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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2016.06.08 12:18

[2016.05.29] 사회적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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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사회적 영성


 

2016529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새길교회 신학위원)

 

 

그들이 길을 가다가, 예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마르다라고 하는 여자가 예수를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이 여자에게 마리아라고 하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다는 여러 가지 접대하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마르다가 예수께 와서 말하였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마르다에게 대답하셨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 누가복음서 10: 38-42 -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고통 받는 모든 생명의 이웃이 되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합니다.”

- 새길신앙고백중에서 -

 

 

 

새길의 목적

 

2013년 가을에 평신도의 모험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증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새길을 특징짓는 예수따르미의 정신적 기초는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종교개혁 사상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예언자라는 사회변혁 사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새길의 정체성을 주로 평신도성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외부에서도 새길하면 평신도교회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평신도성은 새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한 요소이지 전부는 아닙니다. 또한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정신에서 보면 평신도라는 개념 자체가 부적절하기도 합니다. 평신도는 구별된 사제나 성직자를 전제해야 성립하는 대조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새길이 말하는 평신도성은 직업적 성직자에게 의존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는 상대적 개념일 뿐입니다.

 

물론 새길이 실현해온 평신도성에는 평등과 민주주의 같은 긍정적 가치가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의 진보에 비추어 보면 당연하고 상식적인 것입니다. 현대 시민사회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평등하고 민주적인 방향으로 성숙해왔습니다. 따라서 새길의 평신도성은 현대 사회의 진보와 보조를 같이 하는 것일 뿐 특별히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 못 됩니다.

 

새길의 창립 목적이 단지 담임목사 없는 평신도 교회라면 이렇게 힘들게 애쓸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가벼운 평신도 친목모임으로 존재하면 그만일 것입니다. ‘평신도 교회는 여전히 흔하지 않은 대안적 교회 모델이지만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평신도 교회도 다른 모든 교회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로서의 근본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 운동 공동체인 새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모든 신자가 예언자라는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광주 이후하나님나라 운동을 시작한 새길 1세대와 세월호 이후그 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새길 2세대가 공유하고 있는 정신입니다. 그 예언자적 정신을 새길은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우리는 자신을 비우고 고통 받는 모든 생명의 이웃이 되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다짐합니다.” 그 신앙고백을 오늘 사회적 영성의 주제로 함께 성찰해 보고자 합니다.



예언자의 사랑과 분노

 

그리스도교 사회적 영성을 체현하고 있는 성서적 모델은 예언자입니다.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는 예언자 정신은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적, 사회적 독특성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예언자 정신은 두 가지 상호 관련된 하나님 신앙에 기초해 있습니다. 하나는 가난하고 약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우선적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의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입니다. 즉 예언자는 하나님의 사랑과 분노를 세상에 전하고 실천하도록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우선, 첫째, ‘가난하고 약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우선적 사랑은 히브리인들이 역사 속에서 경험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 원형적 경험은 출애굽 사건입니다. 예언자는 이 사건을 하나님께서 사회적 약자인 히브리 노예들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킨 해방 사건으로 기억합니다. 이 출애굽 사건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은 약자를 사랑하고 해방하시는 분이라는 신관을 형성했기 때문입니다. 히브리 성서 전체에서 나타나는 약자 보호 정신도 그런 해방자 하나님 신앙에 근거하고있는 것입니다.

 

이런 가난하고 약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우선적 사랑은 해방신학이 재발견한 유대-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가치입니다. 영어로는 “preferential love for the poor”(또는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인데, ‘preferential’당파적이라는 뜻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더 절박하게 필요한 사람에게 향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우선적이라는 표현이 더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당파적 사랑이든 우선적 사랑이든 신론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불편부당하고 보편적이어야 한다는 믿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해방신학도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억눌린 자를 사랑하시는 방법과 억누르는 자를 사랑하시는 방법이 다르다는 것을 강조할 뿐입니다. 해방신학자 혼 소브리노는 그 다름을 예수의 사랑법을 통해 명쾌하게 밝혀줍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 예수는 억눌린 이들과 함께 함(being with)으로서 그들을 사랑하고 억누르는 자들에게 맞섬(being against)으로써 그들을 사랑한다.” 그러므로 약자에 대한 우선적 사랑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보편적 사랑입니다.

 

둘째, 예언자는 불의의 현실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분노를 전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예언자가 관심하는 것은 정의의 이상이 아니라 불의의 현실이라는 사실입니다. 흔히 예언자는 정의의 이상을 추구하고 선포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틀린 생각은 아닙니다. 예언자의 메시지에는 정의의 이상이 들어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불의한 현실에 대한 매서운 비판을 전제합니다. 그리고 그 비판이 예언자의 더 중요한 사명입니다.

 

정의의 이상을 말하는 것은 쉽습니다. 정의는 누구나 말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불의한 자도 정의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의, 어떤 정의인지를 물어야 합니다. 1980년대 거짓과 불의의 신군부 세력이 만든 정당의 이름은 민주정의당이었고, 그 당의 핵심 이념 중 하나는 정의사회구현이었습니다. 예언자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짓 예언자는 온 세상이 불의와 상처투성이인데도 마치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인 것처럼 말합니다. 그런 거짓 예언자에게 분노한 예레미야가 소리칩니다. “백성이 상처를 입어 앓고 있을 때에, 그들은 괜찮다! 괜찮다!’ 하고 말하지만, 괜찮기는 어디가 괜찮으냐?” (예레미야서 8:11) 마치 지금 시대의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처럼 들립니다. 예레미야는 불의의 현실을 비판했기 때문에 박해 받고 옥에도 갇혔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불의의 현실을 비판하고 폭로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예언자가 그런 위험을 감수하고 불의를 규탄하는 것은 가슴에 타는 불같은 열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세상으로부터 욕먹고 조롱 받고 박해받았습니다. 그것이 너무 괴로워서 예언자이기를 그만두고 싶어 할 때도 있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다시는 주의 이름을 입 밖에 내지 말자. 주의 이름으로 하던 말을 이제는 그만두자.’ 하여도, 뼛속에 갇혀 있는 주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견디다 못해 저는 손을 들고 맙니다.” (예레미야 20:9) 그 열정은 예언자의 마음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은 가난하고 약한 자에 대한 사랑과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불의에 대한 분노로 타오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분노가 사회적 영성의 원천입니다.

 

 

사회적인 것의 영성

 

최근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영성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영성이라는 말의 그리스도교적 출처에도 불구하고 비그리스도인, 비종교인도 사회적 영성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종교인이 아니어도 느낄 수 있을 만큼 한국인의 마음이 병들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의 한국사회에서는 가진 자도 없는 자도, 힘 있는 자도 힘없는 자도 모두 불안에 시달립니다. 분노와 혐오 범죄가 끊이지 않습니다. 사회의 외적 구조의 문제로만 보기에는 그 파괴성이 너무 큽니다. 만약 사회에 영혼이 있다면 오늘의 한국사회는 끔찍한 영적 위기를 겪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적 영성은 사회의 병든 구조와 영혼을 함께 치유하려는 노력입니다.

 

사회적 영성에서 중요한 것은 사회적이라는 형용사입니다. 그것은 영성은 사회적이어야 한다는 것이고 사회적인 것이 곧 영적이라는 것입니다. 영성은 사회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예언자적 영성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너희가 아무리 많이 기도를 한다 하여도 나는 듣지 않겠다. 너희의 손에는 피가 가득하다. 너희는 씻어라. 스스로 정결하게 하여라. 내가 보는 앞에서 너희의 악한 행실을 버려라. 악한 일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을 배워라. 정의를 찾아라. 억압받는 사람을 도와주어라. 고아의 송사를 변호하여 주고 과부의 송사를 변론하여 주어라.” (이사야서 1:11b~17) 종교적 의례의 준수보다 정의를 위한 사회적 실천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 영성은 사회적인 것이 곧 영적인 것이라는 통찰로 이어집니다. 예수는 마태복음서 25장의 최후심판 비유에서 의인들이 가난하고 약한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때 그 의인들이 종교인인지 아닌지, 그런 것은 중요시하지 않습니다. 구원,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길은 종교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예수는 나더러 주님, 주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마태복음서 7:21)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사야가 전한 것처럼 오직 악한 행실을 그치고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적 영성을 오늘의새길신앙고백마지막 문장으로 풀어 말하면 자신을 비우고 고통 받는 모든 생명의 이웃이 되어살아가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보다 더 그리스도인 같은 사람들, 자기를 비우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예수의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을 겸손히 배워야 할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미소

 

사회적 영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받는 질문 중 하나는 영적 수행과 사회적 실천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제 답은 영적 수행과 사회적 실천이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둘이 하나라는 것은 형태가 동일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목적이 동일할 때 영적 수행과 사회적 실천은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적 수행에서도 사회적 실천에서도 목적이 중요합니다. 아무리 영적 수행을 깊이 해도 그 목적이 자신만의 내적 평화라면 그것은 영적 이기주의와 다름없습니다. 아무리 사회적 실천을 열심히 해도 그것이 자기 비움 없는 욕망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선한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그 목적이 가난하고 약한 자의 고통을 줄이고 없애기 위한 것이라면, 가장 외진 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도 세상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고, 가장 복잡한 거리에서 저항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자기를 비우는 영적 수행과 이웃을 사랑하는 사회적 실천은 둘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아마 한 가지 의문이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적 수행과 사회적 실천의 일치를 말하기에 오늘의 성서본문이 적합한가 하는 의문입니다. 누가의 마리아와 마르다 이야기에서 예수는 분주히 서서 일하는 마르다보다 가만히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를 더 인정하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마리아를 칭찬하고 마르다를 비난합니다. 하지만 다른 해석도 잇습니다.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세상의 근심과 문제 속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활동하는 마르다가 아직 그리스도 곁에 앉아 말씀을 듣는 마리아보다 영적으로 더 성숙하다고 해석합니다. 마리아를 편드는 듯한 예수의 말도 마르다를 꾸짖는 것이 아니라 동생 마리아의 관상적 삶이 언젠가는 언니 마르다의 활동적 삶으로 성숙하게 될 거라는 긍정의 확언이라고 합니다.

 

저는 예수가 마리아와 마르다를 모두 긍정한 것은 두 자매의 목적이 같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예수의 뜻을 경청하려고 했고 마르다는 예수의 뜻을 실천하려고 했습니다. 예수의 뜻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것입니다. 그 뜻을 듣고 행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마리아의 영적 수행과 마르다의 사회적 실천은 사회적 영성의 한 과정 안에 있습니다..

 

누가는 자신의 시대 속에서 복음서를 썼습니다. 마태, 마가,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시대 속에서 복음서를, 다섯 번째 복음서를 써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 영성의 관점에서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예수의 이야기를 새로 써보면 어떨까요? 저는 그것을 위한 상상력을 태국 화가 사와이 친나웡의 그림에서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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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서양 그리스도인 화가들은 마리아의 부드러운 표정과 마르다의 화난 표정을 대조하여 묘사합니다. 그런데 사와이 친나웡이 그린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예수는 모두 부드럽고 행복하게 미소 짓고 있습니다. 우리의 다섯 번째 복음서, 새길복음서는 이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해도 좋을 것입니다.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고요히 경청한 마리아는 행복했다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뜻을 뜨겁게 실천한 마르다는 행복했다두 자매의 행복을 보며 예수도 행복했다. 모두가 행복했다.”saegill.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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