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_btn
(*.183.188.242) 조회 수 364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Extra Form
설교자 이숙진

 

 

“한 평신도교회의 모험: 밖에서 본 새길”

(마가복음서 1:29-39)

 

2018년 12월 16일

주일예배

이숙진 자매(이화여대)

 

 

[그들은 회당에서 나와서, 곧바로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갔다. 마침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 사정을 예수께 말씀드렸다. 예수께서 그 여자에게 다가가셔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그 여자는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해가 져서 날이 저물 때에, 사람들이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을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그리고 온 동네 사람이 문 앞에 모여들었다. 그는 온갖 병에 걸린 사람들을 고쳐 주시고, 많은 귀신을 내쫓으셨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그들이 예수가 누구인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께서 일어나서 외딴 곳으로 나가셔서, 거기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 때에 시몬과 그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섰다. 그들은 예수를 만나자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셔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내셨다.]

 - 마가복음서 1:29-39 - 



[인사] 


 새길 교우님들, 반갑습니다. 오늘 드디어 그날이군요. 언젠가 이화대학에 강의하러 온 정경일 원장이 외부자의 눈으로 새길을 관찰해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하였습니다. 지난 5~6년 동안 저는 참여관찰의 방법으로 한국교회의 특성 혹은 현상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던 터라 그 제안에 솔깃했습니다. 저는 그간 IMF 이후 한국교회와 사회에 광풍을 일으킨 두란노 아버지 학교를 관찰하여 “포스트오이디푸스 시대의 한국교회 아버지 담론”을 썼고, <긍정의 힘>, <목적이 이끄는 삶>, <다니엘 학습서>와 같은 대중적 신앙서적을 소비하는 신앙인들을 통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이 시대의 복음으로 둔갑하는 장치에 대해 탐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 맥락에서 한국교회사에 기록될 평신도 교회의 상징적 존재인 새길교회에 참여하면서 관찰하는 일은 매우 매력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다른 곳과 달리 새길은 제게 연구의 대상만은 아니었습니다. 간헐적으로, 때론 집중적으로 공동식사 자리나, 대화마당에서, 또 몇 차례 운영위원회나 다양한 모임에서 새길 교우님들을 뵈면서 “나도 이 모든 모임에 함께 하고 싶다.”는 애정과 관찰자의 임무에 충실하기 위해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냉정 사이에 감정적 혼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요즘 청춘들의 “내꺼인 듯 내꺼 아닌 내꺼 같은 너”라고 토로한 연애감정처럼 “내 교회인 듯 내 교회가 아닌 내 교회같은 새길”이었기에 연구대상이기보다는 썸을 타는 존재에 가까웠습니다. 뒤에서 말씀드리겠지만, 놀랍게도 저처럼 새길 공동체와 썸타고 있는 예비교우들이 꽤 계시더군요. 무려 10년 동안 썸을 타는 중이신 분도 뵀습니다. 오늘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새길과 썸을 탔던 제 고백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새길의 정체성] 


 사람이든 단체든 그 이름에는 지향하는 방향이나 정체성이 녹아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이름들도 일정한 경향성이 있지요. 일일이 조사를 해보지는 않았지만 지역명을 딴 교회가 가장 많을 듯합니다. 아현교회, 서대문교회, 정동교회... 거기다 개교회의 지향성을 나타내는 단어가 하나 더 들어가지요. 아현감리교회, 서대문중앙교회나 정동제일교회처럼 말입니다. 감리교, 장로교처럼 교단을 표시하는 경우는 자신의 교단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내고, ‘중앙’ 혹은 ‘제일’은, 중심이 되고 싶고 첫째나 원조가 되고 싶은 욕망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새길, 역시 이 두 글자에 교우님들이 어떠한 공동체를 지향하는지가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교역자 중심의 교회에서 공동체적 평신도 중심의 교회로, 제도와 율법주의에 매인 교회에서 은총과 자유의 교회로, 닫힌 교회에서 열린 교회로,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쌓아 올리는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교회로” 라는 새길 창립취지문에 명시된 지향성은 ‘예수 믿으면 잘 산다’는 주문을 복음이라 믿고 싶은 한국교회의 욕망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새길 정신- 평신도성, 개방성, 사회적 영성] 


 지난 몇 달 동안 예배, 운영위원회, 대화마당, 공동식사, 크고 작은 모임을 통해 또 몇몇 새길 교우님들과 심층인터뷰를 하면서 새길 정신이 구현되는 방식과 현장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새길 정신을 세 가지로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평신도성, 개방성, 사회적 영성추구입니다.  


▸ 평신도성 


 먼저 새길의 평신도성은 운영위원회 등 교회조직이나 대화마당처럼 전교인에게 열린 논의구조를 통해 구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새길 역사를 돌아보면 평신도 중심의 민주적 운영방식과 논의구조가 처음부터 구축된 것은 아니더군요. 세부적인 교회활동이나 목회적 돌봄 문제에서 한계를 절감할 때는 전문 목회자를 청빙한 적도 있고, 제도 교회와의 통합과 분리 과정도 겪었습니다. “이 길이 진정 새 길일까, 새 길이 아닌 샛길로 빠지는 것이 아닐까”를 끊임없는 물으며 회의와 성찰의 역사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이러한 물음은 지속될 것입니다. 흔들리면서도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가운데 새길의 정신은 지켜질 것이고요.  

 아시다시피 2018년 올해는 예배/문화원 공간의 매입여부를 두고 전교우대화마당이 열렸습니다. 5차례 진행된 대화마당은 새길의 평신도성과 열린 교회모델이 가장 잘 구현된 현장인 듯합니다. “대화의 목적은 합의가 아니라 이해입니다. 대화는 더불어 함께 말하고 생각하는 공동의 행위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대로 듣지 않고 남이 말하는 대로 듣습니다.” 등을 포함한 8개의 새길 대화규칙을 되새기며 진행된 대화마당은 사뭇 경이로웠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늘 경이로웠던 것만은 아닙니다. 토론 시간이 늘어지고, 토론 내용이 반복될 땐 지루했고, 너무 비효율적이라는 판단이 쓰윽 올라오기도 했지요. 그러나 발언을 원하는 교우들 모두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한 후 도출된, 예닐곱 개의 사안을 두고 차근차근 표결을 거쳐 최종결정에 도달하는 과정은 숙의 민주주의의 원형적 사건입니다. 간명함과 효율성을 택하게 되면 다양한 낮은 목소리는 삭제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느리게 가더라도 누구나 말하는 주체로 서게 한 대화마당은 모험이었지만 새길을 만드는 씨앗의 시간이었습니다.    


[낯설게 다가온 새길] 


 언젠가 공동식사 시간에 한 교우님이 “지금까지 새길에서 본 것이 무엇인지” 물으셨어요. 그 때 저는 새길의 좋은 점들 주로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부흥사가 했던 역할을 할 작정입니다. 제 모교회에서는 부흥회를 자주 열었는데요, 부흥사의 역할 중에는 교우들 사이에 서로 다 알고 있기에 식상하거나 차마 면전에서 말하기엔 곤란한, 그러나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그런 말들을 대신 해주는 일도 있습니다. 어쩌면 제가 몇 달간 경험한 새길 이야기는 수련회나 여러 자리에서 늘 나온 식상한 이야기일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새길이 늘 지향하고 지켜왔던 모습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넓은 신학과 깊은 신앙을 추구하며 서른 해를 쌓아온 새길의 역사를 제가 어찌 몇 달 만에 알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게 되면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게 하는 효과가 있으니 부족하지만 객관화해보는 계기로 여기시면 좋겠습니다.  


▸ 새길의 여성주체


 새길에서 가장 의외였던 모습은 자매님들의 자리입니다. 공동체 운영의 여러 부서와 활동에 여성들이 뒤로 물러나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우선 운영위원회에 참관했을 때, 새길살림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서나 위원회(총무부, 관리부, 재정부, 새길살림, 사회사역위원회[손길, 숨길, 씨앗, 곁], 서로돌봄위원회, 친교부, 선교부)의 부장이나 위원장들이 형제들이었습니다. 운영위에 들어온 분들도 압도적으로 남성들이 많았구요. 어느 달 운영위 참석자는 남성 15명에 여성 2명일 정도였습니다. 대화마당에서 탁월한 사회자로 역할을 한 문경란 자매가 있기는 하지만, 그 외 대화마당에서 발언한 교우들의 성비, 말씀 증거자, 말씀 증거자와의 대화시간 등에서 목격한 것은 성 불균형이 심하고, 특히 여성의 역할과 참여가 저조하다는 점입니다. 자매님들은 주로 회의나 모임이 진행되는 교직원식당 문 밖 공동식사 공간에서 식사와 커피를 준비하고 나누는 일에만 헌신하거나 삼삼오오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저는 20여년 전 강남청소년수련관의 새길 자매님들을 기억합니다. 4-50대 자매님들이 말씀증거와 운영위원장을 맡아 공동 여성지도력을 발휘하던 그때의 새길은, 여성이 말하는 주체가 되지 못하는 주류교회와는 사뭇 달랐습니다. 그 시절의 40-50대 여성지도력은 이제 코스모스 자매단이 되었는데, 지금의 40-50대 자매님들은 어떠한 지도력으로 새길을 이끌고 계신가요? 분명 소모임 활동은 주중에도 활발히 운영이 되는데 왜 새길 전체 공동체의 집단 지도력이나 집단지성으로 이어지지 않을까요?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구조의 문제일까요? 아니면, 자매님 스스로 그 책임을 지고 싶지 않을 걸까요? 저의 관찰은 한해만의 예외적 경우일수도 있습니다만, 만약 이러한 상태가 지속된다면 평신도 주체를 세우는 공동체의 이상이 꿈에만 머물게 될 것은 자명합니다. 

 책 <새길 20주년> 을 읽다가 제 마음이 오래 머물렀던 인터뷰가 있습니다. 좀 길지만 함께 나누겠습니다. 

 

“(초창기) 교회에서 어떤 일로 해서 자기를 필요로 하면 노(No) 하지 않는, 그러니까 운영위원장이라든가 직책을 맡을 때 거절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평신도 교회를 하는 지금 만약 서로 안 한다고 하면 유지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당신이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면 비록 어려운 일이라도 받아들이는 걸로 그렇게 해서 지켜왔어요. 그 힘에 의해서 시스템이 유지가 되는 거지요. 그게 없으면 유지가 안돼요.... 새길 정신을 좋아하고 내가 교인으로서 정체성을 갖고 봉사하기로 작정한 이상 맡는 것이 불문율이 되었어요.”


▸ 이웃종교에 대한 개방성


 새길의 두 번째 특징은 이웃종교의 가르침에 크게 열려있다는 것입니다. 새길의 신앙과 신학은 한국주류 교회의 신학적 배타주의를 넘어섭니다. 길희성 형제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나라라는 초월적 가치는 기독교 울타리를 넘어서서도 실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교회의 독점사업이 아니기에 교회는 세상을 향해 크게 열려있어야 합니다”(길희성, “아직도 교회다니십니까” 2000) 새길의 “넓은 신학”은 2018년에도 <그리스도인을 위한 이슬람교 이해> 강좌나 차옥숭자매님이나 이웃종교인의 말씀증거를 통해 구현되고 있었습니다. 

 새길교회는 창립취지문에 잘 나타난 대로 열린교회를 지향합니다. 제가 인터뷰했던 많은 교우분들도 그렇게 말했구요. 그래서 이웃 종교의 가르침에도 거부 반응없이 잘 경청합니다. 그런데 새길이 모든 면에서 열린 공동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새길은 과연 열린공동체인가? 


 외부자 서른분께 ‘새길’하면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를 물었습니다. 진보적, 새길 문화원, 지식인, 촛불, 김이수, 대안, 또 다른, 예수의 새로운 길, 평신도, 그들만의, 중산층, 어우러짐, 계급적, 섞기기 어려운, 후원금, 인간예수. 점잖은, 지적인, 지성적, 엘리트, 강남, 교수, 그리고 세월호 교회 등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이미지 중 “그들만의, 계급적, 섞기기 어려운” 이라는 단어는 새길정신인 ‘열림’과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새길과 썸 타기를 그만둔 몇 분이, 새길교회를 “오는 사람 막지는 않으나 방치하고, 가는 사람 절대 잡지 않는” 교회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 속에는 자기를 열어 환대하는 교회의 따뜻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날선 비판이 녹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쿨함을 빙자한 자기 폐쇄적인 교회라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이런 말들은 정말 소수의 예외적인 경험만일까요? 

 외부자들이 새길에서 폐쇄적이라고 느꼈듯이, 새길 안에서도 끼리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목소리가 있더군요. 인터뷰에 응한 대부분의 교우님들은 어느 한 부서에 대한 불편한 감정을 토로했습니다. 다른 교우들에게 곁을 주지 않고, 공동식사에도 어울리지 않으며, 공동체가 마련한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는 부서가 있다는 것입니다. 새길에 대한 외부자들이 시선처럼, 교우들은 이들에 대해 “그들만의, 계급적, 섞기기 어려운” 감정이 큽니다.  

 새길 역사를 보니 지난 30년 동안 단기간에 교우들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적이 몇 차례 있더군요. 그럴 때마다 새 교우를 수용할 시스템의 부재로 인해 전전긍긍하거나 자칫 대형화로 이어져 새길의 정신을 훼손될까 염려했습니다. 


 코이노니아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새길을 찾아, 새길 정신이 좋아 스스로 온 예비교우를 환대하지 못하고,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공동체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됩니다. 새로 온 분들의 새 목소리가 새길을 새 길로 이끌 것입니다. 새로운 것은 원래 나와 다른 남에게서 배우는 것입니다. “새길을 모르셔서 그런 말씀을 ~” “새길은 원래 ~”라는 말로 새 목소리를 침묵시킨다면, 새 목소리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면, 새길은 더 이상 새 길이 아닐 것입니다.  


▸ 사회적 영성


 마지막으로 사회적 영성에 대해 나누겠습니다. 사회적 영성은 새길 공동체의 중요한 정신입니다. 새길교회 제도와 운영규칙에는 “복음 정신에 따라 선교, 봉사에 힘쓰는 교회로서 예산의 가능한 한 많은 부분을 교회 밖의 선교와 봉사를 위해 사용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지난 달 등나무모임에서도 현재 예산의 60% 남짓을 사회사역을 위해 지출한다고 하셨구요. 예배처소의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는 것은 참 대단한 일입니다. 적어도 물질만큼은 “쌓아 올리는 교회에서 나누어주는 교회로”라는 창립취지문의 다짐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종종 기독교의 나눔은 자선을 베푸는 것으로 치환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선이 수혜자와 시혜자를 나누고 암묵적인 위계 구도를 생성할 수 있다는 위험성을 압니다. 구조적 부정의에 무관심한 자선행위는 자칫 문제를 더 악화시킬 수 있음도 압니다. 현실참여적 기독인들이 정의로운 분배 구조를 주장하고,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맞서 싸우는 이유입니다. 정의란 합당한 각자의 몫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몫이 없는 사람의 몫과 권리 없는 사람의 권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누가 몫 없는 자의 몫에 관심을 기울일까요. 바로 여기에 무조건적인 환대, 곧 사랑의 계명이 요청됩니다. 

 새길이 추구하는 사회적 영성은 가진 자의 자선과 무조건적인 환대 사이에 어디쯤에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요? 촛불광장에서 휘날리는 새길교회 깃발을 보았습니다. 세월호와 함께한 새길을 기억하는 밖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촛불과 세월호는 전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된 사건이었습니다. 한국교회의 대부분이 보수나 수구적이기에 새길의 행보가 도드라져 보였을 겁니다. 그 결과 진보적, 대안적, 촛불, 세월호 교회라는 단어를 떠올렸겠지요. 이러한 사회적 고통에 대해 발언하고 목소리를 보태는 일은 중요합니다. 이 정도마저도 못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과 비교해보면 그러합니다. 그런데 사회적 영성을 신앙의 푯대로 삼은 새길이라면, 과연 이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의 치유 행위]


 오늘 읽은 본문은 갈릴리에서 이제 막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시작한 예수의 활동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가십니다. 시몬과 안드레는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지만, 그의 집까지 포기한 것은 아닙니다. 대신 예수께서 사역할 수 있도록 자신의 집을 개방합니다. 

 예수님은 시몬의 집에서 열병을 앓고 있는 그의 장모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는 그 아픈 여인의 손을 잡아 일으켰고, 그때 열병에서 나은 장모는 예수의 일행을 섬깁니다. 새번역 성서에서 시중들다고 번역한 디아코노스(διακονος) 곧 섬김은 예수의 핵심 사역입니다. 마가복음서는 섬김이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며, 그의 제자들이 모두 따라야 하는 모범임을 강조합니다. 놀랍게 마가복음서에서 이 섬김의 실천을 감당하는 이들은 전부 여성입니다. 여성 교인들이 주체로 서지 못하게 하는 한국교회가 읽고 성찰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시몬 베드로의 집에서 많은 병자를 고치십니다. 안식일이 끝나는 저녁에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몰려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루 저녁을 보낸 예수는 새벽에 홀로 외딴 곳으로 가서 기도하는데, 시몬의 일행이 예수를 찾아 나서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모두 선생님을 찾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는 다소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갑시다. 거기에서도 말씀을 선포해야겠습니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습니다.” 그리고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두루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고 귀신들을 쫓아냅니다. 

 시몬의 일행이 예수를 부지런히 찾아 다닌 대목을 성서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은 매우 신선한 관점으로 해석합니다. 시몬은 자기 집을 개방하긴 했지만 치유를 위한 중개소로 만들려고 했다는 겁니다. 소문이 퍼져 나갈수록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몰려들 것을 기대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오늘 예수는 한 곳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다른 마을로 또 다른 마을로 계속 떠나는 삶을 삽니다. 

 그리고 그 삶의 현장에는 소외당하고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정결법 때문에 부정당한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예수는 이들을 찾아갔고, 거기에서 이들을 ‘직접’ 만지면서 고칩니다. 이들이 삶의 터전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있도록 회복시킵니다. 베드로는 자기 집을 중심으로 예수와 병자 사이에서 브로커 노릇을 하려고 했지만, 예수는 계속 떠나는 삶을 통해 자신의 공동체에서 어떤 위계 체계가 생기지 않도록, 핵심 그룹과 주변 그룹이 생기지 않도록, 한 곳에 머물러 정체하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새길은 교인과 예수 사이에 브로커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려고 노력하는 공동체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 위에서 하신 말씀, 가난한 자, 슬피 우는 자, 굶주린 자, 배척받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쓰고 있는 자에게 “하나님 나라는 그대들의 것”이라고 하신 그 말씀을 기억합니다. 


 지금 여기, 이 추위에 사흘동안 길바닥에서 전전하며 내일이 오는 것이 두려워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철거민 박준경씨들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안전사고로 숨진 24살 비정규직 청년 김용균씨들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 음란하다 누명쓰고 전환치료를 강제당하고 한국교회가 퍼트리는 가짜뉴스에 애통한 성소수자들이 있습니다,
  

 머리 둘 곳을 찾아 이 땅에 온 난민들이 있습니다. 지금 여기서 가난하고, 슬피 울고, 굶주리고, 배척받고, 욕을 먹고, 누명 쓴 몫이 없는 사람들, 권리 없는 사람들의 고통의 곁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예수 따르미 새길이 추구하는 사회적 영성이 아니던가요

 

[맺음 말] 


 지난 몇 달간 보고 경험하는 동안, 새길교회가 계속 새 길을 내려면 끊임없이 도전하고 모험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 모험의 주체는 역시 새길공동체에 속한 모두가 되어야 하구요.  

 지난 30년간 새길은 교단도 목회자도 안정된 처소도 없이 위태로웠기에 치열하게, 흔들리면서도 담담하게, 유약하면서도 단단하게 새 길을 만들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초대교회의 바울선생이 그랬듯이, 새길의 신앙선배들이 그러했듯이, 지금의 새길교우님들은 부단히 흔들리면서 방향을 찾아가는 나침판처럼 한국교회와 사회의 새 길을 만들어 가시리라 기대합니다.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설교자
1082 2019 [2019. 2. 24] 우리는 '스스로 섰'(獨立)는가? 2019.03.02 이정배
1081 2019 [2019. 2. 17] 친구란 무엇인가? 2019.03.02 권진관
1080 2019 [2019. 2. 3]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 세계종교화합주간을 맞으면서 2019.02.13 길희성
1079 2019 [2019. 1. 27] 불의한 청지기 비유 2019.02.13 김철호
1078 2019 [2019. 1. 20] 관념의 감옥 file 2019.02.13 추응식
1077 2019 [2019. 1. 13] ‘나홀로’ 시대에 외롭지 않게 사는 법 2019.02.13 이명식
1076 2019 [2019. 1. 6] 중요한 것은 작은 것입니다 2019.02.13 정경일
1075 2018 [2018. 12. 30] 가는 해와 오는 해: 수고로움에 감사드리며 2019.02.13 차옥숭
1074 2018 [2018. 12. 23] 초대 2019.02.13 김영희
» 2018 [2018. 12. 16] 한 평신도교회의 모험: 밖에서 본 새길 2019.02.13 이숙진
1072 2018 [2018. 12. 09] 광야 시험의 현대적 의미: 실종된 예수의 하나님 file 2019.01.31 한완상
1071 2018 [2018. 11. 25] 품삯 한 데나리온 file 2018.11.29 김이수
1070 2018 [2018. 11. 18] 사랑, 그리고 마무리-때의 지혜 file 2018.11.28 최만자
1069 2018 [2018. 11. 11] 두 발로 서서 하늘을 봅니다 file 2018.11.13 최순화
1068 2018 [2018. 11. 4] 헤매다 받은 엉뚱하고 놀라운 은혜 file 2018.11.07 최현섭
1067 2018 [2018. 10. 28] 모두가 인도자인 공동체 file 2018.10.31 정경일
1066 2018 [2018. 10. 21] 성문 밖으로 나아간 그리스도인들: 세속성자와 교회 file 2018.10.23 양희송
1065 2018 [2018. 10. 7] 우리들의 감사 file 2018.10.19 안인숙, 주선경, 조혜자
1064 2018 [2018. 9. 30] 들어라, 이스라엘아: 함께 찾는 유대인 예수의 믿음 file 2018.10.19 강철웅
1063 2018 [2018. 9. 23] 지금 여기서 사는 영생 file 2018.10.19 김기협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8 9 10 ... 56 Next
/ 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