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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2002.10.10 11:53

[2002.10.06] 예수의 자연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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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김명수 교수

"예수의 자연사상"

(마가복음4:26-29)

 

 

2002.10.06

김명수 교수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 마가복음4:26-29

 

 



A.D.30년경에 팔레스틴의 북부 갈릴래아 농촌지역에, 나사렛 출신 예수가 등장하여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였는데, 그가 전파한 하나님 나라 복음은 3가지 특성을 지닌다. 예수는 시대의 징조를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무엇보다도 그가 '종말의 때'에 살고 있음을 간파하였다. 사탄이 통치하는 암흑과 고난의 시대가 끝나가고, 하나님의 공의가 통치하는 광명의 새 시대가 동터오고 있음을 예견하였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 앞에서 인간이 어떠한 삶의 자세를 가져야하는가? 첫째로 예수는 갈릴리 소농들에게 '지금이 어느 때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질 것을 촉구하였다.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임박했다."(막1:15) 현재가 어느 때인가? 종말의 때 인식,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출발점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은 현재를 종말의 때로 인식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갈릴리 농민들이 일상적으로 겪고있는 고통을 해결해주는데 예수는 앞장선다. 복음서에서 나오는 병자들과 정신 질환자들은 도시보다는 흔히 농촌 세계에서 볼 수 있는 현상들이다. 예수는 불치병으로 고생하는 농민들을 치료하여 건강을 되찾게 해 주는가 하면,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을 치료하여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복음서가 전하는 치병 이야기와 축귀 이야기 배후에는 갈릴리 농민들의 이러한 예수 체험이 서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실천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와 같이 갈릴리 농민들의 일상적 고통을 덜어주는 작은 이야기가 중심을 이룬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또 하나는 교육이다. 예수는 갈릴리 농민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비유를 많이 든다. 비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를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인데, 우리가 흔히 일상적인 생활세계에서 경험하는 것에 빗대어,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 비유이다. 예수가 사용한 비유에는 씨앗, 농부, 새, 나무, 땅과 같은 주로 자연과 관련된 것들이 많이 등장한다. 이것은 예수가 태어나서, 성장하고 경험한 생활세계가 다름 아닌 농촌이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도미닉 크로싼이 란 책을 썼는데, 그 책에 "지중해 연안의 한 농부의 생애"라는 부제를 달고있다. 이 책에서 크로싼은 주로 성서 밖의 자료들을 이용하여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는데, 그가 밝혀낸 것은 예수가 수공업자가 아니라, 농사 사회의 경험을 토대로 지혜를 터득한 현자(賢者)라는 것이다. 예수가 청소년기에 손수 농사짓는 경험이 없었다면, 공중의 새, 들의 꽃 한 송이, 참새 한 마리, 이러한 자연의 생명 속에서 창조주의 사랑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전반적으로 예수의 비유 이야기들은 농촌적 세계관을 배경으로 깔고 있다.

농촌의 세계관의 특징은 무엇인가? 모든 생명체는 상호 의존되어 있다는 것이다. 상호 관계성 속에서 생존한다는 것이다. 별개로 존재하거나, 다른 생명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생명체는 없다. 이 생명이 있음으로 저 생명이 있고, 저 생명이 있음으로 이 생명이 있다. 이 생명 속에 저 생명이 참여하고 있고, 저 생명 속에 이 생명이 참여한다. 이 생명과 저 생명은 결국 상호 의존된 하나의 생명 공동체, 장회익의 말을 빌리면 "온 생명"으로 존재한다.

예수의 최고 가르침 중의 하나는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는 나와 이웃을 별개로 생각한 적이 없다. 이웃이 곧 내 몸이며, 내 몸이 곧 이웃이다. 이웃과 나는 상호 의존된 하나의 유기적 생명체로 존재한다. 물론 이웃은 인간만이 아니다. 나를 둘러싼 지구 생명 일체가 곧 이웃이다. 예수는 이웃을 내 몸의 확장으로써, 그리고 내 몸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한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본문은 하나님 나라에 관한 비유이다. 26절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리는 일에 빗대어 설명한다. 어떤 사람이 땅 위에 '씨앗을 뿌린다.'(sporos balein) 씨를 뿌린 다음, 농부는 밤낮 자고 일어나며 일상적인 생활을 한다. 씨앗은 '싹이 돋아나고,'(blasta) '성장한다'.(mekynetai) 그런데 농부는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지 못한다. '저절로'(automate) 땅이 싹을 움트게 하고, 자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한다. 이것이 전체 내용이다.

28절에 보면 흙이 주어로 등장하는데, 이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흙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automate he ge karpophorei), 처음에는 흙이 싹을 내고, 다음에는 흙이 이삭을 내고, 다음에는 흙이 이삭에 충실한 낱알을 낸다. 싹을 내고, 이삭을 맺게 하고, 낱알이 달리게 하는 것, 곧 생명의 성장활동은 어디까지나 흙의 작용이라는 것이다. 흙 1그램 속에 미생물이 적게는 1억 마리에서 많게는 10억 마리가 있고, 평균으로 2억 마리가 살고 있다. 흙은 무생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이고, 개체 생명의 토대에 해당한다. 미생물의 왕성한 활동은 지표면 30-40cm에서 이루어진다. 인간을 포함해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지표면 30-40cm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흙 속에 살고 있는 미생물들이 무기질을 먹고 배설하면, 그 배설물은 씨앗에 영양을 공급하여 싹을 틔우고 성장하게 한다. 싹은 태양 에너지를 받아 탄소동화작용을 하여 이삭을 패게 한다. 흙은 적절한 온도와 물과 영양을 공급하여 낱알을 맺게 한다. 농사는 누가 짓는 것인가? 흙이 짓는다. 진정한 농사꾼은 인간이 아니다. 흙 속의 미생물, 지렁이와 바람, 태양, 비가 진정한 농사꾼이다. 농사에서 인간의 역할은 무엇인가? 씨를 뿌리고, 자연이 농사를 지어놓으면, 그것을 거두어들이는 일뿐이다. 흙이 짓는 농사법을 예수는 무어라고 말하는가? 헬라어로 "아우토마테"이다. 우리말 성경에는 '저절로,' '스스로'로 번역되어 있는데, 노자가 말하는 소위 '무위자연'이 '아우토마테'에 해당한다. 예수의 농법은 '아우토마테 농법'인데, 이는 '무위농법' 또는 '태평농법'으로 번역이 가능하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란 무엇을 뜻하는가? 위(爲)가 없는 것을 말한다. 위는 행(行)과는 다르다. 행이 무엇을 하는 것을 말한다면, 위는 이와 달리 꾸며놓은 것, 위장해놓은 것, 실제와 다르게 억지로 조작해 놓은 것이다. 따라서 노자가 말하는 무위(無爲)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꾸밈이 없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뜻한다. 노자는 도상무위이무불위(道常無爲而無不爲)라고 했다. 도라는 것은 언제나 억지로 하는 일이 없지만, 이루지 못하는 것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인위적인 조작이 배제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노자가 이상으로 삼았던 무위자연의 세계이다.

노자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것처럼 우주 만물이 "...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물은 저절로 그렇게 거기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식물이 동물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동물이 인간을 위하여 존재하는가? 신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을 위해서 존재한다"는 목적론적 사관과 인간중심주의가 결합된 현대 기술과학 문명이 오늘날 생태계의 재앙을 초래하고 있다. 목적론적 가치를 개입시킬 때, 나와 이웃, 나와 자연의 관계는 '인격적'(人格的)인 관계에서 '즉물적'(卽物的)인 관계로 전락한다. '나와 당신'(I-Thou)의 관계에서 '나와 그것'(I-it)으로 관계로 변질되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이웃과 자연은 삶의 파트너가 아니라, 단지 나의 탐욕과 편리함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된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는 이러한 목적론적 사관과 무관하지 않다. 우주의 개체 생명들은 "무엇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저절로 그렇게 존재할 뿐이다.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있음으로 해서, 삼라만상은 조물주의 영광을 드러낸다.

자연이건 인간이건, 억지로 조작하거나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줄 수 있어야 한다. 독일의 교육학자 루돌프 슈타이너는 자연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위대한 스승이라고 선언하였다. 아이교육도 마찬가지다. 사사건건 간섭해서는 안 된다. 큰 방향을 잡아주고, 큰 울타리만 쳐주고, 그 안에서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행동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인위에 근거한 조작교육이 아니라, 무위에 근거한 보살핌과 자발성의 교육만이 창의력을 개발할 수 있고, 세계화 시대에 진정한 의미에서 경쟁력이 될 수 있다.

예수는 아우토마테의 농법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참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인간의 모든 인위적인 행동이 정지되고 근절된 그곳에서 하나님 나라는 시작된다. 무위자연이 회복되는 곳에서 하나님 나라는 시작된다. 이러한 자연의 아우토마테 농법을 시인 김용택은 훌륭한 시적 언어로 형상화하고 있다. "해가 뜨고, 달이 뜨고, 꽃이 피고, 새가 날고, 잎이 피고, 눈이 오고, 바람 불고, 살구가 노랗게 익어 가만히 두면, 저절로 땅에 떨어져서 흙에 묵혀 썩고, 그러면 거기 어린 살구나무가 또 태어나지, 그 살구나무가 해와 바람과 물과 세상의 도움으로 자라서, 또 살구가 열린단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얼마나 신기하니? 또, 작은 새들이 마른 풀잎을 물어다가 가랑잎 뒤에 작고 예쁜 집을 짓고, 알을 낳아 놓았지,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것 또한 얼마나 기쁜 일이니, 다 지구의 일이야, 그런 것들 다 지구의 일이고, 지구의 일이 우리들의 일이야, 어떤 일이 있어도 사람이 지구의 일을 방해하면 안돼."(녹색평론, 1996, 9-10월호, 72)

오늘날 인간세계의 불행은 어디에서 오는가? 이 아우토마테의 세계를 상실한데서 비롯된다. 자연을 인위적으로 파헤치고 변경시키고 조작한데서 모든 인류의 비극이 싹텄다. 그 근저에는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자리잡고 있다. 21세기 인류 문제의 해결책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끊임없이 세계를 인위적으로 조작하고 변화시키는데서인가? 하늘과 땅을 조작하고, 식물과 동물을 조작하고, 이제 심지어는 인간의 DNA마저 조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본문에서 농부는 인간의 한계성을 깨달았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 그 외에 그가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씨알이 어떻게 싹이 트고, 줄기를 내어 이삭을 패는가? 생명의 성장과 결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조물주의 소관이다. 김용택의 언어로 말하면 지구의 일이다. 그것은 인간이 간섭할수록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이성(理性)을 도구화(道具化)함으로써 손대서는 안 될 자연과 생명의 영역까지 파헤치고 난도질하고 있다. 인위에 근거한 20세기 서구 물질문명은 생태계 파괴와 정신문명의 피폐 그리고 영적인 빈곤을 초래하였다.

20세기 인류문명은 무엇을 지향했는가? 무지에서 유지에로, 물질적 빈곤에서 풍요에로,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에로, 정신문명에서 물질문명에로 탈출을 시도했던 세기였다. 이러한 20세기 남성중심의 인위적 문명의 페러다임은 이제 더 이상 21세기 인류가 직면한 문제들을 풀 수 없다. 이제 21세기 인류는 이러한 인위문명의 패러다임을 청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명의 전환점에 서있다. 21세기 인류의 살길은 무엇인가? 인위적 문명에서 아우토마테의 문명에로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지식문화에서 지혜문화에로, 풍요에서 검소에로, 대량생산과 소비에서 근검절약에로, 팽창에서 수렴에로, 지배에서 상생(相生)에로, 개발에서 보전으로, 물질문명에서 정신문명에로, 육식문화에서 채식문화에로, 인위에서 자연에로, 남성중심에서 여성 중심에로, 인류문명과 인간의 삶 가치와 스타일을 전환해야 한다. 예수가 말한 아우토마테의 세계, 노자가 말한 무위자연의 세계를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

20세기 인류가 쌓아온 인위적인 현대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하고, 그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예수의 아우토마테 세계를 노래로 승화시킨 노래가 있다. 비틀즈가 부른 "Let it be!"가 그것이다. 비틀즈는 심오한 철학사상을 팝송과 접목시켜 음악의 새로운 세계를 연 20세기 위대한 음악가이다. 무분별하게 조작을 해서 문제가 발생했다면, 해결책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훼손시키지 않고, 그냥 놓아두는 수밖에 없다.' 예수가 말한 아우토마테의 세계, 비틀즈가 부른 Let it be!의 세계를 회복하는 길만이 21세기 인류가 살길이다.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in my hour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when the broken hearted people, living in the world agr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For though they may be parted, there is still a chance that they will se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when the night is cloudy, there is still a light that shines on me,
shine on until tomorrow, Let it be!
I wake up to the sound of music,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There will be an answer,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Let it be!
Whisper words of wisdom, Let it 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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