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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최만자

 

 

정의와 평화의 입맞춤: 희년 평화의 오늘의 의미(분배정의, 환대, 긍휼)”

(레위기 25:10, 시편 85:10, 누가복음 4:18)



2017219일 주일예배

최만자 자매

(새길교회 신학위원)

 

[너희는 오십 년이 시작되는 이 해를 거룩한 해로 정하고, 전국의 모든 거민에게 자유를 선포하여라. 이 해는 너희가 희년으로 누릴 해이다. 이 해는 너희가 유산 곧 분배받은 땅으로 돌아가는 해이며, 저마다 가족에게로 돌아가는 해이다.]

- 레위기 2510-

 

[사랑과 진실이 만나고, 정의는 평화와 서로 입을 맞춘다.]

- 시편 8510-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누가복음 418-

 

 

말씀증거를 시작하기 전에 잠시 김영주 형제님을 추모하려 합니다. 언제나 조용히 말씀이 별로 없이 다니셨지만 그의 빈자리가 느껴집니다. 형제님의 미소를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그 선한 눈빛에 서렸던 아픔의 그늘을 느꼈습니다. 더 다정히 환대하지 못했던 죄스러움이 지금 제 심정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서 명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참 힘든 시간들을 지나고 있다. 국정 농단으로 상처투성이가 된 이 나라, 3월을, 그리고 5월을 잘 넘길 수 있을까? 그 이후 이 나라는 어떻게 될까? 이런 현실에 있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인식과 삶의 태도는 어떤 것이어야 하나? 염려도 깊고 조바심도 난다. 그런데 참 유감스럽게도 가짜뉴스 양산과 억지 떼쓰기 태극기 집회에 대형교회 교인들이 다수라고 한다. 이런 현실 초래는 오랫동안 한국교회가 물질주의에 빠져 예수의 삶과 정신을 외면한 채 돈과 권력의 종이 되게 하는 메시지 전달에 주력하였기 때문이리라. 그 결과 정의와 비판의식은 사라진지 오래되었고 돈과 권력을 예수의 복음이라고 진리를 속여 온 지도자들과 맹종한 신도들의 모습이 오늘의 저들이 된 것이다. 이들은 신앙의 기본에도 못 이르는 교인들이 되어버렸고 예수와는 상관이 없어졌다.

 

많은 교회들이 예수의 정신으로부터 멀어져 기본상식도 없어진 것과 달리 오히려 수많은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정의의 대열에 섰기에 그나마 국정농단 후의 나라 미래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싶다. 어찌보면 민주화정신이란 거대한 이념 이전에 기본상식조차 무너진 정치 권력자들에 대한 분노가 시민들로 하여금 촛불을 들게 한 것이라 생각된다. 한국교회가 기본상식 이하의 행위에 조차도 분노할 줄 모르는 집단이 되었다는 것이 참 슬프다. 가짜 그리스도인, 가짜뉴스 등 가짜가 성행하는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것은 비판적 사고이므로 우리는 더 냉정하고 정신 바짝 차리고 거짓과 대결해야 한다. 우리에게 지금 절실한 것은 새로운 질서, 새로운 삶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5월 이후 똑 같은 사회가 반복된다면 촛불 투쟁했던 것이 얼마나 자괴감이 들겠나 싶다. 성서 표현대로 묵은 땅을 갈아엎어야 새 봄의 농사가 가능한 것이다.

 

오늘은 새길 정체성 중 하나로 평화의 주제가 선정됐다. 평화는 매우 중요한 인류의 삶의 가치이며 새길은 매주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다짐을 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고 할 만큼 수많은 전쟁의 경험 속에 살아왔다. 그런데 전쟁이 많은 만큼 인간 사회는 또한 평화를 추구하고 지향하는 역사를 이루어 온 것도 사실이다. 평화가 부재한 곳에서 인간 존엄과 사랑, 삶의 안녕을 보장하는 평화사상이 더욱 발전하여 왔다. 이런 면에서 보면 6.25 한국전쟁을 겪어 근 70년 동안을 그로인해 나라와 민족이 만신창이가 된 우리나라에서 평화사상이 크게 발전하지 않았음을 자성해야 될 일이라 생각된다.

 

평화는 무엇일까? 냉전시대는 소극적으로 전쟁이 없는 상태를 평화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세계 2차 대전 이후 동·서간 냉전체제가 고착됐고 제3세계들의 탈 제국주의 흐름 속에 혼란과 혼동이 지속되었으며, 월남전, 걸프전 등 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평화는 멀어져 갔다. 대립국가들은 평화를 이룬다는 명목아래 생존논리, 안보논리를 앞장세워 경쟁적 무기확장, 더 위협적인 무기개발에 전력하면서 전쟁을 끝없이 준비하고 발발시켜 왔다. 이러한 냉전시대의 안보논리, 소극적 평화론을 넘어서야만 진정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이 요한 갈퉁에 의해 제창됐다. 그는 평화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잠재적 요인들이 없어진 상태라는 적극적 평화개념을 말한다. 전쟁이 없는 상태의 평화는 표면상 평온한 상태로 이는 평화가 아니라 평정(pacification, befriedung)이라 구별한다. 그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잠재적 요인들을 폭력(물리적, 구조적)으로 보고 평화는 폭력이 없는 상태그것은 곧 사회정의가 실현된 상태라고 규정한다. 그러므로 평화는 바로 사회정의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갈퉁의 평화론에 영향 받은 1980년대부터 지속되는 대중적 평화운동이 안보철학을 비판하고 무기 감축(군비축소) 등을 주창한 것이 이 맥락이다.

 

사실 생존논리, 안보논리를 내세워 군비확장을 통해 평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은 성서의 평화사상이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전쟁의 역사라 할 만큼 전쟁을 겪으면서, 그 역으로 성서 안에는 절대적 평화사상이 확고히 나타나 있다. 미가 예언자가 칼을 쳐서 농기구인 보습을 만들라고 외친 것이 대표적 소리이다. 이스라엘의 처절한 고백은 군비확장에 의존하여 평화는 절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왕들이 강대국과 그 군비에 의존하다 결국 멸망한 경험을 예언자들은 소리 높여 일깨웠다. 현실에 안주하고 외세의 힘에 의존하면 평화가 온다는 거짓 평화론자들에게 국민들이 속아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소리친다. 진정한 평화는 정의로운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고, 그것으로부터 온다는 것이 성서의 평화사상이고 또한 갈퉁의 주장이다.

 

사실 기독교 평화전통은 어거스틴으로부터 중세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정당한 전쟁론’(Just War) 곧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전쟁을 일으킨다는 것이었다. 이는 과거 십자군 전쟁의 신념이요 걸프전의 부시의 논리이다. 그러나 에큐메니칼 교회신학은 성서의 절대적 평화주의 전통에 선다. 이 전통은 성서의 예언자 정신위에 서서, 1930년대 세계 1차 대전 이후 전쟁을 정당화 해 온 교회의 잘못을 반성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며 정당한 전쟁은 없고 전쟁과 폭력이 범람하는 세상에서 평화 건설자로 역할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임을 각성하였던 것이다. 기독교 평화론을 다 고찰 할 수는 없겠다. 오늘의 집중적 관심은 평화는 사회정의가 실현된 상태이다라는 것과 무력 강화에 의한 평화는 거짓평화라는 것과 정의 없이 평화없다는 결론이 성서의 정신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이는 시편 기자가 정의와 평화가 입맞춤 한다라는 아름다운 시로 표현하였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춤 한다는 성서 평화의 구체적 제시는 무엇일까? 성서의 평화라는 말 곧 히브리어 샬롬’(shalom)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라는 좁은 의미가 아니고 상해를 받지 않는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 완전함, 완성, 질서, 복지, 안전, 축복, 정의, 사랑, 해방, 구원 등등 다양한 뜻을 갖는 말이다. 히브리인에게 있어서는 삶의 궁극 목표이며 하나님이 인간에게 부여해 주는 구원의 상태와 상응하는 말로 이해되는 포괄적 개념이다. 샬롬 부재의 상태는 질병, 전쟁, 사회적 계급투쟁, 빈부의 격차, 자연재해와 파괴 등등으로 나타나고 샬롬은 이런 요소들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조화, 평등, 질서 그리고 유기적 통일의 완전함과 온전함을 지칭한다. 완전 자유한 상태, 그 상태 안에서 성장하고 있는 삶의 일상적인 상태를 통칭해서 샬롬의 상태라고 한다는 것이다. , 샬롬은 우리 일상적 삶의 총체적 안전이요 안정이다. 그 샬롬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의 근원은 하나님과의 특수한 관계현실 안에서 이해된다고 한다.

 

그런데 참으로 독특한 구약성서의 기록은 이 샬롬이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이 온전하게 평형을 이루는 영역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구약성서가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두 활동이 있는데, 1)징벌과 심판을 통한 공의를 세우는 것과 2) 위로의 용서를 통한 긍휼(라훔) 활동이다. 이 둘이 유기적 상호작용을 하면서 성취되어 간 역사가 구약의 역사라고 한다. 하나님의 공의의 활동은 평등의 부조리를 해소시키는 하나님의 심판활동으로 공동체의 윤리를 형성하였고, 긍휼은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어 궁핍한 자들과 동등되게 하며 그들을 일으켜 세우는 긍휼, 자비 안에서 비로소 평화를 수행하는 주권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의는 긍휼을 지향하고 긍휼을 통해서 완성된다. 그리고 공의와 긍휼이 만나서 평화를 이루는 영역을 이스라엘 안에 보존해 두고 있다는 것이다. 김이곤 교수는 이 영역이 바로 약자변호의 평등사회를 추구하는, 이른바 휴머니즘에 철저히 기초한 율법, 계약법전, 신명기 법전, 성결법전 등이라고 한다. 초기 이스라엘 사회의 평등과 평화의 윤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기초로 하여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체결되었던 평화의 계약이었고 그 법을 지켜 나가는 것이 바로 평화를 이루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적 샬롬이 갖고 있는 그 특수한 역사적 삶의 자리라고 해석한다. 하나님이 거주habitation하는 자리를 지켜 나가는 법 정신은 한결같이 이스라엘 역사현실 속에서 나그네 되고 고아가 된 그리고 과부가 되고 눌림을 받았던 자들을 억압한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있는 곳이고, 눌림받는 자를 위한 하나님의 긍휼의 해방역사가 개입한 곳이요, 그것이 하나님의 평화운동임을 환기시킨다. 이 하나님의 평화공동체를 역사 안에서 만들어 갈 과제가 하나님을 신앙하는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이들이 구약의 선각자들 곧 사가들과 예언자들, 시편 시인들이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평화계약 곧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의 조화를 이루는 대표적인 하나가 희년법이다. 따라서 희년법은 바로 평화의 법이다. 레위기 258~55절에 기록된 이 법은 참으로 독특한 성서의 정신이다. 고대 중동사회의 다양한 관습법의 영향 받기는 했지만 이 법은 다른 곳에서 유례를 볼 수 없는 특유한 성격을 띠고 있다.

 

희년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때를 기점으로 일곱 번째 맞는 안식년이 지난 그 다음 해인 제 오십년 째의 해를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들어갈 때 그들은 지파별로 삶의 근거가 되는 땅을 공평하게 분배 받았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나면서 각자의 사정들이 달라졌다. 어떤 이는 땅도 집도 팔아먹고 심지어 노예로 전락했다. 빚을 많이 진사람, 살 집이 없어진 사람, 병들고 의지할 곳 없는 사람 등 불공평한 삶의 모습들로 바뀌었다. 그런데 성서는 희년이 되면 이 모든 현재의 조건을 털어버리고 가나안에 처음 들어 왔을 때의 상태로 다시 돌아가서 다시 인생을 시작하는 사회개혁법을 선포한 것이다. 그 해의 신년일은 성격상 대 사면의 날에 해당하며 기쁜 함성의 나팔을 불어 거룩하게 성별하여야 한다고 한다. 희년의 대 주제는 해방이다. 땅이 없어진 사람에겐 처음 땅을, 빚진 자들에게 모두 탕감을, 집이 없어진 사람들에게 원래 집 무르기를, 노예된 자들에게 전적 해방을 선포하고 땅의 휴경을 명령하여 자연까지도 경작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대 해방의 혁명적 법을 선포한다. 모든 굴레로부터 해방하여 원래 생계 터전과 신분으로 돌아가 새로운 인생을 평등하게 다시 시작할 수 있게 하는 대 사회개혁이다. 참으로 엄청난 사회혁명적 명령이다. 성서는 정말 과격한 책이다.

 

이 대 사면의 근거는 나는 너희를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하나님이며 너희는 그 노예 경험에 근거하여 형제를 억압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억압하지 말라는 억울하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억압과 폭력은 경제 억압과 경제 폭력을 가리킨다. 경제적 폭력은 형제와 동족의 마음에 한을 남기게 되고 이와 같이 동일한 노예 경험과 동일한 구원 경험을 가진 동족끼리 경제적 능력 때문에 한을 심는 일은 다름 아닌 그들 모두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모르는 행위가 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이 다만 영적이고 제의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


누가복음 418절엔 예수께서 자신이 이 땅에 온 사명을 처음으로 선포하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는 바로 이 희년을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고 한다. 가난한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자에게 보게함을, 눌린자에게 해방을 주는 기쁨의 해를 자신의 사명으로 선포한다. 구약의 희년은 예수에게 와서 구체화, 역사화 되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가 헬조선 이라고 표현된지 오래되었다. 특히 빈부 양극화현상은 끔찍할 정도이다. 대량실업, 특히 청년실업 현실은 나라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노년층 빈곤, 송파 세모녀 사건으로 대표되는 가난한 이들의 고통, 흙수저 금수저의 계층문화, N포세대, 갑질의 횡포, 사람이 사람이 아닌 현상, 막살기, 난민, 다문화, 주택문제 윤리 도덕의 실종, 권력의부패와 오만과 횡포로 인한 세월호의 참사 등 등 이 험난한 현실을 극복하고 새로운 세상을 이루어야 한다는 간절함이 있다. 오늘 우리자리의 희년, 그래서 이룰 평화세상이 무엇일까? 이는 아직 구체화 되지 못했지만 현재의 우리 사고와 사유를 전환해야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희년개혁, 희년평화 지향의 삶의 조건과 기회를 오늘의 현실에서 평등하게 다시 조정하기 위한 세 가지 영역을 깊이 생각하였다.

 

첫째, 분배정치에 관하여

경제적으로 모두 평등한 조건에서 다시 시작할 방법은 없을까? 이 생각을 하면서 제임스 퍼거슨의 분배정치의 시대를 읽었다. 그의 논점들을 희년의 경제해방법의 정신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았다.

 

예수는 밤새도록 고기를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지라고 조언했고 베드로는 그물이 찢어질 정도의 물고기를 수확하였다는 것이 성서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물고기를 비유로한 빈곤정책은 자본주의 사회의 복지정책에서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가난한자가 평생 먹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로 된다. ‘물고기를 주면 그냥 하루 배부르게 되지만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면 평생 배부르게 할 것이다라는 논리가 빈곤퇴치의 정책이었다. 퍼거슨은 그런 관점이 북반구 자본주의 사회 복지정책이었으나 지금은 세상이 너무 달라져 그 정책들이 맞을 수 없기 때문에 관점의 전환, 사유의 전환이 절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우선 오늘날의 어업, 혹은 산업은 고도로 자본화, 기술화된 특정 기업들이 독점하는 상태이고 따라서 노동에 대한 수요가 절대 감소하여 실직 어민이 넘쳐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더하여 오늘날 어획량은 이미 바다 생태계를 파괴할 만큼 엄청나서 물고기를 더 많이 잡을 필요성에 의문해야 하는 상태의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원제는 물고기를 줘라’ (Give a Man a Fish)이다.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 생태위기가 일상이 된 시대에 살면서도 여전히 분배가 아닌 생산에서 탈빈곤 해법을 찾는 시각은 문제이므로 사고를 전환해댜 한다는 것이다. 젖을 먹이는 행위를 원초적 인간행위로 생각한다면 분배가 오히려 생산의 결과가 아니라 토대가 된다는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는 것이 퍼거슨의 강력한 주장이다. 안정적인 노동임금의 기회가 박탈당하고 99%가 잉여로 전락하는 시대, 4차산업혁명은 더 불안한 요소로 다가오는 사회에서 인간을 재정의하지 않고서는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시대를 위한 새로운 사유가 필요하기에 생산보다 분배가 먼저라는 사고로의 전환을 요청한다.

 

이런 분배주장을 하는 것은 부의 원천인 토지나 천연자원, , 공기 뿐 아니라 금융 시스템, 인터넷, 방송주파수처럼 사회공통의 재산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기업의 소유물로 전유되어온 공유재를 광범위하게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피터 크로포트킨을 인용 하면서 퍼거슨은 말하기를 내가 어떤 재화를 생산하기 때문에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통의 산출물에 대한 상속인으로서의 지분을 갖기 때문에 배당의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고 한다. ‘사회적 불평등은 단순히 불평등의 동의어가 아니다. 삶의 조건과 기회에서의 엄청난 불평등이 초래하는 비극현상이다. 나는 이 분배먼저라는 주장이 희년의 정신과 연결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분배 정치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야할 과제를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한다고 본다.

 

둘째, 환대의 문제

오늘의 우리사회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 환대라고 할 때 우리는 찾아온 손님 혹은 방문자를 반가이 맞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환대는 더 근원적인 인간의 존재적 가치에 대해 생각해야 함을 일깨운다, 환대는 사람을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다. 끝없이 발생하는 난민문제, 유랑민, 이주민, 추방당한 사람들, 장벽에 가로막히는 사람들, 입국을 거절당하는 사람들, 더하여 사회적 갈등 속에서 배타당하는 사람들, 빈부격차, 차별에 의해 소외되는 사람들, 갑질당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인간의 존재성을 회복하는 사회로 나아가야만 한다. 나는 이 주제에 대하여 김현경 선생의 사람, 장소, 환대라는 책에서 통찰을 얻었다.

 

이 책은 사람이라는 것은 사람으로 인정된다는 것, 다른 말로하면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받는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사람은 이 성원권과 공간이 연결된 사회적 존재임을 제시한다. 우리를 사람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는 공간에서 사람은 성원권을 가지며 그 장소를 벗어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니게 된다는 것이기에 따라서 사회란 다름 아닌 이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한나 아렌트는 이를 현상공간이라 부른다고 한다.

 

이글을 읽으면서 오래전 정대현 형제의 말씀증거가 떠올랐다. 우리는 중국집 배달원을 철가방으로 부른다. 이는 사회적 사람의 범주에서 제외된 것이다. 그는 그 존재 자체로 사회 안에 들어와 있지 못한 것이다. 존재 자체는 그 실존의 이름을 가지고 사회 안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나의 정체성이 인정되는 것, 그것이 사회적 성원권이고 그 성원권으로 우리는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정대현 형제님은 집에 오시는 도우미 아주머니를 처음 만날 때 꼭 이름을 묻고 그를 이름으로 대한다는 얘기도 들었다. 실로 우리 주변에서 우리가 스스로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숱할 것이며 사회적 성원권 곧 그 존재 자체로 가치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느끼게 된다.

 

김현경 선생의 전개에 의하면 사회는 물리적 윤곽을 갖는 어떤 객관적 실체가 아니라 각자 앞에 상호주관적으로, 각각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공간이며, 다른 말로 하면 사회는 각자의 앞에 펼쳐져 있는 잠재적인 상호작용의 지평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평 안에서 타인들과 조우하며, 서로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신호를 주고받는데 이를 타인이 내게 현상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필자는 이 말이 어렵다고 보아 타인이 내게 인정되었다로 이해하자고 제안한다. 타인이 나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가 나의 알아봄을 알아 볼 수 있도록 내 쪽에서 신호를 보내는 것은 그의 사회적 성원권을 인정하는 의미를 띤다. 이런 행위를 통해 나 역시 그에게 인정되었다, 현상하였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함께 사회 안에 있다는 믿음을 표현하는 것이고 상대방이 나의 믿음을 확인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내 신호에 화답 않고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다는 듯이 행동하면 상호작용은 일어나지 않고 상호현상은 없고 함께함은 없는 것이라고 김현경 선생은 설명한다.

 

상호현상 안에서 사회적 성원권 곧 나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된다면 이는 다른 말로 타인의 환대 속에서만 자신의 사회적 성원권을 확인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이는 사회적 사람으로 성원권을 갖지 못한 모든 범주들, 태아, 군인, 노예, 외국인, 탈북자, 성소수자, 기지촌 여성들,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모든 사회적 약자들이 어떠한 그 사회적 환대를 받고 그 사회 안에서 성원권을 가지고 상호적 현상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환대지표일 것이다.

 

저자는 환대란 타자에게 자리를 주는 행위, 혹은 사회 안에 있는 그의 자리를 인정하는 행위, 공간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행위라고 한다. 모든 사회적 권리를 주고/인정하고, ‘모든 권리를 주장할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환대는 절대적 환대 곧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조건부로 사람이 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거부하며, 복수하지 않는 환대를 진정한 환대라 한다. 그리고 환대의 개념에서 자기권리에 대한 인정은 새로운 시대를 향한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예수를 따른다는 사실은 그의 환대를 받은 사건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응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내가 스스로 나의 사회적 성원권을 전혀 갖지 못했다고 생각한 상황에서 예수로부터의 환대를 받은 경험이 있다. 이 경험이 내 인생의 힘이 되었고 새로운 삶을 영위하게 한 힘이었다. 창녀와 세리의 친구이셨던 예수는 모든 사람을 아무런 조건없이 환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자신과 형제, 자매가 되게 하신 분이다.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환대로 인하여 새로운 삶을 얻었고 새 사람으로 세움을 받았을까? 한국 초기 기독교전래 당시 이러한 역사적 환대의 경험들이 많이 서술되어있다. 여전도사 전삼덕은 야소교가 남녀평등하다는 진리를 전한다는 소식에 80리 어두운 밤길을 걸어 예배당에 가서 예수의 환대를 받고 전도자의 길을 걸었다. 이런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으리라. 이는 구약에서 모세의 소명의 경험 속에도 나타난다. 살인자요 쓸모없는 인생으로 사막에서 은둔하던 스네(연약한 덤불) 같던 그를 환대하여 불러내어 노예 히브리를 해방시키는 혁명적 리더로 세운 사건이다. 기독교의 진정한 환대를 회복하는 일이 오늘의 자기상실의 시대에 중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하는 예수의 환대, 우리의 환대는 이 시대 희년의 정신을 되살리는 일이 될 것이다. 난민, 성적 소수자 등 갖가지 조건들로 인하여 사람으로 인정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환대의 회복을 위해 사고의 전환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재촉하고 계시는 중인 것 같다.

 

셋째 긍휼에 대하여

앞에서 언급한바 긍휼은 하나님의 속성이요, 활동 중 하나라고 했다. 긍휼은 연민, 자비 등으로도 번역된다. 억압당하거나 폭력당하는 현장에 직접 자신을 낮추어 그 자리로 내려가 억압을 풀고 폭력을 물리치는 일을 행함이 하나님의 긍휼의 활동이고 거기서 평화가 이루어진다. 이 긍휼은 공감과 연대를 이룬다. 오래전 말씀증거에서 얘기한 적이 있는데 긍휼의 히브리어 라훔은 그 어원이 여성의 자궁이란 단어에 견결된다고 한다. 엄마와 아기가 하나로 연결되어 기쁨도 아픔도 같이 느끼는 상태, 그래서 둘의 연대가 이루어진다. 아기의 아픔이나 위험 앞에서 엄마는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과 위협을 함께 느끼고 생사를 같이 한다. 하나님이 히브리 노예를 해방시키려 작심한 것은 그들의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부르짖음에 하나님의 긍휼-라훔이 격렬하게 떨려 그들의 고통 속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희년의 법을 통해 보여주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이다.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희년의 정의도 평화도 이루어 질 수 없었다.

 

하나님의 속성을 닮은 긍휼의 인간성이 정의, 평화가 없는 이 세상에 절실히 요청된다. 인간은 하나님의 긍휼의 속성으로 태어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부터 상호의존적 존재이고 사회는 공감과 연대에 의해서만 지속가능한 것이다. 나는 이 주제를 오늘날 무너져버린 인간성의 회복을 위해 생각하며 분배 정의도 여기에 근거하는 것임을 말하고자 한다. 경쟁으로만 살 수 있게 된 사회구조, 각자도생의 현실에서 나의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돌진하는 현실, 먹고 살기 위해 돈과 권력 앞에 자존과 인간임도 포기하는 현실, 생의 즐거움은 없어지고 함께 사는 방법도 잃어버린 삶들, 자비, 긍휼은 그 이름도 기억나지 않게 된 세상에 살고 있다. 긍휼의 인간성을 회복하여 분배정의를 이루고 인간의 가치가 인정되는 환대의 사회를 만들어 새로운 내일을 향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 희년이 구체적으로 실현된 적은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의가 짓밟히고 억울한 사람이 너무 많아지고 사람이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형편없는 세상이 될 때마다 희년은 우리가 찾아가는 정의와 평화의 고향이다. 그 고향이 마냥 그리운 오늘 저는 분배정의, 환대, 긍휼의 세 가지 손들을 붙잡고 그 빛나고 좋은 고향을 함께 가자고 새길 자매 형제들을 초대하는 것이다. 정의와 평화가 입맞춤하는 그 아름다운 세상, 고향길을 향하여 우리 같이 걸어가지 않으려는가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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