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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순님, 장숙경

[말씀증거 #1]

 

스스로 밝히는 빛

(베드로전서 2:9)


201735창립 30주년 감사예배

최순님 자매(평신도신학팀)

 

[여러분은 택하심을 받은 족속이요, 왕과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민족이요, 하나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어둠에서 불러내어 자기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신 분의 업적을, 여러분이 선포하는 것입니다.]

- 베드로전서 29-

  

저는 낯가림이 심한 편입니다. 사람을 사귀는 데도 오래 걸리고, 낯선 장소에 적응하는 데도 시간이 꽤 걸리는 편입니다. 나름 큰 변화였는데도 오랜 적응기가 필요하지 않았던 경험은, 새길교회를 처음 나왔던 때였습니다. 이국땅을 밟은 느낌이었다 할까요? 날마다 새로웠고 날마다 설렜습니다. 기독교에 입문한 이후 교회에 다니면서 점차 적응은 되어 갔지만 내심 깊은 데서 늘 낯이 설었던 교회의 문화가 새길교회에는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을 부르는 소리가 없었고, 어깨를 다독여주시는 전도사님이 계시지 않았습니다. 야단을 치며 설교를 하시던 목사님들도 안 계셨습니다.

 

그런데 진짜 행복했던 충격은 그렇게 달라진 외적 풍경에서 왔다기보다는 다른 데서 왔습니다. 객석의 손님처럼 앉아서 목사님들의 설교를 수동적으로 들어야 할 평신도 교인들이 간혹 강단 위에 올라가 말씀증거를 할 때였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야단맞으며 듣던 설교와는 다른 것이었지요. 자기 속내를 만나는 순간부터 털어놓는 진지한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습니다. 다양한 직업에 종사하는 형제자매님들이 자기만의 영혼의 깊은 우물에서 건져 올린 말씀증거를 하셨습니다.

 

말씀증거자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진솔하고 다양해서 자연스러웠습니다. 마음을 움직여주는 힘이 거기에는 있었습니다. 스스로 밝히는 빛은 자신도 모르게 다른 이들도 빛을 밝히게 하는 힘이 있다지요. 새로운 세계로 이주해 온 설렘으로 행복의 강도가 더 크게 느껴졌던 그 무렵이 어느덧 15년 전의 일이 되었네요.

 

소나무는 일천 개의 봄볕을 모아 언덕 위에 서고

시냇물은 일만 봉우리의 가랑비를 모아서 계곡에서 흐른다

 

모든 생명을 자라게 하는 바탕은 지극함이라는 뜻이겠습니다. 지극함을 담보로 하는 한 생명의 성장과 성숙은 느리고 완만하게 이루어진다는 의미로 다가온 이 싯귀가 서른 살이 된 새길은 어떤 모습으로 자란 나무일지 상상하게 만듭니다. 낙락장송에 이르기엔 아직 갈 길이 먼 나무일까요? 앞으로도 지금까지처럼 봄볕을 모아 줄기가 더 굵어지고, 빗방울을 모아 쉬임없이 흘러가는 물줄기가 되기를 간절하게 기원해보는 아침입니다.

새길공동체에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지요. 서른 살 생일을 한 해 앞둔 지난 해, 30주년을 기점으로 제2의 창립을 선언하기 위해 미래위원회가 구성됐습니다. 미래위원회 다섯 개의 서로배움팀 중 하나로 평신도신학팀도 태어났습니다. 자발적으로 태어났습니다. 창립 때부터 실처럼 이어져 온 열망이 봄볕처럼 모여, 빗방울처럼 모여 한 개의 씨앗으로 뿌려진 것입니다.

평신도신학팀은 지난해 돌연히 태어난 건 분명 아닙니다. ‘직업화된 교역자 중심이 아닌 평신도중심의 교회를 세우기로 한 창립 당시의 취지가 있었으니 30년 전에 잉태가 된 셈입니다. 평신도신학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그동안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유를 두 가지로 짐작해봅니다. 우선,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요. 예언자적 사명과 사회적 책임을 끊임없이 성찰했고, 게으름과 방관자적 자세를 경계하면서 당면한 시대 문제들과 씨름을 하는 동안, 아마 알게 모르게 미루어졌던 것 같습니다. 또 신학은 전문가들이 하는 것이니 전문적으로 신학공부를 하신 분들께 맡기고 의존해 왔던 것이 또 다른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의 생의 과제를 부둥켜안고 고민하며 하나님 앞에 스스로 서 있는 존재들이 아닌가요? 자기 문제들을 누군가가 대신해 주는 일이 언제까지 가능할까요? 평신도신학팀이 생겨나자 여러 형제자매들이 온전한 궁금증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걸 보면, 그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모임은 첫모임부터 지난 달 대화마당을 마칠 때까지 쉽지 않았습니다. ‘평신도도 신학자라는 선언에 얄팍한 호기심으로 모인 사람들이 아니었기에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간의 우리가 이해하고 수용했던 신학과 어떻게 구별이 되는지, 앞으로 어떻게 지속시켜 가야 할지... 평신도가 신학에 대한 호기심이 있어 신학자가 되고 싶으면, 지금 당장에 신학대학에 들어가 학위를 받게 되면 신학자가 되는 간단한 길이 있는데 왜 이토록 심하게 고민하고 갈등을 하면서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각자 암중모색하는 짧지 않은 시간들이 흘렀습니다. 돌아보니 그런 수많은 질문을 하면서 우리는 자유로워졌고, 암중모색하면서 우리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이 되어왔습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도 예수를 믿어 구원(자유, 해방)에 이릅니다. 그의 구원과 그의 구원이야기는 구분됩니다. 그의 구원이야기는 자체 충족적인 체계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신학이고 그는 신학자가 됩니다.”

 

곱씹어볼수록 하나님 앞에 선 한 사람의 단독자로서의 자의식이 있어 아름답고 그래서 겸손하기 그지없는 우리들의 선언이었습니다. 이것이 나는 신학자라고 선언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자기를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은 공통의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이후 삶의 뿌리 혹은 우선순위가 뒤바뀐 경험들이지요. 어느 신학자는 암송하고 있거나 책에서 배운, 아니면 목사님으로부터 들은 말하자면 밖에서 주입돼서 알고 있는 하나님과 예수님이 아닌 자기의 하나님과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자기의 성령은 어떤 분이며, 교회는 또 자기에게 무엇인지를 한 줄로 고백하게 하는 훈련을 시킨다고 합니다. 그 고백이 바로 신학의 근간을 이루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평신도신학팀이 선언한 신학과 어느 정도 통해 있는 듯해 반가웠습니다.

 

헌신예배를 통해서 팀원들의 구원과 구원이야기를 나누고 거기서 체계성을 도출하여 신학성에 도달해보려고 했습니다. 쉽지는 않았지만 선언을 실천해본 것이었으며 평신도신학의 출발을 한 계기였습니다. 그 때 제출했던 저의 구원이야기를 요약해서 들려드림으로써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믿음 그리고 구원]

교회를 다닌 지 5년 정도 지났을까요?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하나 생겼던 때입니다. 100일 기도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처음 일어난 때였지요. 어스름한 새벽에 성경만 펼치면 살아있는 몸을 가진 어떤 한 인격체가 내게 따스하고 깊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은 날들이었습니다.

(중략)

그러던 어느 한순간 와락 다가온 성서의 한 귀절, “여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난해했습니다. 왜 이 구절이 내 안에 갑작스런 생기가 돌게 하는 걸까?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이상한 조건이 교회에 대한 내 반감을 키워오지 않았던가? 그 맹목적인 믿음만 강조하는 기독교가 한 일은 세상사를 더 꼬이게 하는데 일조해 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믿음이라는 주관적 상태를 무엇으로 검증할 수 있다고... 그걸 검증하는 기준이 있다면 믿음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할 수 있나?

(중략)

믿음에 대한 이러한 두려움이 있는 나에게, 믿음이 구원의 선행조건이라는 말은 목에 걸린 가시 같은 것이었지만 나를 기습해온 성서의 한 구절로 저는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믿음, 구원 모두 실로 어려운 말들이었습니다.

 

얼마 전 다가오는 것들이라는 영화를 보았는데 영화 속에서 주인공은 신은 눈을 뜬 자에게는 보이고, 눈먼 자에게는 안 보인다.’ 라고 팡세를 인용합니다. 몸을 땅바닥까지 바짝 구부려야 겨우 보일만큼 낮은 땅에서, 모진 추위를 뚫고 피어나는 봄꽃들에서부터 아름드리 큰 나무까지 처음 시작은 아주 작은 씨앗이었다는 것을 깨달으며 내가 생명의 경이로움에 전율할 때마다, 자연 속에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볼수록 만물은 사랑의 기운 속에서 서로 의존하며 경이롭게 신비한 생명의 춤을 지칠 줄 모르게 추는 것을 새삼 느낄 때마다,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신비롭게 만물이 이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내가 아는 나의 하나님과 그의 아들 수님은 아주 깊은 아름다움이라고 저는 고백하게 됩니다. 사랑이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영화를 보다가 깨달았습니다. 누군가의 성품을 아는 것. 그 성품이 선하며 아름답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그 사람에게 눈을 뜬 사람이라는 것을... 자연이든 사람이든 예술이든 만물 속에 은밀하게 감추어진 아름다움으로 계신 그분을 아는 것이 나의 믿음이고 나는 아주 깊은 아름다움으로 계신 그분을 알고 있기에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구원에 대한 저의 개인적인 경험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내어 이렇게 들려드린 건 개인적인 경험이 공동체적인 경험이 되는 순간을 함께 나누고 싶어서였습니다. 평신도신학팀은 스스로 빛을 밝힘으로써 자기도 모르는 사이 다른 사람도 빛을 밝히길 바라는 소망에서 태어났습니다. 앞으로 공동체 식구들이 다양한 만큼 구원이야기도 다양하게 흘러나와 점점 평신도신학의 영토가 더 확장되고 풍성해지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제 뿌려진 씨앗이 싹이 틀 때까지, 그 싹이 메마르지 않게 물을 줘서 자라게 하는 일은 서른 살을 맞은 새길공동체의 몫입니다.새길로고.jpg

 

 

 

[말씀증거 #2]

 

청년 예수, 청년 새길

(마태복음서 4:12~16, 누가복음서 4:18~19)


201735창립 30주년 감사예배

장숙경 자매(사회사역위원회)

 

[예수께서 요한이 잡혔다고 하는 말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는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 바닷가에 있는 가버나움으로 가서 사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 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 마태복음서 412~16-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누가복음서 418~19-

 

 

잠시 눈을 감고 들으셔도 좋겠습니다.

 

청춘! 이는 듣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 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을 들어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의 기관과 같이 힘 있다.

이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이성은 투명하되 얼음과 같으며,

지혜는 날카로우나 갑 속에 든 칼이다.

청춘의 끓는 피가 아니더면 인간이 얼마나 쓸쓸하랴!...

인생에 따듯한 봄바람을 불어보내는 것은 청춘의 끓는 피다...

사랑의 풀이 없으면 인간은 사막이다...

이상의 꽃이 없으면 쓸쓸한 인간에게 남는 것은 영락과 부패뿐이다.”

 

가슴이 뛰시나요?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민태원의 <청춘예찬>이란 수필의 일부입니다. 청춘에 대해 굉장히 가슴 설레고 아름답게 묘사가 되어 있지요. 혹시 이 글이 쓰여진 시기가 언제인지 아시나요? 영화 <암살>의 배경이 되었던 1930년대입니다. 작가의 나이는 30대 중반이었구요. 며칠 전이 3·1절이었는데, 3·1운동이 일어난 때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이 시기는 만주침략을 위해 한반도는 병참기지화 되기 시작하고, 치안유지법으로 조선인들에 대한 사상 탄압은 가중되던, 참 암담한 시기였습니다. 그런 시절에 작가는 도대체 어떤 심정으로 이런 글을 썼을까요?

 

요즘 우리 청년들의 암울한 미래와 더불어, 당시 젊은이들의 미래에 대한 전망은 어떤 것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됩니다.

 

아시다시피 올해는 새길이 서른 살이 되는 해입니다. 제가 서른 살을 생각하면서 제일 먼저 떠올린 것은 멋진, 아주 잘 자란 청년의 이미지였습니다. 여기 성수 씨나 청년회의 청년들처럼 이요. ‘청년이란 어감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소년, 장년, 노년의 과정에서 느닷없이 푸른 시절이라니! 사실 정치사회적 문제들을 치워놓고 보면 서른은 참 젊고 아름다운 나이임이 분명합니다. 10대나 20대 때처럼 발랄하진 않아도 이제 조금씩 인생을 알아가는 나이, 그래서 더 듬직하고,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함께 가지고 행동할 수 있는, 힘이 있고 싱그러운 때이지요.아마 그래서 예수도 서른 살 부터 공생애를 시작했고, 석가도 서른에 출가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보니 서른이란 나이가 예삿나이가 아니란 생각이 듭니다.

 

저는 오늘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한 때와 같은 나이가 된, 청년새길의 사회사역위원회의 한 사람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일반적으로 개신교에서 사역의 사전적 의미는, 목사 혹은 전도사가 신자들을 모으기 위해 행하는 행위를 뜻 합니다. 찾아보니 많은 교회에서 사회사역, 또는 사회선교란 단어도 쓰고 있던데, 활동 내용은 주로 외부봉사와 전도였습니다.

 

평신도교회인 새길 사회사역의 내용은 조금 다릅니다. 선교와 봉사를 아우를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정치 사회적 불균형, 날로 심각해지는 환경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며, 고민에 그치지 않고,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정의롭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실천으로 이어 나아가겠다는 다짐이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괴테가 파우스트의 입을 통해 철학, 법학, 의학, 신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구를 하고 수많은 고민을 하였지만 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고 그 한계를 고백하면서 요한복음 11절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구절을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로 바꾸고 비로소 만족했듯이, 저는 조심스레 새길의 평신도신학은 말씀에서 시작해 행동으로 실현될 때에만 완결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새길 사회사역위원회의 다른 이름은 <새길행동>입니다. 예수를 신으로 떠받들고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일을 그만두고, 인간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따라 예수정신으로 살겠다는 의지적 표현이기도 합니다. 누가복음의 오늘의 말씀처럼, 작은 일 한 가지라도 가난한 사람에게 따듯한 손길을 전하고, 지친 삶의 굴레에 포로 된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놓여나게 하고, 미처 알지 못해 피해를 보는 사람들에게 눈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곁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다면, 이것이 곧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는 것이 되리라는 믿음입니다.

 

<새길행동>은 몇 몇 팀원들의 활동이 아닙니다. 평신도신학처럼 새길인이면 누구나 참여해야 하고, 누구나 그 일원으로 활동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제가 오늘 이 자리에 선 이유이기도 합니다. 활동의 방법은 다양하겠지요. 우선 마음표현으로, 그리고 예수의 손과 발로, 덧붙여 경제적 후원도 있을 것입니다. 그 어느 것이든 올해부터는 작은 실천을 작은 습관으로 만들어 한 가지 이상 새길의 이름으로 함께하시기를 제안합니다.

 

저희가 오늘 짧은 시간에 이해를 돕기 위해서 간략한 리플렛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여러분께서 가지고 계신 리플렛을 보시면, 새길행동의 현재 활동들과 각 팀의 역할이 나와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 이후 우는 자와 함께 울기 위해, 아픔이 있는 곳, 고통 받는 이들의 이웃이 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있구요,

 

시대의 그늘진 곳, 차가운 곳에 찾아가 따듯한 손길로 잡아주겠다는 새길의 의지가 담겨있는 <손길>이 있습니다.

 

<동행>은 국내 체류 노동자가 점차 늘어나는 상황에서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해 의료, 이미용, 여성 쉼터 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숨길>은 이번에 새길행동에 새로이 합류한 환경팀입니다. 환경문제의 심각성을 모르는 분은 안계시겠지요. 숨길은 창조의 보존과 생명존중이라는 새길정신에 부합하여 이 시대를 깨우기 위한 목소리를 내거나, 함께 하는 발걸음을 내딛을 것입니다. 팀장님의 포부가 크니 많은 분들이 동참하셔서 실천적 환경운동을 하시길 기대합니다.

 

한 가지 더 <씨앗 프로젝트>가 있는데, 이번에 우리가 오산학교로 오면서 미래세대인 청소년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기획하고 있는 것들입니다. 리플렛에 나와 있는 사업들을 학교 측과 의논하여 진행할 계획입니다.

 

각 팀 소개 아래 팀장님들의 이름이 있습니다. 적성에 맞고 마음이 가는 팀에 합류하셔서 함께 활동하시면 새길 공동체에서의 삶이 훨씬 더 풍요롭고 즐겁게 느껴지실 거라 확신합니다. 이 사회, 이 땅에서 가장 고통 받는 이들 곁으로 가 그들의 이웃이 되어주라는 것은 예수가 우리에게 준 지상명령이자 새길 공동체의 존재 이유이기도 합니다. 새길행동의 각 팀들은 따로, 또 같이, 늘 우리의 사회현상에 깨어있음으로써 시의적절하게 방안을 마련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의 작은 실천이 이방사람들과 어둠에 앉아있는 민중들에게, 또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추는 일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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