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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세 단계










 


떡 떼기의 깨달음: 역사적 예수와 그리스도의 만남


누가 24:13-35





한완상
형제


Rembrandt, "엠마오의
저녁"(1648)
 




  벌써 한해가 다 저물었습니다. 연말(年末)이 주는 소중한 뜻과 교훈이 무엇인지 새삼 스스로에게 묻게 됩니다. 나이가 들수록 반성과 회고의 소중함이 절절히 몸에 와 닿습니다. 사람답게 살려는 사람일수록 반성과 회고를 아끼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기억할 수 있고, 기억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고 싶으면 기억능력을 상실한 딱한 존재를 생각해보면 족합니다. 기억력을 상실한 치매환자는 정말 비참합니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병에 결렸기에, 남들도 알 수가 없지요. 자기 존재와 의미 있는 사회관계를 맺고 있는 남들을 알아 볼 수 없으면 그는 이미 사람이 아니지요. 짐승만도 못한 법이지요. 왜냐하면 짐승도 자기 새끼는 알아보니까요. 인간은 그의 기억을 통해 지난날의 여러 일들을 일정하게 해석하고 반성할 수 있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역사적 존재로 뜻있게 살아갑니다. 바로 그 능력으로 자기 개인과 역사와 구조를 새롭게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도 있습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은 바로 이 능력을 전제로 삼습니다. 모든 교육이 이같은 기억과 회고의 능력을 북돋우는 일을 소중하게 여깁니다. 특히 교양교육과 종교교육이 바로 이 능력을 토대로 해서 가능합니다. 종교 경전의 가치도 바로 이 기억과 반성의 능력을 함양 시키는데 있는 것입니다.

 

  한해가 저물 때 우리는 우리자신이 유한(有限)한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인간이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른 것은 자의식(自意識)입니다. 바로 이 자의식은 자기 한계를 통렬하게 깨닫는 데서 우러나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식, 죽음이라는 끝을 향해 날마다, 매 순간마다 달려가고 있다는 의식이 바로 자의식입니다. 투철한 자의식으로 자신의 유한성의 의미를 깊이 되새겨 볼 때, 비로소 영원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지요. 그리고 영원을 추구하게 되지요. 여기서 진지한 종교적 염원이 생겨나게 되지요. 자신이 풀과 같고, 기껏해야 풀의 꽃과 같은 허무한 존재임을 깨닫고 겸손의 미덕을 갖게 되지요. 장독대 위의 먼지가 잠시 그곳에 머물러 있다가 바람에 휘날려 순식간에 사라지듯,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임을 새삼 깨닫게 되지요. 그래서 시간의 한계를 깨닫게 해주는 연말이 소중한 자성(自省)과 은혜의 순간이기도 하지요.

 

  연말은 그러하기에 희망을 갈구하게 하는 순간입니다. 한해를 쓰라린 실패와 좌절의 연속으로 보낸 분일수록, 지금쯤은 새로운 희망을 품고 싶어 할 것입니다. 지난 시간이 괴롭고 외로웠던 순간순간으로 느껴질수록, 앞으로의 시간은 보람 있고 즐거운 시간이 되길 바라게 되지요. 현실이 절망적일수록 연말을 맞아 새로운 희망을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좌절의 밑바닥에서 희망의 빛을 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놀라운 반전(反轉)을 펼쳐 보여주는 사건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어떻게 해서 실패와 좌절이 희망과 희열로 전환되며, 죽음의 절망이 부활의 감동으로 반전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적 유대교에서 어떻게 사랑의 기독교가 탄생할 수 있었는지 그 단초를 보여주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역사의 예수(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부활의 그리스도로 연결되는지를 보여주는 신비한 이야기입니다. 결단코 역사의 예수는 신앙의 그리스도로부터 분리 될 수 없지만, 또한 새로운 차원에서 다를 수 있음을 깨닫게 해주는 교훈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역사의 예수는 우리의 짧은 시간 속에서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는 회상의 대상이지만, 부활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매일 매일 삶 속에서 언제나 뜨겁게 직접 만날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음을 증언해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제 본문을 따라 함께 은혜받는 순례의 길로 나아갑시다. 본문의 상황과 맥락은 절망과 좌절에 지쳐 귀향하는 제자들의 딱한 모습을 투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 예수(역사의 예수)에 대해 더 높은 현실적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야말로 그들의 민족적 소망을 풀어 줄 수 있는 카리스마를 지닌 역사적 지도자로 믿고 그를 열성으로 따랐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 줄 민족적 메시아로 확신했습니다. 그런데 허무하게도, 너무나 허무하게도 그 강력한 메시아를 토착 종교지도층과 지배자들이 로마의 힘을 빌어 십자가 처형을 하고 말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신탁의 위력을 지녔다고 믿었던 그 강력한 카리스마 예수가 너무나 연약하게 온갖 수모를 감수하면서 허무하게 죽어갔던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가 없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나약한 메시아의 모습을 보고 제자들은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리고 절망하였습니다.

 

  이제 그분이 처형된 지 사흘째가 되었을 즈음 제자들 사이에 혼돈의 먹구름이 닥쳐왔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이같은 혼돈과 혼란은 제자들의 불안과 아픔을 더 깊게 해준 또 하나의 악재였습니다. 새벽에 여성제자 한 분이 제일 먼저 무덤을 찾아갔는데 처형된 예수의 시체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부활했다는 천사의 전갈을 받기는 했으나 당황했던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소식을 들었던 남성제자의 대표는 그 말을 확인하고 싶어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만, 빈 무덤만 확인한 체 실망하여 돌아 왔습니다. 제자들 간에는 삽시간에 혼돈과 혼미, 방황과 좌절이 급성 유행병처럼 번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불안 속에서 더 견디지 못한 두 제자는 불안과 공포의 예루살렘을 벗어나기로 결심 했습니다. 예수에 대한 희망과 기대를 완전히 접고 아마도 옛 생업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엠마오로 향해 풀이 죽어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걸어가면서 지난 일을 회상하며, 절망과 실의를 되씹으며 귀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어깨는 축 처져 있었을 것이며, 그들의 얼굴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었겠지요. 목적지 엠마오에 가도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는 체 터벅터벅 불안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을 찾아온 분이 있었습니다. 실의와 좌절에 빠진 제자들의 순례 길에 다가오신 분이 누구인지 그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괴로웠던 지난 날을 회상하며 걸어가는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분은 역사의 예수가 아닌 부활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런데 부활의 그리스도가 갖는 그 위엄과 위광을 그들은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저 평범한 길벗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왜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대번에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무엇보다 그들의 예수관이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예수를 승리의 메시아로만 본 듯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로마의 족쇄로부터 단번에 속시원하게 풀어줄 승리자 메시아로만 믿고 따랐습니다. 온갖 기적을 불러일으키면서도 인간적인 따뜻함을 보여주신 예수야말로,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과 종교적 소외로부터 해방시켜 줄 강력한 카리스마로 우러러 보았습니다. 제2의 모세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카리스마의 강력함은 어이없이 사라져버렸고 예수의 무력함만 남게 되었습니다. 승승장구하는 시저의 모습은 없어지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범법자〉의 딱한 모습만 부각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허깨비 환상을 보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이미 암시했거나 적시했던 고난당하고 패배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알지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나사렛 예수의 말씀과 행동을 구약 예언서의 관점에서 조명할 능력도 없었습니다. 성서에 대한 해석학적 회고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하기야 복음서 자체가 부활체험을 기점으로 역사의 예수를 새롭게 조명하여 예수의 행적을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재해석한 문서임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본문도 그러한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 처형으로 실망했던 제자들에게는 그의 허무하고 처참한 죽음을 예언자들의 관점에서 해석할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의 부활이 철저한 세속적 실패 끝에서, 투철한 자기해체와 자기비움 끝에서 비로소 나타나는 감동, 정말 드라마틱한 감동임을 그들은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한심했던 제자들을 다리시고 그의 고난과 처형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하시면서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때 아무도 그 어느 누구도 이 말씀의 참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음을 또한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수제자였던 베드로가 결코 그러한 고통과 처형과 패배가 있을 수 없다고 우겼다가 야단맞았던 일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때의 제자들에겐 부활이 필요 없었지요. 왜냐하면 살아서 예수가 세속적 승리의 메시아로 당당하게 군림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지요. 그 승리자 메시아 밑에서 고위관직 자리를 탐했던 것이지요. 부활은 처절한 자기부인, 뼈를 깎는 자기해체와 자기비움 끝에서 빛나는 영광의 기쁨임을 그들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엠마오로 내려갔던 제자들은 어떻게 하여 그 길벗이 바로 예수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되었을까요? 여기에는 두 단계가 있는 듯 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진 것이 첫째 단계입니다. 그 길벗이 구약의 예언자 말씀을 상기시키고 그 뜻을 해석해 주었을 때 제자들의 마음에는 뜨거운 공감의 파장이 잔잔하게 생겨났습니다. 참 메시아는 고난과 죽음을 겪게 될 것이라고 지적 해 주었을 때 성령의 감동이 뜨겁게 그들 속에 일기 시작했습니다. 마음에 찡하는 느낌이 생겨난 것이지요. 길벗의 성서 주석은 이렇게 뜨거운 자각과 감동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그 길벗이 그들의 주님임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단계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해가 지고 황혼이 그들의 시야에 잡힐 즈음, 그들은 마을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길벗은 계속 여행하려 했습니다. 이 때 이미 감동을 받았던 제자들은 그 길벗이 좀더 그들과 동행할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허락받았습니다. 그들이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습니다. 식탁에 둘러 앉아 그 길벗과 떡을 떼고 함께 나누어 먹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들의 영의 눈이 비로소 뜨이게 되었습니다. 그 길벗의 정체를 알아 볼 수 있는 영의 눈이 비로소 활짝 열리게 되었습니다.


 

  아 주님이시로구나.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로구나!


  가야바의 심문을 받던 예수로구나!


  가시면류관을 쓰고 놀림을 받던 주님이로구나!


  빌라도의 법정에 처연하게 서있던 예수님이로구나!


  아니 그 비참했던 십자가 위에서 절규하셨던 예수님이로구나!



 

  이 같은 깨달음이 폭포수처럼 그들 위에 쏟아져 내림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길벗과 떡을 함께 떼는 순간 제자들은 갈릴리 지역에서 예수님과 함께 했던 공동식탁의 그 파격적 즐거움을 상기할 수 있었습니다. 역사적 예수의 그 역사적인 밥상공동체의 흥겨운 모습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떠돌이 생활에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과 밥상에 둘러 앉아 격의 없이 대화하며 음식을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가히 혁명적인 평등공동체 실천운동이었습니다. 왜 밥상공동체운동이 혁명적이었을까요?

 

  먼저 계급의 벽이 그 상 주변에서는 무너졌습니다. 도저히 한상에 둘러 앉아 함께 떡을 나눌 수 없는 당시 반상(班常)이 예수님과 함께 둘러 앉아 떡을 뗌으로써 계급장벽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급이 달라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없는 이들을 한상에 둘러앉도록 초청하였습니다. 이같은 밥상공동체야 말로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운 평등의 모습이었습니다. 이것은 미국 흑인인권운동가 킹목사의 ‘꿈’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性)의 벽도 무너졌지요. 뿐만이겠습니까. 이방인과 유대인 사이의 ‘건널 수 없는 불신의 거리’도 줄어 없어지는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지요. 이러한 파격적 사건을 목격하거나 직접 참여 했던 사람들은 “아하 이것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멋진 잔치 모습이구나”하고 감탄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밥상공동체로의 초청은 일종의 해방의 초청이었습니다. 온갖 구조적, 역사적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주는 초청이었습니다. 때로는 점잖은 종교지도자들로부터 “게걸스럽게 먹는 대식가”라든지 “술을 탐하는 사람”이라든지,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는 욕설을 들어가면서도 이를 개의하지 않으시고, 지극히 작은 사람들과 꼴찌 인생들을 공동식탁에 불러주신 예수님, 그 나사렛 예수를 엠마오로 내려갔던 제자들은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 이 길벗이 바로 역사의 예수로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되면서 얼마나 흥분했겠습니까! 바로 이분은 사흘 전에 십자가 처형을 당했는데 바로 눈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앉아계시어 우리와 함께 다시 떡을 나누고 계시는구나 하는 진한 감동을 느끼게 된 것이지요. 여기서 우리는 역사의 예수와 부활의 그리스도가 바로 한 줄에 이어짐을 확인하게 됩니다. 아니 그들 제자들이 확인하게 되지요. 십자가에 처형된 나사렛 예수는 그들에게 이제 부활의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새롭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제자들은 그 길벗과 떡 떼기를 함께 하면서 예수의 최후 만찬 모습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때의 그 긴박감, 그 긴장감, 그리고 제자들의 스스로의 우매함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비록 이 두 제자는 최후 만찬에 참여했던 열둘 중에 속하지 않았더라도, 이미 그 만찬 때에 일어났던 일들을 들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빈 무덤에 달려갔던 남녀 제자들을 ‘우리’로 불렀던 그들이기 때문이지요. 최후 만찬에서 예수께서 친히 자기 몸을 떡으로, 자기가 흘릴 피를 잔으로 말씀하시면서 예수의 몸을 먹고 예수의 피를 마시는 새로운 공동체를 제의하셨습니다. 이 공동체는 예수의 자기해체를 실천하는 고난의 공동체이기도 합니다. 또한 자기를 철저히 비워 남을 살려내는 사랑의 실천공동체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성만찬의 참 뜻은 자기비움과 자기해체의 실천에 있습니다. 제자들은 엠마오 도상에서 그 길벗과 떡을 떼면서 바로 이 최후만찬의 참뜻을 새롭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남을 위한 자기 몸 떼어주기와 자기 피 흘리기는 값싼 승리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것임을 의미하고 오히려 비참한 세속적 패배를 뜻함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가야바의 법정과 빌라도 법정에서 억울한 재판을 받아야 했는지, 왜 주님이 조롱과 채찍을 받아야만 했는지, 왜 십자가를 지고 해골언덕으로 기진맥진 올라가야만 했는지, 왜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나막사박다니”를 처절하게 외칠 수밖에 없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같은 쓰라린 수모와 고통과 죽음을 거쳐 오늘 엠마오 도상에서 이렇게 식탁에 다시 앉아 함께 떡을 나누게 되었음을 제자들은 비로소 영의 눈을 뜨고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엄청난 감동의 만남이라 하지 않을 수 없지요. 어제의 나사렛 예수가 오늘의 주님 그리스도로 새롭게 나타나셨음을, 사흘 전 돌아가신 역사의 예수가 오늘 이렇게 다시 살아나시어 그 모습을 다른 모양으로 드러냈음을 그들은 영안을 열어 비로소 알게 되었고 또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나사렛 예수는 그들의 육안으로 보고 만났지만, 이제 그들의 영안으로 부활의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된 것이지요. 이때 그들이 느낀 놀라움의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 나타나신 그리스도가 바로 나사렛 예수의 새로운 모습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활의 그리스도로 인해 역사의 예수가 즉각 상기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갈릴리에서 예수의 밥상공동체와 엠마오 도상에서 그리스도의 떡 떼기가 별개의 사건이 아님을 더더욱 꼭 기억해야 합니다. 특히 소중한 밥상공동체의 참여를 통해 체험하는 해방과 평등의 환희 속에서 예수와 그리스도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체험을 오늘의 상황에서도 계속 기리고 보존해나가야 합니다. 예수 따르미들의 예배도 사귐도 모두 이와 같은 떡 떼기 사건으로부터 연유된다는 사실을 새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부활의 그리스도 체험도 새로운 밥상공동체 체험이요 성만찬 체험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평등공동체의 뜨거운 희열을 오늘 여기에서 체험해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역사예수를 우리가 지금 그 실물로 만날 수 없지만, 성령을 통해 부활의 그리스도는 언제나 만날 수 있다는 고백입니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우리와 함께 살아계시는 지금 나와 우리의 주님이시지만, 역사적 예수는 지난날에 존재하셨던 역사적 존재입니다. 역사의 예수는 오늘 우리의 회상의 대상이지만, 그의 가르침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기쁨으로 더욱 존중하고 따라야 하는 소중한 오늘의 살아있는 교훈입니다.

 

  이제 우리는 본문의 사건이 황혼녘에 벌여졌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황혼은 밤의 세력이 힘을 뻗기 시작하려는 순간입니다. 절망을 안고 황혼을 바라보며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에게 그리스도 예수께서 동고행(同苦行) 길벗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렇습니다. 2003년의 황혼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마지막 주일을 맞아 절망하고 있거나 좌절해 있는 우리들에게도 희망과 용기를 주시고, 뜨거운 깨달음을 주시기 위해 길벗으로 다가오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영의 눈을 우리도 떠야 하겠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난 뒤, 그들의 삶의 방향은 180도 달라졌고, 그들의 삶의 내용도 근본적으로 전환되었습니다. 그들은 황혼에서 새벽을 향해 달려 나갔습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던 발을 되돌려 예루살렘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옛 생업을 찾아 옛 고향으로 향했던 그들의 삶은 이제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예루살렘에서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부활의 그리스도가 주는 능력으로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의 가치를 새롭게 깨닫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 담대한 새 삶을 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초대 예수 따르미 공동체가 바로 이들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다. 예수 따르미는 곧 그리스도 따르미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 따르미가 됨으로써 로마의 학정과 핍박 속에서도 굳건히 견딜 수 있었습니다. 환난과 핍박 중에도 예수의 밥상공동체와 최후만찬의 교훈 곧 함께 나누고 자기를 비워 남을 채워주는 사랑의 교훈을 실천하여 하나님나라 세우기에 앞장섰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연말의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속에서 엠마오 도상에 나타나셨던 그리스도 예수께서 바로 우리들의 삶 속으로도 다가오심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육의 눈으로는 길벗 예수 그리스도의 접근을 확인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눈으로는 그분이 찾아오실 뿐 아니라 우리 속에 와 이미 계심을 똑똑히 보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 체험은 우리가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마치 제자들에게 예고 없이 길벗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 왔듯이 말입니다. 다만 우리도 그들과 같이 영의 눈이 어두워져서 길벗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절망과 좌절의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우리의 소중한 것을 남들과 함께 떼고 나눌 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비우고 해체시키면서 좋은 것으로 남을 가득 채워주려고 힘쓰고 애쓸 때, 우리의 영의 눈은 활짝 열려 질 것입니다. 그리하여 고난의 예수의 삶을 새롭게 이해하게 되고 부활 환희의 그리스도를 뜨겁게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연말을 맞아 우리는 역사의 예수를 회상하며 신앙의 그리스도를 떡 떼기 사랑 실천을 통해 반갑게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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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2003 [2003.10. 5] "신앙의 세 단계" 2003.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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