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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완상

 

 

이름 불러주기의 힘: 예수 이름의 힘

(누가복음 8:46~48, 사도행전 3:6~8, 빌레몬서 1:10~12)


2017212일 주일예배

한완상 형제

(새길교회 신학위원)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누군가가 내게 손을 댔다. 나는 내게서 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고 있다.” 그 여자는 더 이상 숨길 수 없음을 알고서, 떨면서 나아와 예수께 엎드려서, 그에게 손을 댄 이유와 또 곧 낫게 된 경위를 모든 백성 앞에 알렸다. 그러자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 누가복음 846~48-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 사도행전 36~8-

 

[내가 갇혀 있는 동안에 얻은 아들 오네시모를 두고 그대에게 간청합니다. 그가 전에는 그대에게 쓸모없는 사람이었으나, 이제는 그대와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그를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는 바로 내 마음입니다.]

- 빌레몬서 110~12-

 

1. 이름 불러주기의 힘은 언어와 상징을 활용하는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아름다운 이름을 불러주면서 아름다운 관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인간의 특권이며 기쁨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같은 특권을 은총으로 인간에게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신 뒤 그가 홀로 있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셨습니다. 피조물세계가 모두 좋고 아름답다고 감탄하셨는데, 유독 아담의 홀로 있음을 좋지 않다고 탄식 하셨습니다.(창세기 2:18) 그래서 그의 짝 이브를 창조하셨지요. 참으로 흥미롭고 의미 있는 첫 만남은 아담이 이브를 보자마자 쏟아낸 그의 감탄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의 짝에게 이렇게 이름을 불러주었습니다. 당신은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 이라고 감탄했습니다. 이 말은 한 마디로 이브 당신은 바로 나의 전부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뼈가 고통을 뜻한다면 당신은 곧 나와 동고(同苦)할 짝이요, 살이 기쁨과 쾌락을 뜻하기에 당신은 나와 동락(同樂)할 반려자란 뜻이기도 합니다. 동고를 함으로써 동락의 기쁨을 영원히 지속시킬 수 있음을 선포한 것이지요. 동고의 그릇에 동락의 기쁨을 영원히 담아내겠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두 인격체는 참 사랑과 화평으로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당신은 내 뼈이며 또한 내 살이란 외침은 당신이야 말로 나의 전부이며, 당신이 바로 나이고 내가 바로 당신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신은 나의 하드웨어()이면서 동시에 소프트웨어()이므로, 이렇게 서로 부른다면 바로 그곳에 하나님께서 참으로 좋다고 감탄하신 아름다운 관계가 이뤄지게 됩니다. 시인 김춘수는 아름다운 이름 불러주기의 감동을 이렇게 표현 했습니다.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나의 이름을 누가 불러다오.

그에게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서로 이렇게 꽃으로 불러 줄 때 흐뭇한 기적 같은 사랑과 평화의 관계가 샘솟게 됩니다. 새로운 관계는 서로 꽃이라고, 서로 별이라고, 서로 달님과 햇님이라고 불러줄 때 비로소 아름답게 꽃피게 됩니다. 이것은 이름 불러주기가 몸짓의 뜻 없는 한낱 겉 동작을 의미심장한 사랑의 관계로 승화시켜주지요. 이것을 아름다운 창조적 힘주기(empowering)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바로 이 같은 힘 불어 넣어주는 분이시지요. 예수님도 바로 이 같은 힘 불어 넣어주는 일, 곧 하나님나라 운동을 펼치셨지요. 이 운동으로 인간들 사이에는 발선(發善)의 기운이 솟아나게 됩니다. 그래서 따뜻한 샬롬이 창조됩니다.

 

그런데 이름을 잘못 불러주면 어떻게 될까요? 발선 대신 발악(發惡)이 터져 나올 수 있음을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이름 불러주기는 흉측한 낙인찍기가 되고 말지요. 그렇게 되면 평화는 멀어지고, 긴장과 갈등, 불신과 투쟁은 격렬해집니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권력 주체가 갑질하게 되면 많은 을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고 차별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을들이 갑에 대해 정당하게 저항하게 됩니다. 이때 갑들은 을들에게 고약한 이름을 불러대지요. 바로 흉칙한 낙인을 찍어버리죠. 우리 현실에서 보면 색깔론적 통제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저도 이런 딱지 훈장을 여러 번 받아 본적이 있지요. 아니, 지금도 받고 있지요. 이를테면, ‘친북좌파종북좌파니 하는 낙인이 바로 그런 것 입니다. 하기야 악한 권력은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어디서든지 이 같은 부정적 이름 불러주기를 통해 그들의 기득이권을 보호·유지·강화해왔습니다. 그들은 2000년 전 예수를 십자가 처형시키면서 십자가 형틀 꼭대기에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낙인 글씨 팻말을 붙여놓았지요. 이 표현에는 엄청난 경멸과 폭력이 노골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 보여주지요. 최근 주말마다 광장에서 거칠게 휘날리는 태극기를 보면서 고약한 낙인들의 거친 낙인언어들도 함께 춤추고 있음을 슬프게 확인하게 됩니다. 특별히 그들의 거친 이름 불러주기 행태 속에서 커다란 십자가 행진을 보며 저는 수치심과 분노로 전율했습니다.

 

2. 그래서 저는 오늘 예수께서는 이름 불러주기를 통해서 지극히 작은 자와 꼴찌들에게 어떻게 힘을 불어넣어 주셨는지를 확인하고 싶습니다. 먼저 갈릴리 예수님께서 참으로 딱한 자들을 어떻게 감동적으로 온전케 해주셨는지를 성찰하고 싶습니다. 열두 해 동안 고약한질병에 걸려 엄청난 고통을 겪었던 한 여인의 얘기를 새롭게 조명해보고 싶습니다.

 

먼저 이 여인의 아픔의 자리에 우리 모두 한번쯤 서봅시다. 질병 중에서도 종교적으로 특별나게 불결한 질병으로 낙인찍힌 질병이 바로 여성의 혈루병이었습니다. 이 병에 걸렸다고 일단 알려지게 되면 그 여성은 사회적 수치심으로 얼굴 들고 다니기 어려웠지요. 친구들도 떨어져 나갑니다. 심지어 가족에서도 따듯한 보살핌을 받기 힘들게 되지요. 딸로 사랑받았던 것은 피 흘리기 전 어린 시절 때 일이죠. 이 병에 걸렸다고 알려진 후에는 딸 노릇하기도 어렵고, 또 딸 대접 받기는 더 어려워 지지요. 누나나 여동생으로 사랑받기도 힘들게 되지요. 그의 육체적 아픔과 불편함에 더하여 사회적, 공동체적 차별의 눈총을 받아야했습니다. 철저하게 외로운 삶을 살아야했습니다. 다행히 경제적으로 가진 것이 있어 이 여성은 이 질병치료에 모두 쏟아 부을 수 있었죠. 그러나 아무 효과가 없었습니다. 더 외롭고 더 아팠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근처를 지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이 소식은 참으로 그녀에겐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 파격적 희망을 자기처럼 절망한 자들에게 불어넣어 주고 있다는 소문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결사적으로 그에게 다가가기로 단단히 결심했습니다. 허나 당시 가부장제도와 율법주의 풍토에서 자기 같은 불결한여성이 예수님에게 바짝 다가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행이 엄청난 군중이 그를 따르고 둘러싼다고 하니까 군중 속에 남몰래 끼어들어 예수께 접근하기로 작정했지요. 그녀에겐 가진 것 이라곤 더러운 질병밖에 없었습니다. 허나 그녀가 아직도 소중히 간직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무한한 신뢰(신앙)와 희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용기와 결단이었습니다. 예수님 몰래라도 그의 옷자락만 만질 수 있다면, 그 지긋지긋한 질병은 당장 나을 것 이라는 희망과 확신이 그 여인의 깊은 가슴속에 살아있었습니다. 그래서 결사적으로 다가가 기어코 예수의 펄럭거리는 옷자락이라도 만질 수 있었습니다. 정말 그녀가 예수를 뜨겁게 존경했던 만큼, 예수의 치유카리스마는 그녀를 병마에서 즉각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는 바로 그 순간 자기의 치유능력이 빠져나간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누가 나의 옷을 만졌는가를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이때 이 여인은 예수의 그 소중한 카리스마를 훔친 자기 범죄가 발각된 줄 알고 두려워 떨며 이실직고를 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자기 치유능력을 그의 동의 없이 훔쳐간 이 여인을 나무랐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2000년 전에 일어났던 이 해프닝을 우리 주변에서 지금 막 일어난 사건으로 받아드릴 만큼 감동적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두 가지 복음이 갖는 해방적 동력을 뜨겁게 우리는 오늘 가슴으로 받아드릴 수 있고 받아드려야 합니다.

 

첫째는 그의 카리스마를 훔친 여인에게 예수님은 새로운 이름을 불러 주셨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철저하게 왕따 당해온 지극히 작은 한 여인을 딸아 하고 불러주셨습니다. 그녀의 부모도 그녀를 이제는 딸아 하고 불러주기를 포기했는데, 예수님은 그의 치유능력을 훔친 이 여인을 오히려 딸아 라고 다정하게 불러 주셨습니다. 그녀는 방금 새로 멋지게 다시 태어난 기쁨을 가눌 수 없었으리라 짐작됩니다. 너는 결코 종교적으로 불결한 쓰레기 같은 인생이 아니라 참으로 사랑받아 마땅한 딸이라고 불러주셨지요. 새로운 아름답고 건강한 그리고 자랑스러운 정체성을 얻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이름만을 불러주셨을 뿐만 아니라 놀랍게도 네가 낫게 된 것은 나의 카리스마를 허락 없이 훔쳐간 너의 그 소중한 믿음 때문이지라고 오히려 격려해주셨습니다. 예수의 카리스마 덕분이라기보다, 그 여인의 신앙결단 덕분에 그녀가 낫게 되었음을 예수님은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세상에 이렇게 훌륭한 치유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제부터는 항상 감사하며 자신감 가지고, 평안한 새 삶을 누리라고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이름 불러주기가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변혁의 실제적 파장이요, 감동적 효험이라 하겠습니다. 이 여인을 그 더러운 질병에서 해방시켜 주실 뿐만 아니라, 그 건강을 오래오래 스스로 지켜나갈 수 있는 믿음의 힘, 그 주체적 힘마저 선물로 주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예수의 이름 불러주기 효과요, 창조적 힘주기라 하겠습니다.

 

둘째로 이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는 진리의 메시지는 예수의 카리스마는 항상 남을 위해 본질적으로 열려있다는 점입니다. 예수의 존재 그 자체가 카리스마라면, 그의 존재는 결코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 닫혀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의 능력, 특히 치유능력은 언제든지 그것을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지극히 작은자들과 꼴찌들에게로 언제나 흘러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남을 위한 열려있는 존재입니다. 그 소중한 카리스마는 그것을 간절하게 바라는 자들의 소유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삶과 고난과 죽음마저 자기 비움을 통한 남 채워줌의 감동을 자아내는 케노시스(kenosis)의 힘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예수에 있어 이름 불러주기는 단순한 명칭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비워 남을 채워주고, 나는 죽고 남을 살려내는 힘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말씀과 삶과 죽음이 모두 부활이라는 놀라운 새로운 힘, 곧 죽음의 권세를 극복해내는 힘으로 마침내 이어짐을 우리는 예수 복음의 본질로 증언할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니까 이름 불러주기가 남을 살려주는 운동 곧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임을 알게 됩니다. 또 그렇게 알아야 합니다.

 

3. 이제 자기 스승이었던 갈릴리 예수를 이해함에 있어 빈번히 실패했던 베드로가 예수부활 후 부활의 성령을 받아 그가 보여준 놀라운 이름 불려주기 사건에 주목해봅시다. 그가 초대교회에 놀라운 힘을 불어 넣어준 기적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3시 기도시간이 되면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어느 날 그곳에 선천적 지체장애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에게 구걸했습니다. 걸인은 아예 자존심을 포기한 사람이죠. 얻어먹는 일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게다가 그는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그곳 출입하는 자들로부터 돈 몇 푼 받기위해 항상 그곳에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이 걸인을 보고 그저 지나가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사도들은 말을 걸었지요. 걸인 장애자는 상투적으로 돈 몇 푼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고 사도들을 빤히 쳐다보았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 걸인에게 가장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돈 몇 푼이 아님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진짜 절박하게 필요한 것은 온전한 몸과 마음으로 존엄한 인격체로 우뚝 서는 일이었습니다. 비록 걸인 자신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에게 베드로는 새로운 건강한 인격체로 호명하고 싶었습니다. 이제부터 당신은 병신도 아니고, 자존심 없는 걸인도 아니고, 당신은 하나님의 존엄한 아들로 매우 온전한 존재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세워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3:6)

 

그리고 베드로는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랬더니, 그 걸인 장애인은 벌떡 일어나 걷기도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마침내 사도들과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메시지의 핵심은 무엇입니까?

 

첫째, 부활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의 베드로는 천방지축같이 행동했던 실수투성이의 제자였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꾸중을 가장 많이들은 제자였지만, 또한 가장 사랑을 많이 박은 수제자였지요. 그런데 부활예수가 영혼만의 존재가 아니라 튼실하고 영광스러운 몸을 지닌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예수보다 더 다정다감하고 더 존경스러운 지도자며, 옛과 다름없이, 아니 옛 보다 더 따뜻하고 더 강렬하게 하나님나라 세움에 앞서심을 확인했습니다. 갈릴리 때에는 예수를 뜻도 모른 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건성으로 고백 했으나, 부활 이후에는 예수그리스도의 이름만 불러도 새로운 변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만으로도 이 선천적 장애자 걸인의 몸과 마음의 삐뚤어짐을 고쳐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의 이름은 코스프레의 겉 이름이 아니라 바로 예수 본질이요, 예수 운동의 핵심이며, 하나님나라 운동의 동력 자체임을 깊이 깨닫게 되었지요. 바로 그 깨달음으로 베드로는 선천적 장애인 걸인을 마치 갈릴리 예수께서 친히 그랬듯이 그를 온전한 존재로 변화시켰습니다. 이 사건으로 초대 교회는 예수의 이름이 곧 하나님나라를 세우는 힘 그 자체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운동에는 이름이 결단코 이데올로기적 겉 장식이나 왜곡일 수 없음을 만천하에 알렸습니다. 이름 따로, 본질 따로 노는 세상의 지배 이데올로기와는 확연히 다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 이후 오늘까지 예수 따르미들은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리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 이름의 힘은 금과 은의 힘보다 훨씬 아름답고 강력한 변혁을 불러일으키는 진정한 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돈이나 물질의 가치로 감동적인 변혁을 일으킬 수 없음을 이 사건으로 예수 따르미들은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온전한 존재로 벌떡 일으켜 세우는 힘은 결코 돈이 아니라, 권력이 아니라, 세상 명성이 아니라,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라고 깨우쳤습니다. 상상해보세요. 만일 베드로가 그때 자기 주머니 속에 은이 서른 냥쯤 있었다면, 그것 중 몇 개를 그 걸인 장애인에게 던져주고 성전으로 급히 들어갔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이 걸인은 평생 걸인으로, 지체장애인으로 살았을 것입니다. 마침 다행으로 은과 금이 없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갖는 힘은 더욱 더 감동적으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에는 돈이 너무 많기 때문에 예수 이름의 참 힘을 잃어버린 듯합니다. 교회 내에 뿌리내린 맘몬이즘이 교회로 하여금 예수 이름의 그 감동적 변혁동력을 사라지게 한 듯합니다. 그래서 개독교라고 욕을 먹게 되는 듯합니다. 돈과 권력에 의존하지 않는 교회, 예수 이름의 힘으로 꼴찌가 첫째로 나아갈 수 있고, 지극히 작은 자가 넉넉한 존엄성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교회가 바로 예수의 몸 된 교회요 예수의 마음 된 공동체가 아니겠습니까!

 

베드로는 그래서 예수이름으로 선천적 장애인을 온전한 인간으로 호명할 수 있었고 자존심을 오래전에 던져버린 걸인을 존엄한 존재로 새롭게 불러내었습니다. 그리하여 걸인과 장애인이 건강한 인격체로 벌떡 일어나 씩씩하게 걷기도하고, 신나게 뛰기도 하면서 사랑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름 불러주어 이렇게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감동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구걸할 때 이 장애인은 항상 성전 밖에 있었으나, 베드로의 호명으로 새 사람이 된 후에는 즉시 그가 사도들과 함께 당당하게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성전은 새 사람으로, 새 구조로, 새 역사로 불러주는 은혜와 사랑의 공동체요, 원래적 아름다움을 회복시켜주는 창조 공동체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4. 이제 예수를 생전에는 만나보지 못했으나, 어느 제자 보다 역사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의 본질을 더 깊게 이해했던 바울사도의 이름 부르기는 과연 어떠했는지 잠시 주목해봅시다. 그는 부활의 그리스도를 통해 역사적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을 더 깊이 이해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의 로마서 12장의 메시지는 예수의 산 위의 메시지를 연상케 합니다. 1220절과 21절의 말씀은 산상수훈을 역설했던 예수님의 육성을 새롭게 듣는 듯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바울이 그의 신우(信友) 빌레몬에게 보낸 사신에서 그의 감동적 이름 불러주기의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녹음기 틀어 놓고 옛 친구의 육성을 듣는 것과 같이 저는 2000년 전 바울의 사신(私信이지만 결코 사사로운 편지가 아니라 매우 공공적 가치를 들어내는 인간적 편지입니다)에서 그의 감동적 이름 부르기 소리를 새삼 새롭게 듣는 듯합니다.

 

빌레몬은 바울에게는 믿음의 벗이었습니다. 짐작컨대 빌레몬 집은 초대교회(가정교회)의 역할을 한듯합니다. 사도바울의 신앙적 지도가 있었겠지요. 그런데 빌레몬은 당시 지배계급에 속했던 부유한 인물인 듯합니다. 그의 노예로 있던 오네시모가 그의 주인집에서 도망쳐 옥살이하는 바울에게 찾아와 보호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 실정법으로 보면, 주인을 버리고 달아난 노예는 십자가 처형에 처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친구의 노예를 받아 그를 감화시켜 그리스도인으로 바꿔놓았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돌보는 사람으로 그를 데리고 함께 일하고 싶었습니다만, 오네시모의 법적 주인인 빌레몬에게 일단 보내어 그의 용서와 이해를 먼저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에게 짧지만 참으로 의미가 있는 편지를 쓴 것입니다. 비록 이 짧은 사신에는 복잡하고 심오한 바울신학의 언어들은 없으나, 그의 복음의 감동적 동력은 매우 뚜렷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의 혁명적 메시지가 매우 세련되게, 매우 우아하고 단호하게 표출되어 있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종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그를 자기의 아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갇혀 있는 동안 얻은 나의 아들이라고 이름 불렀습니다. 이런 호명으로 오네시모는 종에서 사도바울의 아들로 뛰어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면서 신우 빌레몬에게도 우아하나 단호하게 요구했습니다. 무슨 요구였습니까? 지난 날 빌레몬의 종이였던 오네시모를, 더구나 주인을 버리고 도망간 중범자 오네시모를 이제는 빌레몬의 형제로 불러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것은 당시 노예제도의 처지에서 판단한다면, 매우 무엄한 요구요, 무례한 요청입니다. 뿐만 아니라 매우 반체제적 위험하고 불온한 요청이기도 합니다. 이 같은 요구를 시인 김춘수 식으로 말한다면 다음과 같은 편지 내용이 되겠지요.

 

사랑하는 주안에서 친구 빌레몬이여

이제 그대의 노예였던 빌레몬을 그대에게 돌려보냅니다. 지금 그는 나에겐 주안에서 나의 아들이 되었소이다. 바라건대 그대도 오네시모를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제로 받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를 형제로 이미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주인도 아니고 노예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서로를 자매형제로 부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 꽃 같은 형제로, 별 같은 자매로 부를 수 있는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를 형제자매로 불러주셨으니, 우리도 즐겁게 서로를 형제자매로 불러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제 나의 아들이 된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인 당신에게 보내드리오니, 그를 형제로 불러 주십시오. 그러면 그는 매우 따뜻하고 충실한 당신의 형제로 거듭날 것입니다...!”

 

과연 오늘 기독교 신자들은 이 편지의 감동적이고 혁명적인 복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5. 끝으로 교회란 무엇인가를 새삼 묻고 싶습니다. 우리 공동체의 30주년 생일을 앞두고 과연 새로운 길이 어떤 길인지 묻고 성찰하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저는 갈릴리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바(Abba)로 이름 부르시면서 그 아바의 뜻을 따라, 역사 현실에서 꼴찌를 첫째라고 불러 주셨고, 지극히 작은 자로 쪼들어버린 존재를 지극히 높은 자유인으로 호명해 주셨음을 새삼 기억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나라의 실현으로 가는 새길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몸과 마음의 실체인 교회공동체 구성원들은 이제는 서로에게 다가가서 <당신은 나의 꽃이요, 나의 별>이라고 이름 불러 주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꽃이 되어 아름다운 작은 창조세계를 함께 만들어가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몸짓의 겉 차원에서 벗어나 곱고 희망찬 색조의 꽃으로 활짝 피어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새로운 에덴동산의 꽃들이 되어 하나님의 감탄이 터져 나오게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공동체는 서로에게 꽃과 별이 되어 꼴찌의 외로움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게 해야 합니다.

 

특히 지난 70년간 강대국의 갑질로 부당하게 분단된 우리조국의 비극적 현실 속에서 친일냉전세력이 갑질해온 이 비극의 상황에서 그들은 약자와 비적자(非適者)와 비주류와 비표준세력을 끈질기게 고약한 낙인찍어 배제해왔고 억압해왔습니다. 때로는 이념적 색깔칠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가슴 아프게도 한국교회 안팎에서 그러한 갑질을 한 세력이 때로는 태극기를 흔들며, 때로는 십자가를 들고 거리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이름 불러주기의 추한 몰골을 보는듯해서 저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이 같은 발악의 호명은 결코 복음적인 행위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역사적 격변기를 맞아 시민명예혁명을 치루고 있습니다. 지난 70년간의 비극적 분단체제를 청산해야 할 시점에 와있습니다. 1948년 체제를 발선의 힘으로, 복음의 감동으로 극복해내야 합니다. 이 같은 70년의 적폐를 청산하는 일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구현하는 일과 별개의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공의와 평화가 한반도에 큰 강물처럼 흐르게 하는 일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일과 결코 별개라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새 역사를 분단비극의 땅에서 만들기 위해서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평화의 아름다운 꽃으로, 공의의 빛나는 별로 불러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삭막한 분단의 땅 황무지가 장미꽃 동산으로 아름답게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가 이런 이름 불러주는 일에 마땅히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예수 이름의 힘으로 하나님의 딸과 아들로 살게 될 것입니다. 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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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3 2017 [2017.08.06] 단테의 '신곡' 여행 file 2017.08.10 문현미, 노선희, 박흥식
1022 2017 [2017.07.30] 사탄의 문제? 사람의 문제? file 2017.08.02 최현섭
1021 2017 [2017.07.16] 내 안의 선악과(善惡果) file 2017.07.18 김용덕
1020 2017 [2017.07.09]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file 2017.07.13 정경일
1019 2017 [2017.07.02] 손의 회복 file 2017.07.13 구미정
1018 2017 [2017.06.18] 내가 모르던 기도 file 2017.06.22 박현욱, 정영훈
1017 2017 [2017.06.04] '포도나무 비유'에 담긴 뜻은 file 2017.06.08 장회익
1016 2017 [2017.05.14] 꽃 핀 쪽으로 file 2017.05.17 정경일
1015 2017 [2017.05.07] 죄는 어디에서 오는가? file 2017.05.12 박경미
1014 2017 [2017.04.23] 하나님의 능력, 우리의 능력 file 2017.04.26 윤여성
1013 2017 [2017.04.16] 부활하신 예수는 어디에 계신가? file 2017.04.21 김성수, 정공자, 김희국
1012 2017 [2017.04.02] 사랑과 믿음 file 2017.04.04 권진관
1011 2017 [2017.03.26] 사순절 명상-믿음을 버려야 할 때 file 2017.03.31 민영진 목사
1010 2017 [2017.03.19] 하나님 편에 선다는 것은 file 2017.03.24 정경일
1009 2017 [2017.03.12] 여혐과 민주주의는 같이 갈 수 없다 file 2017.03.22 이숙진
1008 2017 [2017.03.05] 새길교회 창립 30주년 기념주일 말씀증거 file 2017.03.10 최순님, 장숙경
1007 2017 [2017.02.26] 3·1 운동과 기독교 file 2017.02.28 이만열 교수
1006 2017 [2017.02.19] 정의와 평화의 입맞춤: 희년 평화의 오늘의 의미(분배정의, 환대, 긍휼) file 2017.02.23 최만자
» 2017 [2017.02.12] 이름 불러주기의 힘: 예수 이름의 힘 file 2017.02.17 한완상
1004 2017 [2017.02.05] 사랑은 율법의 완성 file 2017.02.09 추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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