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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송진순



거룩한 수고자들

(요한복음 17:17-18)



2019428

주일예배

송진순 목사(이화여대)



[진리로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 요한복음 17:17-18 -



오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이야기, “시지프의 신화로 말씀을 이어가겠습니다. 시지프는 신들의 노여움을 사서 끊임없이 산꼭대기로 바위덩어리를 굴려 올리는 형벌을 받습니다. 호머에 따르면 시지프는 매우 현명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다른 설화에 의하면 신들과 내기를 하고 그들을 기만할 만큼 호방한 사내였다고도 합니다. 어느 날 제우스가 강의 신인 아조프의 딸을 납치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시지프는 강의 신에게로 가서 코린트 성에 물을 대달라는 조건으로 딸의 납치 사건을 알려줍니다. 납치에 실패한 제우스는 분노하여 죽음의 신인 타나토스를 보냅니다. 그런데 오히려 타나토스는 시지프에게 제압당하고 지하실에 갇히게 됩니다. 더 이상 세상에 죽음이 없게 되자 지옥의 신인 하데스는 자신의 왕국의 황량함과 고요함에 기가 막혔습니다. 전쟁터에 전사자가 없자 전쟁의 신도 화가 났습니다. 이들은 제우스에게 항의했습니다. 그러자 제우스는 전쟁의 신을 급파하여 타나토스를 구해내고 시지프를 지옥에 떨어뜨렸습니다. 이후 아내의 일로 신들과 협상한 시지프는 다시금 지상에 올라와 이 세상의 태양과 바다 그리고 대지의 미소에 흠뻑 취해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신의 소환, 분노, 경고는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결국 신들을 기만한 죄로 그는 바위가 준비되어 있는 지옥으로 강제 소환되었습니다. 그가 신들을 멸시하고 죽음을 경시하며 삶을 사랑한 대가는 지옥의 무의미한 노동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알고 있는 시지프 신화입니다. 이 신화를 통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쳇바퀴를 돌 듯, 무미건조한 삶에서 의미없는 일을 반복하는 인간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알베르 까뮈는 시지프에게서 비극적 인간, 즉 절망과 비통에 빠진 인간의 수동적인 상황을 다른 눈으로 바라봅니다. 상상하며 읽어 보겠습니다 경련이 인 얼굴, 바위에 비벼대는 뺨, 진흙으로 덮인 바위덩이를 떠받치고 있는 어깨, 바위를 고정시키려고 힘겹게 버틴 다리와 쭉 뻗은 두 팔, 흙투성이의 두툼한 양손.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 속에서 그의 고된 노력은 드디어 목적을 달성합니다. 바위가 산꼭대기에 올리어 집니다. 그러나 이때 바위가 하계로 굴러 떨어집니다. 이것을 바라보며 시지프는 다시금 바위를 올리고자 벌판으로 내려갑니다.

 

까뮈가 시지프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입니다. 시지프는 한결같은 걸음으로 끝도 알 수 없는 고뇌를 향해 내려갑니다. 꼭대기에서 떨어지는 바위를 보며 멈춰있는 그 시간, 그리고 바위를 들어 올리며 돌아오는 시간은 고통스러운 시간입니다. 고통스럽다는 것은 깨어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의식의 시간입니다. 물론 신들은 그런 시지프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까뮈는 자신의 비극을 알면서도 바위를 들어 올리는 시지프를 운명을 넘어선 자, 그래서 바위보다 강한 자 영웅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시지프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성공하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면, 과연 그는 고통스러웠을까요? 신들의 노동자인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지프는 자신이 왜 비참한지 그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시금 바위를 들어 올리며 자신의 고뇌를 인식합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서, 인간은 비극을 명찰할 수 있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자신의 비극을 인식하는 것, 다시 말해 주어진 상황에 대면하여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자신을 안다는 것. 그것은 한편으로 슬픔이고 비극입니다. 이것은 바위의 승리이며 이로 인한 비통함은 참으로 감당하기가 힘듭니다. 마치 예수조차 피하고 싶은 겟세마네의 밤과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시지프는 자신의 비극을 인식했기 때문에 비로소 바위를 자기 것으로, 자신의 운명으로 짊어지고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명찰과 의식이야말로 그의 성실하고 반복되는 걸음을 통해 신들의 조롱을 뛰어넘어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게 합니다. 밤은 끝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앞으로 나아갑니다. 바위는 또다시 굴러 떨어집니다. 까뮈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남겨둔다. ... 그가 보여준 고귀한 성실함, 산꼭대기를 향한 투쟁 그 자체가 인간의 마음을 만족시키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행복한 시지프를 상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까뮈만큼이나 경계에 선 자도 없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뤼시엥 까뮈는 알제리로 이주한 프랑스인으로 포도농장의 노동자였습니다. 어머니는 스페인의 한 작은 섬 출신으로 청각장애인이었습니다. 카뮈가 1살 때, 아버지가 1차 세계대전에 징집되어 사망하자 그는 어머니와 형 그리고 외할머니와 함께 지독한 가난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한 불의와 폭력 그리고 벗어날 수 없는 가난이라는 척박한 삶에서도 유독 머리가 좋았던 까뮈는 많은 책들을 섭렵하며 학교에서 인정받았습니다. 대학 입학을 코앞에 둔 그는 폐결핵으로 생사를 넘나들면서 다시금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프랑스 인이면서 동시에 식민지 알제리 출신, 소설가, 비평가,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유럽의 좌파 지식인들, 부르주아 엘리트들과 동고동락했지만, 태생부터 프롤레타리아였던 그는 소설 <이방인>과 같이 언제나 이도 저도 아닌 경계에 선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는 전쟁의 참혹한 비극과 절박한 역사 앞에서, 다시 말해 죽음을 마주하고 있는 인간이, 신이 부정되는 이 세계, 부조리한 세상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습니다.

 

때로 우리는 뒤로 물러날 수도 없고,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는 현실을 마주합니다. 세상 어느 곳에도 기댈 곳 없이 부유하거나, 삶의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 채 고통스러운 하루를 채우는 데 급급한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실제로 자살을 하는 많은 이들은 마지막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살만한 가치가 없어. 나에겐 삶의 의미가 없어.” 의미가 없다는 것, 가치가 없다는 것. 그래서 까뮈는 자살은 인생에 패배했다는 것, 인생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삶을 산다는 것은 삶이 부조리임을 알면서도전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기에 인간은 보잘 것 없는 임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면서, 바로 그 고귀한 성실함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인정하고, 매순간 저항하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서 소위 안락한 미래나 희망에 몸을 내맡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허황된 미래와 허구적 희망을 말끔하게 비워내고, 삶을 그 자체로 정직하게 대면해야합니다. 삶을 대면한다는 것은 나에게로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나로부터 한 발 물러나는 것입니다. 나에게서 거리를 두고 성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비록 그것이 척박하고 절망적인 삶일지라도, 내게 주어진 삶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나의 의지와 선택으로 기꺼이 살아내려는 용기, 그것이 저항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어떠한 삶을 살았습니까? 우리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보다는 그의 부활과 영광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데 익숙합니다. 하여 그리스도의 희망과 기쁨을 손에 쥔 채 내 삶의 안정과 평안을 갈망합니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요청하는 최적화된 선망의 삶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안락하고 평안한 부활을 노래하기에는 우리는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당면한 고통이 너무 큽니다. 지난 한 세기 동안 한 민족이, 같은 지역 공동체가, 매일 얼굴을 마주하는 이웃이 서로 다른 이념으로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수없이 치러야했습니다. 심지어 전 국민이 생중계로 300명 이상의 살아있는 이들이 수장되는 것을 무기력하고 고통스럽게 지켜봐야 했습니다. 무고한 죽음들을 목도하면서 우리 사회는 진심어린 애도나 의미 부여에는 서툴렀습니다. 우리 앞에 펼쳐진 사건들을 그 만큼의 시간의 거리에도 불구하고, 물러나 성찰하며 고통스러운 의식과 명찰을 통해 우리가 짊어질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함께 고뇌하고 끝까지 생각하며 다같이 저항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한 채, 어설프고 재빠르게 일상의 무의미로 돌아왔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17장은 예수의 마지막 기도로서 대제사장의 기도라고 불립니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예수가 수난을 받기 직전 예수와 제자들의 마지막 이야기를 어느 복음서보다 상세하고 절절하게 묘사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만 나타나는 13장의 마지막 식사에서 16장에 이르는 예수와 제자들의 마지막 이야기를 예수의 고별설교혹은 고별담화라고 명명합니다. 이어지는 17장은 절박한 예수의 심정을 기도로 담아냅니다. 사실 요한복음만큼이나 예수를 태초의 존재이자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 복음서는 없습니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존재 자체로 하나님입니다. 애초에 이 땅에 내려 왔을 때부터 죽음을 통해 다시 돌아갈 것을 알았던 예수는 17장에서 애끓는 심정으로 세상에 남아있는 제자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나는 이제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11), “이제 나는 갑니다.”(13)라고 그는 반복해서 말하면서 세상에 있는 믿는 자들을 지켜달라고 하나님에게 간곡하게 기도합니다. 마치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잠이 든 자식들을 남겨둔 채 이제 마지막 길을 떠나가야 하는 어머니와 같이 애절합니다.

 

그러나 본문을 다시 읽는다면, 이와는 다른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따르던 제자들은 세상의 박해와 처형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자신들의 고난과 죽음을 예수의 고난과 죽음과도 동일하다고 고백합니다. 알 수 없는 세상의 미움과 증오 앞에서 의미 없이 스러질 존재들,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이들의 핍절한 부르짖음을 그들은 죽음 직전의 예수의 목소리에 담았습니다. 따라서 예수의 간구는 실은 세상에서 예수를 껴안고 신앙을 지키며 살아 남아야했던 믿는 자들의 간구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인한 거룩함, 다시 말해 하나님과 예수와 하나가 되는 신비한 거룩함의 경험을 통해 세상 한가운데서 세상과 구별되어 다시금 세상을 껴안을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그들을 박해하는 세상, 그들에게는 절망일 수밖에 없는 삶을 뜨겁게 껴안을 수 있는 용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합니다. 세상에 있으나 세상과 다른 존재로 살면서 예수처럼 태초부터 하나님의 사람이었다고 고백한 이들은 세상 한가운데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스럽지만 비극적인 운명을 받아들이는 거룩한 발걸음을 통해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믿는 자들이 짊어진 고난의 수고로움은 하나님이 이 땅에 아들을 보내신 것에 기인합니다. 예수가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제자들을 지키며 세상으로 보낸 것처럼, 이제 믿는 자들 역시 목숨 걸고 자기 공동체의 사람들을 지키며 세상으로의 거룩한 삶의 여정에 참여했습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 됨의 진정한 의미가 발견됩니다.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따름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한 거리감과 그로 인한 매일의 삶에 대한 저항의 몸짓, 자신과 세계에 대한 고통스러우리만큼 차가운 인식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마련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으로 세상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의미는 절망의 상황에 대한 뼈저린 명찰과 그곳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말없는 사랑의 수고와 작은 행위에서 비롯됩니다. 하여 우리의 보잘것없는 손짓과 몸짓조차도 그 분 안에서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거룩함은 그렇게 나와 세상에서 거리를 두고 저항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는 과정입니다. 고통스러운 의식의 수고로움이 진정 절망의 세계를 들어 올리고, 마침내 도래할 것 같지 않는 불가능의 세계를 끌어당깁니다. 매일의 고귀한 성실함을 삶의 저항으로 들어 올린 시지프에게서 삶의 의미를 발견했다면, 또한 고통스러워하는 하나님의 얼굴을 매만지며 우리는 기꺼이 자기를 내어주는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을 경험합니다.

 

4월이 지나기 전에 기억해야할 또 다른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세상으로부터 십자가로 내모신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무력하고 연약하다. 바로 그러하기에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계시고 우리를 도우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전능이 아니라 바로 고난을 통해 우리를 도우십니다. 거룩함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은 삶에서 하나님의 고난을 함께 짊어집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흔쾌히 겟세마네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깨어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비극과 고통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를 발견합니다. 그것이 거룩한 수고자들의 일입니다새길로고.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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