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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길희성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 세계종교화합주간을 맞으면서”

(마태복음 4:1-11)

 

2019년 2월 3일

U.N. 종교화합주간 예배

길희성 형제

 

 

[그 즈음에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악마에게 시험을 받으셨다. 예수께서 밤낮 사십 일을 금식하시니, 시장하셨다.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그 때에 악마는 예수를 그 거룩한 도성으로 데리고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 너를 위하여 자기 천사들에게 명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손으로 너를 떠받쳐서, 너의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할 것이다’ 하였다.” 예수께서 악마에게 말씀하셨다. “또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 하였다.” 또다시 악마는 예수를 매우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세상의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보여주고 말하였다. “네가 나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겠다.” 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이 때에 악마는 떠나가고, 천사들이 와서, 예수께 시중을 들었다.]

- 마태복음 4:1-11 -

 

 

 오늘은 유엔이 제정한 <세계종교화합주간>입니다. 그 취지는 일찍이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이 남긴 유명한 말 한 마디가 잘 말해줍니다.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세계의 평화도 없다.” 그렇습니다. 현대 세계는 전통사회의 특징이었던 사회와 문화들 간의 장벽이 허물어지거나 무력화되면서 닫힌 사회에서 열린사회로, 닫힌 문화에서 열린 문화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난 세계입니다. 현대인은 그래서 모두 이 개방된 사회와 시대를 맞아 전 세계와 호흡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더 이상 한 사회, 한 문화, 한 종교의 울타리에 갇혀서 눈과 귀를 막고 살 수가 없고, 모든 것 – 종교, 가치관, 삶의 방식 등 - 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아직도 인류가 어느 정도 과거 폐쇄된 사회와 문화의 관습 아래 살고 있지만, 그런 시대는 영원히 갔다 해도 무방합니다. 아무도 자기 문화, 자기 삶의 방식만을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종교가 개인의 선택이 되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사실이고, 그 신학적 의미는 심대합니다.


 아직도 이러한 변화를 거부하는 각종 근본주의, 정통주의, 전통주의, 극우 세력 내지 배타적 민족주의 세력이 세계 곳곳에서 전통과 정통을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개방사회가 초래한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불확실성을 감당하지 못하는 많은 사람을 유혹하고 있지만, 이제는 어느 나라, 어느 사회도 이 개방시대의 물결을 저지하지 못합니다. 시간문제일 뿐입니다. 이슬람도, 북한도, 답답한 우리나라 개신교계와 태극기 부대도, 그리고 박정희 향수도, 대세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독재를 노리는 시진핑도, 푸틴도, 트럼프도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긴 하지만, 이 역시 일시적 현상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개방사회, 개방문화는 양날을 가진 칼과 같습니다. 개방과 자유는 한편으로는 우리를 전통의 무거운 짐과 억압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해방시켜 주고 우리에게 엄청난 기회를 줍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과거의 전통사회와 문화 속에서 특권을 누리다시피한 종교가 힘을 잃게 됨에 따라 사람들의 불안과 방황이 일반화되고 그만큼 전통사회로 회귀하고자 하는 희구도 생기고, 폐쇄적 시대의 안정과 확실성에 대한 대중의 욕구도 강하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과거 시대에는 타 문화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었지만, 개방사회와 문화에서는 매일 같이 우리와 다른 사고를 하며 다른 가치관, 다른 삶의 방식을, 그리고 다른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을 접하게 되니까, 이 개방 사회의 흐름에 적응을 하지 못하고 자기 것만 고집하는 갈등의 요인이 훨씬 더 큽니다. 그리고 전통의 힘이 무너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가장 심각한 현상은, 유례없는 정신적 공백상태에서 실제로 사람들의 사고와 삶을 지배하는 힘은 계몽주의, 자유주의, 합리주의, 인간의 보편적 인권과 정의와 평화를 지키고 신장하는 세속적 휴머니즘 같은 새로운 삶의 질서와 사고방식이 아니라 돈, 달러, 자본주의가 세계 곳곳에서, 그리고 삶의 각 영역에서 마수의 손길을 뻗으면서 우리가 하는 모든 활동을 돈벌이의 수단으로 변질시키고 우리 삶을 타락시키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유의 극단을 달리는 각종 상대주의, 다원주의 내지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가 아무런 비판과 통제 없이 젊은 층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으며, 그럴수록 이에 반발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수구세력, 문화적, 종교적 권위주의의 유혹 또한 강해집니다. 

  

 나는 이런 개방사회로의 전환이라는 세계사적 대격변의 와중에서, 종교 간의 대화와 화해, 협력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기울여왔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나의 문제의식은 한편으로는, 우리가 어떻게 이미 지난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고 선동하고 이용하는 온갖 형태의 전통주의, 정통주의, 권위주의를 단호히 거부하고 현대 세계가 가져다 준 엄청난 기회를 선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원사회와 문화가 초래한 무분별한 상대주의, 무책임한 자유를 경계하는 길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나는 이 제 3의 선택이 현대인 일반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종교들이, 그리스도교 신학이 당면하고 있는 가장 중대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종교와 신앙이 절대적 권위를 상실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의 대상이 되는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무엇이 옳은 길인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는 것은 어쩌면 당연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 종교가 가르치는 신앙을 어떻게 하면 책임 있게 수용할지, 마구 쏟아지는 정보와 유행의 홍수 속에서 어떻게 하면 우리가 정신 바짝 차리고 ‘뭐가 뭔지’ 제대로 알고 선택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현대 신학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사명이라는 것입니다. 과연 자유로운 다원 시대를 사는 현대 기독인들은 어떤 신앙을 어떻게 선택하고 이해하면서, 확신을 가지고 살 수 있을까요?

 

 크게 말해서 3가지 선택이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선택은 세속주의(secularism)입니다. 종교는 모두 다 사기다, 지나간 시대의 유물이고 과감한 청산의 대상이다, 인간은 종교 없이 자유롭게, 그리고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외치는 각종 세속주의적인 사고 내지 삶의 방식입니다. 물질주의, 유물론, 향락주의, 무신론, 무종교주의 등 각종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며, 때로는 혼란 속에서 회의주의, 허무주의를 즐기고 부추기고, 심지어 영웅시하는 사상도 있습니다. 둘째는 나의 신앙, 우리 종교만이 유일한 진리이고 타 종교들은 다 틀렸다, 가짜다, 열등하다, 혹은 우상숭배라고 비하하고 배척하는 배타주의입니다. 정통 신학과 전통적 신앙을 고수하고 고집하는 길입니다. 이 두 극단을 피하는 제 3의 선택은 다원 사회와 다원화된 시대의 변화, 그리고 그 가치, 특히 그 자유라는 열매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아니 오히려 유례없는 기회로 간주하면서, 적극적인 자세로 신앙과 신학의 변화를 모색하는 길입니다. 다원 사회, 개방 사회의 현실을 인정하고 긍정하고 포용적으로 수용하면서 자기 신앙의 전통을 새롭게 해석하고 이해하는 길을 모색하려는 자세입니다. 제일 바람직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입니다. 더군다나 자기가 접해온 좁은 신앙의 길과 틀에 갇힌 사람들에게는 무척 힘든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한 번 알을 까고 나와 변혁을 수용하면서 새로운 길에 들어서고 나면 전에는 몰랐던 새롭고 풍부한 세계가 열리고 새로운 신앙의 길이 보입니다.

  

 세계 종교화합주간을 맞아 나는 종교다원주의의 이론에 대해 말하기보다는 나 자신의 경험을 주로해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내가 어떻게 젊은 시절에 나를 사로잡았던 신학적 배타주의를 극복하고 불교, 힌두교, 이슬람, 그리고 유교, 도교, 천도교 같은 여러 종교들을 공부하고 포용하면서 <종교다원적 신학>이라는 것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나 자신의 신학적 편력 내지 여정을 잠시 여러분과 나누어 보고자 합니다. 불교와 세계 종교들을 두루 공부하게 된 종교학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앙을 따르고 공부해온 신학자로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교 다원성의 문제를 안고 고심할 수밖에 없었던 한국인으로서 가지고 있던 신앙적 고민을 어떻게 풀어왔는지, 나의 경험을 나누고 싶습니다. 특히 불교와 그리스도교라는 두 종교가 어떻게 해서 나의 평생의 관심사가 되었는지, 두 종교가 어떻게 창조적으로 만나 둘 다 ‘win-win’하는 창조적인 상생의 길을 걸을 수 있는지, 아니 걸어야 만 하는지에 대해, 내가 도달한 결론 같은 것에 대해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아는 사람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겠지만, 나는 강화도에서 심도학사라는 ‘공부와 명상의 집’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학사의 정규 프로그램 말고, 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신학교들에 다니는 신대원 학생 7명을 천거 받아, 매달 신학 세미나도 하고 있습니다. 열린 신학, 종교다원적 신학의 길을 그들과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지난달에는 불교에도 <복음주의> 신앙이라고 불러도 하등의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그리스도교 복음주의 신앙과 매우 유사한, 아니 그것을 더 능가하는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내가 알게 되면서 내가 받은 충격과 그 신학적 함축에 대해 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성 아우구스티누스 혹은 마르틴 루터를 능가하는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 즉 인간은 자신의 도덕적 노력이나 공로로, 영적 수련이나 노력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절대자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계시만이 우리가 하느님께 가는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매우 유사한 길이 불교에도 있습니다. 오직 아미타불의 자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신앙인데, 정토진종(淨土眞宗), 간단히 ‘진종’ 이라고 부르는 일본의 주류 불교계에 속하는, 가장 큰 불교 종단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 교단은 물론 자기들이 믿고 귀하게 여기는 ‘복음’의 진리를 해외에 전파하기도 합니다. 나는 이러한 불교가 존재한다는 놀라운 사실을 미국 유학시절에 처음 접하게 되었고, 거기서 받은 충격과 신학적 결론에 대해서 먼저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내가 이러한 불교의 복음주의 – 불교에서는 타력신앙(자신의 수행과 노력에 의한 구원/해탈의 길이 아니라 아미타불(무량수경, 무량광불)이라는 부처님의 힘에 의해서 해탈을 얻는다는 - 신앙을 접하게 된 것은, 1970년대 초 미국 Yale 대학 신학부에서 공부하던 시절, 대학 학부에 개설된 불교사 강의를 수강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때 불교에 대해서 나의 눈을 뜨게 해준 분은 와인스타인(Stanley Weinstein)이라는 유태계 미국 불교학자로서, 당시 예일 대 종교학과 교수였습니다. 일본에서 유학을 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일본어와 일본불교에도 능통한 학자였습니다. 그를 통해서 나는 처음으로 일본불교에 대해 접하게 되었는데, 특히 정토진종이라는 종파의 ‘타력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타력신앙이란, 자력수행 즉 계, 정, 혜 삼학(戒, 定, 慧)을 부지런히 닦고 진리를 깨달아 성불하려는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불교가 아니라, 오직 중생의 구원을 위한 아미타불의 한량없는 자비의 서원(誓願)을 진실한 신심(shinjin, 信心)으로 믿기만 하면 정토왕생(淨土往生, 즉 정토에 태어나는, 들어가는)의 구원이 가능하다는 대중적 메시지의 불교가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고, 나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느꼈습니다.

  

 신란(親鸞)이라는 사람이 시작한 운동인데, 그는 13세기 일본의 가마쿠라 시대의 인물로서, 당시 교토 근교에 위치한 일본 불교의 중심지였던 히에이잔(비예산)에서 수도하다가 포기하고 호넨(法然)이라는 스님이 전개한 염불운동에 가담하여 그의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기는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다가 – 그는 당시 기성 불교교단에 의해서 심한 탄압을 받아 스승과 함께 귀양살이까지 했습니다 - 지옥에 떨어진다 해도 여한이 없겠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어차피 자력으로, 즉 자신의 수행으로 해탈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니까, 어차피 지옥에 떨어질 몸이니까! 라는 것입니다. 그의 스승 호넨은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염불, ‘칭명염불’을 믿는 마음으로 단지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는 쉬운 수행(易行)을 구원의 길로 제시했습니다. 호넨은 염불은 많이 할수록 좋다고 했고 그 자신도 매일 염불 수행에 전념했습니다. 하지만 신란은 염불의 행위 그 자체보다는 진지하고 진실한 믿음, 즉 신심(信心)을 더 강조했습니다. 염불이 아무리 쉬운 왕생의 조건이라 해도, 그것 역시 결코 순수한 마음으로 지속적으로 하기는 결코 쉽지 않다고 신란은 생각했고, 무엇보다도 염불 수행 하나만으로 중생의 정토왕생(구원)이 가능하게 된 것은 어디까지나 중생이나 범부들을 위해 자비의 서원을 발하시고 우리 대신 무한한 공덕을 쌓고 우리 같은 중생을 위해 회향(回向) 해주신 아미타불 자신의 공로 때문이지, 우리가 하는 염불이라는 알량한 행위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염불 행은 또 하나의 수행, 우리가 정토왕생을 위해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자신의 노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아미타불에 대한 깊고 진지한 신심(信心, shinjin)의 표현 혹은 응답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우리가 자신의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수행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아미타불의 은총을 수용하는 믿음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염불은 우리가 구원을 위해 충족시킬 수 있는, 아니 충족해야만 하는, 또 하나의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예수의 공로로 인한 것이지 우리의 행위나 공로(work, merit) 때문이 아니라는 그리스도교 신앙과 너무나도 유사합니다. 신란은 심지어 그의 스승의 말, “악한 사람도 구원을 받는데, 선한 사람 – 염불 행 같은 쉬운 수행을 많이 한 - 이야 말할 것 있겠는가?”를 뒤집어서, “선한 사람도 구원받는데 하물며 악한 사람이야 말할 것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유명한 <악인정기설>(惡人正機說)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철저한 ‘타력신앙’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아무 주저 없이 불교의 ‘복음주의’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당시 신학공부를 하던 나에게는 그 신학적 의미가 문제였습니다. 우선 나는, 기독교의 복음주의 신앙이 불교에도 존재한다면, 그만큼 복음주의가 <보편적 진리>라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불교의 복음주의 신앙을 접하고서 매우 놀랐지만 반가웠습니다. 일종의 해방감 같은 것도 느꼈습니다. 그것은 내가 오랜 동안 품어왔던 커다란 의문에 대해 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해주었기 때문입니다. 

  

 1) 첫째 의문: 불교는 좋긴 좋은데 너무 어렵다, 과연 계, 정, 혜 삼학을 부지런히 닦아서 깨달음 얻어 열반에 들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어려운 수행이 필요 없고 오직 신심 하나 만으로 구원이 가능하다는 철저한 복음주의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종교라는 무거운 짐, 수행이라는 종교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되는 ‘복음’이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2) 둘째 의문: 기독교 복음이 정말 인류 구원의 진리라면, 복음을 접해 보지 못하고, 아예 모르고 죽은, 우리 조상들은 도대체 구원에서 배제된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복음을 접하지 못한 것이 그들의 잘못도 아닌데, 그런 사람들을 구원에서 배제하는 하느님을 우리가 과연 믿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었습니다. 조금 경박하게 말하면, 하느님께서는 처음에 한국인들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다가 200여 년 전에, 이제부터는 불쌍한 한국 백성을 구해야지 하고 갑자기 생각을 바꾸고 선교사들을 보냈다는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누구에게 물어도 시원한 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불교에도, 일본에도 복음주의 신앙이 있다면, 복음주의가 유독 기독교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편적 진리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구원의 복음이 기독교에만 있다고 주장하면서 타 종교를 윽박지르고 타 종교인들을 개종시켜 구원하려고 든다는 말인가? 나는 여기서 종교다원성을 신학의 긍정적 자산으로 삼을 수 있고, 삼아야 하겠다는 생각을 마음 편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의 단초가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난 후 결국 지금 내가 심도학사에서 추구하는 일, 즉 다종교적, 초종교적, 종교다원적 신학 내지 영성의 길을 추구하는 일로 귀결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 선교를 목적으로 한다는 마음이 전혀 없이 인류 구원의 보편적 진리를 배워간다는 마음으로 심도학사를 개설하고 운영하게 된 동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나의 이러한 생각과는 정 반대의 결론을 내린 한 위대한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것도 500년 만에나 한 번 출현한다는 개신교 최고의 현대 신학자로 칭송받고 있는 칼 바르트(Karl Barth)라는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나는 그의 신학에 심취해서, 지금은 신학자들조차 거들떠보지도 않는 ‘Church Dogmatics’ (교회 교의학) 이라는 수 십 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 가운데서 몇 권을 읽고 음미하면서 즐거워하던 시절이었는데, 바로 이 책 제1권에서 바르트가 불교에도 순수한 복음주의 신앙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궁금하지만,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필시 그의 일본인 제자들로부터 들었을 가능성이 클 것 같지만 -  거기에 대해 깨알 같은 글자로 약 3페이지나 할애하면서 논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가 내린 결론은 실로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도 이건 아니다. 이건 하느님의 계시에서 오는 구원의 길이 아니다. 왜?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인 - 이 없기 때문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이 황당한, 어처구니없고 실망스럽기 짝이 없는 결론을 읽고서, 세상에 이런 억지가 어디 있는가, 이런 독단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하고 심하게 반발했습니다. 사실 바로 그런 것이 계시중심적인 바르트 신학의 정체라는 것을 실감했고, 그의 신학에 관심을 접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부터는 하느님께 올라가는 길이 없고 오직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계시 외에는 길이 없다는 그의 신학이 19세기에 유행하던 자유주의 신학에 찬물을 끼얹고, 세상 풍조와 이성의 진리를 너무 추종한 나머지 물탄 기독교로 변질시켜 고사 지경에 이르렀다는 기독교를 살린 것으로 평가받고 이른바 ‘신정통주의’ 신학을 낳은 원동력이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르트 신학에 질려버렸습니다. 타 종교에도 기독교 복음과 매우 유사한 복음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반가워하고 기뻐하지는 못할망정, 이게 무슨 억지인가. 그것도 대 신학자의 입에서 나올 거의 막말 수준에 가까운 반응인지, 도저히 수긍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지구 말고 외계에도 생명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종일 거기서 오는 시그날 같은 것이 잡히지나 않을까 귀를 쫑긋하면서 기다리며 사는 천체물리학자들이나 천문학자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만약 외계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것도 우리 인간과 유사한 존재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이런 놀라운 사실이 기독교 신앙에 독이 될까 득이 될까 하면서 머리를 굴리는 신학자들이나 신앙인들도 제법 많습니다. 나는 외계에도 생명체가 존재하다는 사실이 명확히 드러난다면, 기독 신앙에 도움이 되면 되지 결코 해가 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실 이 방대하기 그지없는 망막한 우주 공간에서 바다의 모래 한 알 크기도 못 되는 우리 지구와 인간은 결코 외로운 존재가 아니라, 생명을 잉태할 수 있는 지구와 같은 행성의 탄생과 인간 출현이 결코 엄청난 물질계의 무수한 돌연변이 즉 우연의 연속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근본 성격과 필연적인 물리 법칙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라는 생각에 힘을 실어 줄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지구와 인간의 출현은 창조주 하느님의 보편적 섭리이며 진리로 간주될 가능성이 더 크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그리스도교의 복음에 일본불교 판 버전이 있다면, 이를 속 좁고 무식한 독단으로 폄하거나 거부할 일이 아닙니다. 우리 지구와 유사한 조건을 가진 무수한 다른 행성에서 생명체가 출현한 가능성이 있다면, 그리스도교의 복음과 같은 가르침이 다른 종교, 다른 문화권에도 있다는 사실은 환영할만한 일입니다. 복음의 보편성을 입증해줄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저명한 종교철학자이며 신학자인 존 힉(John Hick)은 기독교 중심적인 종교관에서 깨어나게 된 현대의 종교 다원적 상황 – 사실, 성경은 물론이고 기독교 신학은 근 2,000년 동안 아시아의 고등 종교들은 몰랐습니다. 불교, 힌두교, 유교, 성리학, 노장사상 같은 심오한 철학적 통찰이 있는 아시아의 종교들이 존재하는지조차 몰랐습니다 – 을 ‘지구 중심적’ 사고에서 ‘태양 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에 빗대어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불렀습니다. 바르트는 불교에 복음주의가 있다는 사실의 의미를 지독한 편견을 가지고 보았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듯이, 서양 신학과 사상에 대해서는 그토록 박식한 대 신학자가 그토록 편협한 ‘기독교 중심적 사고’를 하다니 실로 개탄할 노릇입니다. 어찌 그런 사실을 시샘이라도 하듯이 한 마디로 거부하고 복음주의를 기독교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특권의 논리로, 타 종교를 배척하는 차별과 배제의 논리로 사용한다는 말입니까? 전혀 대 신학자답지 않고 옹졸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습니다. 현대신학은 종교다원성이라는 현실 속에서 또 하나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회’가 필요합니다. 

  

 바르트는 무엇보다도 <요한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하고 있는 진리, 곧 2,000년 전 유대 땅에 태어나신 한 인간 예수의 탄생이 역사의 우연적 사건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이며 창조의 원리인 로고스(Logos)의 육화(Incarnation)라는 엄청난 주장의 의미를 불교 신앙에 적용하지 못했습니다. 일찍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하기를,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영원한 것인데, 예수가 지상에 오심으로 그리스도교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갈파했습니다. 바르트는 ‘계시 실증주의’라는 자신의 지독한 독단에 사로잡혀 계시와 종교, 은총과 종교를 확연히 차별화한 나머지 계시는, 기독교까지 포함해서, ‘종교’가 아니라는 억지 주장을 펼쳤습니다. 누가 보아도 말이 안 되는 독단이고 궤변입니다. 바르트의 주장대로,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느님의 계시는 실로 종교가 아니라 해도, ‘기독교’라는 종교가 하느님의 계시에 서 있다고 하면서 그 보호자(custodian) 행세를 한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데, 그런 논리로 모든 타종교를 심판하고 계시 종교를 자처하는 기독교에는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그는 외면했습니다. 불교의 복음주의도 물론 바르트에게는 인간의 노력으로 신에 이르려는 ‘종교’에 포함시킨 것입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바르트의 신학에 심취했던 중요한 동기도 역사 상대주의, 문화 상대주의가 판을 치는 현대의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한 구원의 동아줄에 대한 젊은 시절 내가 지녔던 강한 욕구 때문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는 결국 바르트 신학에서 그 가능성과 매력을 발견했기 때문에 한 동안 거기에 심취했던 것입니다. 특히 그가 종교와 그리스도, 종교와 하느님의 계시를 확연하게 구별하면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라는 하느님의 계시와 은총이 우리를 구원한다는 주장에 한 때 심취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부질없는 궤변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에, 모든 종교의 진리에 귀를 여는 종교다원적 신학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여하튼 기독교 복음주의가 불교의 정토신앙과 만난다는, 거의 일치한다는 놀라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정토신앙은 어디까지나 불교의 방계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역시 불교를 대표하는 것은 수행과 깨달음을 강조하는 선불교(Zen Buddhism)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만남은 무엇보다도 선불교와의 만남과 대화, 화해와 일치가 더 중요합니다. 그런 가운데 나는 40대 후반의 나이에 나의 신학적 여정에 또 하나의 중대한 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곧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라는 중세 가톨릭 신학자, 도미니코 수도회 수도자이며 설교가, 무엇보다도 신비주의 영성가와의 만남이었습니다. 그의 설교문들을 탐독하면서 나는 마치 선사들의 어록을 읽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로 감탄하게 되었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서 나는 그리스도교 진리와 불교의 주류인 선불교가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불교뿐 아니라 유교, 도교, 그리고 10억이 넘는 신자를 가진 인도의 힌두교와도 만날 수 있고, 무엇보다도 ‘오직주의’에 빠져 편협하기 짝이 없게 된 개신교 신학의 울타리를 넘어 가톨릭 신학 전통의 위대성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점을 깨닫게 되고 지금까지 개신교 신학, 그것도 독일 현대 신학에 갇혀 좁은 세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공부했던 나의 어리석음에 많은 후회를 하게 되었습니다. 에크하르트라는 놀라운 중세 사상가를 만나게 되면서 중세 스콜라 철학이라고 깔보고 배우기를 소홀히 했던 나의 무지를 실감하게 되었고, 더 나아가서는 중세 유대교와 이슬람 사상의 깊이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특히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의 영성 사상을 통해 기독교와 유대교, 이슬람 내에 조용히 흐르고 있는 신비주의(mysticism) 전통과 영성의 보고에 눈을 뜨게 되었고, 불교 복음주의를 발견할 때와 마찬가지로 세 유일신 종교들에도 하느님과 그의 모상인 인간 사이의 신비적 합일(unio mystica)을 말하는 깊은 신비주의 영성과 신학이 있다는 사실에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이와 동시에 이러한 신비적 합일의 진리를 당연시하는 동양종교들을 보는 나의 시각에도 일대 전환이 찾아왔습니다. 불교와 유교는 물론이고 힌두교, 도교, 천도교, 그리고 다석 유영모와 함석헌의 씨알사상 등에도 마음의 눈을 열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수십 년 간 기독교, 그것도 개신교와 독일 현대 신학에 갇혀 있던 나의 공부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동서양의 종교 전통 모두에서 깊은 영성의 물을 깃게 된 행운이 나에게 찾아 온 것입니다. 그 결과 나는 50대 후반에 가서야 이 모든 일이 지닌 신학적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기독교 신앙을 놓고 벌였던 오랜 갈등이 어느 정도 정리되면서, 확신을 갖고 종교다원적 신학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문제를 좁혀서, 그렇다면 도대체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어떤 면이 이렇게 사상, 교리, 역사/문화적 배경에서 거리가 큰 두 종교를 하나로 묶어주는가, 그 열쇠, 그 공통의 심층적 코드가 무엇인지에 대해 잠시 말하고자 합니다. 오늘 읽은 성서 말씀은 우리 모두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신 이야기인데,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나라 운동을 시작하시기 전까지 예수님 자신이 겪은 내면의 고민과 갈등의 경험이 이런 이야기 형태로 전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복음서들 가운데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만 자세히(누가 4장 1-13절, 마태 4장 1-9절) 나오고 마가복음(1장 12-13절)은 단지 예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사탄(악마)의 시험을 받으셨다는 사실만 간단히 언급할 뿐, 무슨 시험을 받으셨는지 그 내용은 안 나옵니다. 여하튼 마태, 누가는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직전에 사탄의 시험을 받고 단호히 물리치셨다고 하면서 그 내용도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이 시험의 내용과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아들은 세상 모든 사람이 탐하는 ‘금권’과 ‘권력욕’과 ‘명예욕’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고 이겨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 관점에서는 성욕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는 우리 남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세 욕망에 성욕을 하나 더 추가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시험 받으신 예수의 이야기를 좀 더 확대해서 말하면, 세상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 사회의 지도자가 될 사람은 먼저 금권과 권력과 명예욕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와 우리들의 차이는 예수는 시험을 받지 않았고 우리는 끊임없이 유혹과 시험을 받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유혹에 넘어가지만 예수는 유혹을 단호히 물리치셨다는 점입니다. 그래야만 세상을 구원하는 자가 되고 하느님 나라의 일꾼이 될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단순하고 간단명료한 메시지이지만, 만고불변의 진리입니다. 우리사회에서 각종 사회 지도급 인사들이 보통사람도 하지 않는 말도 안 되는 폭력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사실을 보면서 혀를 차게 됩니다. 언론을 통해 매일 듣고 있으니, 구체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불교의 요체도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예수님의 이야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열반의 평화, 구원을 누리려면 먼저 탐(貪, 탐욕), 진(瞋, 노여움), 치(癡, 무지 내지 어리석음)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입니다. 세상 욕망에 대해,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먼저 죽어야 만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인들이 불교에서 배워야 하는 것은 불교의 수도정신, 즉 마음공부의 정신과 전통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어리석음을 벗어나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는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불교는 바로 이 탐욕의 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 즉 어리석음의 독을 제거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지혜의 종교입니다. 지혜를 기르기 위해서 무아(無我)라는 인간관, 공(空)이라는 존재론, 모든 것이 마음뿐이라는 진리(三界唯心) 등을 가르치고 훈련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교가 불교에서 배워야 할 지혜입니다.

  

 반면에 진, 즉 노여움에 대한 강조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예수의 가르침이나 삶과 다른 점입니다. 예수에게는 구약성서의 예언자적 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불의를 참지 못하고 분노하는 정의에 대한 관심이 강했습니다. 우리는 불상을 볼 때마다, 부처님은 그 누구에게도, 또 그 어떤 일에 대해서도 화를 내셨다고 생각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부처님의 얼굴은 늘 온화한 얼굴이셨을 것이라고 상상하게 됩니다. 부처님에게는 예수님처럼 ‘거룩한 분노’(holy wrath)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장점이자 약점이기도 합니다. 정의에 대한 관심은 자연히 ‘의분’ 내지 의로운 폭력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남이 나에게 가하는 폭력에는 성내거나 폭력으로 대응 하지 않고 참을 수 있다 해도, 남이 무고한 자, 연약한 어린아이들, 우리 가족에 대해 폭력을 가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어려운 문제에 봉착합니다. 이것은 또 전쟁의 문제로까지 확장되면서, 절대 평화주의(pacifism)와 정당한 전쟁(just war) 이론이 대립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대화에서 거의 단골로 등장하는 주제들이며, 두 종교가 서로 배워야 할 점이 많습니다. 산상수훈의 가르침에서 보이는 예수님의 ‘절대윤리’를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집단 간의 갈등이 그치지 않는 현실세계에 적용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문제가 많은 신학자들을 고민하게 만드는 문제로서 많은 견해들을 낳았습니다. 


 우리가 행복을 얻는 데는 간단히 말해 두 가지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는 욕망을 성취하려고 노력하면서 경쟁하고 다투는 일이며, 다른 하나는 욕망을 줄이고 없애고 양보하는 길 두 가지 뿐입니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효과가 있고 좋을지는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여러분 자신이 잘 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을 채워서 행복해지려는 것은 마치 불을 더 지펴서 불을 끄려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는 데 이견을 제시하는 종교는 세상에 없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나라 종교계의 실태를 보면, 그 반대로 욕망을 부추기는 <기복신앙>이 참 된 신앙인양 판을 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런 종교는 전부 혹세무민하는 종교들이고 가짜이고 사기라고 보면 됩니다. 그리스도교에서 십자가와 부활은 항시 같이 갑니다. 만약 어떤 종교가 자기부정과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말하지 않고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인의 욕망을 부추기고 세인의 욕망과 출세욕만을 자극한다면, 다시 말해서 좁은 길로 가지 말고 넓고 쉬운 길만 얘기 한다면, 나는 그런 종교를 주저 없이 ‘사이비 종교’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야말로 아무 희생, 아무 대가 없이 ‘공짜’만을 외친다면, 그런 종교는 엉터리 종교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한국종교계, 특히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을 외치는 개신교의 최대 위험이고 유혹이고 타락의 근본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기독교, 불교 할 것 없이 이 값싼 <현세주의, 기복신앙>에 묻히고 말았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도 부처님의 정신과 예수님의 정신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교회당 꼭대기에서 붉은 빛 십자가가 높이 달려 있지만, 정작 십자가 없는 종교로 타락했고, 자기부정과 자기 비움이 없는 종교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래도 예수님의 참 정신은 아직 불씨가 조금은 남아 있어, 여기저기서 ‘작은 예수’처럼 사는 분들이 우리 주변에 더러 있습니다.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우리가 죽어야만 산다는, 죽으면 살리라는 <사즉생>의 진리, 역설의 진리를 말하고, 사즉생의 영성을 전하는 종교라는 깊은 코드에서 일치합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불교와 그리스도교는 한 개인이 세상 풍조, 세상의 가치관과 맞대결을 하는, 말하자면 ‘맞장’을 두는 종교입니다. 정면에서 대결하고 승부를 거는 종교라는 말입니다. ‘대결’까지는 아니라 해도 성직자, 평신도 할 것 없이, 출가 재가 할 것 없이, 적어도 이 세상의 풍조, 즉 사고나 가치관, 삶의 방식과 갈등과 긴장을 느끼지 않는다면, 진정한 불교, 진정한 기독교는 아닙니다. 이런 긴장을 말하지도 않고 전하지도 않는 종교는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종교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는커녕 해만 됩니다. 초자연적 힘을 빌려 자연인의 욕망을 채우려는 이기적인 ‘종교 아닌 종교’가 되고 맙니다. 역설적이지만 죽는 길이 참으로 사는 길이며, 진정한 행복의 길이라는 것이 두 종교가 가르치는 공통의 진리입니다.


 이게 무슨 행복의 길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조롱하는 사람, 정직하지 못한 패배자들이나 가는 길이라고, 힘없는 약자들 혹은 비굴한 속임수, 변명 내지 위선에 지나지 않는다고 니체처럼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 종교라는 것이 반드시 그렇게 어려운 길을 말해야만 하느냐, 기복신앙이라도 대중의 관심에 부응해야만 하는 것 아니냐, 무슨 행복이 그렇게 어렵냐고 불만을 터드리는 사람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참 행복은 비싼 법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더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몇 가지 오해만은 피할 필요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욕망 그 차제, 물질 그 자체가 악하다고 가르치는 종교는 영지주의(Gnosticism)라고 불리는 것 말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종교들은 욕망을 경계하고 줄이라고 가르치지 욕망 자체가 악이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내가 아는 한 그런 종교는 없습니다.

 

 2) 둘째 오해는 욕망을 줄이고 사는 금욕적 삶은 무척이나 힘들고 괴로울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내가 비교적 잘 알고 존경하는 스님이 한 분 계시는데, 그 분이 세상 욕망을 버리라는 취지의 강연이 끝나고 청중의 질문을 받는데, 한 사람이 묻기를, 스님들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사는가 하고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청중이 폭소를 터트렸습니다. 한데 그 스님의 대답 또한 질문 못지않게 단도직입적이었습니다. “아무 재미없지요.” 청중의 폭소는 더 컸습니다. 아마도 결혼생활을 하지 않는 스님들이나 신부님들 가운데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질문을 하루에도 몇 번 씩이나 스스로에게 하지 않고 사는 분은 한 분도 없을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하지만 속인들이 모르는 재미가 있으니까 평생을 출가자로, 수행자로, 독신으로 살 것이 아닙니까? 적어도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의 즐거움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독신 생활을 하는 신부님이나 스님에 대해 얼마나 힘드실까 동정하듯이 말을 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말하기를 “모르는 말씀 하지 마세요, 한 배우자와 몇 십 년을 같이 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아요?”라고 해서 큰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때로는 독신으로 사는 스님이나 신부님이 부러울 때가 결혼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도 있는 법입니다.  

  

 그런가 하면, 출가승이나 신부님 가운데도 어리석고 쓸 데 없는 탐욕을 부리다가 패가망신 당하는 분이 가끔 있지만, 대부분은 진리를 알고 인간의 더 큰 행복,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서 오는 기쁨 같은 것이 있다고 믿으며, 느끼며 살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욕심을 버리고 사는 자, 욕심이 적은 사람일수록, 가난하고 이름 없는 삶을 살아도, 천하의 자유인으로, 임제선사가 말하는 <무위진인>처럼 사는 즐거움, 여유와 기쁨을 누리면서 삽니다.

   

 3) 셋째 오해는 사즉생의 영성과 삶을 세속의 욕망을 포기하는 매우 소극적이고 조용한 삶, 그야말로 아무 활동도 하지 않는 무 활동 내지 비활동적 삶, 즉 정적주의 내지 도피주의로 오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부처님과 예수님의 삶을 보십시오! 무위는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으로 무리수를 두지 말라는 것이지, 그야말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팔짱 끼고 구경만 하는 삶을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말없이, 불평 없이, 다툼 없이, 무언가를 이룬다는 의식 없이, 으스대거나 뽐내지 말고, 물처럼 부드럽지만 강하게, 아무 일도 하지 않지만 소리 없이 모든 일을 이루는 자연(저절로 그렇다는 뜻)처럼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영성가들이나 성인들은 하나 같이 이러한 활동적 삶을 살면서 많은 일을 이룬 분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활동적 삶(vita activa)과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이 둘이 아니었고, 세간과 출세간, 하느님나라의 질서와 세상의 질서, 개인의 영성과 사회적 영성이 둘이 아니었습니다. 모두 이원적 대립을 초월하는 삶을 사셨고, 만약 둘이 분리되면 둘 다 죽고 만다고 생각을 가지고 삶을 살았습니다.

  

 여하튼 인생을 한 번 접어보는 초월의 경험, 세상을 한 번 더럽다고 침을 뱉고 떠나본 적이 없는 신앙인들은 결코 종교의 진수를 모릅니다. 세상을 한 번 포기해본 적이 없는 사람, 하느님을 위해 모든 것을 버려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성숙한 인격이 되기도 어렵습니다. 남의 고통은 안중에 없고 이기적 욕망만 지배하는 삶을 살기 쉽습니다. 십자가가 곧 부활의 길이라는 사즉생의 진리를 믿고 자기 목숨까지 버리고 덤벼드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 인생의 사표를 제출해 놓고, 언제든 하느님의 부름에 떠날 각오를 하고 사는 사람처럼 당당하고 두려움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세계부정은 결코 도피나 정적주의가 아닙니다. 세상으로부터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더 강한 헌신을 위한 것이라는 역설이 존재합니다. 

  

 사즉생의 삶은 아무 즐거움 없는 우울한 삶이 아니고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삶이 아닙니다. 사즉생의 영성은 불행을 찬미하는 종교가 아닐뿐더러 사람을 우울하고 비관적으로 만드는 영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는 이미지에 익숙해서, 그가 항시 괴로움에 얼굴을 찡그리며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읽어보면 오히려 그 반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자’라고 비난을 받을 정도로 낙천적이고 힘차고 즐거운 삶을 사셨으며, 가난 가운데 살면서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 천하의 자유인으로 사셨다는 사실을 기억합시다.

  

 사즉생의 진리를 아는 사람은 진정으로 삶을 알고 사랑합니다. 인생무상을 알기 때문에 삶의 모든 순간을 귀하게 여기고 축복으로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인생을 다른 눈으로 보게 되며, 새록새록 진리를 깨달으며 삽니다. 언제 어디서나 내가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모든 것이 주님의 은총이며 이미 우리 곁에 있는 행복을 발견합니다. 세상 어디에서나 하느님의 축복을 발견하며 삽니다. 가난이나 실패나, 죽음마저도 앗아갈 수 없는 행복입니다.

  

 나는 사즉생의 영성을 실천하는 삶을 신 금욕주의라고 부릅니다. 과거의 고전적 금욕주의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 자체를, 물질세계 자체를 피해야 할 악으로 알고 수행의 적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지만, 오늘의 금욕주의는 욕망을 좇는 삶에 지쳐,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알고 스스로 욕망을 줄이려고 하는 삶, 자발적 가난과 단순한 삶(simple life)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선택해서 사는 삶의 방식입니다. 

  

 이 사즉생의 진리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바울사도처럼 “나는 날마다 죽는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자기 부정, 자기 비움, 자기 초월이 있어야 합니다. 수행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일단 죽을 줄을 알아야 삶도 제대로 삽니다. 일단 매일, 매 순간 죽음을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살아야 참으로 지혜로운 삶, 보람 있고 행복한 삶을 삽니다. 철이 들고 성숙한 인격이 됩니다. 병고를 통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살아난 사람을 보십시오. 또 억울한 옥고를 치룬 경험을 한 사람, 의를 위해 고통을 받아 본 사람, 어떤 소중한 가치를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송두리째 헌신한 사람이나 어떤 가치 있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 전 재산을 던져 버린 사람을 보십시오. 큰 것을 위해 수많은 작은 희생이나 소소한 일은 안중에 없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작은 득실에 연연해하지 않고 대범한 삶을 살고 사소한 이해득실에서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매일매일 생명의 주님께 인생의 사표를 내고 사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는 사람에게 무엇이 걸리고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사즉생의 경험은 특별한 계기를 통해 갑자기 주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보다 일반적으로는  삶 속에서 끊임없는 자기 성찰, 자기 수양, 수신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불교 식 용어로는 돈오도 있고 점수도 있습니다. 자기성찰, 자기 수양에는 “이만하면 되었다”는 자만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자기 성찰은 자기 양심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자기 자신의 양심과 하느님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결정적인 계기를 통해서 지금까지의 자기 삶을 갑자기 청산하고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간혹 주위에서 봅니다. 갑작스러운 돈오의 경험을 통해서 사즉생의 진리를 터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이렇게 사는 것은 아닌데, 마치 무엇에 홀린 듯 미친 듯이 살다가 내가 이러다가는 갑자기 죽는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문득 정신이 들어, 비장한 결심을 하고 삶의 방식을 180도 바꾸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또 성직자들 가운데도, 내가 이런 것 하려고 태어난 것은 아닌데, 이딴 짓 하려고 사는 것은 아닌데 하는 자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정신이 번쩍 들 때도 있다는 것입니다. 출가한 스님 가운데도, 신부님들 가운데서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합니다. 내가 이런 짓 하려고 머리를 깍은 것이 아닌데, 내가 이런 것 하려고 신부가 된 것이 아닌데 하고 ‘두 번째 출가’를 감행하는 사람들이 있고, 매일 출가를 반복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유독 개신교 목사님들에게서는 이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대체로 목사님들은 확신에 차 있는 듯 행동해야 한다는 관념의 포로가 되었는지, 겸손한 자기반성과는 거리가 먼 것 같습니다. 비굴하게 보일 정도로 겸손한 체 하는 목사님들은 쉽게 보지만, 진정으로 자기 모습과 자기 신앙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겸손하고 솔직한 목사님은 만나기 어렵습니다. 모든 문제에 답을 잘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설교만 하고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여하튼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우리는 그 때가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오는 때이며 이 때 우리는 과감히 응답하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인생을 접어 본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돈오든 점수든, 사즉생의 진리를 터득한 사람은 죽는 줄 알았다가 살아난 사람처럼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기쁨 속에 삽니다. 날마다 새롭게 삽니다. 평범한 일 가운데서도 축복을 느끼며 감사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의 현존, 하느님의 숨결을 느끼며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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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4 2019 [2019. 03. 10] “백년의 기다림” 2019.03.22 김정수
1083 2019 [2019. 03. 03] “내가 새길을 걷는 것은” 2019.03.08 김영란 외 8명
1082 2019 [2019. 2. 24] 우리는 '스스로 섰'(獨立)는가? 2019.03.02 이정배
1081 2019 [2019. 2. 17] 친구란 무엇인가? 2019.03.02 권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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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9 2019 [2019. 1. 27] 불의한 청지기 비유 2019.02.13 김철호
1078 2019 [2019. 1. 20] 관념의 감옥 file 2019.02.13 추응식
1077 2019 [2019. 1. 13] ‘나홀로’ 시대에 외롭지 않게 사는 법 2019.02.13 이명식
1076 2019 [2019. 1. 6] 중요한 것은 작은 것입니다 2019.02.13 정경일
1075 2018 [2018. 12. 30] 가는 해와 오는 해: 수고로움에 감사드리며 2019.02.13 차옥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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