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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권진관

 

 

“친구란 무엇인가?” 

(누가복음 16:5-9 요한복음 15:13-15)

 

2019년 2월 17일 

주일예배

권진관 형제(한국민중신학회)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내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는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어서 앉아서,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묻기를 '당신의 빚은 얼마요?' 하였다. 그 사람이 '밀 백 섬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가 그에게 말하기를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받아서, 여든 섬이라고 적으시오' 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 누가복음 16:5-9 -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 요한복음 15:13-15 -

 

 

키케로라는 현인이 있었습니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는 기원전 106년에 태어나 기원전 43년, 그가 63세 되던 해에 죽은 로마의 최고의 웅변가요, 문인이요 철학자였습니다. 키케로는 그가 죽기 2년 전에 “우정에 대하여”라는 책을 썼습니다. 키케로는 우정을 지키는 방법과 우정을 가지면 좋은 점을 논했습니다. 우정이 오래 지속되려면 선의가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또 친구에게는 남들에게 못하는 것을 이야기할 수 있고, 기쁜 일과 괴로운 일들을 공유하기 때문에 인생이 더 쉬워진다고 했고, 또 우정은 희망을 북돋아준다고 했습니다. 함께 같은 길을 가다보면 서로가 힘이 되어주고 미래가 희망적이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정은 지혜로운 사람들의 특권이며, 오직 지혜있는 사람들이 좋은 우정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키케로는 계산적인 우정을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친구와의 우정에서 대변과 차변을 정확히 일치시키는 것은 우정을 옹졸한 계산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키케로는 바람직한 우정은 신념과 취향이 유사하며 의견의 일치가 있는 관계라고 주장했습니다. 맞는 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인정하면서도 거기에 약간의 수정도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습니다. 즉, 우정은 신념이나 취향들의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자식과 부모 사이에도 서로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도 잘 지낼 수 있는 것은 우리 인간은 그런 차이를 오히려 기회로 이용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차이가 오히려 재미를 불러일으킬 때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들, 취향들이 우리들에게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신선하게 다가올 때도 있으며, 다름은 오히려 우정의 관계를 더 흥미롭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신념이나 취향이 유사하지 않는 경우에, 우리가 적어도 그 친구의 다름을 존중해 주면, 우정이 가능해 질뿐만 아니라 깊어지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존중해 주고 좋아 해주는 그런 따뜻한 인간성이 친구를 만들어 줍니다. 


친구는 특히 노년의 삶을 위해 필수적인 요건이 됩니다. 친구가 없는 노년이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친구가 없는 만큼 인생은 불행해 질 것입니다. 제가 작년10월부터 올 초까지 약 4개월간 대만의 長榮(장영)대학교에 머물면서 강의하고 집필할 기회를 가졌습니다. 기숙사의 게스트 룸에 지내면서 운동도 하고 도서관도 들르고 대만의 맛있는 음식도 즐겼습니다. 그러나 좀 심심하고 무료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자연히 삶에 대해서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정년은퇴한지 벌써 2년이 되는데,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의미 있고 행복한 삶이 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그 필요한 첫째가 일입니다. 저는 학교에서 정년 은퇴하고 나서부터는 이제 일로부터 해방되어 매달 나오는 연금으로 삶을 즐기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적도 있습니다. 근데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은 계속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꿔먹었습니다. 그게 돈이 되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일을 지속하고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 행복을 더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삶의 필수적인 조건은 친구입니다. 오래 함께 살다 보면, 배우자도 친구가 됩니다. 사실, 배우자는 가장 좋은 친구입니다. The best friend지요. 배우자는 내 편을 들어주고 나를 지켜주는 최후의 친구입니다. 그런데 친구가 배우자 한명만 있다면 그것도 옹색합니다. 삶이 풍부해 질 수 없겠지요. 친구를 가져야 하고, 우정을 쌓아야 합니다. 우정은 평등한 관계에서 나오며, 나이가 엇비슷한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납니다. 저는 친구 중에 한 10살 아래 친구들도 있습니다. 내가 대 선배이지만 그 후배들을 그냥 친구로 지냅니다. 물론 제가 선배이므로 돈도 좀 들지만, 그래도 젊은 친구를 가지고 있는 것도 참 좋습니다. 그리고 젊은 친구들이 있으면 내가 마음이 젊어집니다. 신학하는 커뮤니티나 목사들 사이에 이런 젊은 친구들이 있습니다. 저는 민중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신학자 서클에 들어가 있습니다. 저는 이 모임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서 자주 나갑니다. 이제는 제가 연배로 아주 윗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후배들과도 평등한 친구로 지내는 것에 재미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의 띠 동갑 되는 선배 한신대 김경재 교수님께 제가 부족하지만 친구로 잘 지내는 게 어떻냐고 슬며시 제안했더니, 김교수님은 슬며시 화제를 바꾸셨습니다. 제가 좀 당돌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10년, 15년 아래 후배들을 친구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와 형제처럼 가까이 지내고 있는 독일 친구는 저보다 10살 아래입니다. 형제 같은 인도 친구도 10살 정도 아래입니다. 그래도 그런 친구들이 있어서 삶이 더 풍부해 집니다. 대만에 있는 친구도 앞으로 계속 동지로, 그리고 친구로 남아 있을 겁니다. 이런 친구들은 제가 신학하면서 얻은 좋은 결실입니다. 그 외에도 친구들이 있습니다. 그 친구들이 아마도 저의 삶의 동반자가 될 것이고 서로 배우는 동지가 될 것입니다.  

친구 얘기를 하면 할 말이 많습니다. 제가 대학에 들어가서 곧바로 학생운동에 뛰어 들어 투옥됐고 그것도 두 번 투옥되면서 격리되었고, 그리고 나서 또 오랜 기간 동안 유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친구들과 오래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원래 사회복지과에 다니다가 제적되고, 제가 좋아하는 신학공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것도 비공식 신학교에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신학 쪽의 친구들, 선배들, 선생님들은 많이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옛 고교, 대학 동창들과는 거리가 멀어졌습니다. 그게 늘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루는 고교 동창회를 나갔는데 처음 보는 친구가 나에게 자전거를 타느냐고 하고 자전거 동호회를 만들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자전거로 만나기 시작한 동창들이 이제 제법 친해지고 동창 친구들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자전거를 타기 위해서 국내나 외국에도 돌아다니면서 며칠씩 숙식을 같이 하면서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시간을 나누는 것은 참으로 은혜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다양한 학과를 뛰어 넘는 학번 동기들과도 자주 만나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중요한 세 번째 요소는 뭐니 뭐니 해도 머니입니다. 돈이 있어야 친구와 잘 지낼 수 있습니다. 일단 돈이 없으면 친구를 만나기 쉽지 않습니다. 만나자고 해도 자꾸 피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께서는 불의의 맘몬으로 친구를 사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나이 들어가면서 정말로 필요한 것은 친구요, 일이며, 그리고 돈입니다. 물질적인 뒷받침 없이 뜻있는 일을 해 낼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맹자의 말씀입니다. 항산 항심. 항상 생산하는 것이 있어야 같은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 돈이 뒷받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불의의 맘몬을 언급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으로라도 친구를 사귀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인생의 행복의 세 가지 조건에 포함은 안 시켰지만,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너무나 필수적인 거라 그리고 우리가 너무 잘 아는 거라 포함시키지 않은 겁니다. 그것은 건강인데요, 건강은 너무나 필수적인 조건이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그걸 얘기 안 해도 되는 것입니다. 말해 봐야 잔소리밖에 될 수 없습니다. 숨 쉬는 것 감사할 일이고 잠잘 수 있는 것, 걸을 수 있는 것, 먹을 수 있는 것, 배변 볼 수 있는 것 모두 감사할 일입니다. 건강을 잃으면 인생의 좋은 모든 것을 잃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운동은 필수요, 음식 조심하는 것, 과음하는 것 모두 조심해야 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입니다. 고 신영복 교수님은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은 좀 더 늙어야 제 맛을 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서양의 대부분의 인문 학자들이 60대 이후부터 좋은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신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이나 인문학은 늙은이가 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신마저 늙어버린 늙은이가 아닌, 정신적, 영적으로 젊은, 늙은이가 하는 학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나이가 들수록 젊은 친구들을 만드는 것도 그런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 나이가 들어가면서 우리 시대에 그리고 한반도에 정말로 필요한 정치신학, 정치사상을 쓰고 싶어집니다. 그건 앞으로의 과제인데, 문제는 그 정치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그 개념이 친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친구가 무엇이기에 정치라는 것에서도 그렇게 중요할 수 있는 것인가 입니다. 이런 생각은 임마누엘 칸트의 “판단력 비판”이라는 책을 연구한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사상의 영향에서도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친구처럼 불명확한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친구관계란 무슨 약속 예식을 하고 시작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그냥 언젠가부터 시작하는 그런 관계입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관계이기 때문에 언제 시작했는지도 모르는 관계입니다. 우리는 가끔 그 친구와 언제부터 친구가 됐지 하고 되돌아보게 됩니다.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우리는 이미 친구가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서로 만나고 싶어 하고 대화하고 싶은 관계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친구는 형제자매, 친척, 그리고 남편과 아내와는 다른 인생의 또 다른 반려자입니다. 친구 관계는 부담이 없습니다. 만나면 즐겁고, 그리고 헤어져서 각자 자기 일을 합니다. 상당한 기간 안부를 묻지 않습니다. 그냥 잘 있겠거니 합니다. 부부관계나, 애인이라면 그럴 수 없겠지요. 그러나 친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연락이 있으면 더 좋은 것이 친구입니다. 연락이 없어도 되지만, 가끔 연락 오는, 그리고 내가 연락하는 그것은 우리가 친구임을 확인시켜 줍니다. 좋은 친구로부터 은은한 감동을 받게 될 때 우정이 더 깊어집니다. 아, 이 친구가 이런 면에서 훌륭한 데가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나도 그 친구 덕분에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친구를 가지려면 내가 그만큼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친구는 그만큼 좋은 것입니다. 심지어 불의의 맘몬으로 친구를 사귀어야 할 정도로 친구는 중요합니다. 


오늘날 북한을 적으로 보느냐 친구로 보느냐로 갈려져 있습니다. 북한을 적으로 보려고 하는 세력이 있습니다. 북한의 김정은과 그 체제를 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뉴스를 보니까 이번에 5.18 망언을 한 사람이 계속 원색적인 냉전, 반공적인 레토릭으로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의 정치가 아닙니다. 예수의 정치는 친구의 정치입니다. 


저는 친구관계를 전제로 하는 것이 정치의 근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예수의 정치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을 적으로 간주할 때 그 때는 전투와 전투를 이기기 위한 음모밖에 없습니다. 거짓도 불사합니다. 적은 제거되어야 하고 없어져야 할 존재입니다. 거기에는 전쟁이나 전투를 위한 전략과 음모와 술수만 있을 뿐, 함께 논의하고 대화하고 합일해 나가는 역동적 친구 관계는 전무합니다. 친구의 정치, 우정의 정치는 적을 만들지 않습니다. 우정의 정치는 예의 정치입니다. 최소한 예의가 있어야 친구의 관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거짓말하거나 막말하는 것은 예의가 아닙니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예라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겠습니다. 사람들이 예를 지켜야 대화할 수 있는 관계가 성립되기 때문이고, 대화를 할 수 있어야 집단적 지혜, 지성, 유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학의 정치는 예의 정치요, 친구의 정치입니다. 

요즘 미국의 트럼프는 전형적인 적대 정치를 펼치고 있습니다. 친구들이 갑자기 적으로 변했습니다. 무방비한 상태에 있는데 급습 당하니 혼란이 큽니다. 제국인 미국은 힘으로 인류를 분열시키고 적대적의 관계로 만들고 있습니다. 세계 경제를 파멸로 몰고 있습니다. 멕시코와의 국경에 아주 높은 담을 쌓겠다고 국가비상사태를 선언했습니다. 이민 장벽을 높이고 있고, 많은 이민자들은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외적으로 한반도의 평화에는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인 일입니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해빙 분위기는 전적으로 남북한의 당국과 민중들의 열망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트럼프는 우리의 열망에 얹혀 있는 것이지 트럼프가 정말 원해서 해빙과 평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미국 백인들의 인종주의에 봉사하기 위해 다른 종족과 민족에게 적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북한의 통일을 이루어야 합니다. 어떤 통일입니까? 그것은 지금보다 훨씬 훌륭하고 부유하고 강한 국가를 이루는 통일일 것입니다. 극일(克日)하는 통일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일제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일제 40년 지배의 결과가 전쟁과 분단이라고 한다면, 이제 평화를 이루고 통일을 이루는 것이 일제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 됩니다. 카츠라-태프트의 밀약으로 한반도가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갔는데, 그 강대국들의 음모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통일입니다. 통일은 민족독립운동인 3.1운동의 최종 목표입니다. 어제 뉴스에 보니까 일본 수상 아베가 북미 회담을 이유로 트럼프를 노벨상 후보자로 추천했다고 합니다. 고생은 우리가 다했는데, 미국 트럼프에게 공을 돌리고 있습니다. 마치 카츠라가 태프트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한 것과 비슷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합니다. 극일을 위해서라도 (사실, 극일은 일본과의 대등한 친구관계의 회복을 의미합니다), 북한과의 관계를 친구의 관계로 재정립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가 가르쳐준 한반도에서의 정치입니다.    


남한에 필요한 정치도 친구의 정치라고 봅니다. 아니 그래야 합니다. 우리는 적대적인 관계를 조성하는 적대의 정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적으로 간주하게 되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제거하는 것이 목적이 됩니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적을 제거해야 하고, 불의한 폭력을 써서라도 적을 제거해야 합니다. 예수의 정치는 친구의 정치, 친구들 사이의 정치입니다. 적대의 정치, 적을 무너뜨리는 정치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독재 시대는 지나갔고, 전쟁의 시대도 지나갔습니다. 아직도 전쟁의 상태로 생각하고 북한을 적으로 간주하고 없애야 할 존재로 보고, 북한과 대화를 하는 정부를 타도하자고 한다면 그것은 아직도 전쟁의 시대에 머물고 있는 정신상태입니다. 실제로 태극기 집회에서는 계속 군가를 틉니다. 군가를 틀거나 부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것은 적대의 전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북한은 적이 됩니다. 심지어 북한과 대화하고 화해하고 있는 문재인 정부도 그들에게 적이 됩니다.     

독재가 있고, 부패가 있으면 그것을 적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런 시대에 살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물론 독재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도 정당한 방법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적의 관계가 아니라, 친구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몸짓이어야 했고, 사실 그러했던 것입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북한군의 선동과 소행이라고 주장한 사람들은 전형적인 적대 정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적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거짓을 일삼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정치입니다. 

예수는 모든 사람들을 친구로 만들라고 했습니다. 원수지간에 있는 사람들도 친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수사랑의 계명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고 양보하고 타협하고 함께 즐기는 친구 관계입니다. 우리 사회의 공동체는 바로 이러한 친구들의 공동체여야 하고 그러한 공동체의 원형, 사크라멘트(sacrament), 성사적인 사건이 바로 교회입니다. 

     

오늘 제가 택한 본문 중 첫째 것 누가복음 16장 5-9절의 말씀에서 청지기와 주인의 이야기를 통해서 돈이란 무엇인가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습니다. 2주 전에 김철호 목사께서 이 본문으로 설교를 해주었습니다. 여기에는 돈의 본질에 대한 예수의 이해가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돈에 대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은 돈을 중립적으로 보지 않고, 또 그 자체로 선한 것으로도 보지 않고 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불의의 맘몬”이라는 언어에서 부정성이 드러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악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돈을 죄는 아니지만, 죄로 나갈 수 있는 전 단계 정도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돈과 불안은 서로 유사성이 있습니다. 불안은 그 자체로 죄가 되지 않지만, 죄를 불러오기 쉬운 조건이 됩니다.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엇인가에 의지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것에 노예가 됩니다. 그런데 불안이 오히려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인이 되기도 합니다. 불안하기 때문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한다면, 우리가 그 불안 때문에 더 좋아지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돈을 좋은 곳에 쓰면 돈은 좋아지는 것이고, 돈을 욕심과 사치를 위해 다른 사람들을 착취한다면 악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돈은 그래서 목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중립적이지도 않고, 저울의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즉 부정적인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는 존재이므로 우리가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이 됩니다. 돈이 좋은 것이 되려면, 그 돈이 친구를 만들기 위해 쓰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친구관계는 목적이고 돈은 그것을 위한 수단이 됩니다. 

그러므로 세금을 걷어 모은 나라의 돈도 친구관계의 공동체를 만드는 데에 쓰이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들을 북돋아서 친구관계로 끌어올리는 데에 돈이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돈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맘몬이 되고 맙니다. 따라서 돈의 향방은 적어도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친구를 만들기 위한 돈, 즉 사랑을 실현하는 수단으로서의 돈과, 돈이 목적이 되어 하나님과 대적하고, 하나님의 자리를 빼앗는, 목적으로서의 돈, 즉 신이 되어버린 맘몬입니다. 돈은 친구를 만들기 위해서 쓰이는 수단적인 것입니다. 


이제 다시 친구란 무엇인가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저는 친구를 개인적인 차원으로도 말했고, 정치적인 차원으로도 말했습니다. 이처럼 친구관계란 다양한 층위와 차원이 있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친밀한 친구관계와 넓은 사회 속에서의 광범위한 친구관계가 있습니다. 정치적 영역에서는 서로 소통과 토론을 하는 넓고 엷은 관계를 가리키는 친구관계가 있습니다. 베스트 프렌드가 있는가 하면, 아는 친구가 있고, 동료적 친구도 있고, 학문적 동지도 있고, 감옥 친구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 어떤 친구가 가장 아이디얼한 것인가, 무엇이 진정한 친구인가를 질문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요한복음의 말씀에서 친구가 무엇인지를 말해줍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한 15:13)입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목숨을 버린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람”이라는 단어 대신에 “친구”라는 말을 썼습니다. 모든 다른 사람들이 친구여야 한다는 내용이 함축되어 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죽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죄인들, 심지어 당신을 상하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모든 사람들, 심지어 원수까지도 예수에게는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앞에서는 우리 모두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친구를 위해서 죽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서 돌아가셨고, 우리를 친구로 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친구의 가장 전형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그런 우정을 다 실천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우정에 기대어서 친구를 만들고,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입니다. 그 분에 기대어 우정을 가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가장 온전한 우정을 그 분이 보여주셨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에 기대어 그 온전한 우정을 지향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친구관계는 예수의 친구관계의 상징일 뿐이요, 그림자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친구가 돈을 꿔달라고 할까봐 친구를 사귀지 못합니다. 그래서 외톨이가 됩니다. 중세의 수전노가 그 대표적이 유형이지요. 요즘 그런 것이 많이 사라졌지만, 친구의 빚을 보증 섰다가 폐가망신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안 만나고 외톨이 신세가 된 부자들도 많습니다. 친구를 사귀되 끼리끼리 사귑니다. 돈 있고 지위 있는 친구들끼리 한데 어울립니다. 그게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친구관계란 여러 면에서 한계가 있는 관계입니다. 우리의 우정은 예수의 우정에 비해서 훨씬 못 미칩니다. 질적으로 다릅니다. 우리의 우정은 예수의 친구관계를 조금이라도 지향하려고 하는 그런 관계일 뿐입니다. 우리의 친구관계는 예수의 친구관계의 상징일 뿐이지 그것을 구현할 수 없는 부족한 것입니다. 그의 우정에 비해서 우리의 우정은 그의 우정의 “그림자” 정도일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우리는 그것을 의식하면서 친구들을 만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특히 신학자들은 친구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철학자들 중에 친구들을 많이 만난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나의 school을 형성하려면 그럴 필요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분야의 사람들도 많이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많은 것을 배울 수도 있고, 삶이 무료해지지 않고 행복할 수 있게 됩니다. 유명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가 있습니다. 칸트는 평생 결혼도 안 했습니다. 그가 살았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평생을 지냈고 만 80세에 죽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외국 한 번 안 나가 본 사람이 세계의 정신을 움직이는 철학을 세울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대학이 있고, 칸트의 천재성이 있었으니 가능했겠지만, 그래도 칸트는 친구를 만나는 것을 즐겨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칸트는 늦깎이 학자였습니다. 사강사생활을 하다가 도서관 사서로도 일하고, 46세가 되어서야 정교수로 일하게 됩니다. 그는 아침에 글을 쓰거나 강의를 했고, 점심부터는 친구들을 만나 식사했고 끝나면 산책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에도 친구들 집을 방문했습니다. 이런 대화와 만남 속에서 칸트는 생각의 단초들을 얻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학자는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진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의 빛을 찾는 사람이 신학자요, 또 우리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 드리겠습니다.  

 

[기도]

 

우리의 친구 되시고, 우정의 본을 보이신 그리스도 예수를 찬미하고 사랑합니다. 저희들의 삶을 항상 굽어 살펴주시고, 저희들이 당신의 마음을 살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당신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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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6 2019 [2019. 04. 14] “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 file 2019.04.16 박요셉
1085 2019 [2019. 04. 07] "봄" file 2019.04.12 임동숙, 이상길, 최서희, 김문음
1084 2019 [2019. 03. 10] “백년의 기다림” 2019.03.22 김정수
1083 2019 [2019. 03. 03] “내가 새길을 걷는 것은” 2019.03.08 김영란 외 8명
1082 2019 [2019. 2. 24] 우리는 '스스로 섰'(獨立)는가? 2019.03.02 이정배
» 2019 [2019. 2. 17] 친구란 무엇인가? 2019.03.02 권진관
1080 2019 [2019. 2. 3]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만남: 세계종교화합주간을 맞으면서 2019.02.13 길희성
1079 2019 [2019. 1. 27] 불의한 청지기 비유 2019.02.13 김철호
1078 2019 [2019. 1. 20] 관념의 감옥 file 2019.02.13 추응식
1077 2019 [2019. 1. 13] ‘나홀로’ 시대에 외롭지 않게 사는 법 2019.02.13 이명식
1076 2019 [2019. 1. 6] 중요한 것은 작은 것입니다 2019.02.13 정경일
1075 2018 [2018. 12. 30] 가는 해와 오는 해: 수고로움에 감사드리며 2019.02.13 차옥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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