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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완상

"그 중에 으뜸은 사랑이라"

(고린도전서 13: 8∼13)

 

 

2002.11.10

한완상 형제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 고린도전서 13: 8∼13

 




본문은 신약성서 중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알 같은 메시지입니다. 사도바울의 사랑 찬가는 영원히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는 감동의 선율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시가 문제투성이의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그의 편지임을 우리는 종종 잊고 있습니다. 실망스럽고 부끄러운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가장 아릅답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보낸 사도바울의 그 마음을 우리는 깊이 헤아려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문맥을 우리는 잠시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고린도 교회는 어떤 교회였으며, 고린도라는 도시는 어떤 도시였을까요?

고린도시는 1세기 헬라의 큰 상업도시요, 무역 중심지였습니다. 남북 통로와 지중해 동서통로가 이 도시를 통과하였습니다. 당시 세계의 피가데리 광장 같은 구실을 했지요. 피가데리광장에 오래 서 있으면 각지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듯이, 고리도는 교역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당시 세계의 요지여서 온갖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들었습니다. 원래 BC 46년에 시저(Caesar)가 재건했던 도시였지요. 예수님 당시 여러 인종들이 그곳에 거주했습니다. 모험을 좋아하는 헬라인, 부유한 로마인,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베니게인, 민족자존심이 남달리 강했던 유대인, 온갖 철학자들, 상인들, 선원들, 노예 등이 살았습니다.

이러한 도시는 으례 잡스러운 분위기를 갖게 마련이지요. 그래서 악덕과 부도덕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는 말이 유행했는데 이 말은 방탕한 삶, 타락한 삶을 산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헬라 연극에 고린도인이 등장하면, 그는 으레 술주정뱅이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고린도 언덕에는 이 높이 솟아있었는데 그곳에는 4천여 여사제들이 기거했습니다. 이들은 이른바 거룩한 매춘부 노릇을 했습니다. 사랑행위도 종교의 탈을 쓴 오염된 타락 행위기도 했습니다.

고린도시에 있던 고린도 교회도 이같은 도시상황을 반영하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6 : 9 -10을 보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죽 나열되어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시에 우글거렸던 부도덕한 군상들이 교회 안에서도 활개치고 있었던 듯 합니다. 이같은 소식을 들은 바울의 마음은 얼마나 울적했겠습니까. 게다가 교회는 분열의 질병을 오래동안 앓고 있었습니다.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특히 가슴 아픈 것은 그 분쟁이 거룩한 분들의 이름을 도용한 분파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되고 강화되고 있다는 사실이였습니다. 바울 자신의 이름을 빙자한 바울파 이외 아볼로파, 게바(베드로)파가 있는가 하면, 정말 답답하고 기가 막힌 것은 그리스도파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그리스도파가 다른 파들과 다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의 몸된 공동체를 그토록 강조하셨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이같은 소식을 듣자, 바울은 이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그 편지가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킨 듯 합니다. 그래서 그는 직접 그곳을 방문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하기야 방문 성과도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바울의 심정은 답답했던 것 같습니다.

정말 고린도 교회는 골치 아픈 교회였습니다. 고질적 분열의 교회였습니다. 사랑도 없고, 믿음도 없고, 소망도 없는 문제투성이의 교회였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런 교회에게 보낸 편지 메시지 중, 오늘 그 아름다운 감동의 사랑시가 빛나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캄캄한 흑암 속에서 한줄기 불빛이 빤짝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의 메시지가 주는 그 감동에도 꿈쩍하지 않는 고린도 교회의 완고하고 답답한 현실을 배경삼아 바울의 답답한 심정을 깊이 헤아리면서 우리는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이 메시지의 뜻을 새롭게 되새겨 보아야 할 것입니다. 왜 바울은 이 시의 끝에 고 호소했겠습니까? 그 까닭은 오늘 우리의 이그러진 현실상황에서 새롭게 반추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먼저 사랑을 으뜸이라고 절규했던 바울의 심정을 그의 신학적 관점에서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면, 그 절규가 더욱 절박하게 느껴지고 그 호소의 의미가 더 빛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미 잘 알다시피 바울 신학의 중심에는 적어도 두가지 확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나는 의 신학과 확신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의 종말론적 희망과 신앙입니다. 앞의 것은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이고 뒤의 것은 소망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에게 믿음과 소망은 너무나 소중한 의 가치였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확신은 당시 전통유대 율법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혁명적인 발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율법의 준수, 특히 율법의 그 복잡하고 세밀한 세칙을 모두 지키고 행하는 삶을 통해서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온전케 할 수 있다는 전통을 확 뒤집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 준수로는 결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새롭고 파격적인 진리를 용기 있게 외쳤던 바울은 그 대안으로 믿음을 내세웠던 것입니다. 급격한 패러다임전환을 시도했지요. 그렇기에 그는 무수한 모함과 핍박을 유대 전통주의자들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고초를 당하던 간에 그는 그의 신학적 입장을 고수했습니다. 믿음의 가치와 그 효험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이 믿음보다 사랑이 더 중요하다고 했음을 우리는 새삼 주목해야 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굳세다하더라도, 비록 그것이 산을 옮길만한 힘을 지닌다 하더라도, 그것은 부분적인 것이요, 일시적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올 때 그것은 사라집니다. 사랑은 완전한 것이요, 완전케 하는 힘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바로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바울의 종말론적 신앙은 깊고 뜨거웠고 확실했습니다. 하기야 초대 교회가 예수재림(parousia)을 고대했던 소망의 힘으로 버티어 온 것도 사실입니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소리"(살전 4:16)를 마치 실제로 듣는 것처럼 그는 그의 첫편지(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재림의 드라마틱한 광경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도둑처럼 다시 오시는 그리스도를 그는 초대교인들과 함께 타는 목마름으로 고대했지요. 하기야 그 재림의 연기도 초대교회가 풀어야 할 신학적 과제이기도 했습니다만, 여하튼 예수재림에 대한 목 타는 기대와 열망 없이는 그 어려운 초대교회 상황에서 신자들이 그들의 곤경을 이겨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물론 조급한 재림의 소망으로 윤리적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일들도 생겼습니다만, 대체로 이 종말론적 희망이 초대 교회를 결속시키는 힘이 되었음을 또한 부인할 수 없겠습니다. 그 희망과 성령은 함께 작용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바울에게는 소망의 힘이 소중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사랑이 소망보다 더 소중하다고 고백하지 않았겠습니까. 소망도 그리스도 예수를 만나려는 소망일진데, 그리스도를 만나는 체험 곧 과 하나되는 체험은 이미 소망이 이뤄졌기에, 소망의 가치는 사라질 것입니다. 사도 바울 시대의 거울처럼 희미하게 볼 동안만, 우리는 믿음과 소망의 효험을 필요로 하지만, 완전하게 하나님을 대면 할 때는 사랑만 남고, 다른 것은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사도 바울이 이처럼 사랑을 믿음과 소망보다 더 값진 것으로 강조한 까닭은 고린도 교회의 고질적 질병, 아니 인간 조직의 일반적 병폐인 분열을 근원적으로 고칠 수 있는 힘이 사랑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몸의 각 지체들간의 뜨겁고 끈끈한 관계, 곧 아름다운 관계를 엮어낼 수 있는 힘의 원천임을 이 편지 12장에서 강조하였습니다. 교회를 몸이라고 한다면, 교회 안의 여러 지체들은 몸의 지체처럼 각기 독특한 기능을 갖고 있는데 이 기능들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룩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체들간의 해로운 다툼이 생기지 않습니다. 마치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개성이 뚜렷한 악기들로 하여금 각기 자기의 소리를 내게 하면서도 놀라운 화음을 만들어내는 힘이 바로 지휘자의 능력과 정열에 있다고 한다면, 교회의 화음을 창출해내는 힘은 바로 사랑의 힘이라 하겠습니다. 이 힘은 각 지체의 재능과 은사보다 더 큰 은사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 큰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요"(12 : 31)라고 권면한 뒤 바로 그 유명한 사랑의 노래가 실린 13장의 문을 열었습니다.

이제 오늘의 주제, 왜 사랑이 셋 중에 으뜸인가를 우리의 상황에서 새삼 성찰해 봅시다. 이 질문을 새삼 하게된 저의 실존적 상황, 곧 저의 삶의 문맥(context)부터 먼저 말씀드려야 하겠군요. 지난 한 달 동안 저는 두 가지 문제를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한성대학교 총장에 취임하게 되면서, 학교 안에 불미스럽고 불편한 관계로 인해 학교 공동체가 걱정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교안의 불화가 학교 밖으로 흘러나가는 안타까운 현실을 보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바람직한 길은 법과 규칙에 의한 해결보다는 사랑과 신뢰로 해결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모습의 일단을 보는 듯 했습니다.

둘째로는 전숙희 선생께서 출간하신 라는 실화소설을 읽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마타하리로 알려진 "거물 여간첩" 김수임의 신앙과 사랑과 죽음에 대한 실화증언이었습니다. 한 신실한 신앙여인이 한 남성을 진실로 사랑했기에 (불구하고의 사랑) 간첩으로 몰려 너무나 억울한 죽임을 당했음을 전에는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그녀가 총살형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천벌 내림을 받고 고통스러워하는 가운데서도 사랑의 품위를 지키려고 몸부림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 애처러웠습니다. 그녀를 죽인 것은 사랑의 힘을 항상 죽이려는 사탄의 세력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해방 공간에서 제도화된 사탄의 힘이 괴력을 이미 발휘하고 있음을 전율하면서 다시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강가에서의 아름다운 그녀의 처형을 묘사하면서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죄목은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한 죄, 나이는 서른 아홉 살, 6 25 전쟁 불과 며칠 전, 비정한 해방공간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사랑해서는 안될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목숨 걸고 사랑한 것이라면 그것은 참된 사랑일 것이고, 그러한 사랑은 죽임을 당할 수 도 있구나 하고 깨달았습니다. 참된 사랑을 끊임없이 죽이려는 사탄의 세력은 지금도 시퍼렇게 살아있음을 또 다시 몸서리치면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랑의 힘을 생각하면서 그것이 왜 으뜸이 되며, 되어야 하는지를 심각하게 성찰하게 되었습니다.

사랑과 믿음을 묶어 한번 생각해 봅시다.

먼저 사랑 없는 믿음은 어떠할까요? 사랑 없이 를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은 대체로 섬뜩합니다. 차별과 증오의 눈빛으로 다르게 믿는 사람들을 쏘아보기 때문이지요. 이런 때 믿음의 힘은 차별과 증오의 힘으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이같은 믿음이 그 나름대로 어떤 체계와 논리를 갖추게되면 그것은 무서운 이데올로기의 힘을 발휘하게 됩니다. 독선을 합리화해 주기에 날카로운 종교적 비수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남에게 엄청난 상처를 입히는 "신념의 칼"과 "신앙의 총"이 되기도 합니다. 저 십자군의 칼이나, 저 알카에다의 총도 그러한 신념의 무기가 아니겠습니까. 세속적으로는 600만 유대인을 학살했던 나치의 총과 칼도 따지고 보면 사랑 없는 광신의 날카로운 무기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반(反)인륜적 범죄의 도구이기도 했습니다.

사랑 없는 소망은 어떻습니까? 개인적으로 보면 사랑 없는 소망은 이기적인 욕심으로 끝나기 쉽습니다. 구조적으로는 닫힌 구조와 체제의 경직한 비젼으로 변질되어 이것 역시 엄청난 피해를 인간에게 주게 됩니다. 이를테면 공산주의의 소망과 꿈을 생각해 봅시다. 계급 없는 사회, 그 얼마나 아름다운 소망입니까. 그러나 그 꿈을 이룩하기 위해 폭력혁명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흘리게 한다면, 비록 그 꿈이 이뤄진다 해도 결과는 비극일 것입니다. 전체주의적 평등은 참된 평등일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사랑 없는 소망이 저지르기 쉬운 반인륜적 범죄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믿음, 사랑과 소망의 관계를 보다 긍정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하면 저절로 믿고 싶어합니다. 김수임씨는 고아로 자라 일찍부터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렇기에 이강국씨를 만나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이씨는 해방 전에는 항일운동을 했던 젊은 지식인이었고, 해방공간에서도 남북간의 분단을 막아보려는 민족주의적 사회주의자였던 것 같습니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였던 김씨가 철저한 진보주의자였던 이씨를 으로 그를 사랑하게되자 그녀는 애인이 사랑했던 사람들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념과 행동도 자연히 거부감 없이 이해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를 그토록 했기에 철저하게 그를 했습니다. 그러기에 참 믿음의 바탕은 바로 사랑이라 하겠습니다. 누구를 사랑하면 신뢰가 생겨 그 신뢰로 인해 생기는 그 어떤 고통도 감내하게 된다는 진실을 나는 이 책에서 확인했습니다. 그 책의 이름 도 너무나 처절하게 적절한 표현 같습니다.

뿐만입니까. 사랑하게되면 상대방이 모든 면에서 잘 되길 합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아파하고 함께 기뻐하기를 또한 소망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이의 꿈을 함께 나누고 싶어합니다. 사랑하는 이들이 함께 인생설계를 하고 싶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아닙니까. 조국을 사랑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조국을 사랑하게 되면, 조국의 앞날을 맑고 밝은 것이 되도록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조국이 반민주적이라면 민주조국이 되도록 헌신할 것이며, 조국이 부당하게 반쪽으로 나눠져 있다면, 그것을 평화스럽게 하나로 만드는 꿈을 실현하기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랑이 있는 곳에 믿음과 소망은 자연스럽게 꽃피게 됩니다. 그리고 그 꽃은 떨어져도 그 뿌리인 사랑은 영원히 남습니다. Tuesdays with Morrie 라는 책에서 모리 교수는 제자에게 죽어가면서 이렇게 깨우쳐 줍니다.

"죽음은 생명을 끝내주지만, 관계는 끝내지 못하오"
(Life ends a life, not a relationship)

그의 몸은 매일매일 죽어가면서도 화요일이 되면 지금은 유명하게 된 옛 제자를 만나 정말 살아 숨쉬는 진리를 토론하고 깨닫게 합니다. 그는 "사랑은 항상 이기게 된다"(Love always wins)를 강조함으로써 자기 육신은 곧 사라지지만 제자와의 관계 곧 사랑의 관계는 결코 죽음으로 사라지거나 패배하지 않고 승리하여 살아남을 것임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우리가 살아 남아있게 하는 것이오"

이 사랑의 영원성에 대해 이미 2천년 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13 : 8) 사랑은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날카로운 예언도, 신비한 방언도, 산을 움직일만한 믿음도 모두 사라지지만, 사랑의 울림은 영원합니다.

나는 전숙희 선생의 실화소설을 읽으면서 순간순간 주인공 김수임씨의 입장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녀의 고통이 너무나 억울한 고통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도 그녀가 "천벌"을 받게 된 것은 어릴 때부터 그토록 사랑해온 하나님 보다 인간 이강국을 더 사랑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자문해 보기도 했고, 사랑하는 남자가 있음에도 미군 헌병사령관과 동거생활했던 잘못 때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너무나 진부한 기독교 신자다운 생각이어서 스스로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알고있는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특정 인간과 사랑의 경쟁을 할 만큼 유치하거나 옹졸한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보다 보이는 구체적인 인간을 더 사랑한다고 벌주는 하나님은 결코 예수님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는 유대교 유일신의 무서운 신, 질투하고 변덕스러운 신일 수는 있겠습니다. 예수님의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가 이웃(불한당 만나 고통 당하는)을 당신 보다 더 사랑할 때, 오히려 우리가 대견스러워 우리를 향해 빙그레 웃으시는 분이십니다. 마치 아빠가 외국에 오랜동안 출장 가고 곁에 계시지 않을 때 내가 동생을 더 사랑한다는 소식을 멀리서 듣고 기뻐하시는 아버지처럼, 하나님도 우리가 보이는 이웃을 우리 몸처럼 사랑할 때, 우리를 더 대견스럽게 여기시는 너그러운 분이시지요. 게다가 예수의 하나님, 곧 우리의 하나님은 보잘것 없는 존재를 우리가 사랑할 때 더욱 기뻐하시는 분이시지요. 그래서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부족한 지체"를 더욱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몸의 각 지체 중, 가장 부족한 지체를 더 존귀하게 여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 (12 : 24)

이제 사랑과 정의, 사랑과 평화에 대해서도 새롭게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정의, 평화, 사랑도 항상 함께 있어야 하나 그 중에 으뜸이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우리 공동체의 신앙고백과도 관련됩니다. 사랑 없는 정의는 호메이니식 엄격주의나 탈레반의 엄벌주의로 떨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사랑 없는 법은 를 실행함으로써 모두를 상처투성이의 병신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정의의 이름 밑에 보복이 정당화 될 수도 있습니다. 범죄한 손을 무자비하게 짤라버리든지, 율법을 어긴 여성을 공개 처형하는 "정당한" 잔혹 행위를 거침없이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결과를 예수님의 하나님은 결코 원치 아니하십니다. 정의보다 사랑이 항상 더 바람직 한 해결책입니다.

사랑 없는 평화도 문제입니다. 그곳에는 공포의 균형이 강화됩니다. 비록 당사들간에 열전은 없다할지라도 무섭고 지겨운 냉전은 지속 될 것입니다. 냉전대결은 공포의 균형을 더욱 악화시킵니다. 뿐만입니까. 사랑 없는 평화는 무관심의 심화로 변질되기 쉽습니다. 무관심이 지배할 때 당사자들 사이에는 겉으로 보면 평온스러운 듯 보입니다. 뜨거운 다툼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그 무관심이 정말 염려스럽고 불길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반대는 결코 증오가 아닙니다. 그것은 무서운 무관심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신앙고백에서 "사랑으로 서로 사귀고"라는 표현이 가장 소중한 고백이라 하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사랑이 지배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 1서를 다시 한번 그 뜻을 깊이 되새기며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다 하나님에게서 났고 하나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자매형제 여러분! 과연 여러분은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사람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정말 사랑하게 된다는 진리를 몸과 마음으로 깨닫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주변에서 나 를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가장 으뜸되는 진리를 이미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사랑함으로써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고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과 평화의 주님.
오늘도 세계 도처에서 사랑을 질시하고 핍박하는 세력이 시퍼렇게 살아 있어
증오, 불신, 대결, 분열, 전쟁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마침내 이긴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하소서.
부활은 그 사랑의 힘이 폭발하는 것임을 깨닫게 하소서.
믿음도 소망도 잠시 있는 것이요, 부분적인 것이지만,
사랑이 부활로 올 때 우리는 하나님과 영원히 하나됨을 알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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