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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추응식

사랑이 밥 먹여 주냐?”

(고린도전서 12:13-23)

 

2016109일 주일예배

추응식 형제

(신구대학 시각디자인과 교수)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 고린도전서 1213~23-

 

 

가장 부르주아적인 것은 프롤레타리아를 흉내 내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공산당 간부들의 고급 노동자복이라든가 요즘 거지 옷처럼 찢어진 비싼 청바지 같은 것은 직접적인 예가 됩니다. 이것은 본래의 상징만 남고, 실체는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을 기독교 현실에 적용하면 가장 비기독교적인 것은 기독교처럼 보이는 것이다.”라는 말이 됩니다. 예를 들어 교회건물, 교회 신도 수, 찬송가, 성경지식, 헌금, 예배형식 같은 것들을 기독교의 본질보다 더 앞세우면 자칫 가장 비기독교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기독교형식을 잘 갖추고 있는 곳이 가장 비기독교적인 곳이 될 수도 있다는 무서운 이야기가 됩니다. 정말 무서운 것은 이런 외식주의는 온 힘을 다하여 예수교의 이름으로 예수를, 기독교의 이름으로 그리스도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은 껍데기다.” 라는 것을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달을 가리키는 손으로 달을 가리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기독교는 이러한 형식을 만드는데 많은 힘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래서 500년 전에 그에 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고, 결과 오늘과 같은 예배형식도 생겼지만, 아직도 하나님을 가리는 종교형식은 너무나 견고하게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기독교의 본질은 기독교의 형식을 모두 버린 곳에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곳에서 모든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진정으로 서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정경일 원장님은 교회 안에서만 쓰는 말 대신 일반 사회에서 사용하는 말을 교회에서 많이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교회의 하나님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하나님으로 증거 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건물도 교회 밖 강가의 모래로 지었고, 교회의 헌금도 시장의 돈으로 드리고 있습니다.

 

진정 예배당의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라면, 정말로 이 세상을 운행하는 진리의 하나님이라면, 특히 이 세상에 힘들고 약한 사람이면 누구든지 먼저 더 챙겨주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리고 우리 속까지 들어오셔서 은밀히 위로해 주시고 힘주시는, 한시도 우리와 떨어져 있지 않는 하나님이라면, 짧은 한시적 삶을 불안하게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들이 왜 하나님을 찾지 않겠습니까그 하나님이란 말이 그슬리면 다른 말로 부르든 무슨 일이 있겠습니까. 그 분이 나를 이렇게 불러라 하셨습니까. 나를 이런 모양으로 그리라 강요했습니까. 주시기만 하는 어머니 같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사람이 왜 늘어납니까?

 

하나님이 개한테, 나무한테, 사람한테, 교회한테 도대체 무엇을 요구했습니까. 하나님이 일요일 날 예배당에 안 오면 큰일 난다고 했습니까. 헌금을 안내면 안 된다고 했습니까. 구역예배에 안가면 안 된다고 했습니까. 일요일 날 일하면 안 된다고 했습니까. 일요일 날 일해야 된다고 했습니까. 죽도록 일하라고 했습니까. 쉬어가면서 하라고 했습니까. 높은 사람에게 조아리라고 했습니까. 돈 많은 사람이 높다고 했습니까? 술 마시면 안 된다고 했습니까. 담배 피우면 안 된다고 했습니까. 도대체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고 힘들게 한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에게 홍동백서 제사를 지내라고 했습니까. 일 년에 40일간 밥 먹지 말라고 했습니까.


2000년 전에 직접 보여주신 하나님 모습. 사람들이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그것을 본 사람들이 정말로 세상 도리는 이래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잊을까봐 사람들이 그것을 끝내 기록했지 않았습니까. 그것을 왕이 기록하라 했습니까. 출세하려 기록했습니까. 하늘의 뜻에 따라 기록했든 땅의 뜻에 따라 썼든 그것이 뭐가 중요합니까. 따진들 답이 있습니까. 그것이 오늘날 예배당의 말놀음 아닙니까. 말 만들고 말 부정하고, 말 고치고...... 말 많으니까 예배당 밖에 있는 사람이이 싫어하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그 먼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이 적은 글이 세상이 바뀌어도 몇 백번이나 바뀐 지금까지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고, 삶의 지표가 되고 있다는 것 아닙니까. 복잡한 주자창의 가장 좋은 위치에 장애인 자리를 비워둔다든지, 자동차와 사람이 부딪혔을 때, 약자를 더 위해 주는 법도 다 이에 따라 만들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성서는 두껍지만, 핵심은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서에는 이 말이 수없이 되풀이 됩니다. 바울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고, 예수님은 하나님 사랑이웃사랑이 율법과 예언서의 핵심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기독교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랑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가 땅에서 흐르는 것처럼 같은 것입니다. 성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잘 배우고 힘입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사시면서 또 죽으시면서 이 두 사랑이 하나 되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교회의 십자가는 하늘과 땅의 사랑이 하나로 만나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말은 추상적인 개념일 뿐입니다. 사랑이 너와 나의 사이에서 작용하려면 무언가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장차 이루어질 종말적 세계이기도 하지만, 지금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적 시간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가운데라는 말은 안에 (within)’ 이라는 뜻도 있지만, ‘사이에혹은 우리 가운데(among)’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후자에 뜻에 따르면, 하나님 나라는 너와 내 사이 혹은 우리들 공동체 가운데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이 되려면 주님, 주님부르기만 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고 마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7:21) 이것은 몇몇 선택적 선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바울도 고린도전서(420)에서 하나님 나라는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 능력에 의지하여 예배의 끝 무렵에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서 만들어지길 바라면서 또한 이 나라의 거주자로서 우리의 의무와 책임에 대해 생각합니다.

 

저는 하나님 나라라고 하면 가장 먼저 마태와 누가복음에 나오는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다.”라는 말씀과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의 지체들이 모여 한 몸 이루는이 구절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특히 지체들에 관한 이야기는 제가 평시 다른 사람에게 많이 말하고 또 많이 생각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이와 관련하여 청소에 관한 이야기를 먼저 해 볼까 합니다.


청소는 더러운 것을 닦고, 흐트러진 물건을 정리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래서 먼지를 털고 정리정돈을 합니다. 그러나 방안의 먼지를 없앤다고 그것이 세상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 먼지가 방안에서 마당의 꽃밭으로 옮겨지면, 거름이 되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방안의 먼지는 못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소는 제자리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 비슷하죠. 쓰레기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쓰레기란 쓸모가 없다하여 버림을 받은 것이지만, 그 중에 많은 부분이 필요한 곳을 몰라 쓰레기가 되었습니다. 어떤 집에 버리지도 못해서 두고 있는 애물단지 같은 물건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면 보물단지가 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쓸 데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사람은 더더욱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체들에게 고유한 역할을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더럽다는 것은 방안의 먼지처럼 제자리에 있는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나 있는 것이죠. 김치에 있어야 할 김치국물이 흰옷에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밭으로 가야할 배설물이 강으로 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장사판에 있어야 할 사람이 정치판에 있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렁이는 지렁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호랑이는 호랑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모든 피조물들의 고유한 자리를(고유한 역할을) 흩트려 놓고 있습니다. 세상을 더럽히고 있는 거죠. 하나님의 피조물 중 창조질서를 파괴하는 것은 오직 인간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이렇게 탐욕을 위해 맘대로 사용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왜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명을 다스리라고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더러우면 씻습니다. 세수는 얼굴에, 설거지는 그릇에, 빨래는 옷에 있지 말아야 할 것을 분리하는 것입니다. 각각 제자리로 보내는 것입니다. 깨끗하게 함입니다. 옷만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붙어 있던 때도 제자리를 찾아가 깨끗해집니다. 모두 다시 태어남입니다. 세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누구는 눈으로, 누구는 손으로, 또 누구는 귀의 모습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그 모습은 하나님 나라에서 뚜렷이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지체에게 임하면 그의 정체성과 하나님 나라에서의 역할이 명료해집니다. 눈이 욕심으로 귀의 몫까지 가지고 있던 것을, 혹은 발이 손보다 크다고 여겨서 손을 무시하던 어리석음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의 씻음으로 지체의 모습을 찾는 것입니다. 씻김은 은총이자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세례는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때 묻지 않은 형상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입니다. 하나님나라의 주민등록증을 발급받는 것이죠. 저는 아직도 하나님 나라의 불법체류자입니다. 보수교회 같으면 성만찬에도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제 깨끗해진 지체들이 한 몸 이루는 곳입니다. 그 몸의 주권은 하나님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몸을 다스리십니다. 사랑으로 다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가 그 사랑을 깨닫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 사랑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읽은 성서에도(15-16)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지체들의 이름이 다른 것은 역할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 역할은 다른 지체를 위하는 사랑의 도구가 됩니다. 하나님 나라는 이 사랑의 도구들이 모여서 이루어집니다. 서로를 위하는 지체들의 정교한 삶의 결합입니다. 누구는 농사를 짓고, 누구는 옷을 만듭니다. 그리고 지체들의 고유한 역할은 모두가 하나님의 형상이므로 존귀하며 지체 간 높고 낮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높낮이 없음이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에서도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눈은 손에게 쓸 데가 없다고 하지만, 눈물이 나면 눈을 닦을 손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마찬가지고 손에 가시가 찔렸으면 눈으로 보아야 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머리를 씻으려면 욕실로 걸어 갈 발이 필요하고, 발 역시 머리의 판단 없이는 한발 짝도 내디딜 수 없으니 늘 머리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하나님나라는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평등한 나라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구절 13절에서도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놀랍습니다. 신분차별이 엄격했던 2000년 전 유대사회에서 종과 자유인이 하나님 안에서 한 몸 되었다고 바울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몸은 늘 건강할 수 없고, 세상은 늘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아픈 곳이 생기고 힘든 일도 생깁니다. 눈이 멀 수도 있고, 귀가 안 들릴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눈이 귀의 역할까지 하려하고 입이 몸을 대표하려 해서 갈등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픈 곳을 위하여 모두가 함께 합니다. 사랑의 지체들은 한 몸이기에 한 지체의 고통은 모든 지체의 고통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몸에 분열이 생기지 않게 하시고, 지체들이 서로 같이 걱정하게 해 주신다고 오눌 성서는 하나님 사랑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다시 올 하나님 나라에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 나라처럼 기독교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이라는 말도 어쩌면 없을 것입니다. 농사짓고, 그것을 운반하고 판매하고, 그릇 만들고, 식탁을 만들고, 수저를 만들고, 식탁 위에 놓일 꽃병을 만드는 사람들이 힘을 합하여 한 지체가 밥을 잘 먹도록 해줄 것입니다. 이런 일은 서로가 서로에게 일어날 것입니다. 생선장수 아주머니가 우리들의 저녁밥상을 위해 고등어를 판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자기 역할에 대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트마크를 아무리 그려도 사랑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사랑타령 유행가가 사랑을 만들어내진 못합니다. 울리는 꽹과리처럼 시끄럽기만 하면 사랑이 밥 먹여 주냐?”하는 비아냥거림만 나옵니다. 그러나 사랑은 밥 먹여주는 것입니다. 지체들이 합력하여 밥 먹여주는 것입니다. 누가 밥 먹여주면 그 사람은 누구에게 옷을 입혀줍니다. 그것도 혼자하지 하지 않고 많은 지체들이 함께하여 옷을 입혀 줍니다.


각 지체는 각각 겨자씨만한 일만합니다. 그것들이 밥이 되고, 옷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지체들의 사랑을 먹고 입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시대는 시장에서 지체들이 한 몸이 됩니다. 시장의 지체들은 자신들만을 위하기 때문에 먹여준다.”라는 말 대신 내가 먹는다.”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잘난 체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도 이미 팔릴 상품이 되어 있으니까요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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