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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인섭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창세기 22:1~18)

 

 

2002.12.01

한인섭 형제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 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이르시되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 창세기 22:1~18




말씀증거에서 말씀나눔으로

새길교회의 가장 큰 특징 중의 하나는 말씀증거의 기회를 평신도에게 개방한다는 것입니다. 신성한 설교대라면 그것은 목사 안수를 받은 성직자에게만 허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한국 기독교의 전통에 대하여, 루터의 만인사제론을 받아들여 평신도의 말씀증거를 인정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작 신학 근처에 가지 못한 진짜 평신도에게 말씀증거는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남이 도달하기 어려운 말씀증거보다, 교우들과 함께 말씀을 나누는 형태가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평신도에게는 말씀증거보다 말씀나눔이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지요. 그러면 말씀을 어떻게 나누는가 하는 다음 질문이 등장합니다. 마침 교우들간에 새길교회 홈페이지나 이메일을 통한 쌍방향-다방향의 의사소통의 길이 열렸습니다. 저는 지금 나눌 말씀을 준비하면서 고민되는 사항을 띄워 올렸고, 바쁘신 중에서도 몇 분의 답을 받았습니다. 답변은 길지 않았지만, 내용과 정성, 관점 면에서 도움과 격려를 받았습니다. 앞으로 평신도교회는 추상적 지식으로부터 구체적 체험으로, 다시 말해 지식에서 삶으로 나눌 말씀의 내용이 바뀌어져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평신도에게 말씀나눔의 기회를 보다 강권하고, 우리 평신도도 늘 말씀나눔을 마음속으로 준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목에 걸린 가시

성경을 읽다보면 가끔 이해가 안 되는 부분과 만납니다. 그럴 땐 어떻게 하나요. 대충 넘어가지요. 내가 모르는 뭔가 심오한 진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면서요. 특히 한국 신도들은 성경내용에 대해 질문하려 들지 말고 믿으라고 배워 왔습니다. 의문은 종종 불경 내지 불신앙으로 오해됩니다.

그런데 도저히 대충 넘어갈 수 없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오늘 살펴볼 이 사건, 아브라함의 자녀공양사건(법적으로 말해 이삭에 대한 살인미수사건)이 그렇습니다. 이 줄거리는 너무나 명료하기에 오해가능성도 없습니다. 이 사건을 피해갈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비중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아브라함의 신앙체험 중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아무리 믿음의 조상이라 일컬어질 지라도 아브라함 역시 많은 결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자신의 여종 하갈과 그녀와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광야로 쫓아내는 비정한 모습, 아내 사라를 누이동생으로 속이고 애굽의 바로의 아내로 들여보내는 행위 등은 당시의 가부장제의 한계와 이방인 사이에서 생존해야 하는 특수상황 등을 감안해도 비난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대의 한계라 변명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렇게 감안하고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이 사건에서조차 아브라함이 한 일이 정당화되거나 변명될 수 없다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하여 내려온 세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 파탄을 맞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고민은 아들을 제물로 바치라고 한 하나님을 비난할 수도 없으며(하나님이 잘못되었다고 하면 그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문닫아야 할 것입니다), 그 명령에 순종한 아브라함을 함부로 비난하기도 어렵습니다(아브라함에 대한 비난은 곧 그 종교의 위기를 초래할 것입니다). 그러면 둘 다 그런 대로 잘했는가? 아들을 살해하라고 했다가 천사를 시켜 중단시킨 하나님,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아들을 살해하려 했다가 천사의 만류에 중단한 아브라함 둘 다 잘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까? 이 사건만큼 극적인 스토리도 없지만, 이 사건만큼 갈피를 잡기 어렵고 가끔은 거부하고 싶은 이야기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이야기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요? 이 이야기는 우리 목에 걸린 가시와 같은 것이며, 한번 정리한다고 해도 다시 질문에 질문이 거듭되는 테마이며, 아마 기독교인으로서 평생 안고 가야 할 화두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제가 참석한 구역예배를 인도하던 장로님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삭을 바친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까?" 저는 순간적으로 그 질문에 대한 반발감을 느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를 바치라는 명령을 할 분인가? 우리는 그처럼 불합리하고 부정의한 명령이라도 그저 순종해야 하는가? 그 이야기는 창세기 차원의 이야기인데, 오늘날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마치 가장 신앙의 모범처럼 떠받들어야 할까? 하는 의문들이지요.

오늘날 그런 명령에 그런 순종을 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 중에 판사님도 계신데 어떤 노인이 아들을 제단에 묶어놓고 죽이려다 잡혀왔다면 어떻게 재판해야 할까요? 약간 비슷한 사건은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형법판례 중에서 이런 예가 있습니다. 어떤 신도가 산에 가서 기도하는데, 자기는 죄가 많아 천국에 갈 수 없는데 사탄의 대리인인 백 목사를 죽여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계시를 받아 죽였다는 사안입니다. 이 사람은 하나님에 순종한 자로 찬양되어야 할까요. 우리 법정에서는 이 사람을 정신감정에 의뢰했고, 그는 정신분열증 환자로 판정되어 형벌 대신 치료감호선고를 받았습니다. 오늘날 이런 계시에 의한 살해를 정당화할 논거는 없습니다. 그러면 지금은 부정의한 범죄행위가 창세기 때는 정당했던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단 말인가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은 왜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했기 때문에 천하만민이 너의 자손들로 인해 축복을 받으리라"(창 22:18)는 약속을 얻게 되었는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질문은 다음과 같이 구체화될 수 있습니다. ① 하나님은 왜 이런 시험을 아브라함에게 주었을까? ② 아브라함은 왜 그런 시험에 순종하고 명령대로 행동했는가? ③ 아들을 죽이려는 시점에 왜 천사가 불러 아들을 죽이지 말라고 했을까? ④ 만일 천사가 말리지 않았더라면 아브라함은 아들을 죽였을까, 그리고 그러한 죽임도 찬양 받아야 할까? ⑤ 이 예화가 예수의 희생과는 무슨 상관이 있을까? ⑥ 이 예화를 통해 남겨진 교훈은 무엇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질문에 대해 충분히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아마도 정답이 없는 질문이라 생각됩니다. 이 사건에 대해 수많은 문헌이 있고, 지금도 이스라엘의 신학교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해석이 한 과목을 이루고 있다고도 합니다. 하지만 만용을 무릅쓰고 말씀드리는 이유는, 다른 형제자매들이 이 주제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더 풍부한 믿음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어서입니다.

왜 이리 잔인한 시험을?

저는 이 시험의 목적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창세기 22:12를 보면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시험의 목적은 극한상황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는지 알아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평생동안 하나님 경외를 실천해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시험을, 그것도 천륜과 인륜의 근본에 어긋나는 이런 시험을 걸 필요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제야" 알았다고 하니, 이 시험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명령에 반응할지 몰랐고, 아브라함 역시 하나님이 그 과정에 어떻게 개입할지 몰랐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시험의 마지막 순간에 천사가 "짜잔"하고 개입하여 죽음에 이르지 않고, 복종의 대가로 큰 선물을 안겨주실 것을 아브라함이 예측했다고 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속인 셈입니다.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지요. 그 시험의 의도를 몰랐다면, 하나님은 충성테스트를 위해 믿음의 인간을 잔인하게 농락한 셈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할만한 하나님이 되기 어렵지요.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경우에도 악행에의 초대를 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시대에도 그 점은 물론 확연합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개입지점은 아브라함의 악행으로부터 생겨난 불쌍한 사람들을 건져내는 일입니다. 첫째, 아브라함은 사라가 오래 잉태하지 못하자 여종 하갈과 접촉하여 이스마엘을 낳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태어난 본처의 자식 이삭이 이스마엘에게 희롱 당하자, 아내 사라의 부탁을 받고 하갈과 이스마엘을 집에서 쫓아냅니다. 아브라함은 하갈의 어깨에 떡과 물 한 가죽부대만을 매워주고 모자를 쫓아내니, 하갈이 나가 들에서 방황하다가 물이 다하고, 자식이 죽는 것을 참아 보지 못하겠다고 하고 방성대곡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사자가 "두려워말라, 하나님이 저기 있는 아이의 소리를 들으셨다"고 하면서 그들 모자에게 축복을 내려줍니다. 아브라함의 비정함과 하나님의 돌보심이 극히 대조되는 대목입니다. 아브라함의 악행으로부터 초래될 생명유린을 막는 하나님이신 것이지요.

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와 애굽 땅에 가면서 아내를 누이동생이라 속입니다. 애굽사람이 사라가 아브라함의 아내인 줄 알면 아브라함을 죽이고 아내를 약탈해갈 것이 우려되어서입니다. 사라는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어가게 되는데, 여호와께서 바로에게 큰 재앙을 내려 그 아내를 해치지 못하게 합니다(창 12: 10-20). 이렇게 아브라함은 자기 목숨을 살리기 위해 그랬다고 하지만, 어쨌든 그의 행위는 아내를 유기하고 바로는 그 아내를 차지하게 됩니다. 이렇게 남편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권력자의 횡포의 노리개가 될 뻔한 여성을 하나님은 구해내고 돌보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런 행위는 아브라함의 경우 2번, 이삭의 경우 1번씩 일어나는 것을 보아 당시의 가부장의 생존책의 한 방편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주위의 권력자로부터 희생당하는 약자들(여종, 여종의 아들, 아내)의 곡성을 들으시고, 아픔을 위로하시며, 은혜로 보살핍니다. 아무리 가부장사회, 족장사회라 할지라도 누구의 생명이나 복지도 함부로 다루어선 안됨을 보여줍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아들이라 할지라도 가부장의 뜻대로 그의 생명이 다루어지는 사회였습니다. 이삭의 생명 역시 아브라함의 뜻대로 좌우할 수 있던 시대이기도 했겠지요. 그렇기에 하나님의 이삭제물명령에 대해 아브라함은 그 명령 자체를 이상하다고 생각지는 못하고 복종한 것이겠지요. 그리고 천사를 통해 이삭을 가부장의 횡포로부터 건져냄으로써, 사람의 생명은, 비록 자기 자식의 생명이라 할 지라도, 결코 가부장의 마음대로 할 수 없음을 일깨워주기 위해 이런 시험을 준비하셨다고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브라함은 순순히 순종하는 인간인가?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의 믿음, 과연 그는 믿음의 조상답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자였습니다.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첫 의미 있는 출현(12:1-)을 봅시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자기가 가진 모든 것―혈연과 지연의 모든 인연과 재산―을 버리고 새로 출발하라는 것이지요. 그의 나이 75세, 아내의 나이 65세 때입니다. 믿음은 자기의 가진 것 모두를 내놓고,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오직 믿음만에 의지하여 발걸음을 내디딘다는 것입니다. 결코 쉬운 일일 수 없지요. 이렇게 그는 순종하는 믿음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그가 언제나 순종하는 인간인 것은 결코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맞서 그는 성중에 의인 50인만 있어도 멸하시려나이까 하고 호소합니다. 50인은 45인, 40인, 30인, 20인, 마지막으로 10인만 있어도 멸하시려나이까 하고 무려 6번이나 호소하고 있습니다. 직장 상사 앞에서도 그러기 어려운데, 하나님 앞에 서서 감히 한번도 아니고 6번이나 번의를 촉구하는 것이 얼마나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번의를 요청하면서 서두(序頭)에 하는 말을 보면 그 정성과 안타까움이 가슴을 칩니다.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창18:23)
"성중에 의인 50인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18:24)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18:25)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18:27)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18:30)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18:32)

이같이 하나님의 계획을 수정하기에 이를 정도로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최선의 변론을 다하는 아브라함입니다. 아마 성경 전체를 통해 밑줄 친 구절처럼 하나님과 맞서 말씀하는 인물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런 그가, 자기 자녀에 대한 부당한 희생명령을 들었을 때 왜 항의하지 않았을까요? 그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는 한마디도 적혀있지 않습니다만, 부모된 이로서 그 심정을 짐작 못할 분은 전혀 없겠지요. 성경은 심정에 언급 대신, 번제드리러 가는 과정과 번제하기 직전에 일어난 일을 객관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생생함을 더하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번제를 그 자리에서 실행토록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지시한 번제 장소로 사흘이라 걸어가도록 합니다. 아들을 데리고 죽이러 가는 사흘동안의 동행, 마치 여행이라도 가는 양 천진한 이삭의 모습을 보면서 아브라함은 걸음걸음 보이지 않는 피눈물을 뿌렸음직하지요.

소돔인을 변호하는 아브라함의 모습과 자식의 죄없는 희생요구에 한마디로 못하는 아브라함,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느 부모와는 정반대지요. 북한의 대량 기아와 죽음에는 무관심하면서 내 자식의 독감이 더 큰 문제로 여기고 살아가는 우리들과는요. 아마도 선한 인간일수록 자기를 위한 일에는 무능력하지요. 헐벗은 이웃을 돌보는 밥퍼목사나 꽃동네 신부가 자신을 위한 이재능력이 제대로 있겠습니까. 예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장면을 보면서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이 함께 희롱합니다. "저가 남은 구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라고. 그 말은 사실이겠지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무사히 뛰어내려보라(마태 4:6)는 마귀의 시험을 이겨낸 예수님이고 보면, 기적의 능력은 애초 남을 위해서 쓸 수밖에 없는 능력이지 않겠습니까. 혹시 아브라함도 그것이 자기 문제였기에 그 어떤 변호할 엄두도 못 내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사흘동안의 고통스런 동행 끝에, 아브라함은 이삭을 결박하고, 단 위에 놓고 칼을 내밀어 "그 아들을 잡으려는" 순간!!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창 22:11)

천사의 말씀은 이삭을 구했습니다. 아니 아브라함을 구했습니다. 아니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를 구했습니다. 이삭의 생명과 아브라함의 믿음과 하나님의 사랑이 여기에 한가지로 결합되었습니다. 번민과 갈등은 여기서 씻은 듯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화해와 사랑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누구인가요? 날개 달고 나팔부는 하나님의 사자를 일러 천사라고 부릅니까? 그런 천사는 어디에 있나요? 혹 천사는 그런 조인(鳥人)이 아니라 내 맘속의 선의 의지, 다시 말해 내 맘 속의 하나님의 모습은 아닌가요. 그렇게 본다면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는 소리는, 칼을 잡고 번제란 이름의 살인을 결행하는 그 시점, 고민과 갈등이 절정에 이른 그 시점에서 내면으로부터 터져나온 선(善)의 절규는 아닐까요. '아브라함아! 믿음의 조상, 하나님의 산 증인이란 평판을 듣는 네가, 아무리 신의 명령이라도 이렇게 아들 잡는 짓을 할 수 있단 말이냐! 그것이 정녕 신의 뜻이더냐! 신의 그런 명령까지 들어야 한단 말이냐!' 하는 것이 아니었을까요.

아브라함은 죽임을 어쩔 수 없이 멈추었나요? 아니면 천사의 소리를 듣고 자발적으로 멈추었나요? 저는 아브라함이 자발적으로 죽임을 멈추었다고 확신합니다. 여기서 천사는 몸으로 나타나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 뛰어들어 못 죽이게 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창22:11)로 되어 있습니다. 천사는 목소리로 출현했습니다. (그래서 그 목소리로서의 천사는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더더욱 아브라함 맘속의 천사라 일컬음직합니다) 그 목소리만 듣고 아브라함은 죽임의 시도를 멈추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이 죽이라는 말을 안 했는데도 죽임의 서약을 하고, 멈추라고 해도 그 말을 무시하고 죽입니다. 이 사건을 사사기에 나오는 입다의 딸의 죽임과 비교하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다는 전쟁터에 출정하면서 이기고 돌아오면 처음 집앞에서 만나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약했습니다. 그 서약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닙니다. 제 멋대로 타인의 생명을 희생시키겠다는 서약을 한 것이지요. (이 점에서 하나님의 번제명령 때문에 비로소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과 다르지요)그리고 딸이 소고 치며 반가워하며 달려나오자, "왜 하필 너란 말이냐"하고 한탄하지만 그는 스스로 한 서약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명령이 부당하다고 느껴질 때 그 명령을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입다의 딸이 두달동안 죽음의 유예를 청하고 준비했지만, 그런 기간동안에도 입다는 잘못한 서약을 돌이킬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아브라함은 사흘동안의 동행 끝에 결국 죽이지 않는 것과 비교됩니다.) 전쟁의 사령관 입다에게는 아브라함과 같은 하나님 믿음도, 생명의 존중도, 명령에의 순종의 참 의미도 성찰해내지 못하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입다에게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절규하는 내면의 천사가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입다 뿐 아니라 수많은 입다들이 제 멋대로 서약하고, 제 멋대로 죽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는 소리가 없었다면, 혹은 그런 소리를 듣고도 무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일컫는 종교들(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은 오늘날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죽임을 일삼는 그것을 금지하는 강력한 소리 없이 그 종교들이 설 땅이 있을 리 없기 때문입니다. 명령대로, 믿음대로 순종하기만 하는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종교가 원하는 바가 아닐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자는 아브라함에게 "내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큰 복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 말씀을 "준행"한 대가입니다. 이 준행, 다시 말해 순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명령은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이삭을 희생시켜라는 것, 또 하나는 이삭을 희생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 모순되는 말씀을 아브라함은 시키는 대로 복종했던 것인가요? 그런데 아브라함과 하나님 모두 이삭의 희생을 원치 않았을 것이라고 한다면, 처음부터 '당신의 명령을 받들지 못하겠나이다'고 한 것과 두 명령을 다 준행한 것과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 질문을 앞에 놓고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한 이유가 절묘하게 다가옵니다. 신앙이 약한 자는 하나님의 첫 명령에 실망하여 더 이상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지 않을 것이며, 맹신에 이른 자는 첫 명령대로 기필코 이행하려 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시험대상에 아브라함을 선택함으로써, 아브라함의 하나님은 다른 신과 다르다는 것, 그 하나님을 믿는 자는 다른 신을 믿는 자와는 다르다는 것을 이 예화를 통해 입증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번제물(燔祭物)의 전환 : 사람에서 동물로

이삭의 희생을 멈춘 후에 하나님은 사람 대신 수양을 번제의 희생물로 예비하였습니다. 인간사를 통틀어 인간을 어떤 제의(祭儀)나 어떤 목적을 위해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 허다했습니다. 특히 신의 이름으로의 희생제가 적지 않았습니다. 다음의 예만 들어보지요.

① 통상 우상 신들은 사람을 희생물로 요구한다. 아브라함 시대의 몰렉신도 그러했고, 아즈텍과 잉카는 16세기까지 살아있는 인간을 희생물로 바쳤다. 귀신에게 처녀를 바친 이야기는 우리의「전설 따라 삼천리」에도 숱하게 등장합니다.

② 신의 계시를 핑계하여, 사람을 희생시킨 예도 많습니다. 종교박해, 마녀사냥의 끔찍한 재난은 유럽에서 17세기까지 광범하게 자행되었습니다.

③ 윗사람을 위한 인신희생의 사례도 많다. 왕이 죽으면 비빈이나 노복을 같이 파묻는 동양의 순장(殉葬) 습관은 춘추전국시대까지 내려옵니다. 효녀 심청은 아비의 눈을 뜨기 위해 자신의 몸을 팔아, 인당수의 파도를 가라앉히기 위해 희생됩니다.

그런데 이 점에서 여호와 하나님은 다른 어떤 우상신이나 세속적 권력자와 완전히 다릅니다. 그는 신앙을 위해, 사람을 희생재물로 쓰는 것을 택한 적이 없습니다. 이삭의 살해시도를 멈추게 함으로써(혹은 그를 믿는 아브라함이 신앙의 목소리에 따라 자발적으로 죽임을 멈춤으로써), 여호와는 여느 신과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결정적으로 보여줍니다. 아무리 신앙이 충실한 사람도, 설사 하나님 자신의 명령이라 착각할지라도, 인간을 희생물로 쓸 수 없음을 선언하는 것입이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가장 소중한 것을 소중한 것으로 되돌려주시는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의 힘"(정선자 자매)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번제물은 사람이 아니라 수양 등 동물이 선택됩니다. 번제는 여호와에게 향기로운 냄새(출 29:18, 레 3:5)로 여겨지며, 구약 전체를 통해 동물번제의 의례가 내려옵니다.

그러나 예언자의 시대에 오면 동물을 희생물로 삼는 번제 자체에 대한 비판과 공격이 나타납니다. 호세아가 증언하는 하나님은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호 6:6)시는 분입니다. 아모스 예언자에게 번제에 대한 비판은 훨씬 더 강하게 나타납니다.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 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같이 흘릴지로다"(암 5:22)

번제라는 제의가 율법화하고 종교가 형식화한 데 대한 예언자들의 질타라고 보여지지만, 번제를 하나님의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던 시대와는 전혀 다른 기준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이러한 예언자의 비판에서 하나님 신앙의 참 기준을 드러내어, 신앙하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몸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낫다"(막 12:33)고 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제사와 예물과 전체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치도 아니하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히 10:8)고 정리합니다. 그리하여 율법이 아니라 사랑으로, 동물을 희생시킴으로써가 아니라 내면에서 나오는 신령과 진정으로 신앙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지요. 그로 인해 동물도 예수님 덕분에 번제의 희생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쯤 되면 동물조차 아끼고 사랑하는 예수님 만세가 아닌가요.

이삭의 희생은 예수님의 희생과 무슨 관계일까?

이 사건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의 희생 및 부활과 관련되어집니까? 다시 말해 이삭의 희생=예수의 희생, 천사를 통해 기사회생함=예수의 부활, 아브라함의 아픔=하나님의 아픔 등으로 연상시킬 수 있는 것입니까?

권진관 형제가 보기엔, 이삭의 경우와 예수의 경우는 전적으로 다르다고 했습니다. 둘 다 죄 없는 사람(innocent man)이란 점은 같지만, 이삭은 타의에 의해 초래된 재앙이고, 예수
는 죽음의 길을 스스로 선택한 점에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게세마네 동산에서 피눈물을 쏟는 간절한 기도 끝에 "아버지의 뜻이어든 (죽음이라는) 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누가 22:42) 하고 고백합니다. 이삭희생명령을 들었을 때의 아브라함의 심정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뜻이어든 (아들의 살해라는 쓴) 잔을 내게서 옮기옵소서. 그러나 (신앙의 인간이기에) 내 원대로는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신앙인은 자기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내 고통이 사라지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지기를 바라는 나의 마음이 곧 하나님의 마음이 되기를 얼마나 바라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삭의 희생은 예수님의 희생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됨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는 신학적으로 너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어 저 같은 사람은 요령부득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이삭의 관계는 보통의 부모, 자녀들에게 가장 손쉽게 이해됩니다. 순간순간 어떠했을까에 대해 우리는 생생한 감정으로 접근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두 이야기의 본질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이삭 수난이야기는 하나님-예수님 수난이야기는 어떤 관련성이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이 점은 앞으로의 숙제로 남길 수 밖에요.

말씀나눔을 위한 긴 이야기를 전개했지만, 이 이야기는 불확실하고 여러 가지 해석을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불확실하고 애매하기에 우리의 뇌리에 오래 남고, 그런 만큼 쉽게 소화되기 어려운 목에 걸린 가시인 것이겠지요.

그 어떤 이름으로도, 심지어 하나님의 계시의 이름으로도 인간생명의 희생은 안 된다는 정도의 교훈만 남는 이야기는 분명 아닙니다. 현실역사의 잔인성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의 희생을 통해서만 모진 목숨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며,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매주 기도하지만, 이삭희생의 시험에 걸린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처럼 적절하고 간절한 기도가 달리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신령과 진정으로 신앙할 수 있게 해주신 예수님의 은혜에 한없는 감사를 드릴 일이지요.

너무나 깨달음 부족한 이야기에 송구할 따름입니다. 다음에 다른 분을 통해 이 이야기의 다른 측면, 다른 해석을 듣고 싶은 맘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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