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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이명식



“‘나홀로’ 시대에 외롭지 않게 사는 법”

(고린도 전서 12장 12절-21절, 사무엘상 30장 24절, 열왕기상 3장 9절)

 

2019년 1월 13일 

주일예배

이명식 형제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대 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몸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온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온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겠습니까? 그런데 실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몸에다가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전체가 하나의 지체로 되어 있다고 하면,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실은 지체는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눈이 손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가 없고, 머리가 발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게 쓸 데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 고린도 전서 12장 12절-21절 -


[또 동지들이 제안한 이 말을 들을 사람은 아무도 없소. 전쟁에 나갔던 사람의 몫이나, 남아서 물건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똑같아야 하오. 모두 똑같은 몫으로 나누어야 하오.]

- 사무엘상 30장 24절 -


[그러므로 주님의 종에게 지혜로운 마음을 주셔서, 주님의 백성을 재판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많은 주님의 백성을 누가 재판할 수 있겠습니까?]

- 열왕기상 3장 9절 -



한 언론사가 선정한 <2019 대한민국 트렌드>를 보니 제일 첫 번째로 ‘나홀로 문화’가 나오고 있습니다. 수년 전부터 서서히 진행되던 혼밥, 혼술, 혼영 같은 ‘나홀로 활동 혹은 문화’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까지 ‘나홀로 활동’은, 예를 들면 1인 가구의 증가 및 가족관계의 변화 등 ‘어쩔 수 없는’ 나홀로 활동이 많았다면 지금의 나홀로 활동은 ‘스스로 자발적으로 원해서’ 이루어지는 활동이 지배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특히 이러한 ‘나홀로 활동’은 비단 혼밥, 혼술, 혼영에만 그치지 않고 소비활동과 인간관계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걸쳐 확대되고 있습니다. 고립된 개인, 사회적 해체가 전 연령대에서 일어나면서 사회 전체가 ‘우리’(We)에서 ‘개인’(Me)으로 옮겨간 것을 체감하게 되는 것이지요. 개인들 각자가 자기 삶을 그려나간다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이 속도감있게 현실화되고 있습니다.


통계청에 따르면 1인 가구는 2000년 222만 가구에서 2017년 562만 가구로 152.6% 증가했고 전체 가구의 28.6%를 차지하며 대한민국의 가장 주된 가구 유형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향후에는 더욱 증가하여 2035년에는 34,5%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됩니다. 세 집 건너 한 집은 1인 가구가 되는 셈이지요. 이들은 단순히 혼자 사는 것을 넘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데에도 익숙합니다. 2030세대 두 명 중 한 명은 스스로를 ‘나홀로 족’이라고 생각한다는 통계도 나와 있구요. 1인가구가 소비트렌드 주도 계층으로 떠오르자, 이들을 잡기 위해서 기업들은 다양한 1인 상품들을 개발하여 시장에 내놓고 있습니다. 편의점에서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것은 이젠 자연스러운 풍경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밥은 누군가와 함께 먹어야 하는 것이었으나 이젠 아닙니다. 바쁜 스케줄뿐 아니라 경제적 이유나 관계 유지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많은 이가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쇼핑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듯 타인과 함께하는 활동보다 자신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원하는 스케쥴 하에서 움직일 수 있는 활동을 선호하고, 그래서 자신의 영역이 침범받는 것을 불편해 하는 많은 사람들도 틈나는 대로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주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뉴스거리에 관심을 표명하고 있습니다. 이제 많은 한국인들은 종이신문 보다는 포털사이트의 뉴스를 선호하고 즐겨 봅니다. 대중들이 포털사이트의 뉴스를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즉각적으로 알 수 있다는 점’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습니다. 결정적으로 포털사이트 뉴스의 ‘댓글 기능’으로 다른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의견을 나누며 자유로운 토론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의아한 생각이 듭니다.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나홀로 활동했던 사람들이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의견을 궁금해 하고 사이버 상이지만 다른 사람들과 접속하고자 하는 현상이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에서 어느 사회학자는 ‘혼밥·혼술 현상을 단순히 개인주의나 소통의 부재로 재단하기 보다는 혼밥·혼술을 매개로 개인적으로 더욱 활발히 소통하고 결속을 다지는 경향이 강화되는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라고 진단하고 있습니다. 타인의 시선이나 사회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나만의 기준으로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개념으로 ‘나홀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러한 사람들 내면 깊숙이에는 알 수 없는 외로움이 있어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함께 모여서 교제를 나누며 생활하는 것을 그리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한 올의 실로는 줄을 만들 수 없고, 한 그루의 나무로는 숲이 되지 않는다’라는 서양의 명언이 있습니다. 의미 있는 인생은 나 혼자서는 가꿀 수 없고 사회에서 다른 사람들과의 진정한 협력이 이루어질 때에만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이야기이겠지요. 


사회의 가장 원초적이고 최소한의 단위는 가족입니다. 또한 인생은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배움의 연속’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배움은 고립된 사실들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실을 연결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내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확장된 가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런 배움을 익힐 수 있는 장소로 교회 공동체만큼 좋은 곳도 드물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저마다 고유한 모습으로 창조하셨지만 부부, 가족, 교회, 사회란 공동체를 만드셨습니다. 이러한 공동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와 타인이 똑같은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흔히들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고 효과적인 이벤트는 ‘같이 밥을 먹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가족의 다른 말이 ‘끼니를 같이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식구(食口)이겠습니까? 밥상이 풍족하든 빈약하든 그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냥 같이 음식을 나누며 서로를 격려하고 힘을 얻으면 되기 때문이지요. 이러한 차원에서 교회 공동체의 존재와 역할은 그만큼 더 의미가 커지며 깊어지고 있습니다. 


작년에 우리는 <새로운 교회를 찾아>라는 말씀증거 시리즈를 기획한 바 있습니다. 그 중 하나로 12월에 행해진 “밖에서 본 새길”이라는 말씀증거가 생각납니다. 우리 공동체가 외부의 전문가에게 의뢰해서 새길의 참모습을 조망해달라는 요구를 한 것입니다. 그 연구자는 봄부터 시작해서 거의 9개월 여간 참여관찰 및 구성원 인터뷰 등을 통해서 연구를 진행했었습니다. 여러 가지 내용 중에 새길이 계속해서 유지 발전시켜나가야 할 과제 하나와 가장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과제 하나를 들어달라는 질문에, 그 연구자는 사견이고 표본의 수가 적었다는 것을 전제를 단 후에, 앞의 질문에는 우리 공동체가 꾸준하게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 실천’을 하는 것을 꼽았으며, 뒤의 질문에는 ‘끼리끼리의 문화’를 꼽았습니다. 저는 이 부분이 쓴소리이지만 상당히 깊게 내면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느 사회에서나 끼리끼리 분위기가 팽배해지면 관계의 독과점이 형성되어 공동체의 전반적인 관계구조가 왜곡되게 됩니다. 이는 마치 일부 대기업들이 시장에서 독과점을 형성할 때 공정거래가 힘들어지는 원리와 유사한 맥락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존의 구성원들 사이에 끼리끼리 문화가 고착화될 때 새롭게 들어오는 구성원들은 소외감을 느끼게 되어 뿌리내리기가 힘들어지고 공동체의 균열로 이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럴진대 이러한 문화가 정형을 이룰 때 우리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일부에서는 연구자의 분석에 문제를 삼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연구자의 개인적 시각일 뿐, 그 결과를 수용할지 말지는 전적으로 우리들의 몫인 것입니다. 모든 연구프로젝트가 다 그러하듯이 연구자는 자신의 분석과 견해를 종합한 연구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며 그 결과를 활용할지 여부는 클라이언트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끼리끼리의 문화가 가장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우리의 과제라는 이번의 연구결과를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동체는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체입니다. 특히 교회공동체는 ‘그리스도’라는 공통분모 외에는 공통점이 없을 수도 있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입니다. 따라서 여러 가지 성격과 기질들을 갖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결같이 동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질감을 갖기도 쉽습니다. 나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는 것도 그렇고요. 그래서 관심사가 같은 사람들끼리 모일 수도 있고,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와 같지 않은 사람들을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아니 어떤 때는 도리어 보호해 주어야 하고 지지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다양성이 커져서 공동체가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리 잘 났어도 부족한 면이 있기 마련입니다. 내가 없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갖고 있어서 그것으로 나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와 다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받들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로서로의 약점을 보완해 줄 때 비로소 교회가 하나가 되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실하게 세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공동체에서 서로의 다름은 문제가 안 됩니다. 왜냐하면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비로소 공감의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바람직한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나홀로 시대에 외롭지 않게 살아가는 법을 터득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러한 점을 깊게 인식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서신에서 공동체의 의미와 역할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솔직하게 표현했기 때문이지요. 고린도전서 12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그들이 모두 한 몸이듯이 그리스도도 그러하십니다. 우리는 유대사람이든지 그리스 사람이든지 종이든지 자유인이든지 모두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서 한 몸이 되었고, 또 모두 한 성령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몸은 하나의 지체로 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지체로 되어 있습니다. 발이 말하기를 나는 손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또 귀가 말하기를 나는 눈이 아니니까 몸에 속한 것이 아니다 한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온 몸이 다 눈이라면 어떻게 듣겠습니까? 또 온 몸이 다 귀라면 어떻게 냄새를 맡겠습니까? 그런데 실은 하나님께서는 원하시는 대로 우리 몸에다가 각각 다른 여러 지체를 두셨습니다. 지체가 하나의 지체로 되어있다고 하면 몸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데 실은 지체가 여럿이지만 몸은 하나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이 전도하고 개척한 교회 중 가장 큰 교회에 속하고 가장 많은 은혜를 받은 교회였지만 또 가장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교회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 다양한 파벌이 생겨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서신에서 교회 공동체의 본질을 우리 인체와 비유해서 쉽게 그러나 핵심적으로 설파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의 모델로 존재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 한 교회를 이루고 있습니다. 마치 지체는 많으나 한 몸을 이루고 있는 것과 유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분의 몸을 이루는 지체이기에 우리는 공동체에서 3가지 즉, 협동과 상대방에 대한 배려, 그리고 경청의 지혜를 통해서 한 몸으로 움직일 수 있습니다. 


먼저, 협동(協同)입니다. 흔히들 협동정신을 이야기할 때 기러기 떼의 비행을 언급합니다. 


기러기 떼의 비행법을 알면 많은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추운 겨울 달밤에 남쪽 나라를 향해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항상 "V"자형으로 줄을 지어서 납니다. 그런데 왜 하필 V자형으로 날아가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기러기들의 지혜가 숨겨져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맨 앞에서 날고 있는 새가 날개를 퍼덕이면 뒤에 있는 새에게는 양력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양력은 날개를 위로 올려주는 힘입니다. 기러기들은 이 양력을 이용해서 먼 거리를 함께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V"자형으로 줄을 지어서 날면 뒤에 있는 새는 힘을 덜 들이고도 같은 속도로 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혼자 날아가는 것보다 71%나 더 멀리 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V자형으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서로 협력하는데 천재적입니다. V자형의 최선두 가운데에서 앞서 날던 1번 기러기가 많은 노력과 희생 때문에 진이 빠져 지치게 되면 제일 후미로 빠지고 뒤에 있던 2번 기러기가 선두의 자리로, 그리고 3번 기러기가 2번 기러기 자리로 이동합니다. 능력있고 힘이 세어서 최선두에 서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저 자신이 팀을 위해 나누어 맡아야 할 역할이기에 앞장서는 것이지요. 그리고 뒤에서 나는 다른 모든 기러기들은 우는 소리를 냅니다. 이 소리는 앞서 날아가는 새에게 자신들이 잘 따라가고 있다고 안심시키고 지치지 않게 하는 격려의 응원입니다. 흔히들 무리를 이끄는 리더십(leadership)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오히려 리더를 잘 따라주는 팔로워십(followership)이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는 대목입니다. 만약 한 기러기가 병이 들거나 총에 맞아 대열에서 떨어지더라도 기러기들은 동료를 혼자 버려두지 않습니다. 함께 날지 않고서는 목적지에 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배려(配慮)입니다. 공동체에서 배려는 상대방의 형편과 처지를 온전히 인식하는데서 시작이 됩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전쟁을 많이 치룬 왕입니다. 그는 손에 피를 많이 묻힌 탓에 성전을 세우는 일은 아들에게 넘기게 됩니다. 사무엘상 30장에 보면 그가 아말렉과 전쟁을 할 때 600명 중 200명은 피를 흘리거나 죽기 싫어서, 비겁하게 후방에 남겨진 짐을 지키겠다고 합니다. 다윗은 그들의 뻔한 속셈을 알면서도 남아있을 것을 허락합니다. 치열한 전쟁에서 승리한 후 함께 출전했던 군인들은 이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전리품을 하나도 주지 말라고 강력하게 건의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은 단지 서서 기다렸지만 그들도 봉사하였다. 전쟁에 나갔던 사람의 몫이나 남아서 짐을 지킨 사람의 몫이나 똑 같아야 한다”라고 말하면서 전리품을 똑 같은 몫으로 나누어 주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은 내심 불평이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리더의 말을 수용합니다. 진정한 팔로워십을 발휘한 것이겠지요. 


이것이 바로 공정을 넘어선 배려입니다. 공동체에서 구성원들의 역할과 공헌은 형편과 처지에 따라서 사뭇 달라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봉사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저 그 봉사의 과실을 향유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공동체이든 그 속한 사람들은 크든지 작든지 모두 영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든 모두 공동체에 안정감을 생기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만약 서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없게 된다면 이러한 안정성은 금방 깨지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경청(敬聽)입니다. 공동체에서는 상대방에 대해 경청하는 자세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 귀를 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마도 두 배로 듣지만 공평하게 들으라고 주셨을 것입니다. 하늘과 사람의 마음에서 오는 소리를 듣게끔 말이지요. 경청에는 유익이 많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혼탁해진 사회 안에도 여전히 아름답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잘 들으면 상대방의 마음도 치유하고 신뢰도 생길 수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들을 줄 압니다. 열왕기상 3장을 보면, 솔로몬이 젊은 나이에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소원을 물으셨습니다. 그때 솔로몬은 “지혜로운 마음을 주옵소서”라고 간구합니다. 그 지혜로운 마음이란 “듣는 마음”을 의미하는 문학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동체 생활에서 우리는 서로 상대방의 말을 잘 들어야 합니다. 잘 듣는 것은 상대방에 대한 신뢰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협동과 배려와 경청이 충만하게 되면 우리 공동체는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안아 줄 수 있는 성숙한 공동체가 됩니다. 우리 몸이 많은 지체들로 구성되어 완전한 유기체를 이루고 있듯이,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인 공동체가 되는 것이지요. ‘나홀로’ 트렌드가 점차 강력해져 가고 있는 우리 사회에서 고립된 개인이 늘어나고 개인이 파편화하면서 생기는 ‘외로움’이라는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건 결국 연대와 교류일 것입니다. 다양한 연령‧성별‧직업 계층이 모이고 교류할 수 있는 공동체가 많이 생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새길 공동체가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받들어주어서 상대방을 포용하고 사랑할 때 우리는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있으며 그 힘을 바탕으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실하게 세워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다 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기도]


주님, 저희를 새길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게 하시고 이렇게 함께 모여 당신께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우리 몸에서 발은 손이 아니어도 몸에 붙어있고, 귀는 눈이 아니어도 몸에 붙어 있는 소중한 지체들인 것처럼, 우리 공동체 자매 형제들은 다양한 지체들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새길 공동체가 안으로는 희생과 협동, 배려와 경청을 통해서 한 몸이 되고 밖으로는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데 초석이 될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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