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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철호

 

 

“불의한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1-9)

 

2019년 1월 27일

주일예배

김철호 목사(마당교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씀하셨다. “어떤 부자가 있었는데, 그는 청지기 하나를 두었다. 그는 이 청지기가 자기 재산을 낭비한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서, 그를 불러 놓고 말하였다. ‘자네를 두고 말하는 것이 들리는데, 어찌 된 일인가? 자네가 맡아보던 청지기 일을 정리하게. 이제부터 자네는 그 일을 볼 수 없네.’ 그러자 그 청지기는 속으로 말하였다. ‘주인이 내게서 청지기 직분을 빼앗으려 하니, 어떻게 하면 좋을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낯이 부끄럽구나. 옳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다. 내가 청지기의 자리에서 떨려날 때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네 집으로 맞아들이도록 조치해 놓아야지.’ 그래서 그는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하나씩 불러다가, 첫째 사람에게 ‘당신이 내 주인에게 진 빚이 얼마요?’ 하고 물었다. 그 사람이 ‘기름 백 말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는 그에게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어서 앉아서, 쉰 말이라고 적으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묻기를 ‘당신의 빚은 얼마요?’ 하였다. 그 사람이 ‘밀 백 섬이오’ 하고 대답하니, 청지기가 그에게 말하기를 ‘자, 이것이 당신의 빚문서요. 받아서, 여든 섬이라고 적으시오’ 하였다. 주인은 그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 그가 슬기롭게 대처하였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자녀들이 자기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슬기롭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라. 그래서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맞아들이게 하여라.]

- 누가복음 16:1-9 -

 

 

읽기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도 말했다. 

마름(청지기)을 거느리고 있는 어떤 부자가 있었다. 그런데 그 마름이 부자의 소유재산들을 횡령 하는 것으로 부자에게 고발되었다. 그래서 부자가 마름을 부른 후에 마름에게 호통을 쳤다. 

“내가 너에 대하여 듣는 이 고발이 어찌 된 일이냐? 너는 네 마름 장부를 내 놓아라! 왜냐하면, 네가 이후로는 마름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 마름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왜냐하면, 나의 주인이 내게서 마름 일을 떼어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땅을 파기에는 힘이 없고, 비럭질을 하기에는 부끄럽구나. 옳거니 알았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마름 일로부터 떨려나게 될 때에는 언제라도, 그들이 자기네 집들 안으로 나를 기꺼이 맞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마름은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 가운데서 따로따로 한명씩 불러들인 후에, 첫 번째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의 주인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졌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기름 백말입니다.” 

마름이 그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빨리 앉아서 오십이라고 쓰시오.” 

그러고 나서 마름이 또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빚을 졌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밀 백 섬입니다.” 

마름이 그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팔십이라고 쓰시오.” 

그런데 주인은 그 불의한 마름을 손뼉 치며 칭찬 했다. 왜냐하면 그 마름이 잽싸고 약삭빠르게 사기를 쳤기 때문이다. 


낱말풀이


* 부자 : 플루시오스 πλούσιος, 이 낱말은 ‘플레토 πλήθω 넘치도록 채우다’라는 뜻에서 유래되었다.  

* 청지기(여기서는 ‘마름’) : 오이코노모스 οὶκονὸμοϚ, 문자적으로는 ‘집을 관리하는 자’이다.

* 횡령하다 : 디아스콜피조 διασκορπίξω, ‘전치사 διά ~통하여 + 스콜피조 σκορπίξω 골라내다 또는 흩다’, 우리말 성서는 ‘낭비하다’라고 번역했으나 여기서는 비유의 문맥에 따라 ‘횡령하다’라고 읽는다. 

* 고발되었다 : 디에블레테 διεβλήθη, 이 헬라어 동사는 ‘디아발로 διαβάλλω 던지다’라는 동사의 ‘과거수동태형’인데, ‘전치사 διὰ ~통하여 + βὰλλω 던지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 잽싸고 약삭빠르게 사기를 치다 : 프로니모스 φρόνιμος 약삭빠른, 이 낱말의 어원은 ‘프레나파테스 φρεναπάτης 자기양심을 속이는 자’ 인데,  ‘프렌 φρήν 마음 + 아파테 ἀπάτη 속임’으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들어가는 말 


나는 지금도 어린 시절 고향교회의 모습을 아련한 추억으로 떠올리곤 한다. 무엇보다, 가슴 떨리는 추억은 교우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나눔과 우정이다. 지금도 새록새록 생각이 나는 분이 있는데, 우리 집에 이웃해서 살던 할머니 권사님이다. 그 할머니 권사님은 우리 집에 양식이라도 떨어질라 치면 귀신같이 알아채셨다. 그리고는 나지막한 흙 담장너머로 보리쌀 자루, 감자와 고구마가 담긴 소쿠리를 건네 주셨다. 지금도 흙 담장 너머로 그것들을 건네주시던 할머니 권사님의 크고 거칠며 두툼한 손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려오곤 한다. 


나의 옛 고향교회는 부자나 가난한 사람이나 먹고 입고 사는 것에서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이야 자주 굶기도 했지만 부자라고 해서 터무니없이 호화로운 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옛 고향교회는 누가 뭐래도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에게 기대어, 서로 가진 것들을 나누는 ‘삶의 나눔 공동체’였다. 가난한 사람들이야 말할 것도 없이 부자 집의 곳간에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어내야만 했다. 또한 부자 집은 부자 집대로 가난한 사람들의 농익은 일손이 절실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에게 기대는 ‘삶의 경제’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21C 한국교회 상황에서 나의 어린 시절 옛 고향교회의 모습은 아련한 추억일 뿐이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대형화되고 자본주의로 상업화 되어 맘몬․자본숭배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다. 성서가 증언하는 초대교회의 ‘삶을 나누는 신앙공동체 경제’는 멀고 먼 옛날의 한낱 종교 신화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더불어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에게 기대는 삶의 경제’란, 21C 우리시대의 교회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가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마땅치도 않은 일이다. 왜냐하면 21C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이 ‘ 맘몬․자본세상의 영혼 없는 임금노예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맘몬․자본세상 임금노예에게는 ‘무한경쟁, 무한독점, 무한축적, 무한소비’욕망이야말로 자기 삶을 꾸려가는 힘의 바탕이다.  


이점에서 예수는 비유의 사건과 상황을 통하여 ‘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의 실체’를 낱낱이 까발린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내부자 마름들의 권력실체와 그들의 ‘잽싸고 약삭빠른 빚 세상 경제 영속화의 음모와 사기’를 폭로한다. 이렇게 본문비유에서는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의 톱니바퀴로 전락한 인간 군상들의 비윤리적이고 약삭빠른 행동이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예수는 비유에서 청중들과 독자들에게 ‘마름(청지기)의 횡령과 그에 대한 고발 → 마름의 해고의 위기 → 그리고 그 위기를 모면하려는 마름의 약삭빠른 배임사기행태’를 통하여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의 모순과 폐해’를 하나하나 까발린다. 더불어 빚 세상 경제 안에서 채무노예로 살아가는 빚꾸러기들의 삶을 통하여 새로운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을 꿈꾸게 한다. 이렇듯이 예수는 비유에서 청중들과 독자들에게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 까발리기’를 통하여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에게 기대는 삶의 경제,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은유를 마음껏 상상하도록 이끈다. 


이끄는 말 


21C 독자들에게는 예수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왜냐하면 우리시대의 독자들이 예수의 비유의 언어들에 대한 굳어진 신앙은유들을 떨쳐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비유의 마지막 문장에서 ‘주인이 비유의 부자인지, 예수인지, 하나님인지’ 헷갈리는데, 그 가운데 무엇 하나로 딱 잘라 결정하고 비유를 읽는다면, 비유에 대한 교회의 여러 갈래 해석들이 물과 기름처럼 서로 달라져야 마땅하다. 실제로, 누가복음서 저자와 초대교회도 본문비유 읽기와 해석을 매우 어려워했던 것 같다. 누가복음 저자와 초대교회는 하나같이 본문비유 읽기와 해석에 갈지자걸음을 걸었다. 그래서인지 누가복음 저자는 본문비유 끝에 덕지덕지 자신의 해석을 붙여놓았다. 

   

무엇보다도 21C 한국교회와 교우들에게는 본문비유를 ‘제대로 읽고 해석하는 것’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매우 불편할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교회와 교우들의 신앙이 서구 제국주의 교회가 만들어낸 자본주의 정통교리와 ‘21C 독점금융자본의 빚 세상 경제 이데올로기’에 찌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구교회의 자본주의 정통교리와 21C 독점금융자본의 빚 세상 경제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본문비유를 읽고 해석하려는 독자들은 ‘뭐가 어려워’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비유들은 한결같이 청중들과 독자들의 생각과 삶의 태도에 맞서서 싸움을 건다. 예수는 지중해세계 전통의 지혜문학과 유대교 랍비문학의 비유 언어들을 비틀어서 청중들에게 억지스럽게 들려지게 할 뿐만 아니라, 어이없어 말문이 막히게 한다. 그렇게, 예수는 비유를 통하여 로마제국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여 기득권을 누려온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의 모순과 폐해를 까발린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비유의 청중들과 독자들을 로마제국 지배체제와 거기에 기생하는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에 저항하도록 선전선동 한다. 

   

그렇다면 예수는 왜, 이런 비유들을 이야기 할까? 예수는 비유를 통하여 청중들과 독자들에게 새로운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의 은유들을 깨닫고 꿈꾸게 하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비유는 여러 다른 예수의 비유들에 비해 읽고 해석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왜냐하면 비유의 이야기흐름의 앞뒤가 전혀 맞지 않으며, 억지스럽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부자 주인이 불의한 마름의 잽싸고 약삭빠른 직권남용 배임사기에 대하여 손뼉을 치며 칭찬했다’는 비유의 끝맺음은 비유 전체내용과 크게 어긋난다. 이러한 비유의 끝맺음이 청중들과 독자들에게 비유의 해석을 어렵게 할 뿐만 아니라, 비유에 대한 제멋대로의 은유를 상상하도록 부추긴다. 물론, 본문비유 끝에 이어 붙인 누가복음 저자와 초대교회의 알레고리 해석만을 따른다면, 본문비유를 읽고 해석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제, 여기서는 이 모든 비유 읽기와 해석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본문비유를 읽고 비유에 숨겨진 은유를 찾아 나서기로 한다. 

   

본문비유는 예수가 갈릴리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행길에서 말한 비유이다. 따라서 예수는 제자들과 따르는 사람들에게 비유를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과 예루살렘 대중들이 비유의 중요한 청중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은 ‘예수의 하나님나라를 제대로 이해하거나 바라지도 않으며’ 막무가내로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을 비판한다. 그래서 예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 등 예루살렘 유대인 청중들에게 로마제국 맘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의 모순과 폐해’를 낱낱이 까발리려고 한다. 왜냐하면, 로마제국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피라미드 빚 세상 경제 착취구조가 ‘유대 전통 야훼신앙의 해방과 자유, 정의와 평등, 생명평화 세상’과 크게 어긋나기 때문이다.  

   

특별히, 예수는 비유에서 ‘갈릴리지역 부재지주들의 상업영농․기업영농으로 인한 빚 세상 경제의 모순과 폐해’를 하나하나 까발리려고 한다. 실제로 갈릴리는 다른 유대지역에 비해 나름대로 비옥한 땅이 많은 지역이다. 고대 유대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자신이 직접 돌아본 갈릴리 땅에 대해 이렇게 기록한다. 


“땅이 비옥하고 풍요로워 온갖 종류의 나무들이 자라고 소출이 풍성하다. 주민들이 온 땅을 경작하기 때문에 노는 땅이 없다.” 


이어서 요세푸스는 ‘갈릴리 땅에는 밀과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가 풍성하다’고 기록을 남긴다. 

   

사실은 어디, 갈릴리의 땅 뿐이겠는가? 갈릴리 호수의 어류자원 역시 다양하고 넉넉하다. 온갖 물고기가 많았던 갈릴리 호수는 ‘자기 땅을 빼앗기거나 소작농에 쫓겨난 이들, 외지의 유랑민들’을 끌어 들였다. 그나마 어촌생활이 농부들의 상황보다 조금 더 나았기 때문이다. 어부들 가운데 일부 여유 있는 사람들은 조합을 만들고 여러 척의 배를 구입해서 고기잡이를 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은 어부들에게서 물고기를 받아다가 장사를 하기도 했다. 이와 관련하여 갈릴리호수 주변의 마을마다 물고기를 소금에 절이는 소규모 염장업이 이루어졌는데, ‘막달라’에서는 제법 큰 규모의 염장업이 발달하기도 했다. 이렇게 소금에 절인 물고기들은 지중해를 건너 멀리 로마와 이베리아 반도에까지 수출되었다. 따라서 지중해 세계의 사람들은 갈릴리호수를 헬라어로 ‘타리코스 - 소금에 절인 생선’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타리체아‘라는 갈릴리호수의 별명이 나왔다. 


이러한 갈릴리 지역 상황에서 피라미드식 사회계층구조가 뚜렷해졌다. 갈릴리 지역의 피라미드 맨 꼭대기에는 대지주(왕 또는 귀족)와 대상인(지중해 해상무역)이 있었다. 중간층에는 대지주인 왕과 귀족에게 봉사하는 세리와 하급관리들이 있었다. 또한 부재지주의 상업영농․기업영농을 관리하는 마름(청지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쩌다 소규모 자영농, 어부, 수공업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피라미드 최하층에는 한해살이 소작농, 지주에게 예속된 농노와 천민들, 하루벌이 노동자, 등 대다수의 하층 민중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예수는 비유에서 이러한 갈릴리 피라미드 사회계층구조 속에서 부재지주의 상업영농․기업영농의 모순과 폐해를 증언한다. 부재지주에게 고용되어 부재지주를 대리하는 마름의 횡령과  고발, 그로 인한 마름의 해고위기, 그 해고 위기를 벗어나려는 마름의 잽싸고 약삭빠른 배임사기행태를 통하여 갈릴리 빚 세상 경제의 실체를 폭로한다. 그럼으로써, 예수는 비유의 청중들과 독자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운동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깨달으며 함께 참여하도록 이끈다. 마치, 21C 우리시대의 대중들이 신자유주의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내부자 갑 질 폭로를 통하여 새로운 정의 세상을 꿈꾸게 되는 것과 같은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예수는 비유를 통하여 우리시대의 독자들에게도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에 대응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경제 ’서로의 필요에 따라서 서로에게 기대는 삶의 경제‘를 꿈꾸게 하고 실천행동 하도록 요청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비유에는 어떤 부자와 마름, 그리고 많은 빚을 진 소작농들이 등장한다. 여기서 부자는 헬라어로 ‘플루시스’라고 하는데 ‘플레토- 가득 채우다’라는 동사에서 유래한다. 그런데 예수시대의 갈릴리지역 상황이나 비유의 상황에서 보면, 이 부자는 대단위 토지를 독점한 부재지주이다. 또 마름(문자적으로는 ‘청지기’)은 대단위 토지를 독점한 부재지주를 대신하여 주인의 상업영농․기업영농의 생산기반인 토지와 소작인들의 수확물을 판매 관리하는 사람이다. 

   

이점에서 본문비유의 마름을 교회의 전통적인 알레고리 해석을 따라 ‘종의 신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본문비유에서 마름은 부재지주인 주인과 직업적 계약을 맺은 고용인으로써 갈릴리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고위 내부자 중 하나이다. 실제로, 갈릴리지역에는 예루살렘 등, 멀리 떨어진 대도시에 거주하는 부재지주들에게 고용되어 그들의 토지와 소작인들을 돌보고 생산물을 관리하고 판매하는 ‘마름’들이 존재 했었다. 

   

그리고 본문비유의 ‘빚진 사람들’은 부재지주의 땅을 부치는 소작농들인지, 아니면 부재지주에 매여 있는 소상공인지 뚜렷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다만, 본문비유에서 이들이 주인에게 진 빚의 규모가 상상외로 클 뿐만 아니라, 이들이 글을 읽고 쓸 줄 안다는 점에서 소작농이 아니라고 의심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갈릴리지역 부재지주들의 상업영농․기업영농 상황에 비추어 소작인들도 간단한 숫자정도를 읽고 쓸 수 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갈릴리지역 소작농들은 부재지주와 로마제국과 헤롯 왕국,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제사종교까지 삼중사중의 착취구조로 인해 늘 빚을 지고 살 수밖에 없는 그 땅의 사람들이다. 

   

실제로, 본문비유에서 소작농들의 큰 빚은 부재지주와 마름이 오래 동안 꾀와 술수를 부려서 늘려놓은 빚더미일 것이다. 왜냐하면 본문 비유에서처럼 부재지주의 상업영농․기업영농 현장에서는 오로지 소작농만이 유일한 생산수단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땅이 기름지지 못하고 메마른 유대지역이나 갈릴리의 고만고만한 지주들이라면 농업노예들을 부려서 농사를 짓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본문비유의 상업영농․기업영농 상황에서는 부재지주의 땅에 매여 오롯이 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만 하는 소작농이 아니라면, 높은 생산성을  유지 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유능한 마름이라면 부재지주인 주인을 위해 소작농들의 빚을 쌓고 늘리는 ‘빚 세상 경제의 달인들’이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많은 소작농들을 주인의 땅에 온전히 매어 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예수는 비유의 등장인물들과 그 처한 상황을 통하여 예수시대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의 사회구조적 모순과 폐해’를 있는 그대로 까발린다. 그럼으로써, 비유의 청중들과 독자들에게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겪어야만 하는 빚 세상 경제의 고통과 갈등을 실체화하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비유에서 마름은 어느 날 부재지주인 주인에게 불려가 해고통보를 당한다. 한마디로, 실직이라는 생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실직은 현대뿐만 아니라 예수시대에도 일상적 삶의 위기였다. 특별히 이비유의 청중인 예루살렘 대중들은 대부분 하루벌이 날품꾼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BC 20년경에 시작된 헤롯성전 공사가 예수시대에 이르러 마무리 되면서 예루살렘에 몰아친 대규모 실직사태를 몸으로 경험했을 것이다. 헤롯대왕은 이 대규모 실직사태를 벗어나기 위해 강제로 예루살렘성전 금고를 열고 대규모 취로사업을 벌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대규모 폭동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따라서 본문비유의 예루살렘 유대인 청중들은 마름의 갑작스러운 실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생존의 위기인지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본문비유에서 마름의 해고이유는 부자의 소유재산에 대한 마름의 횡령을 누군가가 부자에게 고발했기 때문이다. 우리말 성서는 이 마름의 횡령을 ‘낭비’라고 번역했는데 아마도 영어성경의 표현을 따른 것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동사 ‘디아스콜피조’는 ‘~ 통하여 + 골라내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마름이 부재지주인 부자의 소유재산들로부터 일부를 자기 것으로 골라내어 착복한 것이다. 물론, 마름은 자기 재량껏 부재지주인 주인으로부터 자신의 몫으로 허락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챙겼을 수도 있다. 또한 갈릴리지역의 상업영농․기업영농 상황에서 부재지주는 지금까지 마름의 소극적 횡령을 눈감아 주었을 수도 있다. 

   

이점에서, 본문비유의 마름에게 몰아닥친 해고위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마름의 횡령자체라기보다 마름의 횡령이 주인에게 고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말 성서는 본문비유에서 사용된 ‘디에블레테 - 고발되었다’라는 헬라어 동사를 ‘소문이 들리다’라고 번역했다. 하지만 ‘디에블레테’는 ‘디아발로’라는 헬라어 동사의 ‘과거수동태형’인데, ‘~통하여 + 던지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이다. 따라서 ‘디에불레테’는 본문비유의 문맥 안에서 ‘고발되었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그러므로 부재지주인 부자는 갈릴리지역의 상업영농․기업영농상황 속에서 마름의 소극적 횡령에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도리어, 부재지주 대신방망이인 마름이 주인의 충분한 아량 안에서 오랜 관행으로 여겨지고 있는 자신의 횡령행태에 대해 누군가에게 고발당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재지주인 부자에게 마름의 횡령을 고발한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도 고발자는 부재지주와 마름이 만들어내는 빚 세상 경제 아래서 고통 받는 소작농들 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작농들이 부재지주인 부자에게 마름의 횡령을 고발한 사건은 갈릴리지역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 체제의 심각한 문제와 갈등 요소를 드러낸다. 부재지주인 부자에게 고용된 마름은 갈릴리지역의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체제 안정의 핵심’이다. 따라서 마름이 소작농들에게 횡령으로 고발되는 상황에서 부재지주인 부자는 마름을 해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자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어 → 마름을 소환한 후 → 마름에게 해고통보’를 한다. 예수는 비유 이야기꾼으로서 이러한 상황을 아주 실감나게 전달한다. 


“내가 너에 대하여 듣는 이 고발이 어찌 된 일이냐? 너는 네 마름 장부를 내 놓아라! 왜냐하면, 네가 이후로는 마름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때, 마름은 재빨리 자신의 실수와 그로인해 자신에게 몰아친 해고위기 상황을 곰곰이, 아주 철저하게 되새긴다. 비유에서 마름은 부재지주인 부자에게 불려가 해고통보를 받을 후, 속엣말로 스스로에게 묻고 생각하며 다짐한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왜냐하면, 나의 주인이 내게서 마름 일을 떼어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땅을 파기에는 힘이 없고, 비럭질을 하기에는 부끄럽구나. 옳거니 알았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마름 일로부터 떨려나게 될 때에는 언제라도, 그들이 나를 자기네 집들 안으로 기꺼이 맞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본문비유에서 땅을 판다는 말은 농사일이나 육체노동을 말하는 것이겠지만, 실제로는 생계를 꾸리기 위한 모든 생업을 대표하는 말로 쓰인다. 여기서 마름이 땅을 팔 수 없을 만큼 나이가 많았는지? 아니면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내부자로써 부자로부터 상당한 대우를 받던 마름 자리에서 떨려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나 수치심 때문인지? 잘 알 수는 없다. 아마도 비유에서 마름의 속엣말은 누가복음 특유의 문학적 수사일 수 있다. 일례로 돌아온 탕자비유나, 어리석은 부자비유에서도 잘 꾸며진 문학적 수사로써의 속엣말들이 나타나 있다.  

   

어째든 마름은 갈릴리지역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체제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행동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결단한다. 그리고 잽싸고 약삭빠르게 그 일을 실천에 옮긴다. 여기서 비유의 반전과 비유 이야기 흐름의 핵심내용이 드러난다. 그 점에서 마름의 속엣말 속에 사용된 모든 헬라어동사가 가정법 수동태동사이다. 


“옳거니 알았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내가 마름 일로부터 떨려나게 될 때에는 언제라도, 그들이 나를 자기네 집들 안으로 기꺼이 맞아들이게 하기 위해서!” 

   

아직, 마름은 정식으로 해고되지 않았다. 마름은 아직 갈릴리지역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체제의 고위 내부자로써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잃지 않았다. 그렇다면, 부재지주가 마름에게 그의 실수와 고발당함, 그로인한 갈릴리지역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체제의 불안요소를 해결할 말미를 보장한 것이 아닐까? 이후로 마름이 일으키는 모든 사건과 마름의 행태야말로 부재지주인 부자가  바라고 의도한 바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소작농들에게 횡령으로 고발당함으로 인해 부재지주로부터 해고통보를 받은 마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부재지주인 주인의 이름을 팔아 직권남용과 배임사기를 친다. 

“그리고 마름은 자신의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 가운데서 따로따로 한명씩 불러들인 후에, 첫 번째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은 나의 주인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졌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기름 백말입니다.’ 마름이 그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빨리 앉아서 오십이라고 쓰시오. 그러고 나서 마름이 또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빚을 졌소? 그러자 그 사람이 대답했다. ‘밀 백 섬입니다.’ 마름이 그 사람에게 말했다.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팔십이라고 쓰시오.”  

   

위 본문비유의 단락에서 마름은 주인의 이름을 빌려서 모든 소작인들의 빚을 일정부분 깎아주는 배임사기를 친다. 자기가 마름 일로부터 떨려나게 될 때를 대비해서 소작농들에게 자신을 받아들이도록 선심을 쓴 것이다. 한마디로, 마름이 직권남용과 배임사기죄를 저지른 것인데, 여기서 마름의 바람은 터무니가 없다. 부재지주인 부자에게 턱없이 큰 빚을 지고 있는 갈릴리지역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체제의 빚꾸러기 소작농들에게는 해고당한 마름을 받아들일 여력이 전혀 없다. 그것은 단지 ‘마름의 잽싸고 약삭빠른 행동’에 대한 ‘누가복음 저자의 문학적 수사, 또는 알레고리 수사’일 뿐이다. 

   

그렇다면 실제로, 이 마름의 잽싸고 약삭빠른 직권남용과 배임사기 행태의 목적은 무엇일까? 혹시 마름의 이 머뭇거림도 주저함도 없는 직권남용과 배짱 두둑한 배임사기 행태야말로 부재지주인 부자에게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이 모든 의문은 비유의 마지막 문장에서 한꺼번에 풀려진다. 


“그런데 주인은 그 불의한 마름을 손뼉 치며 칭찬 했다. 왜냐하면 그 마름이 잽싸고 약삭빠르게 사기를 쳤기 때문이다.” 

   

참으로, 예수는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과 독자들에게 너무도 터무니없는 비유의 끝맺음을 던져 놓는다. 어떻게, 비유의 주인은 ‘잽싸고 약삭빠르게 사기를 친 것 때문에’ 마름을 향하여 손뼉을 치며 칭찬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주인의 칭찬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 나는 21C 예수의 비유의 독자로써 ‘불의한 마름의 잽싸고 약삭빠른 직권남용과 배임사기를 통한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 까발리기’라는 비유의 숨겨진 은유 찾기를 제안한다. 또한 비유의 독자들이 나의 제안을 통해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를 해석하는 온갖 다양한 은유들에 대한 상상을 억제 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큼, 예수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끝맺음이 비유의 해석을 아리송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 그럼 이제 시작해 보자. 예수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갈릴리지역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 상황에서 빚꾸러기 소작농들이 마름의 횡령을 부재지주인 부자에게 고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사실, 마름은 부재지주인 주인의 충분한 아량 안에서 오래전부터 소극적인 횡령행위를 저질러 왔을 것이다. 그것은 갈릴리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 상황에서 부재지주를 대신한 마름이 빚 세상 경제체제 안정을 잘 이끌어 온 공로에 대한 보상일 수 있다. 왜냐하면 소작농들에게 감당 할 수 없는 빚을 지워 그들을 부재지주의 땅에 매어 놓는 것이야말로 부재지주의 상업영농․기업영농의 생산성을 최대로 보장하는 것이 때문이다. 21C 우리시대의 독점재벌․독점대기업 경제체제에서 말하자면, ‘그것은 관리자 인센티브 상여금’이다.

   

그러나 이제, 마름이 빚꾸러기 소작농들에 의해 횡령으로 고발됨으로 인해 부재지주인 주인의 모든 수익구조와 자본축적체계가 무너져 내릴 위기에 처했다. 소작농들과 마름의 관계는 악화 될 때로 악화 되었을 터, 마름은 소작농들을 지휘하고 관리할 힘을 잃었다. 이제, 부득불 부재지주인 부자는 마름을 불러 해고통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대 반전이 일어났다. 마름이 주인으로부터 은근슬쩍 보장받은 갈릴리지역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체제의 불안요소 해결의 말미를 더 말할 나위 없이 멋지게 활용한 것이다. 마름이 부재지주인 주인의 이름을 빌어 빚꾸러기 소작농들에게 빚을 깎아주는 배임사기를 친 것이다. 


“당신은 나의 주인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졌소?” 

   

갈릴리지역의 소작농들은 부재지주와 로마제국과 헤롯 왕가와 예루살렘 성전종교체제 등 가혹한 삼중사중 착취체제 아래서 많은 빚을 지고 살아야만 했다. 그러나 이제, 마름의 이 물음은 빚꾸러기 소작농들에게 너그럽고 자비로운 주인을 앞세운 마름의 친절한 연대와 사귐의 제안이 되었다. 이렇듯이, 마름은 빚꾸러기 소작농들에게 주인의 너그러움과 자비로움, 그리고 자신의 친절한 연대와 사귐을 실천행동 한다. 그럼으로써 더불어 마름은 자신과 소작농들 사이에서의 모든 껄끄러웠던 관계들을 말끔히 해소한다.


“기름 백말입니다. 당신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빨리 앉아서 오십이라고 쓰시오. 밀 백 섬입니다. 당신의 빚 문서를 받으시오. 그리고 팔십이라고 쓰시오” 

   

그런데 여기서 독자들은 부재지주인 주인의 이름을 빌린 마름의 직권남용과 배임사기행태의 내용들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름이 주인의 너그러움과 자비로움을 앞세워 소작농들에게 베푼 ‘빚 깎아주기의 실체’는 딱 ‘빚에 대한 이자만큼’만이다. 갈릴리의 주요 농산물가운데 하나인 올리브기름은 쉽게 상하는 농산물이다. 그러니 유통기한이 짧고 저장도 어려우며 이율도 높다. 그 시대의 올리브기름의 이율은 50%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에 밀은 저장도 쉽고 수년 동안이라도 유통할 수 있는 농산물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밀에 대한 이율은 20%정도였다고 한다. 많은 이자를 깎아주는 빚 탕감 기법, 그것은 21C 우리 시대에서도 채권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빚 세상 경제의 가장 유용한 신용회복기법’이다.  

   

또 한편 ‘기름 백말’을 히브리어 ‘바트-기름 한말’로 따져서 계산하면 약 36리터이다. 따라서 ‘기름 백말’은 오늘의 단위로 약 3,650리터에 달한다. 올리브나무 한 그루의 일 년 평균 생산량이 약25리터이고 올리브나무 한 그루가 그 시대의 한 가족의 생계를 감당 했다는 사실을 생각 하면 너무나 엄청난 액수의 빚이다. 그리고 ‘밀 백 섬’은 히브리어 ‘코르 - 한 섬’으로 따져서 계산하면 약 36,500리터인데, 약 42헥타르의 경작지를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소작농들의 어마어마한 빚의 크기에 비해서 이자 따위를 깎아주는 빚 탕감으로는  갈릴리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체제의 아무런 변혁도 불러 오지 못한다. 본문비유에서 마름의 이자 빚 깎아주기로는 갈릴리지역 빚꾸러기 소작농들에게 아무런 실제적 이로움도 줄 수 없다. 다만, 비유에서 마름의 이자 빚 깎아주기는 빚꾸러기 소작농들에게 부재지주인 주인의 너그러움과 친절과 자비로움을 선전선동 할 뿐이다. 그럼으로써 갈릴리 상업영농․기업영농의 핵심생산 수단인 소작농들의 동요를 잠재우고 빚 세상 경제체제의 안정과 영속화를 꾀할 수 있을 뿐이다. 

   

이와 똑같이, 21C 우리사회 정치․종교․언론 등 모든 영역에서도 독점재벌․독점자본 경제의 충실한 마름들이 활개를 치며 나대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도 이에 발마추어 빚꾸러기 저소득․취약계층 과중채무자들의 동요를 막고 불만을 잠재우려는 ‘고리이자 깎아주기 빚 탕감 정책’을  마구 내놓는다. 그럴 때마다 정치권과 언론들이 앞장서서, 이러한 정부정책이 빚꾸러기들에게 큰 혜택이라도 되는 듯 허풍과 거짓말로 호들갑을 떨면서 정부정책을 선전선동 하는데 열을 올린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독점재벌과 독점금융자본의 입이 되고 나팔수가 되어 빚꾸러기들의 도덕적 해이를 떠들어 댄다.  

   

그러므로 이제, 부재지주인 주인이 왜 마름을 칭찬하는지, 그 뜻이 분명해졌다. 주인의 칭찬의 진짜 의미가 무엇인지, 마름은 어떤 점에서 잽싸고 약삭빠른지, 이해와 설명이 분명해졌다. 그것은 바로 마름의 잽싸고 약삭빠른 직권남용과 배임사기를 통한 갈릴리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체제의 안정과 영속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비유의 끝맺음에서 부재지주인 주인의 입을 빌려서 비유의 주인공 마름을 ‘불의한 청지기’라고 폭로한다. 그렇다면, 과연 마름은 불의한가?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의 내부자들에게는 마름이 불의하지 않다. 마름은 빚 세상 경제의 안정과 영속화를 위한 옳고 마땅한 일을 했다. 특별히 갈릴리지역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 체제에서 마름의 횡령을 고발한 빚꾸러기 소작농들을 주인의 이름으로 달래고 무마한 마름의 직권남용과 배임사기 행태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다만 비유 이야기꾼인 예수만이 마름을 ‘불의하다’라고 선언한다.  

   

또한 예수는 비유에서 ‘비유의 주인이 불의한 마름을 칭찬하는 이유를 노골적으로 마름이 잽싸고 약삭빠르게 직권남용과 배임사기를 쳤기 때문’이라고 폭로한다. 여기서 사용한 헬라어 낱말이 ‘프로니모스’ 인데 이 낱말의 어원은 ‘프레나파테스 – 자기마음을 속이는 자’이다. 이 헬라어 낱말은 ‘마음 + 속이다’로 이루어진 합성어인데, 한 마리도 ‘잽싸고 약삭빠른 사기꾼의 행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본문비유에서 부재지주인 주인은 잽싸고 약삭빠른 사기꾼 마름을 향하여 손뼉을 치며 칭찬한다. 그러므로 이제 21C 독자들은 본문비유의 마지막 끝맺음의 혼란스러움을 충분히 이해하고 나름대로 다양한 신앙은유들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는 무엇 때문에 이비유를 이야기했을까? 앞서 말했듯이 본문비유의 청중들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과 더불어 예루살렘 대중들이다. 먼저, 예수는 로마제국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피라미드 착취구조의 마름역할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을 마름과 하나로 여기고 매조진다. 로마제국 지배체제에 기대어 제국의 아량아래서 횡령을 일삼아 온 그들의 기득권을 고발한다. 그들의 잽싸고 약삭빠른 직권남용 배임사기행태를 꼬집고 조롱한다. 누가복음 저자조차도 이 예수의 조롱과 비난을 비유에서 완전히 제거하기가 멋쩍어 비유 끝에 이렇게 사족을 달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 시대의 아들들이 자신들의 동류와 관계 안에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아예 예수의 이름을 빌려서 누가복음 공동체와 초대교회의 비유해석을 예수의 복음인양 선포한다. 


“너희는 너희에게 속한 불의한 맘몬으로 친구를 사귀라.”

   

그러나 예수는 비유에서 예루살렘 대중들에게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의 모순과 폐해들을’낱낱이 밝히고 까발려 드러낸다. 그럼으로써 비유의 청중들과 독자들이 마음껏 새로운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에 대한 상상과 은유의 나래를 펼치도록 선정선동 한다. 무엇보다도 비유의 유대인 청중들은 자기 시대의 빚 세상 경제체제 속에서 빚꾸러기들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운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지게 된 소작농들이 부재지주인 부자의 땅에서 쫓겨나 소작농의 지위를 잃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고통과 절망을 절절히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청중들은 갈릴리지역의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체제에서 ‘마름의 야비하고 사악하며 속보이는 이자 깎아주기 빚 탕감 음모’를 이해하고 깨달으면서 미어지도록 제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그러므로 21C 우리시대의 독자들도 ‘불의한 마름이 잽싸고 약삭빠르게 배임사기를 쳤기 때문에 주인이 마름을 손뼉 치며 칭찬했다’는 비유의 끝맺음에서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의 모든 악함과 모순과 폐해를 뼈저리게 이해하고 깨닫게 될 것이다.  


맺는 말 


비유의 주인은 이미 해고통보를 한 마름을 다시 고용했을까? 마름은 주인의 칭찬대로 다시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의 고위 내부자 지위를 회복했을까? 예수의 비유에서 그런 의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는 비유에서 갈릴리 상업영농․기업영농 빚 세상 경제체제의 모순과 폐해를 낱낱이 까발림으로써, 부재지주인 주인이 불의한 마름의 직권남용과 배임사기를 칭찬할 수밖에 없는 커넥션을 폭로한다.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에서는 더 많은 빚꾸러기들을 만들어내고 관리해야하는 불의한 내부자 마름들이 더 많이 필요하다. 빚꾸러기들에게 맘몬․자본권력 지배체제의 너그러움과 친절과 자비의 연대와 사귐을 선전선동 할 잽싸고 약삭빠른 사기꾼 마름들이 귀하고 귀하다. 

   

지금 예수의 비유를 듣고 있는 유대인 청중들 가운데에서,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이야말로 비유의 불의하고 약삭빠른 사기꾼 마름과 똑 닮았다. 그들은 로마제국 식민지 유대 땅의 기득권세력으로써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내부자 마름들이다. 그들은 로마제국 지재체제의 아량 속에서 빚꾸러기 유대 대중들의 호주머니를 은근슬쩍 횡령하는 것으로 로마제국 지배체제 내부자 마름의 기득권을 누린다. 

   

그러므로 예수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는 로마제국 지배체제의 마름들인 바리새파 사람들과 서기관들에 대한 조롱과 비난으로 시퍼렇게 날이 서 있다. 그 조롱과 비난이 너무도 날카롭기에 누가복음 저자는 예수의 비유의 날카로움을 누그러뜨리려고 나름 어설프게라도 본문비유의 어투와 내용을 바꾸어야 하지 않았을까?

   

이렇듯이 예수는 비유의 청중들과 독자들에게 ‘맘몬․자본 지배체제 빚 세상 경제 까발리기 은유를 통하여 새로운 대안세상, 예수의 하나님나라 복음운동 은유를 마음껏 상상하고 펼쳐내도록 안내한다. 서로가 서로의 필요에 따라 서로에게 기대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삶의 경제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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