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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만자

 

뒤 돌아보니 모든 것이 당신의 은총이었습니다.”

-여호와 이레-

(창세기 22:13-14)

 

2016925일 추수감사주일

최만자 자매(새길교회 신학위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 창세기 2213~14-

 

 

오늘은 새길 공동체가 추수 감사절 예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인류는 고대로부터 추수한 수확에 대한 감사와 함께 노동해 온 공동체의 유대를 다지는 의식을 다양하게 지켜왔습니다. 일 년 동안 무사히 풍성한 수확을 할 수 있게 해준 신과 자연에게 감사드리고 이 절기를 통해 그간 공동체 안에 혹 쌓여진 갈등을 헤쳐 서로 화해하고 또한 고된 노동을 통해 쌓인 억압을 풀어내면서 함께 춤추고 노래하고 즐거운 놀이를 하며 공동체의 새로운 결속과 앞으로 더 의미 있게 살아갈 새 힘을 얻는 의식과 축제를 벌여온 것이 추수 감사절의 원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성서에도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가 첫 수확을 한 후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그 이후 보리 수확으로부터 밀 수확에 이르는 동안의 칠칠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사실 미국교회의 추수 감사절인 11월 셋째 주일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켜왔으나 점차로 우리의 전통과 풍습에 맞는 추수감사절을 지키자는 의식이 확대되었고 새길 공동체는 추석 때를 우리의 전통 절기라 생각하여 추석 지난 다음다음 주일에 감사절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올해 감사주일은 새길 코스모스 회원들이 주관하여 그 순서를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새길 코스모스가 뭐지? 이러실 분은 없으시겠지만 혹시 모르시는 분을 위해 이 모임은 새길의 65세 이상의 여성들 모임입니다. ‘가을에 피는 꽃이름이기도 하지만 우주의 질서를 의미하는 코스모스로 작명 하고 모이기 시작한지 2년이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올해 감사절 예배를 새길 코스모스에서 주관해 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고 여러 고민을 한 끝에 우리 회원들 자신의 감사에 대한 생각과 이야기를 미리 나누고 그 이야기를 종합 정리해서 말씀증거로 하기로 하고 특송, 기도와 성만찬, 봉헌 등 순서를 맡아 인도하기로 하였습니다. 종합 정리를 맡은 저는 한분 한분의 이야기의 뜻이 잘 전달되는 것을 중심으로 준비했습니다.

 

92일 공간새길에서 7명의 코스모스 회원들이 모여 각자의 감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기 지면에서는 참가자들의 이름을 밝히지는 않겠습니다. 한 자매님은 어려서부터 성실하게 생활을 한 모범생이셨고 열심히 공부하여 보육학과에 지원서를 썼는데 혼자되신 어머니께서 여성도 경제권을 가져야 한다면서 자매님도 모르게 의대로 학과를 고쳐 놓으셨대요. 어쩔 수 없이 의대를 들어가 약리학, 병리학에 재미를 붙이셨고 병리학 대학원을 마치셨는데 영어가 너무 복잡해서 병리학을 포기했을 즈음 선배로부터 행려병자를 다루는 정신과 병원에 와서 봉사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겠지라는 믿음으로 수락 했답니다. 이 병원은 행려병자들과의 생활이 너무 힘들어 많은 의사들이 잠시 머물다 가버리는 곳이었지만 자매님은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통독하면서 순진한 사랑과 돌봄으로 그들을 대하면서 성실히 지내셔서 19년이나 봉직하였으니 모두 놀라워했답니다. 자매님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이끄심이었고 그분의 뜻 이었다라고 고백하며 뒤돌아보니 하나님의 은총이었다고 고백합니다.

 

또 한 자매님은 어려서부터 몸이 약하시어 내가 열심히 무엇을 해서 어떤 것을 성취 하겠다 이런 의욕을 갖지 못했답니다. 그런데도 중, 고교 시절 수많은 콩쿨에 나가 입상을 휩쓰셨대요. 음대를 졸업하고 약혼하신 후 미국에 가서 결혼하고 생활하셨는데 가난한 유학시절이라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나셨답니다. 그런데 남편 분이 맨해튼 School of Music에 원서를 넣어 보라고 하도 졸라서, 사실 경쟁이 너무 치열해 별 자신도 없고 욕심도 없으셨는데, 남편의 강력한 권유로 지원하였고 결과는 졸업할 때까지 풀 스칼라 쉽을 받아 공부 할 수 있었답니다. 너무 신나서 졸업 후도 계속 학업을 하고 싶었는데 남편께서 서울대의 요청으로 급히 한국으로 돌아오시게 되어 귀국해야만 했고 그 후 단국대 전임으로 임용되어 은퇴하실 때까지 지내셨다고 합니다. 자매님은 자신의 삶 이야 말로 자기 힘으로 일구어 낸 것이 아니라 뒤에서 보이지 않는 손, 보이지 않는 영의 인도로 살아 온 것이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즈음 손주들을 돌봐주고 계시는데 친구 분들이 말하기를 , (누구)가 손주 보고 있다는 게 상상이 가니?’라고들 하신답니다. 자신의 삶을 충분히 되돌아보는 요즈음은 일상의 모든 것, 먹고 자고 숨 쉬는 것 까지도 감사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다른 자매님은 또렷한 한마디로 자신의 일생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평탄한 삶에서가 아니라 역경과 고난 속에서 경험하게 된 하나님의 인도와 은혜에 대한 감사가 넘친다고 고백합니다. 서울 YWCA 총무로 일할 때 힘든 과정 과정을 손 붙잡고 함께 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었고, 특히 남편의 감옥 생활 기간 동안 그 고통스러운 날 들 동안에 오히려 더 큰 힘으로 감당하게 하고 성숙하게 해 주셨음을 이제 뒤돌아보며 감사를 드린다고 합니다. 사실 남편이 감옥에 가 있는 상황에 부인의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관심가져 보셨나요? 옥살이 하신 분의 고통과 고난은 많이 얘기되고 사람들의 마음을 붙잡지만 그 부인들의 뒷 생활에 대해서는 거의 무관심 해온 것이 우리들의 현실입니다. 군부독재에 저항하던 민주화 운동 시절동안 구속자 가족협의회가 결성되어 구속자의 어머니들이, 부인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군부세력에 투쟁하고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옥살이 뒷바라지에 눈물과 기도가 끊이지 않는 생활을 했습니다. 감옥 안의 생활만큼이나 힘든 삶을 여성들이 감당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매님은 서울Y 총무라는 공적 책임을 맡은 입장에서 옥바라지를 감당하기란 참 벅찬 생활 중에도 오히려 더 깊은 기도의 능력과 신비한 영적 체험의 힘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입니다. 시편의 많은 부분에서 감사하라,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란 노래를 항상 암송하였답니다. 제 기억에 이분이 그동안 하도 금식기도를 많이 해서 저러다 병나면 어쩌나 걱정했던 기억이 납니다.

 

또 다른 자매님은 좀 특별한 감사의 자리를 보여주었습니다. 자매님의 아버님께서 교장 선생님으로 오래 봉직하시다가 뒤늦게 62세 되시어 평생 원하시던 신학을 공부하셨답니다. 원래 법학을 전공하셨고 교회 장로로 헌신하셨는데 기독교를 제대로 알고 싶다 하시면서 늦깎이 신학생이 되시고 졸업 후 목사 고시를 치른 후 안수를 받고 그 어려운 개척교회를 몇 제자들과 함께 시작하신 것입니다. 자매님은 독일 유학을 하고 돌아 온 후 아버님을 어떻게 도와드릴까 고심하다가 매일 새벽 기도 인도하러 가시는 길에 차로 모시고 함께 오가면서 많은 이야기들을 아버님과 나누었답니다. 또 아버님 목회하시는 교회를 열심히 빠지지 않고 출석했는데 교회 교인들이 얼마 없어서 도저히 빠질 수가 없었다내요. 그런데 이제 돌이켜 보니 자기 인생에서 그 때 아버님과 함께 교회 다녔던 일들이 제일 감사하다는 고백입니다. 부모에게 자신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전달 해 드릴 수 있었던 그 시간이 너무 소중하고 감사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부모는 가셨는데 아련히 그 때 함께했던 시간의 추억이 귀하고 아름답게 자신의 삶의 큰 자리를 차지하며 그 추억이 오늘 자신의 삶에 큰 힘이 된다고 하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자매님은 그 활달한 웃음 뒤에 그동안 삶의 억울함이 묻어 나왔습니다. 자매님의 마음 깊은 곳에 이전에 다니시던 교회로부터 받은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못한 듯 했습니다. 자매님은 깊은 신심으로 한 교회를 26년 동안 성심껏 섬겼답니다. 교회가 자리 잡히기 전 자신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고 그 후에도 청년들의 모임 장소로도 제공되기도 했으며 점심식사를 손수 지어 그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치우고 일주일 내내 교회 뒷바라지로 시간을 보내야 했고 그 정성과 헌신이 끝없었습니다. 미술 전공하신 분이 손에 붓과 물감 대신 주걱과 행주를 들고 지내야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아는 후배 중에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10년을 오직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나서 뒤 돌아보니 자기의 삶과 인생과 존재가 없어졌더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들이 여성들의 헌신에 의존하여 교회를 살려 나가면서도 여성들의 평등한 참여에는 길을 막고 있습니다. 여성들은 교회에 와서도 가사노동의 연장으로 부엌일에 집중되고 있고 따라서 여성들의 오랜 교회생활은 여성들의 사회 역사의식의 확장이나 사회적 삶의 발전으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자매님은 이렇게 혼신을 다해 봉사한 교회에서 의외의 배신을 경험하게 되어 자신의 삶이 허무해 지고 그 공백감과 허무감으로 깊은 상처를 안게 되었답니다. 그러다 인터넷을 통해 찾아온 새길 공동체에서 신앙의 자유한 차원과 의미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새길을 깨닫게 되어 너무 감사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요즘은 열심히 많은 책을 읽고 강연들을 들으며 진리에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려 노력하고 있답니다.

 

이제 여섯 번째 자매님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 자매님도 위의 자매님과 비슷한 고백을 하면서 새길 공동체를 발견한 것에 감사하고 행복감을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자매님도 함께 사는 형제님과 한 교회를 오랜 세월 열심히 섬겼답니다. 형제님은 중한 직책도 맡으시고 많은 교회 일들을 책임지셨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매주일 자매님은 고민에 빠졌는데 교회를 가야 할 의미를 찾을 수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일상생활에도 활력과 기쁨을 누리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매주일을 고민과 갈등 속에서 의미 없이 몸만 교회를 오가던 중 어느 주일 아침 한 신문에 소개된 새길교회를 발견했답니다. 그 주일날도 형제님은 교회의 많은 책임들을 생각하면서 다니던 교회로 가자고 하였지만 자매님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단호히 거절하고 나는 새길로 가보겠다고 했답니다. 어쩔 수 없이 형제님도 따라 나섰고 하여 두 분이 함께 새길에 오셨는데 그날로부터 자매님은 새길의 일원이 바로 되셨답니다. 새길과의 만남은 자신의 인생에 큰 기쁨과 의미를 주는 사건이 되었으며 자신은 새길 공동체가 너무 좋고 여기서 하나님과의 만남을 제대로 알게 되었다고 정말 기뻐하며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1년이 넘도록 이전의 교회로부터 만나자, 그러면 안된다 등등 많은 전화와 요청이 이어져 괴로웠지만 그럼에도 자매님의 단호한 의 의지는 확고했습니다. 그만큼 의미 있는 신앙생활에의 갈망이 컸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자매님의 탈 기존교회의 경험은 보기 드문 용기 있고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이었습니다. 뒤 돌아보니 새길에 온 것이 하나님의 은총이라 고백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분이 학교에서 더 오래 학생들을 가르쳐야 하는데 선생님 역할을 빨리 끝내신 것이 아쉬웠습니다.

 

여섯 분의 감사에 대한 고백을 들었습니다. 이 감사의 간증을 통해 가족관계의 소중함, 한국교회 문제와 개혁의 필요성,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삶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을 새롭게 만남 등의 경험을 녹이고 있는 새길 자매님들의 귀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보통 감사의 표현은 ‘...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인데 코스모스 자매님들의 감사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삶의 순간순간들이 뒤돌아보니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아 감사를 드린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 고백들이 너무 귀하게 생각되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너무 왜곡된 신앙행태로 인해 예수의 삶과 하나님의 뜻과는 별 상관도 없어진 것 같습니다. 부와 세상 권력과 세상적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이라 생각하고 그런 것을 획득하기 위해 기도하고 그것을 얻을 경우 감사의 간증을 남발하는 교인들, 교회들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복덕방망이가 되고 예수의 십자가는 사라지고 부활의 영광만이 난무하는 성서의 하나님도 예수도 없는 교회와 교인들이 우글거리고 있는 것입니다.

 

뒤돌아보니 모두 당신의 은총이었다는 감사는 그 밑바닥에 깊은 자기 성찰을 담고 있다 하겠습니다. 나의 능력, 나의 힘으로 살아 온 줄 알았는데 돌아보니 당신의 손길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이런 길로 내가 살 수 없었겠음을 깨닫는 깨달음입니다. 기쁘고 행복할 때야 물론 하나님의 은혜에 쉽게 감사드리지만 고통의 날들에 감사를 드리기는 어렵습니다. 그 고통의 시간들을 내 힘으로 극복해 보려고 온갖 애를 써 보았지만 고통은 더 심하였던 경험들이 많이 있지요. 그러나 그 힘든 순간엔 전혀 몰랐지만 다 지난 후 뒤돌아보니 함께 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모든 것이 당신의 은총이었습니다라고 고백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뒤돌아보는 감사는 지난날 나에 대한 성찰과 동시에 지금의 나를 겸손하게 하고 더 의미 있는 삶을 촉구하게 하는 동력이 되어주니 참으로 귀한 감사입니다. 더욱이 그 감사는 혹여 지금의 내게 허영, 거짓과 술수가 있다면 단호히 버리고 오직 진리를 쫓으리라는 결단을 하게 해주는 선한 인도하심을 믿는 믿음을 부어주니 진정 감사하게 되는 감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인자하심을 깨닫게 되는 축복이 아닐까요? 그래서 뒤돌아봄에 의한 감사는 나를 비우고 내려놓을 수 있게 하는 힘을 줍니다. 지난 날 삶이 기쁨이든 고통이든 당신의 은총임을 깨닫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넘어선 초월적 당신 앞에 나를 비우고 내려놓음으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게 하는 근원, 제대로 살게 하는 참 생명으로 이어주는 힘을 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새길 자매님들의 감사 고백과 그 의미는 참 아름답고 좋은 감사절의 언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제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습니다. 왜냐하면 요즘 세상이 이런 고백을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준비를 하면서 내내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이 말에 동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과 가족들이 돌아보니 은총이었습니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오늘도 일용할 양식 때문에 굶주린 자들이 정말 그렇군요할 수 있을까? 너무나 고달프게 사는 취준생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그래 이 땅의 가장 낮은자들은 어떻게 당신의 은총입니다를 고백할 수 있을까? 눈을 돌려 이런 사회적 난제들을 풀어 나갈 구조들을 보니 책임 져야할 자들, 힘을 가진 자들은 정말 기막히게 마구 살면서 제 뱃속들만 챙기고 이 땅의 낮은 자들을 위한, 불의한 현실들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눈곱만큼도 없으니, 이 불의한 상황에 하나님 당신은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당신의 공의가 어떻게 세워 질 수 있습니까? 하며 탄식하게 되는 마당에 모든 것이 당신의 은총입니다라는 고백은 살만한 자들의 사치스런 고백이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를 떨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에 창세기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하신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이 본문이 감사절과는 얼토당토 않는 것이지요. 그러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하나님이 주는 고통 가운데서 어떻게 감사를 고백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이삭 이야기를 다시 보았습니다. 잘 아시는 내용입니다만, 100세에 큰 민족을 이룰 후손으로 철석같이 약속하고 주신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폭력적인 하나님과 결코 용납될 수 없는 하나님의 이 요구 앞에 아들을 죽일 칼을 손에 쥐고 아들에게 태울 장작을 지워 침묵으로 산을 향하는 역시 폭력적이고 무능한 아브라함과 아무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을 믿으며 순종하는 지극히 어리고 약한 아들 이삭의 이야기이지요. 이 폭력적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어찌됐건 자식 죽이는 패륜적 아버지가 되는 상황에도 침묵으로 순종하는 이를 정말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하게 되나요? 이 본문의 해석은 참으로 난해하기 짝이 없습니다. 물론 학자들은 가나안의 어린이 희생제의에 대항하는 내용이라 합니다만, 저는 이 이야기가 오늘 우리 현실을 은유해 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악의 성행이 대책 없고 세상 질서가 뒤죽박죽인 것 같고 그 가운데 가장 낮은 이들이 희생되고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이 이삭의 처지같이 생각됐습니다.


저는 오늘 이 본문의 의미를 신학자들의 주석보다도 렘브란트의 그림을 통해 같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렘브란트는 이삭 이야기를 주제로 1636년 이후 많은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미술에 문외한이라 이런 깊은 통찰은 구미정 선생 글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1655년 이전의 많은 작품들에선 이 빛의 화가는 번제물 제단 위에 놓인 이삭의 몸을 밝은 빛으로 드러내어 그의 고통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내었습니다. 영락없이 무고한 고통에 발버둥치는 우리 인생의 사실적 모습이라 할까요. 그런데 1655년의 같은 주제 작품은 완연히 다른 그림으로 나타납니다. 오늘 이 그림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서 렘브란트의 해석은 아주 다르게 드러납니다. 아브라함은 강압적이지 않게 이삭을 제단에 뉘이지 않고 가슴에 안고 있으며 그의 두려움을 줄이려 눈을 가립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내면 깊은 자식에 대한 애정과 고통을 동시에 말해 주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천사는 아브라함의 뒤에서 그의 오른 팔을 누르며 붙잡고 칼을 쥔 팔을 뒤에서 만류하듯 잡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천사도 아브라함도 이삭을 살려야 한다는 강한 의지와 행동을 시사하는 모습으로 그려졌고 이삭의 발버둥은 없어 보입니다. 여기 렘브란트의 하나님은 결코 전지전능 무소불위의 힘센 분, 폭력적으로 인간에게 자기사랑에 대한 테스트를 하는 분이 결코 아닙니다. 천사를 하나님으로 동일시한다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길로 폭력을 막고 살리기를 원하시는 분, 전지전능의 군왕적 힘으로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고통을 감싸 안고 이삭을 살리기 원하며 안타까워하는 연민의 하나님-천사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분명 밝혀지는 것은 렘브란트의 하나님이해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더 이상 하나님은 인생의 잔인한 폭력과 연결된 분이 아니라는 새로운 하나님에 대한 발견이 아니었나 저는 생각합니다. 벗어날 수 없는 잔인한 악의 현실은 인생에 있지만 그것이 결코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으로 인한 것이 아님을 깨달은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여러분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지만 동남아에서 쓰나미가 발생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을 때 김홍도 목사가 주일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든가 그 곳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지 않아서 그렇게 가난하고 죽게 됐다는 등의 발언을 했지요. 유대인들의 믿음에도 율법주의적, 인과론적 사고가 팽배했고 하나님은 자기를 배반하는 자를 벌주시는 분, 인생의 고통은 그의 죄로부터 온다는 사고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이런 유대주의 인과론적 사고를 극복하려는 대표적인 이야기가 성서의 욥의 이야기이지요.

 

렘브란트는 우리 실존의 악의 현실, 고통의 현실은 불가해한 영역, 알지 못하는 영역으로 일단 미룹니다. 그 고통의 현실은 무엇으로도 설명될 수 없는 알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렘브란트는 하나님은 그 악의 현실로부터 우리를 살리려 애쓰시는, 그 악의 힘을 막으려 우리 뒤에서 우리의 노력과 함께하시는 분이심을 드러내고자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칼을 쥔 손을 제지하는 천사의 모습입니다. 사실 히브리 사상에는 악과 고통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를 밝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신비의 영역이요 하나님의 영역으로 미룹니다. 다만 이 세상은 악의 세력이 날뛰는 험악한 곳이요 이곳에서 살아야 하는 인간의 실존적 현실은 고통이며 그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사건이 출발합니다. 잔인한 이 현실 안에 눈에 보이지 않게, 그리고 강압적 권능으로서가 아닌 숨어서 위기를 막으려 애쓰는 하나님을 성서는 자주 자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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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의 이 새로운 하나님이해는 그의 돌아온 탕자이야기에서도 나타납니다. 탕아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손, 그 한손은 남성의 손이요 다른 한 손은 여성의 손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하나님의 모성적 속성에 의한 것임을 그는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어머니로 고백한 중세의 신비주의 영성가들도 많았습니다. 렘브란트는 예수의 삶에서 이미 어머니 하나님을 보았고 그 사랑의 하나님 안에서, 달리 말해서 사랑 안에, 자비 안에, 고통과의 연대 안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고 그렇게 표현하였다 하겠습니다. 그는 이미 현대의 여성신학적 지평을 열어 보고 있었던 사람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참혹한 세계전쟁들과 아우슈비츠의 극한적 비극 등을 겪으면서 인과론적이며 율법주의적인 유대-기독교 전통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이해 될 수도 용납될 수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 고통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하나님에 대한 많은 새로운 깨달음의 사상이 큰 흐름을 만들어 왔습니다. 렘브란트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단초를 이미 자기 시대에 발견하였다고 봅니다.


신영복 선생님 글귀 하나 보게 됩니다. “길을 걷다가 골목이 꺾이는 길모퉁이 같은데서 재빨리 뒤를 돌아다보라, 거기 당신의 등 뒤에 당신을 지켜주는 손이 있다. 어머니 손 같은, 친구의 손 같은... 인간을 사랑 할 수 있는 이 평범한 능력이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이다

하나님은 생명을 사랑하고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사랑 안에 계시고 고통에 연대하는 우리들의 몸짓과 함께하시고 그 안에 계시는 분입니다. 악의 현실이 아무리 거세더라도 그 가운데서 진리와 정의를 추구하며 세상을 살리기 위한 우리들의 사랑과 연대 안에, 아니 그러한 우리들의 뒤에서 우리와 함께 아파하고 우시고 웃으시는 분입니다. 우리들 사랑 안에 계신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돌아보니 당신의 은총이었습니다를 고백할 수 있는 것입니다은총은 하나님 편에서 우리 쪽으로 내려오는 사랑입니다. 코스모스의 특송처럼 누군가 너를 위하여 기도하고 있습니다. 은총의 기도입니다.

 

하나님,

우리가 언제나 진리와 정의와 사랑과 생명 안에서 살아 당신을 항상 만나게 하소서.

그 안에 계시는 당신을 늘 사랑하고 따르게 하소서.

당신의 은총을 영원히 감사하게 하소서. 아멘.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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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2016 [2016.08.21]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자유 file 2016.08.26 신익상 목사
25 2016 [2016.08.07] ‘性善’ 따르기 file 2016.08.09 김용덕
24 2016 [2016.07.24] 민중은 어떻게 메시아가 되는가? file 2016.07.26 정경일
23 2016 [2016.07.17] 율법의 완성, 인권의 복음 file 2016.07.20 한인섭
22 2016 [2016.06.26] 소리없는 아우성: 돌들이 울부짖기 전에 file 2016.07.01 김성수
21 2016 [2016.06.19] 우리의 불편한 사명: 원수사랑 file 2016.06.24 김동수 교수
20 2016 [2016.06.12] '산 돌(살아있는 돌)’의 비유와 산티아고 카미노(the way of Santiago) file 2016.06.16 이은선 교수
19 2016 [2016.06.05] 사랑, 소망, 믿음을 깨우는 소리 file 2016.06.08 문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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