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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경일

다시, 길을 떠나며

(창세기 12:5-9)

 

2016124일 주일예배

정경일 형제

(새길기독사회문화원 원장)

 

 

["아브람은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땅으로 가려고 길을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이르렀다. 아브람은 그 땅을 지나서, 세겜 땅 곧 모레의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이르렀다. 그 때에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의 자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 아브람은 거기에서 자기에게 나타나신 주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쳤다. 아브람은 또 거기에서 떠나, 베델의 동쪽에 있는 산간지방으로 옮겨 가서 장막을 쳤다. 서쪽은 베델이고 동쪽은 아이이다. 아브람은 거기에서도 제단을 쌓아서, 주님께 바치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다. 아브람은 또 길을 떠나, 줄곧 남쪽으로 가서, 네겝에 이르렀다.”]

- 창세기 125~9-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는 우리 사회의 가치에 대한 근본적 성찰과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사태의 충격이 큰 만큼 변화의 의지도 큽니다. 공적 권력의 사사화(私事化)에 맞서 민주주의와 공공성을 지키려는 시민이 거리를 가득 메우며 역사 이래 최대 촛불시위를 수차례 경신했습니다. 헌법 파괴자와 그의 공범들은 장기농성을 하며 촛불이 꺼지길 기다리지만 우리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민의 촛불은 오히려 들불처럼 번지고 있습니다. 어제도 6주 연속 주말집회인데도 헌정사상 최대 인원이 민주주의의 촛불을 들었습니다.

 

물론 쉬운 싸움은 아닙니다. 위기를 피하기 위해 대통령과 여당은 별의별 꼼수를 쓰고 있고 야당도 그리 믿음직하지 않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하고 정치에 대한 절망과 냉소만 더 커질까 불안하기도 합니다. 그런 불안이 일어날 때면 저는 역사를 장구한 길로 생각해 봅니다. 역사의 길에는 특정한 사건의 지점들이 있습니다. 어떤 곳은 평탄하고 어떤 곳은 험준합니다. 어떤 곳은 넓고 어떤 곳은 좁습니다. 그 각각의 지점들은 역사의 완성이 아니라 과정입니다. 역사의 길은 수많은 굽이굽이를 지나며 이어집니다. 지금껏 많은 길을 여행하면서 깨달은 것은 굴곡이 많은 길이 더 인상적이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우리 국민은 오늘 함께 부를 희년을 향한 우리의 행진가사처럼 일곱 번 씩 일곱 번 넘어져도다시 일어나 민주주의를 향해 계속 걸어갈 것입니다.

 

 

네겝을 지나

 

종교의 역사도 사회의 역사와 다르지 않습니다. 종교의 길도 막히거나 위태로워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자신을 개혁하는 종교는 계속 진보하고 그렇지 못한 종교는 퇴보하거나 소멸합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에서 기원한 유대-그리스도교의 역사는 유난히 굴곡이 심했습니다. 아브라함 자신의 삶도 순탄하거나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여정은 파란만장한 위험으로 가득했고, 그래서 그는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서본문은 제가 유학을 마치고 새길로 돌아와 나눈 첫 말씀증거의 본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부분입니다. 그 때 경계를 넓히는/없애는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던 아브람이 중간 지점인 하란에 정착하지 않고 가나안을 향해 다시 떠났듯이 계속 새 길을 걸어가자고 말씀드렸습니다. 오늘 제가 나누려는 이야기는 그 말씀증거의 속편으로 여기셔도 좋습니다.

 

하란을 떠난 아브람은 마침내 가나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그는 가나안에 정착하지 못합니다. 가나안에서 그 땅을 자손들에게 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을 뿐입니다. 아브람은 베델과 아이 사이 세겜에 천막을 치고 머물다가 다시 남쪽 네겝으로 떠납니다. 히브리어 네겝메마른(dry)’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즉 네겝은 사막입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은 더 험한 곳을 향해 다시 길을 떠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네겝이 가나안의 남쪽 관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훗날 이집트에서 탈출해 나온 아브람의 후손들은 네겝을 거쳐 가나안으로 들어왔습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을 정탐하라며 여호수아와 갈렙 일행을 보낸 곳이 바로 네겝입니다. (민수기 13:17). 히브리인들이 네겝 사막을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간 것처럼, 어쩌면 한국 사회와 종교도 네겝처럼 메마르고 험한 길을 지나야만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의 약속을 굳게 믿고 다시 미지의 세계로 길을 떠나는 아브람의 이야기는 창립 30주년을 앞두고 있는 우리 새길 공동체에게 더 생생하고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우리도 아브람처럼 천막을 걷고 다시 길을 떠나야하기 때문입니다. 은유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스물 세 해 동안 예배를 드렸던 이곳을 떠나 새해 첫 주일부터 새로운 곳에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다시 길 떠날 준비를 하며 우리는 불안을 느낍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익숙하고 편안한 곳을 떠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런 불안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자유로운 존재임을 말해줍니다. 새길은 물리적 건물, 교리적 신앙과 신학, 교권적 직분, 형식적 의례와 같은 종교의 제도적 요소들로부터 자유로운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제도의 기능 중 하나는 물리적, 심리적 안정을 제공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도를 거부하는 것은 안정을 자발적으로 포기하는 것입니다. 제도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우리는 불안한 것입니다. 쇠렌 키르케고르가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이라고 한 것도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보면 불안은 자유로운 평신도들의 공동체인 새길의 존재방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새로운 여행을 앞두고 불안을 느끼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아브람의 천막으로부터 배워보고자 합니다.

 

 

아브람의 천막: 성막 종교

 

아브람은 유목민입니다. 유목민은 한 곳에 정주하지 않고 물이 있고 풀이 자라는 곳을 찾아 끊임없이 이주합니다. 그러려면 소유가 적고 가벼워야 합니다. 유목적 삶의 기본 원리는 이동성과 휴대성입니다. 그런 원리를 잘 보여 주는 것이 천막입니다. 천막의 특징은 쉽게 조립하고 해체하고 운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유목민의 삶은 종교적 공간 양식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세겜에서 아브람은 화려한 대리석으로 웅장한 성전을 짓지 않고 거친 돌로 소박한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노예들과 떠돌이들로 구성된 하비루’, 즉 히브리인들도 성전이 아닌 성막을 지었습니다. 천과 나무로 지은 성막은 유목민의 천막과 마찬가지로 조립, 해체, 운반이 용이했습니다.

 

성전 종교와 성막 종교는 매우 대조적입니다. 성전과 성막 모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지만, 성전의 하나님은 한 곳에만 나타나시는 반면 성막의 하나님은 어디에나 나타나십니다. 히브리 전통에서 태어난 그리스도교도 성전 종교보다 성막 종교에 더 가깝습니다. 예수의 삶도 정주적이기보다 유목적입니다. 예수는 길에서 태어나고 길에서 살고 길에서 죽임 당하고, 부활한 후에도 길에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는 성전을 건축하지 않고 교회를 형성했습니다. 교회, 즉 에클레시아는 유형의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 예수를 기억하고 따르는 이들의 모임이었습니다.

 

그리스도교가 세계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성전이 대표하는 율법과 의례 같은 외적 제도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성전 종교였다면 예루살렘 성전의 붕괴와 함께 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를 기억하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움직일 수 없는 성전이 아니라 휴대할 수 있는 성서를 들고 세계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 가벼운 성서 한 권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단순성: 자발적 불편과 자유

 

이러한 유목적 이동성, 휴대성과 함께 아브람의 천막이 상징하는 것은 단순성입니다.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난 후 줄곧 길에서 살다가 길에서 죽었습니다. 그렇게 늘 떠돌아다녀야 했으니 꼭 필요한 것만 소유했을 것입니다. 유목민의 살림살이는 단순하고 소박합니다. 오늘의 정신적 유목민인 우리가 믿음의 조상인 아브람으로부터 배우고 본받아야 할 것이 바로 단순성입니다. 단순성은 반드시 필요한 것만 소유하고 불필요한 것은 포기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는 꼭 따라 해 보고 싶은 삶의 방식이 하나 있습니다. 환경운동가 폴 호켄에게는 독특한 생활원칙을 실천하는 친구가 하나 있습니다. 그는 자기 집 안에 있는 물건의 개수를 600개로 엄격히 제한합니다. 하다못해 찻숟가락 하나까지 포함해서요. 뭔가 새로 필요한 게 있거나 선물을 받게 되면, 정확히 그 수만큼 갖고 있던 무언가를 포기합니다. 그것을 남에게 주거나 팝니다. 그렇게 몇 해를 살았더니 그의 집은 더욱 단아해져서 마치 하나의 작은 사원처럼 되었습니다. 이제는 집 안의 모든 물건이 의미를 지니고, 불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또한 자기 생활을 위해 쓰는 돈은 줄어들고 이웃을 위해 쓰는 돈은 늘어났습니다. 600의 소유,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지 않습니까?

 

단순성은 물질적 가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순성의 핵심은 본질적인 것만 남기고 비본질적인 것은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물질적 소유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생활도 단순해야 합니다. 본질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길은 태생적으로 단순성을 추구하는 공동체입니다. 30여 년 전 새 길을 떠날 때 우리는 물질주의, 교권주의와 함께 교리주의도 버렸습니다. 하나님 나라 여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예수의 복음만 남기고 그 외의 불필요한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저희 가족은 여행을 좋아하는데,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올 때마다, 거의 매번 한 목소리로 같은 말을 합니다. “, 역시 집이 제일 편해!” 그런데, 막상 편안한 집에 돌아오면 우리는 또 다시 불편한 여행을 꿈꿉니다. 어쩌면 여행은 불편을 자발적으로 감수하는 행위인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행의 불편함에 대한 두려움보다 여행의 자유로움에 대한 설렘이 더 크기 때문이겠지요. 자유보다 편안함을 더 좋아하는 사람은 집을 떠나지 않습니다. 자기 세계에 안주하는 사람은 변화하지 못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새길을 만들고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제도교회에서 목회적 돌봄 서비스를 받고, 목사가 가르쳐주는 대로 생각하고 목사가 시키는 대로 행동하면 편안할 텐데, 왜 그런 제도교회를 떠나, 계속 공부하고, 고민하고, 시도 때도 없이 전교우 대화마당하자고 그러고, 그러면서도 속 시원한 답변을 듣기보다 속 깊은 물음을 나누는 것을 더 좋아하는, 한 마디로 불편한 새길을 찾아온 이유는 무엇일까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공통적인 것은 자유롭고 싶어서일 것입니다. 제도로부터의 자유가 좋기에 탈제도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배 공간이든, 예배 양식이든, 운영 방식이든, 교제 방식이든, 사역 방식이든, 그 모든 공동체의 삶에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물어야 할 것은, 그것이 편안한가 불편한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가 속박하는가, 여야 할 것입니다.

 

 

본질: 하나님 신앙

 

요즘 우리는 새로운 예배 공간으로 가져갈 것과 가져가지 않을 것을 선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식별하여 선택해야 할 것은 물건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시 길을 떠나는 우리가 계속 붙들고 살아야 할 본질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우리가 버리지 않고 간직해야 할 새길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 신앙입니다.

 

오늘 성서본문에 따르면 아브람은 베델과 아이 사이 세겜에 천막을 쳤습니다. 베델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고 아이는 폐허더미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집과 폐허 사이에 머물렀다는 사실이 신앙적 결단의 의미를 생각하게 해 줍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세겜은 선택과 결단의 장소였습니다. 훗날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불러 모읍니다. 그리고 해방하는 하나님을 섬길 지 억압하는 맘몬들을 섬길 지 선택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여호수아서 24).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선택 앞에 선 존재입니다. 예수는 더 분명히 가르칩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아울러 섬길 수 없습니다”(마태복음서 6:24). 우리는 하나님과 맘몬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본질입니다.

 

예배 공간을 옮기면서 걱정이 많습니다. 교통이 지금보다는 불편한 것, 식사 조리를 할 수 없는 것,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 지금보다 부족한 것,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 등 염려스러운 점이 한 둘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우리는 원점에서 단순한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맘몬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는 예수의 말씀이 있는 마태복음서 6장은 또한 다음과 같은 예수의 가르침도 전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마십시오. ...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십시오.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서 6:31-33) 우리가 신앙과 삶의 본질인 하나님을 선택하면,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나머지는 다 해결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래 전 진눈깨비 날리던 어느 겨울날 저녁, 화곡동 한국 떼제 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 수사님들이 알려 준 주소대로 찾아갔는데, 지금처럼 지도앱이 있는 때도 아니어서, 두세 번 전화를 해서 물어물어 찾아가야 했습니다. 주택가 좁은 골목에 작은 나무 팻말이 붙어 있을 뿐이어서 찾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늦은 밤까지 함께 일하고, 대화하고, 기도하면서 누렸던 깊은 평화의 기억이 오래도록 따뜻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날 그런 불편을 감수하면서 떼제 공동체를 찾아갔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습니다. 떼제 공동체가 붙들고 있는 본질인 화해와 일치에 감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러 가지 현실적 염려가 많고 이런저런 준비할 것도 많지만, 서울을 떠나 경기도 오산으로 가는 것도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새길교회는 건물이나 조직이 아니라 운동입니다. 새길의 본질은 맘몬의 길을 떠나 하나님 나라의 길을 향해 여행하는 것입니다. 정신적 유목민인 우리의 본질적 운동 목표와 여행 목적지가 뚜렷하면 오산고등학교가 아니라 오산에 천막을 치더라도 사람들은 새길을 발견하고 찾아올 것입니다.

 

훗날 새길복음서“2017년 새길의 자매형제들은 또 거기에서 떠나, 남산과 한강 사이 오산고등학교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기록할 것입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새길의 본질을 어떻게 발견하고 해석하고 실천하게 될까요? 그 열려 있는 물음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그 불안이 주는 자유가 우리를 가슴 설레게 합니다. 오산학교는 우리 시대의 사상적 모험가였던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 그리고 유영모, 함석헌 선생의 숨결이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탈제도의 길을 걸었던 함석헌 선생은 새로운 길은 언제나 모험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새길은 모험의 길입니다. 우리는 모험가입니다. 우리가 용기 있게 다시 길을 떠나는 이유는 이 길이 안전해서가 아니라, 이 길이 편안해서가 아니라, 이 길이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단순하게, 본질적으로, 새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이 힘들지만, 참 기쁘고 즐겁습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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