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_btn
2002
2003.01.03 16:18

[2002.12.29] 시간의 유예

(*.206.75.175) 조회 수 2620 추천 수 5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설교자 최만자

"시간의 유예"

(누가복음 13:6-9)

 

 

2002.12.29

최만자 자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 누가복음 13:6-9



참으로 유수 같은 세월의 흐름입니다. 2002년 새해를 맞았다고 새해소망을 쏟아 놓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이 해의 끝자락에 다다랐습니다. 또 1년을 보내는 심정은 지난날에 미처 이루지 못한 일들에 대한 아쉬움과 혹은 나도 모르게 저질러진 잘못들에 대한 후회와 안타까움 그러면서도 무엇인가 좋은 일, 좋은 결과가 오게될 것 같은 불안한 기대감 등이 항상 묘한 감상으로 얽힘을 갖는 것 같습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한해의 시간들도 늘 그런 표현을 썼듯이 참으로 '다사다난' 하였습니다. 꼽아보는 10대 뉴스들은 국내의 사건으로는 월드컵 4강 붉은 악마 열풍, 북 핵계획, 봉인제거 파문, 여중생 사망 촛불로 부활, 김홍업 홍걸씨 잇단 구속, 태풍 루사 곳곳 큰 상처, 서해교전 팽팽한 긴장감, 민주 노동당 약진, 한반도 끊어진 허리 잇기, 토요일은 쉬는 날 확산, 노무현 제16대 대통령 당선 등이고, 국외로는 강경한 부시 이라크 압박, 끊임없는 테러 유혈 충돌, 중 4세대 지도자 앞으로, 브라질 좌파 대통령 등장, 회계부정 세계경제 타격, 북 일 정상 역사적 첫 회담, 유로 본격 사용, EU확대, 미국을 뒤흔든 연쇄 저격, 프랑스 극우파 르펜 돌풍, 활발한 국제연대 움직임 등을 꼽고 있습니다(한겨례, 12월 27일자). 이렇게 돌이켜 보니 그 일들을 겪어 오느라 우리들의 숨이 턱에 닿도록 허덕거렸던 것 같습니다. 그 중에도 치른 지 얼마 되지 않은 16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여운과 기대. 그리고 북한 핵 문제 해결을 위한 남북 미국 간의 긴장관계는 지금 우리의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날카롭게 우리 앞에 서 있는 일입니다. 정말 새해에는 모든 문제들이 잘 풀려서 좋은 일들만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해 집니다.

그런데 새로운 시작은 언제나 지난 일들에 대한 철저한 결산을 가져야만 제대로 출발됩니다. 소위 과거의 청산이 있어야만 새로움이 자리 잡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청산의 과정을 특히 정치 사회적 과제에 대한 문제들을 누군가가 해야하는 일로, 혹은 누가 어떻게 잘하나 못하나 두고보자는 식의 태도로 나와 무관한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새 대통령 당선자에게 주문도 수 천 가지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한해를 돌아보며 새해를 맞이하는 이 시점에 우리 자신이 자신의 삶의 개혁과 더불어 민족의 삶 또한 새로이 진행하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하는 일이 참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이 말씀을 택하여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들에 대한 결산과 새로운 시간을 맞으려는 열린 마음이 교차하는 이 세모의 때에는 묵은 해 동안의 그 숱한 회한과 아쉬움 들을 날려보내고 새로운 날을 맞이하려고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한 개인의 삶도 깊은 성찰을 통한 재정비의 시기일 뿐만 아니라 한 민족의 삶도 그렇게 정비해야하는 시기일 것입니다.

성서에는 결산의 일에 대한 비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이고 우리에게 잘 알려진 비유는 마태복음 25장 14-30절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일 것입니다. 이 비유는 누가복음19:11-27의 므나 비유와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두 복음서의 표현에는 몇 가지 상이함이 있습니다. 마태는 주인이 세 명의 종에게 각각 다른 액수의 돈을 위탁하고 있고 누가에는 10명의 종에게 똑같이 한 므나씩을 맡기고 주인이 떠나고 있으며, 마태는 보상에 대해서 추상적인데 비해 누가는 구체적으로 사업을 벌리도록 지시하면서 그 보상에도 구체적 명시를 하는 등등의 차이입니다. 그럼에도 주인이 먼 길을 떠나면서 종들에게 자신의 재산을 위탁하고 떠나고 다시 돌아와 재산관리 및 증식을 위한 청지기직 수행 정도를 각각 평가하게 되고 그 결과 칭찬과 비난의 대비가 벌어지고 특히 재화를 묻어둔 종에 대한 가혹한 징벌로 마무리하는 구성은 같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마태 25장 28-30에는 한 달란트를 묻어둔 종에게 게으르고 악한 종이라는 판결이 내려지고 어둠 속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는 심판은 다분히 종말론적 심판의 어투로 강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실 오늘 본론과는 약간 거리가 있을 수도 있지만 이 비유에서 우리의 궁금증은 예수는 이 비유에서 원상 보존의 태도는 비판하고 적극적인 투자를 하여 이윤을 남기는 경제행위를 칭찬하신 것일까? 라는 물음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많은 해석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본문은 경제신학적 주제로 읽기보다는 현 상태를 보존하려는 보수적 입장과 모험을 감수하더라도 적극적으로 새로운 현실을 개척하려는 진보적 자세의 차이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이라고 해석됨이 타당하다는 학자들의 견해입니다.

다시 우리는 본문의 구성이 결산에 따라 잘못된 결과에 대하여 심판을 부르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음에 주목하여 봅니다. 결산과 심판은 불가분리로 연결되어지고 따라서 성서의 결산은 심판을 위한 전 과정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산의 때가 왔다는 것, 그것은 곧 심판의 때가 왔다는 것이며 그 때가 매우 임박하여 있는데 아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바로 앞에 있는 12장에는 바로 이러한 심판의 현상과 그 긴박성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누가 12:49-50에 '내가 세상에 불을 붙이러 왔다. 불이 이미 붙었기를 내가 얼마나 원하였는가! 내게는 받아야 할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내가 얼마나 괴롭겠는가! .... 내가 세상에 분열을 일으키려 왔다' 는 등의 비극적인 갈등이 메아리치는 표현의 이 내용들은 심판의 때에 당면할 현상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구원의 때를 가져오는 자이지만 그러나 그는 구원과 새 창조를 향한 길은 재난과 파멸, 연단과 심판, 불과 물의 범람을 통과해야 함을 알고 있고 이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 전체에 흐르는 이 종말론적 심판의 긴박성은 우리를 긴장하게 하고 더 이상 구원의 희망을 잃고 좌절하고 표류하게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그 긴박성을 완화시키면서 새로운 생각을 열게 하는 다른 차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징벌의 시간을 유예 받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도 결산과 징벌의 구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과수원 주인이 무화과나무 열매를 거두려고 왔지만, 그것도 세 해씩이나 그렇게 했지만 그 나무가 열매맺지 못하였음에 분노하여 '나무를 불에 찍어버리라 무엇 때문에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는 심판을 내립니다. 그런데 포도원지기가 애원합니다. '한해만 더 시간을 주십시오, 그러면 내가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다음 철에 열매 맺을지도 모릅니다.'라고.

본문을 자세히 보면 포도원지기가 아무리 간청해도 주인의 입장에서는 그 나무는 더 시간을 줄 가치가 없는 나무로 판단됩니다. 즉 열매맺기를 기대하면서 시간을 유예 받기는 어려운 상태의 나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원지기는 혼신을 다하여 이 나무를 살리고자 시간을 더 줄 것을 주인에게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나무가 시간의 유예를 받을 가치가 거의 없다는 사실은 본문을 자세히 읽으면 나타납니다. 13장 6절에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팔레스틴에서는 대개 포도원에 과일나무들을 함께 심으므로 과수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무는 우선 나무가 자라기만 하는 데도 3년이 걸리므로, 심은 지 이미 6년이 지나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열매 맺기를 바라기에는 어려운 상태의 나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무화과나무는 특히 많은 양분을 빨아들여서, 그 과수원의 포도나무들의 성장에 필요한 양분을 빼았기 때문에 던져 버리지 않으면 다른 나무들도 버리고 땅을 망치게 되는 경우가 생길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부터 베다니에 이르는 길가에 벳파게라는 곳이 있는데 그 이름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들의 집'이란 말로 번역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고 합니다. 아마도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마가복음 11장 13절, 마태 21장 18절에도 열매를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가 저주를 받았다고 합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보아 주인이 이 포도원지기의 간청을 들어주는 일은 어려운 조건들로 둘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5세기의 사화로 확인되는 아힉키르 사화가 있는데 이 이야기와 연결되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물가에 서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다. 이제 주인은 그 나무를 베어 버려야 하게 되었다. 그때 그 나무가 주인에게 말했다. 나를 옮겨 심어 주세요. 그때에도 내가 열매를 맺지 못하거든 나를 베어 버리세요. 그러나 그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물가에 서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했거늘 어찌 다른 장소에 옮겨진다고 열매를 맺겠는가?" 이 사화는 시간의 유예가 허락되지 않는 사회적 관습이나 풍토를 암시하고 있어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원 지기는 비상수단을, 마지막으로 가능한 시도를 다 동원하면서 시간을 더 달라고 간청하고 있으며, 이 포도원지기의 간청을 들어주는 주인의 모습을 오늘의 본문은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는 아마도 당시에 여러 다른 형태로 돌아다니던 민화를 이용했으나 그것들과는 다르게 결론을 맺는 내용으로 간청이 거부되지 않고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로 전환하였습니다. 곧 심판의 고지는 징벌로 이어지지 않고 회개에의 부름으로 연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이미 작정된 형벌까지도 중지시킨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 성서의 심판과 징벌의 상징표현을 별로 좋아하지 안습니다. 사실 기독교는 심판과 징벌의 하나님을 가지고 너무 많은 공갈과 협박을 해 왔습니다. 예수도 심판과 징벌의 하나님을 두려워 벌벌 떨기만 하는 유대인들의 믿음을 비판하고 사랑의 하나님을 역설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심판의 본질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구약성서에서 일관하는 종말론적 하나님의 심판도, 신약성서의 종말론적 심판의 비유들도 사실은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고 구원하고자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 있고 구원을 이루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인 것입니다.

이 결산과 심판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회개를 근원적으로 요청하는 메시지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해의 결산, 그것은 곧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서 내 존재의 근원적 새로움을 위해 진지한 회개를 할 필요가 있음을 다시 발견하고자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심판의 시간을 유예 받는 이 비유를 대하면서 저 자신의 삶의 태도에 대해 근원적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사실 새길교회에 나오시는 자매 형제분들 가운데 불에 던지움을 당할 잘못을 저질러 심판을 두려워 할 분은 없으실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본문이 가슴에 와 닿지 않을 것입니다. 징벌 받을 만한 열매맺지 못한 삶이 나에게는 없다고 쉽게 생각 될 수 있습니다. 열매가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먹을 것을 생산해 내지 못하니 남에게 생명보존을 주지 못하는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저는 어제 저녁 뉴스에서 성덕 바우만의 결혼식을 전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불치의 백혈병을 극복하고 새 생명을 얻은 그가 이혼하고 두 딸을 가진 암 전문 간호사와 결혼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인가 그는 두 눈에 눈물을 주르르 흘리면서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기쁨을 함께 하면서 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인간답게 사는 것은 그의 말처럼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돌이켜보니 나의 삶은 전혀 그러하지 못했음을 보게되었습니다. 이 본문과 연결하여 생각해 보니 나는 참으로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이구나 싶었습니다.

저는 제가 살아온 중에 목숨을 잃을 위기를 두 번 경험했습니다. 한번은 크게 교통사고를 당하여 의식을 잃었지만 곧 깨어났습니다. 결국 탈골 상태로 6개월 간 걷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 이후 내 삶은 덤으로 주어진 것이니 잘 살자라고 다짐한 적 있습니다. 다른 한번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였습니다. 그 붕괴 40-50분전에 그곳을 나왔습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던 경험이 더 나은 삶을 살아야지 하는 결심으로 왔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이후에도 아무런 질적 성숙 없이 살아왔음을 결산하게됩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입니다. 그 위기의 시간들 이전보다 내가 사람들을 더 사랑했던가? 더 큰 여유를 갖고 그리고 항상 원칙에 맞게 살아왔던가? 삶을 적당히 살면서 그것이 자유로움이라고 합리화하지 않았던가? 내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한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정말 정의로움에 서서 살아왔던가 등등, 지금 당장 나의 생애를 결산하자고 든다면 저는 영락없이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임을 알았습니다.

저는 2002년 이 끝자락에 자신에 대한 많은 근원적 질문을 던지면서 오늘의 본문과 마주하였습니다. 나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진정한 회개를 하는 일이 필요해졌습니다.

우리는 보통 타고난 수명이 있다고 생각하지요, 명대로 산다 못산다 합니다. 그래서 아직 날들이 나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살고 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예 받은 시간인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결산하였다면 이미 던져졌을 인생인데 하나님께서 나에게 시간을 유예하여 주신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것에 대하여 우리는 진실로 회개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숨쉬고 웃고 먹고 마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시간을 유예하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얼마 전 새길 홈페이지에서 '당신이 하지 않은 많은 일들'이란 제목의 글을 읽었습니다.

내가 당신의 차를 몰고 나가 망가뜨린 날을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날 때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당신이 비가 올 거라고 말했는데도 내가 억지로 해변에 끌고 가
비를 맞던 때를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비가 올 거라고 했잖아!" 하고 화를 내리라 생각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내가 당신을 질투 나게 하려고 다른 남자들과 어울려
당신이 화가 났던 때를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떠나리라고 생각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내가 오렌지 주스를 당신 차의 시트에 엎질렀을 때를
기억하시나요?
난 당신이 내게 소리를 지를 거라고 생각했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내가 깜박 잊고 당신에게 그 댄스파티가 정식 무도회라는 걸
말해 주지 않아서
당신이 작업복 차림으로 나타났던 때를 기억하나요?
난 당신이 내게 절교를 선언할 줄 알았지만
당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그래요 내 생각과는 달리 당신이 하지 않은 일이 참 많았어요
당신은 나에 대해 인내해 주었고
나를 사랑했으며 감싸주었어요
당신이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올 때
당신에게 사과하는 뜻으로
내가 하려고 했던 일이 참 많았어요
하지만 당신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우리가 매 순간을 하나님으로부터 유예 받은 시간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자유롭고 풍성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이들과 만남을 가질 때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하는 종말론적 태도를 가진다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 사색을 넘어 우리 민족의 차원에서도 생각해 봅니다. 지역주의, 연고주의, 남북냉전구조 등등 결산을 한다면 수없이 많은 징벌의 내용들이 나올 것입니다. 불에 던지우던가 뿌리가 뽑혀 던져질 대상일 수 있는 곧 열매 없는 무화과 같은 상태에 처하여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2002년을 지나면서 이 민족을 위해 간청하는 포도원 지기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붉은악마들과 숭고한 촛불의 물결이 포도원지기가 되어 간청을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에게 시간을 유예하신 것입니다. 나는 누구가 좋다든가 나는 누구를 투표했다든가의 차원을 떠나서 이 민족이 냉전사고, 지역주의, 패권주의, 권위주의, 금권주의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유에 받은 시간은 의미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우리자신들이 열심히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는 일을 해야만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이 시간 앞에 우리는 보다 근원적 차원의 회개와 성실함으로 마주해야만 할 운명 앞에 놓였습니다.

포도원지기의 노력은 나무를 근본적으로 새 나무로 고쳐 가는 것이었습니다. 민족이란 나무를 새롭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시간을 주셨다고 생각하고 거름주고 둘레를 새로 파는 일에 온 마음을 합하여 노력해야만 포도원지기의 간청은 실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바로 거듭남의 사건일 것입니다. 거듭남에 대하여 니고데모는 모태에 다시 들어가야 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나 종말론적 관점에서 본다면 거듭남이란 심판의 어려운 과정들을 모두 겪으면서 새로이 창조되어 태어나는 새로운 시간 안에 들어가는 사건인 것입니다. 이전의 모든 잘못들이 청산되고 온전히 다시 태어나는 모습으로 새 시간을 맞는 사건일 것입니다.

시간의 유예는 단 1회만 가능한 것이라는 성서의 주장입니다. 무한정 주어지는 것 아니라 단 한번 유예된 이 시간을 소중하게 사용하여야 하겠습니다. 이 마지막 기간이 회개의 기회로 이용되지 않은 채 지나가 버리면, 하나님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회개의 기간이 지나가 버리면, 그것을 연장할 수 있는 힘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 마태 6:27(눅 12:25)에는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자나 더할 수 있느냐라는 말의 원래 의미는 바로 이 종말적 상황에 하나님의 뜻을 져버리는 것은 어느 힘으로도 회복 불가능함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마지막기간이 모든 갈등과 증오와 배척을 날려버리는 진정한 변화의 시간으로 운영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포도원지기는 예수 자신의 모습이라고 해석됩니다. 열매 없고 쓸모 없는 이 나무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살려나가는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주어진 유예된 시간을 맞아야겠습니다. 나의 인생 길에서 쓸모 없는 나를 끝까지 돌보고 보살펴주는 내 옆에 있는 작은 예수들을 만나고, 나 역시 저들의 작은 예수가 되고 이 민족의 새로움을 위해 동고동락의 역사를 나누면서 서로 서로에게 유예된 시간을 갖게 하고 그 시간동안 새 생명으로 거듭날 수 있는 은혜의 공동체로 2003년 다시 태어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설교자
» 2002 [2002.12.29] 시간의 유예 2003.01.03 최만자
45 2002 [2002.12.15] 인간이 되신 하나님 2002.12.17 길희성
44 2002 [2002.12.08] 예수 없는 크리스마스 2002.12.13 한완상
43 2002 [2002.12.01]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2002.12.05 한인섭
42 2002 [2002.11.24] 삼위일체적 삶 -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2002.11.28 권진관
41 2002 [2002.11.17] 하나님과 상대하시오 2002.11.21 박태식 교수
40 2002 [2002.11.10] 그 중에 으뜸은 사랑이라 2002.11.12 한완상
39 2002 [2002.11.03] 발람과 그의 나귀 2002.11.07 정미현 목사
38 2002 [2002.10.20] 사랑의 질서 2002.10.23 길희성
37 2002 [2002.10.13]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나님 2002.10.15 한완상
36 2002 [2002.10.06] 예수의 자연사상 2002.10.10 김명수 교수
35 2002 [2002.09.29] 늘 고맙습니다. 2002.10.04 박재순 목사
34 2002 [2002.09.22] 나사로를 기억함 2002.09.27 권진관 목사
33 2002 [2002.09.15]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 2002.09.18 김창락 교수
32 2002 [2002.09.08] 빙그레 미소짓는 하나님 - 기도의 기쁨과 감사 2002.09.12 한완상
31 2002 [2002.09.01] 동족을 위해서라면... 2002.09.07 최영실 교수
30 2002 [2002.08.2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002.08.27 길희성
29 2002 [2002.08.18] 와서 보라, 과연 우리는 무화과 나무 밑에 있나 2002.08.23 한완상
28 2002 [2002.08.11] 포도원 품꿈과 품삯 2002.08.13 정형선 교수
27 2002 [2002.08.04] 지식과 지혜 2002.08.07 채수일 목사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