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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추응식

 

 

사랑은 율법의 완성

(로마서 7:6, 13:9~10, 누가복음 10:31~34)


201725일 종교화합주일

추응식 형제

(신구대학 시각디자인과)

 

[그러나 지금은, 우리를 옭아맸던 것에 대하여 죽어서, 율법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 로마서 76-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하는 계명과, 그밖에 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모든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하는 말씀에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 로마서 139~10-

 

[“마침 어떤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이와 같이, 레위 사람도 그 곳에 이르러 그 사람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그러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길을 가다가, 그 사람이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서, 가까이 가서, 그 상처에 올리브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에, 자기 짐승에 태워서,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었다.”]

- 누가복음 1031~34-

 

 

성경책이 하나님의 말씀을 담은 책이라고 하지만 가게에서 구매한 상품입니다. 어떤 책은 비싸고 어떤 책은 쌉니다. 우리가 지금 예배드리고 있는 이 공간(오산고 강당)도 상품은 아니지만, 돈을 주고 빌린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교회의 에어컨을 구입하고자 할 때도 가게 앞에서 기도 드리는 일 대신 시장가격을 면밀히 살피지 않겠습니까. 돈이든 성서든 하늘로 던지면 결국 땅에 떨어집니다. 하나님께 바친 헌금도 우리가 꺼내서 사용하지 않습니까.

 

이처럼 우리의 신앙생활은 천상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지상의 일상생활 속에서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든 생활신앙이든 신앙과 생활은 붙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붙어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국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우리의 자유의지와 은총에 의한 선택적 삶입니다. 실존적 삶입니다. 우리는 지금 일요일 오전에 여기에 앉아있습니다. 이 선택이 하나님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물음이 신앙생활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신학은 관념적일지 모르지만, 기독교는 관념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인간이 한 생명을 받아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며, 또한 죽은 사람의 장례는 죽은 사람이 치르고 너는 나를 따라 오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라는 성서구절도 단순한 경귀가 아니라 우리 살아가야 할 방향을 축약적으로 가르쳐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마태복음 517절에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로마서 13:9)에 나오는 간음하지 말아라. 살인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탐내지 말아라하는 계명들로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데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직접 새 계명을 주셨는데 그것은 요한복음 1334절에서 말씀하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서로 사랑하는 것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여기에 모든 계명이 요약되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의 삶을 지배했던 율법은 우리들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완전해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 이웃사랑을 실천하지 않으면 예수 이전의 삶을 사는 것이며, 그것은 기독교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런 기독교가 있다면 그 기독교는 기독이라는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며, 다시 사신 예수님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예수님의 말씀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 이 때 이 이웃이 누구인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지는 우리가 잘 아는 강도 만난 사람 이야기를 통해서 설명해 주십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강도를 만난 사람과 도와준 사람인데 이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내세울게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히려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모범적인 종교인이 예수님 눈 밖에 난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인들은 더러운 몸에 손대지 않는 정결법을 지키기 위해서거나 아니면 빨리 회당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하니까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그냥 두고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이야기에 무슨 해석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어떤 사람 수준에 맞추어 말씀하시는지는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하는 데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골 할머니가 못 알아듣는 이야기라면 그건 예수님 말씀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강도 만난 예수님 이야기에서 제사장, 레위인빼고는 어려운 말이 없습니다. 이 말도 당시 유다지방에선 물론 쉬운 말이겠지요. ‘제사장, 레위인에 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앞의 이야기에 나오는 제사장, 레위인 같은 율법시대를 사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심청이가 바다에 빠지는 이야기 하면서 그 바닷물의 염도, 수온, 지형적 특성을 길게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지식을 전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강도 만난 이야기를 해주신다면 이렇게 들려 주셨을 것 같습니다. “어떤 경상도 아저씨가 양아치한테 돈 뺏기고 두들겨 맞아서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목사와 장로는 예배시간 때문에 그냥 지나가고,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전라도 아저씨가 생판 모르는 경상도 아저씨를 자기 일처럼 보살펴줬다.” 그리고 동네 아줌마들이 이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습니다. “친형제라도 그렇게 하기 어려운데, 사람은 겉모습보고는 알 수 없어. 그리고 참, 그 목사와 장로는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합니다라고 말하면서 교회오라고 한 그 사람들 아니야.”

 

이 이야기는 한마디로 사람 사는 세상에는 인정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인정머리가 없으면 사람도 아니다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인정 있게 사는 것은 누구나 좋아하고, 특히 어려운 사람에게 인정을 베푸는 것은 옆에서 보는 사람도 기분이 좋습니다. 그래서 언론에서는 그런 것을 미담이라고 해서 많이 보여주지 않습니까? 사랑이신 하나님 모습이죠. 이 마음으로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신 것 같습니다.(창세기 1:28) 그렇지만 자기 것을 내주면서 인정을 베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경우, 인정 많이 베푸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 나도 모르게 더 베풀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저 사람은 참 인정이 많아, 어려운 사람 보면 제 목숨도 내 줄 사람이야라고 인정 많기로 소문 난 그 분을 늘 가까이 하려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죠. 예수를 친구 삼는다는 것은 가까이서 그 인정스러움을 상기하고 덩달아 인정 베풀면서 살라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예수님의 죽으심처럼 이런 인정스러운 삶의 장애가 되는 정치적, 사회적 구조를 타파하는 일도 물론 포함됩니다(이게 더 우선되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배워서 힘입어서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교에는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 늘 붙어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들에게 주신 삶의 지침들은 사실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이 하시던 사람 사는 게 뭐 있나? 그저 부모 잘 모시고, 사람들과 인정스레 살면 되지.’하는 말씀과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저는 한 때 이런 세간의 말씀과 성서말씀을 구별했습니다. 세간의 말씀을 예수님 말씀과 동일시하는 것에 대해 다소 불경스럽다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성서의 말씀과 그것을 문자적으로 구별하지 않습니다. 인정스럽게 살아야한다는 그 말은 단지 한 어른의 말씀이 아니라 돌이 오랜 시간 흐르는 물에 깎이어 둥글게 되는 것처럼 오랜 기간 하나님의 세상 속에서 서로 위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마음들에 의해 다듬어져 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공동체 속에서 서로 위하는 그 마음이 예수의 마음이며, 그 마음이 이 세상에 가득 찰 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입니다.

 

삶에서 신앙을 분리시킬 때, 그 구별이 바로 예수님을 종교 속에 가두고 교리의 예수님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 순간 사랑은 사라지고 예수님의 말씀은 교조적 율법이 됩니다. 사랑이 율법을 완성시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사랑을 삼키는 것입니다. 이런 교조적 율법은 그 내용의 정당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감시하고 심판하는 도구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주체적 인간을 왜소하게 만듭니다.

 

아시다시피 율법제도는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율법은 알라가 무슬림에게만 이슬람법(샤리아)을 준 것처럼, 선택받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해당되는 법이었습니다. 이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세기 1:1)’라는 만유의 하나님을 생각하면 이런 폐쇄성은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는 모두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하는 같은 뿌리의 유일신 종교입니다. 그런데 같은 아브라함이 토라에서는 유대인으로, 코란에서는 무슬림으로, 그리고 신약에서는 기독인의 믿음의 조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다른 기술들이 서로를 배타적으로 만드는 요인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로마서 76절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2000년 전에 낡은 정신이라고 비판받았던 문자와 교리, 관습에 얽매임이 500년 전의 종교개혁 뿐 아니라 수많은 개혁과 회개를 지속해 온 프로테스탄트 속에서조차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그래서 2000년 전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바울의 고백이 2000년이 지난 지금, 여전히 우리들의 고백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주님이 주신 말씀 강도만난 사람을 읽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새 정신은 제사장과 레위인 같은 반듯한 종교활동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돕는 일이라는 것을 배웠습니다. 그것이 율법을 완성시키는 사랑이라 것을 배웠습니다. 아울러 우리는 교회 뿐 아니라 사회생활 속에서도 여전히 율법적 구조와 관습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랑의 실천보다는 율법 속의 작은 자로 살아왔음을 깨달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2000년 후 오늘, 자신의 삶을 따라 사는 것보다 자기를 종교화하는 일이 우선되는 것을 예견하셨을까요? 전 세계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예배당을 짓고 교리를 만들어 자기를 숭배할 줄 알았을까요?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것을 원했을까요? 일요일날 줄지어 각기 다른 예배당에 가는 것을 보면서, 아마도 내가 그렇게 쉽게 말로 설명해 줬고, 또 사는 모습을 보여줬으면 그대로 따라 살면 되지, 내 이름으로 종교 만들어 하루 종일 교회 어떻게 짓고, 구역예배 순서 어떻게 하고, 몇 명 오고 하는 이야기로 세월 보내면 어떻게 하느냐하는 말씀을 하고 계실 것 같습니다.

 

이제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이라는 말은 교회의 담을 넘어 세상의 언어가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의 용어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사용하는 보통명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의 일반화가 아니라 기독교의 사랑이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퍼져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이 주시는 새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율법을 완성시키는 사랑의 의미를 알기에 어려운 사람이 우리 이웃이 되고 이 세상이 하나님의 큰 교회임을 깨닫습니다. 또한 이 큰 세상교회는 이웃사랑을 실천하기에 종교 없는 땅과 종교 없는 하늘과 종교 없는 나무, 종교 없는 개, 그리고 종교 있는 사람과 종교 없는 사람이 함께 어울러져 인정스럽게 살아갈 것입니다. 그곳의 새는 교회에서 절간으로 감리교회에서 장로교회로 자유롭게 날아다닐 것입니다. 만약 우리 예배당에서 말하는 사랑이 교회 밖을 넘어갈 수 없다면 우리가 부르고 예배드리는 하나님은 교리의 하나님, 종파적 하나님이 되어 더 이상 세상을 운행하시는 진리의 하나님이라는 말을 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사랑을 하고 아이도 낳습니다. 그리고 세상 속에서 밥을 구하고, 옷을 구합니다. 기독교표 밥을 먹고, 기독교표 옷을 입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프면 세상 속의 병원에 갑니다. 그리고 끝내는 세상 속 어디에선가 죽습니다. 그리고 시신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처리될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종교와 관계없이 세상 사람들의 협력으로 이루어집니다. 이곳에서 서로를 갈라놓는 것은 오히려 종교입니다. 전 세계적으로는 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의 유일신 종교이고, 한국에서는 이웃사랑을 외치는 기독교(개신교)입니다. 어떤 기독교는 광화문에서 하나님의 정의를 외치고, 또 어떤 기독교는 서울역에서 광화문을 향해 하나님의 공의를 외칩니다. 극단적 대립의 선봉에 교회가 있습니다. 이 대립의 뿌리는 교회 담을 넘지 못하는 그들끼리만의 사랑에 있습니다. 강도만난 이야기 등 예수님의 말씀을 지독히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세상에 사랑을 가르치려합니다. 가장 시끄럽게 사랑을 외치는 교회가 가장 배타적입니다. 오늘 읽은 로마서 말씀처럼 예수의 삶을 배우지 못해 율법에서 풀려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지고 자기의 하나님을 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직도 문자에 얽매인 낡은 정신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대로 말할 수도 있지만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네모라고 말하는 순간, 세모로 그리고 있던 사람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이쿠메네(Oikoumene), 우리들이 사는 세상은 하나인데 세상을 말하는 종교는 많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이 말씀이 또 하나의 종교행위가 되지 않도록 종교생활을 잘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한테 배운 것 한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가정이 해체되어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이 모여 사는 공동가정 아이들과 종종 놀러 갑니다. 지난번에는 밤에 자면서 아이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아이들은 자기를 버린 엄마, 아빠에 대해 모두 좋은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만났으면 하는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도 다른 종교의 좋은 점을 말했으면 합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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