연 놀라운 일인가?

 

정말로 안타깝지만 한국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는 분이 한국사회에 사랑이 없음을 대표적인 이유로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자라면서는 한국 사람은 인정이 많고 끈끈하고 서양 사람은 좀 더 냉정하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난 4월 29일 영국에서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윌리엄 왕자가 신부에게 했던 결혼 서약을 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으로 ‘나 윌리엄 아서 필립 루이스는 캐서린 엘리자베스를 아내로 맞아 하나님의 성스러운 법에 따라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부유할 때나 가난할 때나, 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 지금부터 영원히 함께하고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고..’라는 것이 내용입니다.

 

자세히 보면 상당히 엄청난 서약입니다. 저도 지금은 잘 기억이 안 나서 송구스럽지만 결혼식 때 비슷한 서약을 했을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그 당시 내용을 자세하게 살피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만일 주례를 해주신 목사님께서 서약을 자세하게 설명하면서 ‘정말로 이렇게 할 수 있느냐’고 진지하게 물었으면 ‘잠깐만요. 생각 좀 해보겠습니다.’라고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서약을 지키기가 그리 쉽지는 않은 것 같고 그래서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창조의 보전과 완성을 위해,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 우리의 삶을 바칩니다.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고통 받는 모든 생명의 이웃이 되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합니다.

 

이것은 우리 새길교회 신앙고백의 일부입니다.

 

우리는 결혼 서약 보다 훨씬 엄청난 서약을 매주일 하고 있습니다. 그 서약을 어떻게 지켜야할까요.

 

마태복음 2장에 오늘 제목과 관련된 달란트 비유가 나옵니다. 제목을 정하며 ‘우리에게 주신’이라고 하려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니 ‘또 하늘나라는 이런 사정과 같다. 어떤 사람이 여행을 떠나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서, 자기의 재산을 그들에게 맡겼다.’고 되어있습니다. 주신 것이 아니고 자신의 재산을 맡겼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려서 교회학교에서 이 말씀을 들었을 때 못마땅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것을 빼앗는 것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돈놀이하라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준 것이 아니고 맡긴 것이니 다시 회수해가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고 여겨집니다. 조금 커서는 달란트 비유를 전도를 많이 하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앞서 성경에서 나온 것 같이 믿음과 사랑을 행동하라는 말씀으로 해석합니다.

 

어떤 분은 우리 사회에 밝은 면도 있다라고 항변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회지표가 보여주는 냉정한 현실은 너무나 참혹합니다. 달란트를 맡은 우리가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거나 보이는 데도 외면하고 살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세 번째 눈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세 번째 눈물은 지난 6월 5일 이주연 목사님께서 말씀 증거 서두에 ‘요즘 목사님들 사이에 새길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고 왔다 그래야 참신한 목사 반열에 서는 것 같고 신학자들은 새길교회에 가서 설교를 해야 실력 있고 훌륭한 신학자라는 자부심을 갖는 것 같다’라고 말씀하실 때였습니다. 그 때 제 눈물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복합적인 의미가 있기는 해도 중요하게는 ‘부끄러움’이었습니다. 제 자신이 그리고 새길이 부끄러워서 나오는 눈물이라는 것이 그 때 제 마음에 떠오르는 답이었습니다.

 

강남역 사거리에서 걷다보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사이에서 불구인 몸을 길바작에서 끌며, 찬송을 부르며 적선을 하는 걸인을 만납니다. 지하철에서도 ‘일찍 부모를 여의고’로 시작하는 종이를 나누어 주고 온정을 호소하는 어린 아이들을 보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도 그런 상황에서 마음을 졸이며 고민을 합니다. 그렇지만 불구인 척 하던 걸인은 근무시간이 끝나면 툭툭 털고 일어날 것이고 고아라던 아이는 앵벌이이거나 환각제를 사기 위한 돈을 모으는 것이라고 마음대로 판단하고 대개 돈을 내밀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가난의 구제는 사회를 바꾸어야 하는 것이지 개인의 값싼 동정과 우월감으로 몇 푼을 적선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마음의 사치일 뿐이라고 스스로의 행동을 위로합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거창한 구호만 외치고 있다면, 사랑은 없어 보이지만 순진한 마음으로 동전을 건네주는 사람보다 내가 낫다고 할 자신은 없습니다.

 

새길교회가 출범한 1987년 이후 한국사회의 사회 지표는 참혹한 수준으로 악화되어 현재 실상은 살기 좋은 대한민국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에 대해 새길교회가 책임이 없느냐고 누가 묻는다면 ‘책임이 없다’고 대답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만일 이대로 우리가 이 사회에 희망을 제시하지 못하고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새길교회는 없어질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암울한 상황에서 희망의 씨앗을 나누는 것은 혼자 힘으로는 벅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전에 말씀증거 시간에 산을 오르는 것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만일 제가 혼자 산을 올랐다면 중간에 포기하고 내려왔을지도 모르는데 오르다 보니 동료들도 같이 오르고 잘 모르지만 이웃들인 형제자매들도 땀 흘리며 힘들게 오르고 있어 저도 같이 가다보니 정상까지 올랐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개인이 혼자 하기 힘든 일도 함께 힘을 모아 하면 좀 더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길 공동체가 모여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해나갈 때 저도 끝자락에서 함께 따라가겠습니다.

 

 

 

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 곰곰이 생각해보니 주님께서 맡기신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악하고 게으른 종’이 우리들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아벨인줄 알고 살고 있는데 아벨이 아니고 가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를 용서하여 주세요. 너무나도 부족하니 우리를 도와주세요. 이토록 커다란 아픔을 겪고 있는 우리 자매 형제들을, 우리 부모들을, 우리 자식들을 말이나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과 진실함으로 사랑할 수 있게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오며 우리 주 예수 이름 의지하여 기도드립니다.

 

 

  • ?
    길벗 2011.07.15 22:56 (*.195.135.122)

    다시 한번 더 느끼고 싶어서....,

    음미하며 읽고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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