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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기협

 

지금 여기서 사는 영생

(요한복음서 3:16, 요한15:11-12)


 
2018년 9월 23일 
 주일예배 
김기협 형제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다는 것과, 바로 이 생명은 그 아들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모시고 있지 않은 사람은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서 3:16, 요한15:11-12 -

 

 

최근에 들어 주변에 유명을 달리하는 소식들이 더 많아졌다고 느끼는 것이 금년 여름의 지독했던 혹서 탓만은 아니리라고 봅니다. 아마도 좀 더 죽음에 대하여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제 마음 탓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정경일원장으로부터 말씀증거의 부탁을 받기 전, 우연히 헨리 나우엔의 1999년 발간된 오직 필요한 것이란 책에 나온 글귀를 친구가 보내주었는데 특히나 강렬하게 다가왔었기에 그를 중심으로 제 생각을 증거하면 좋겠다고 수락을 하였으나 계속 마음의 부담을 갖고 지내왔습니다. 우선 그 글을 여러분과 함께 나눈 뒤에 제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나의 분명한 목표가 영생이라면, 그 삶은 내가 지금 있는 바로 이곳에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생이란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이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지금 있는 여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삶-하나님 안에서의 삶-의 위대한 신비는 그 삶을 훗날 일어날 어떤 것처럼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도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생이란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삶입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는 것은 내 삶의 중심에 계신 하나님의 활동적인 임재 즉 내 안에 계시는 성령의 움직임입니다.” 헨리 나우엔의 책 185페이지의 글을 번역한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영생을 거론하려니 삶과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고, 생물학적 영생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 믿음의 자매,형제들에게 영생은 무슨 의미인지를 좀 더 살펴보고, 과학과 종교의 융합에 대한 제 의견을 영생이란 숙제와 결부해 보기도 하렵니다. 그런 뒤 영생의 기쁨을 언급하며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헨리 나우엔은 네델란드 출신의 로마카톨릭 사제였으며 그리스도교 영성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마 전 정원장이 집중적으로 조명을 하였던 토마스 머튼, 화가인 렘브란트와 빈센트 반 고흐, 신학자인 장 바니에 등의 영향 아래 전공인 심리학을 바탕으로 많은 저술과 강연을 하였던 신학자입니다. 그가 생전에 녹화로 남겨진 한 강연에서 그는 2010년 정도까지를 그의 예상수명으로 가상을 했습니다. 그가 1932년에 태어났으니 대략 80세 전후를 기대한 것이었죠. 그러나 그는 199664세에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럽과 캐나다, 미국과 소련은 물론 전세계를 분주히 오가며 왕성한 활동을 하던 그였기에 그는 자기의 육체적인 건강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못하였던 것 같습니다.

 

성경의 외경의 하나인 도마복음서 첫머리에는 예수께서 디두모라 하는 유다 도마가 기록한 말씀 중 누구든지 이 말씀들의 뜻을 깨닫는 자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 세계, 그게 무엇일까요? 죽음이란 무엇인지요? 죽음을 맛본다는 게 나와 상관없는 것일까요? 사실 죽음은 매순간 나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어찌 보면 산다는 게 죽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루하루 산다는 것은 즉 하루하루 죽음에 가까이 다가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죽음은 우리의 의식이나 무의식에서 항상 불안과 공포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집에서나 일터에서나 늘 일상으로 겪는 사소한 불안 걱정 두려움 등 모든 감정들이 죽음, 생사의 문제들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죽음이 남의 문제가 아니고 죽음을 앞둔 암환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근본문제요 지금 여기 이 순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맛보지 않는 그 세계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뜻을 전하려는 도마복음의 첫머리가 마음을 울립니다. 그러기에 영생의 문제는 항상 우리에게 지대한 명제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들 대부분의 사람은 영생을 죽음 후에 천당에 가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도 영생의 한 부분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기독교는 생명의 종교입니다.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은 분명하게 영생을 얻는 방법에 대해 뚜렷하게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는 복음, 즉 그 굿 뉴스를 전파하기 위해 사도 바울은 평생을 받쳤습니다.

 

과학자들은 자연을 철저하게 연구하여 그 비밀을 규명해 냅니다. 규명된 지식을 활용, 또한 진보를 상상하고 그것을 현실화시키기도 합니다. 과학적 지식 덕택에 인간은 달 표면을 걸었고, 한때는 불치였던 병을 치료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생명과 우주를 이루는 구성요소까지 파악하게 되었습니다. 반면 사업가와 기업인들은 그 과학기술을 활용하여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 엄청난 부를 창출해 냅니다. 오늘날 생명공학기술은 인간의 생명연장을 넘어 영원히 사는 것 즉 영생을 상상합니다. 여러분들도 알고 있는 구글, 미국에 있는 세계최대의 기업이지요. 1998년에 설립된 20년밖에 안 되는 회사이지만 전세계 검색량의 90% 이상을 제공하는 엄청난 회사입니다. 혹자는 향후 구글과 아마존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세상이 올 거라고 반 농담조로 이야기를 나눌 만 큼 무섭게 성장하는 회사입니다.

 

그 회사는 2013년 칼리코, 즉 캘리포니아 라이프 컴퍼니란 회사를 설립, 현재 구글의 자회사로 생명공학분야의 연구개발을 하고 있습니다. 칼리코 안에는 비밀노화방지연구센터가 있어 인류가 더 건강하고 오래 살 수 있도록 수명을 조정하는 생물원리에 개입하는 방법을 찾는 엄청난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현재 구글, 페이스북, 이베이, 아마존, 오라클 등은 물론 수많은 정보기술회사들이 요즘 도전하는 기술중의 대표적인 분야가 영생입니다. 이들은 심각하게 2300년 전 진시황이 추구했던 불로초를 최근 빠르게 생명의 비밀을 파헤치고 규명해가고 있는 생명공학기술을 활용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초기 목표는 아직 영생은 아닙니다. 소박하게도 인간을 500살까지만 살 수 있는 기술을 만들어 보겠다는 목표입니다. 물론 성공가능성이 아직은 희박하지만 만약 성공한다면 인류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는 엄청나게 획기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현재 자금을 대는 구글 벤처스의 책임자인 빌 마리스에게 언론이 왜 구글이 엄청난 투자를 그에 하고 있는지를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답변은 명쾌할 정도로 분명하였습니다. 한마디로 인간은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을 좋아한다였습니다. 칼리코는 유전자 조작을 통하여 회충의 수명을 10배를 늘린 신시아 캐넌 박사와 함께 연구를 하고 있으며, 그들이 영생의 비밀을 얻기 위해 연구하는 또 하나의 동물은 벌거숭이 두더지 쥐입니다. 벌거숭이 두더지 쥐는 고통을 느끼지 않으며 신기하게도 암에 걸리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이 때문인지 일반 쥐에 비해 열 배나 긴 30년을 사는 능력이 있어 칼리코는 영생의 비밀을 벌거숭이 두더지 쥐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구글은 기존의 제약회사와는 달리 구글스럽게 접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강점인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를 이용하여 찾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아마존의 창업자인 제프 베저스 역시 관심을 갖고 늙은 세포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게 하여 노화를 방지하는 약을 개발하는 유니티 테크놀로지에 투자를 하는 등 현재 이 영생에 관련된 분야에 엄청난 투자가 왕성하게 전개가 되고 있습니다. 생물학적 영원한 삶이 정말 가능할 것인가? 우리 전통적인 과학기술자들의 의견은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럼 왜 이들은 불가능에 도전을 하는 것일까요? 인간은 과학기술과 의학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간의 평균수명을 지난 한세기 안에 두 배 이상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이제 80세의 평균수명을 갖게 되었고 이도 계속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결국 과학기술은 생물학적인 영생을 추구하는 도전을 통하여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켜 가는 것입니다. 이는 건강한 육신을 가져야만 건강한 정신도 가질 수 있기에 인간의 행복한 삶의 질을 증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며, 이는 사업으로도 엄청난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것이기에 수많은 기업들이 도전을 불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약 10여 년 전 이상한 암에 걸려 수년 동안 암 제거 수술은 물론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 단일항체 치료 등 많은 현대의학의 혜택을 받았습니다. 치료가 종료된 지 5년이 넘었으니 이제 그 암은 완치가 되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최근에 급속히 발전되고 있는 표적항암제, 면역치료제나 줄기세포, 스템셀 치료제 등은 인류가 10년 내에는 모든 암을 정복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는 희망적인 낙관을 펼치고도 있습니다. 생명과학기술은 이제 유전자가위란 신기술을 활용, 인간의 유전자를 조작, 불치유전병까지 치료를 하는 데까지 도달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가히 신의 영역을 넘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래 전 아인슈타인이 언급한대로 종교 없는 과학은 불완전하고, 과학 없는 종교는 맹목적이다란 말과 같이 둘은 상호보완적이 되어야만 위험한 탈선을 멈출 수가 있습니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524절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 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이미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저는 투병 중에 간혹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우리 몸이 이루어진 원소들에 대해서 엉뚱한 생각들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대부분 아시겠지만 우리 몸의 50%는 물, H2O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무게로 보면 산소가 가장 많고, 원소로만 보면 수소가 제일 많습니다. 태양계의 중심에 있는 태양은 73%이상이 수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산소, 수소, 질소, , 칼슘 철 등 인간의 육신을 이루는 원소들은 인간이 죽더라도 자연으로 돌아가서 전부 순환이 됩니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란 시에는 죽음에 대해, “죽음이 뭐냐? 바람 속에 벌거숭이로 서 있는 것, 태양에 녹아드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라는 것을 깨닫게 하여, 우리 마음을 평안하게 해주는 시귀입니다.

 

인간을 이루는 기초 물질들은 변함이 없이 존재한다는 것이니 불멸이고, 따라서 걱정을 하거나 죽음에 대해 크던 많은 두려움이 소멸되었습니다. 육의 세계에서 영의 세계로 신생할 수 있는 편안함을 저에게 부여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과학으로는 사후세계를 규명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현재 지금 여기에서 영생을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를 내 중심에 영접하면 됩니다. 그러면 곤충이 땅 속,위의 유충시대를 거쳐 성충,즉 나비나 벌이 되어 공중을 훨훨 날면서 햇볕을 찾으려는 것과 같이 육에만 속해 있던 삶의 굴레를 벗고, 영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21세기 젊은 학자로서 인류의 지난 발전과 미래에 대하여 최근 호모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란 책으로 우리 인류의 미래를 걱정한 유발 하라리 교수는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 특히 AI, 인공지능의 무분별한 발전과 바이오테크놀로지의 발전 역시 인류를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위험성이 크게 있음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그는 결코 기우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인간이 신을 발명했을 때 역사는 시작되었고, 인간이 신이 될 때 역사도 끝날 것이라는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는 지금이야말로 종교와 과학의 융합이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으며, 과학과 종교의 융합학문인 메타사이언스가 인류의 파국을 막고 지속가능한 지구촌의 존재를 이어나가게 만들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그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일들을 저질러 왔으며, 이는 형벌을 받아 마땅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유일하게 영원하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형벌만이 합당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라는 로마서 623절의 사도 바울의 말씀에 준거하여 우리의 영적인 삶을 충실하게 영위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모든 은사 가운데에서 가장 큰 것이라고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맞게 빚어진 우리 인간은 서로 사랑을 통하여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행복추구를 위해 우리는 걱정과 불안과 초조에서 벗어나야만 합니다. 그를 위해 요한 복음 173절의 말씀과 같이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는 죽음이라는 공포, 즉 피조물인 생명은 필멸이라는 데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사후는 우리의 가장 큰 관심사는 아닙니다.

 

지금 현재 오늘 여기에서 우리에게 영생을 제공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챙기는 일이 제일 먼저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새길의 자매 형제들은 이미 다 영생을 살고 있는 축복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의 소명은 죽음의 공포와 질병의 고통 속에서 힘들어하는 주변의 우리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품 속에서 영생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좀 더 많이 제공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생물학적인 영생의 추구와 기독교적인 영생의 추구는 동시에 이루어져야 되지 않을까 합니다. 그것이 헨리 나우엔이 언급한 지금 여기서 사는 영생을 제대로 구현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걸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주시고자 늘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곁을 떠나려 할 때 하나님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그의 곁에 붙들어 주십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에게 오셨던 분이고 오늘도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그를 통해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애쓰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생명의 하나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영생의 세계로 인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사랑을 우리 사회와 지구촌 어느 곳이든 당신의 역사가 필요한 곳에서 우리가 펼칠 수 있는 기회와 능력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영생은 생명의 무한한 연장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는 의미로 충만한 소중한 시간임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것이 주님께서 수확의 계절에 저희 새길 식구들에게 주시는 선물이라고 여기며, 우리 주님 예수님의 이름 받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아멘.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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