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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완상

"빙그레 미소짓는 하나님 - 기도의 기쁨과 감사"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마태복음서 6:6∼8)

 

 

2002.09.08

한완상 형제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 주고 교회가 짐지지 않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 주게 하려 함이라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꾼이 그 삯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  데살로니가전서 5:16∼18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  마태복음서 6:6∼8

 



추석이 다가옵니다. 고향 동산에 누워 계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합니다. 불효의 삶을 살았다는 자책감이 뼈저릴수록 부모님이 그리워집니다. 고향 동산 묘지 비석에는 오늘의 본문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말씀은 저희 집 가훈(家訓)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내가 이 말씀의 뜻을 제대로 깨닫고 있는가?", "정말 내가 이 말씀대로 살아왔던가?" 이런 물음들이 추석을 앞둔 이 시점에 저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성찰의 메타노이아를 진솔하게 하도록 촉구합니다.

저의 삶을 되돌아보면, 절박한 실존적 위기 상황에서 제가 간절히 기도했던 것들이 그대로 이뤄진 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저의 기도내용과는 다른 '엉뚱한' 결과가 나온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그 결과에 실망하여 괴롭고 외로웠던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시 그 때를 회상해 보면, 제 기도가 너무 자기중심적인 기도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실망스러웠던' 당시의 결과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 좋은 것으로 나타났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진정한 필요를 이미 다 알고 계신 하나님께서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준비해 두셨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새삼 감사 드리게 됩니다. 여기서 제 경험을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1976년 2월 말. 저는 서울대학교 교수 직분에서 쫓겨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토록 성취하고 싶어했던 직분이어서 그 자리를 떠나게 되는 것은 저의 정신적, 사회적 삶의 끝장으로 여겨졌을 뿐 아니라, 별다른 재능이 없는 저로서는 경제적, 육체적 삶의 비참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하루아침에 정치적 황야와 들판으로 쫓겨나 野人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민주화와 인권, 조국의 평화와 사회정의를 갈망했던 저로서 이 같은 결과의 현실 앞에 망연자실했고, 잠시 하나님의 '무력함'에 곤혹스러워했습니다. 그러나 회고해보면 저에게 들판의 삶은 새로운 도전의 삶이요 새로운 은총의 삶이었습니다. 서울대학교 교수로서 전혀 체험할 수 없었던 뜨거운 동지애와 공동체의 흐뭇함을 나라 안팎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들판은 황량하기만 한 사막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따뜻한 생명샘물이 언제나 터져 나오는 비옥한 영혼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관악산 밑의 교실과 다르게, 살아있는 지식과 지혜가 싹트고 자라는 산 교실의 한마당이었습니다. 바로 그 황야에서 민중신학과 민중사회학이 싹틀 수 있었습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치열한 삶이 텍스트(text)가 될 수 있음도 그 때 깨달았습니다.

정말 괴로웠던 때는 저의 소망과 관계없이, 1980년 5월 신 군부에 의해 또 다시 학원에서 추방당했을 때였습니다. 그 해 3월 1일로 복직이 된 저는 하루하루를 신혼여행의 달콤한 같은 보람을 온 몸으로 느끼며 관악산 밑에서 가르치는 삶을 살았습니다. 정국이 불안했으나, 설마 신 군부가 저희들의 간절한 민주화 소망을 그렇게 무참하게 꺾어 버리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정의와 평화로 이 민족을 올곧게 인도해 주시리라 기도하고 믿었기에 신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는데, 불과 석 달도 되지 않은 5월 중순에 그 꿈과 현실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저는 동지들과 함께 남산 지하 2층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신 군부의 쿠데타가 생긴 것입니다. 지하 2층에서 거의 두 달간 저는 사투를 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지하 2층, 공포와 저주의 공간에 이미 와 계신 하나님을 체험하는 은총을 맛보기도 했습니다. 이 때의 경험은 저에게 너무 소중하고 값진 것이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다만 되돌아보면, 안일한 서울대 교수의 삶에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었던 너무나 값진 체험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릴 뿐입니다.

1981년에는 미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났습니다. 일년이 지난 뒤 여권과 비자의 시효가 끝나고 말았습니다. 불법체류자로 있으면서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에 나섰지요. 그 때 저는 법적으로 당당하게 미국에 체류할 수 있기를 바랐고 기도했으나 그것도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또 미국교회협의회에서 사회정의 담당 전임직이 공석이 되어, 그 자리에 갈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으나 그 자리도 흑인 여성에게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절망했습니다. 조국에 돌아가기 어려운 형편인데 미국 이민국으로부터 추방 청문회를 곧 연다는 통고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저의 간절한 기도들은 모두 수포로 돌아갔고 절망의 골짜기를 헤맸습니다. 그때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에서 뜻밖에 신학공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여기에는 이승만 목사님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정말 '엉뚱한' 기회가 생긴 것이지요, 3년 과정을 일년 반만에 마칠 수 있게 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의를 받고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이 때는 저의 삶에 있어 가장 아름답고 신선한 삶을 경험한 은총의 때였습니다. 제자들 같은 젊은 사람들, 특히 한국 학생들과 함께 자유케 하는 하나님의 진리와 지혜를 배울 수 있게 된 것을 지금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또 뜻밖에 1984년 8월 15일에 복권이 되고 복직의 길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한 학기만 마치면 신학과정을 모두 마치게 되는 데 갑자기 귀국할 수 있게 되었고, 학교에 복직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깊은 뜻에 따라 저를 훈련시키는구나 하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당신의 뜻은 항상 저의 뜻보다 깊고, 더 지혜롭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일을 더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1993년 2월에 뜻밖에 통일부총리직을 맡게 되었는데(원래는 김영삼씨가 비서실장을 맡으라고 했는데 갑자기 바뀌었음.), 하나님의 평화를 한반도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한 꿈을 안고 기도했습니다. 이인모 노인을 북송한 것도 그러한 기도의 연장선상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 북한의 핵문제가 불거져 저는 평화의 사도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오히려 냉전근본주의자들의 총공세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70년대 재야 시절보다 더 외롭고 더 괴로운 나날을 정부 한 가운데서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렇게 절규했습니다. 정말 처절했습니다. "주님, 당신의 뜻이 무엇입니까? 왜 한반도에 냉전구조를 해체시켜주지 아니하십니까? 어떻게 하여 그 증오와 불신과 독선의 냉전구조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됩니까?"

아직도 저의 기도는 응답 받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엉뚱한' 방식으로 더 나은 결과를 예비해 두고 계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지금도 변하지 않고 있습니다. 바로 이같은 저의 삶 속에서 기도는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이제 추석을 앞두고 다시 되새겨보고 싶습니다.

도대체 기도는 무엇인가? 그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 기도는 어떻게 하는가? 기도에도 성숙의 단계가 있는가? 기도의 효험은 무엇이며, 그것이 예수따르미의 삶과는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러한 물음들을 가슴에 깊이 안으면서 오늘의 본문에 대한 저의 깨달음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기도의 의미와 그 효험, 그리고 기도의 과정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최근에 와서야 본문에 대해 깨닫게 된 몇 가지 점부터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먼저 사도바울의 語順에 대한 것입니다. 그는 환희, 기도, 감사의 순으로 하나님의 뜻을 표현했습니다. 이것은 중요성의 순서 같지는 않습니다. 또 인과의 순서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만일 여기서 중요성의 순서와 인과의 순서를 존중한다면, 오히려 기도가 먼저 와야 할 것입니다. 기도를 통해 감사와 기쁨을 체험하는 삶을 촉구한 것으로 저는 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기도를 중간에 놓은 까닭은, 기도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마치 새의 몸통이 튼튼해야 간 양 날개가 힘을 쓸 수 있듯이, 기도의 몸통이 튼튼해야 환희와 감사의 두 날개가 힘차게 날 수 있습니다. 독수리 몸통(기도)에 붙어 힘껏 공중으로 날게 하는 감사와 환희의 두 독수리 날개를 상상해 보십시오.(결코 타조나 닭의 날개는 아닌 듯 합니다.)

또 한가지, 본문에서 새삼 주목하고 싶은 표현은 세 가지 副詞에 관한 것입니다.〈항상〉,〈쉬지 않고〉,〈범사에〉 라는 표현 말입니다. 이 세 가지 표현은 사실 한 가지를 다르게 강조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간과 시간의 변화와 관계없이, 흔들림 없이 일관성 있게 실행하라는 뜻 말입니다. 우리의 삶의 기복이 심하고, 외부환경이 아무리 급격하게 변화한다 하더라도, 기도는 끊임없이 이어져야 합니다. 마치 호흡이 끊임없이 이어질 때 비로소 삶이 연장되듯이. 생명과 숨쉼이 분리될 수 없듯이, 기도와 삶은 예수따르미에 있어서 결코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같이 숨쉬듯 기도를 생활화 할 때, 감사와 환희는 끊임없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바는, 바로 이 같은 환희의 삶, 감사의 삶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이 우울해 하고, 속상해 하고, 외로워하고, 분해하고, 괴로워하고, 좌절하고, 절망하는 삶을 살기를 결코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스스로 비워 남을 사랑과 평화의 기쁨으로 채워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올바른 기도를 드리기 위해서는 이 같은 하나님의 본질을 올곧게 깨달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면 기도의 의미와 과정 그리고 그 효험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먼저 기도의 과정 또는 흐름 단계에 주목해 봅시다. 크게 두 과정이 있습니다.

첫째, 은밀한 내적 대화의 과정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은밀하게 조용하게 하는 심층대화입니다. 관객 앞에서 쇼하듯 하는 기도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마치 골방에서 숨어 계신 하나님께만 고해성사 하듯 은밀하게 하는 기도가 바람직한 기도입니다. 이 첫째 과정도 몇 가지로 다시 나눠 볼 수 있겠습니다.

먼저 우리의 존재 속이 이미 깊이 오시어 우리와의 대화를 기다리고 계신 하나님을 우리는 알아차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 구름 넘어, 우리를 감찰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은밀히 우리 속에 숨어 들어와 계심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밖에서만 찾는 일을 중단해야 합니다. 마치 탕자가 하루 빨리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어버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오시어 우리와 대화하고 싶어하십니다. 결코 무서운 심판주 하나님도 아니시고, 목에 힘주는 만군의 총사령관도 아니시며, 복채 받고 복을 파는 기복신(祈福神)도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빠라고 불렀던 바로 그 사랑의 어버이십니다. 내밀하게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우리와 대화하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내적 대화는 대화 상대자의 입장에 서야만 제대로 이뤄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입장에서 자기를 사리는 일이 곧 기도라 하겠습니다. 곧 하나님과 易地思之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하나님 입장에 서려면, 제일 먼저 자기 입장을 떠나야 합니다. 이것은 곧 자기 뜻을 버려야 함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자기 입장을 하나님 앞에 관철하는 행위가 결코 아닙니다. 자기 'agenda'를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우고 떠나는 일입니다. 기도를 통해 자기를 채우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대화가 아니라 대결입니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차이를 정확하게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들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비정했던 삶, 권력, 명예 그리고 부 따위를 탐해 무자비하게 살아왔던 삶, 살고 있는 내 지금의 삶을 똑똑히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의 내적 대화는 불가피하게 겸손한 회개(metanoia)의 체험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이것이 바리새인들의 외식했던 기도와 다른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영적 거울로 작동하심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빙자하여 자기들의 '의로움'을 자랑하려 했습니다.

둘째로, 이러한 내적 대화는 하나님을 거울로 삼아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깨닫고, 이 모습을 고쳐가려는 삶으로 이어지는 과정입니다. 대화가 실천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거울을 보는 까닭은 남의 입장에서 자기를 비판적으로 보기 위함이요, 나아가 거울에 비춰진 자기의 결함을 고쳐서 남을 흐뭇하게 느끼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화장(makeup)은 자기 모습을 보충하고 고쳐 완전하게 바꾸는 행위입니다. 자기 모습을 바꾸되 상대방이 그 변화된 모습을 보고 빙그레 미소지으며 좋아할 것으로 여길 때까지 화장을 계속합니다. 일단 화장을 마칠 즈음에는 상대방의 미소를 예상하여 자기도 싱긋 웃게 됩니다. 이것이 화장의 사회적 과정입니다. 기도는 하나님 거울 통해 나타난 나의 부족함을 끊임없이 고쳐 보려는 〈영적 화장〉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미소지을 때까지 쉬지 않고 자기 고침, 자기 비움, 자기 갱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영적 화장이라는 자기갱신의 삶을 산다는 것은 스스로 비우시는 사랑의 하나님(kenosis의 하나님)을 닮아 가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거울에 비춰진 자기의 부끄러운 모습을 지우고, 하나님을 미소짓게 할 수 있는 아름다운 모습, 떳떳한 삶을 갖추기 위해 몸부림도 하고, 마음부림도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기도는 정말 하나님을 닮기 위한 아름다운 수행의 삶입니다. 기도는 예수따르미의 명상수행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몸부림과 마음부림을 거치면서 우리는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도 새로운 관계를 맺게 됩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 타존재 중심의 삶이 이뤄지기 시작합니다. 여기 타존재 속에는 자연과 환경도 포함됩니다. 이 새로운 관계는 죽음도 끊어낼 수 없는 감동적이고 아름다우면서도 끈질기게 오래가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인 Tuesdays with Morrie 라는 책의 주인공 모리 슈바르츠 교수가 말한 바로 그 관계입니다. "죽음은 한 생명을 끝낼 수 있으나, 관계는 끊을 수 없습니다(Death ends a life, not a relationship.)"(p.174.) 바로 이 관계는 서로 비워 상대방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사랑의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삶, 바로 그것이 기도입니다. 그것도 끊임없이, 쉬지 않고 사랑하는 삶입니다. 베트남의 성자 수도승 틱낱한(Thich Nhat Hanh)은 숨쉼을 자각할 때 참 삶을 느끼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숨쉬듯 기도하는 삶이야말로 값진 참 삶을 살게 하는 힘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셋째 과정에서 우리는 기도의 놀라운 효험을 맛보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감사와 환희의 끊임없는 체험입니다. 뜻깊은 기쁨은 항상 감사에서 우러나옵니다. 먼저 기쁨에도 두 가지 수준이 있습니다. 낮은 수준에서는 자기가 남들보다 잘 되었다고 기뻐합니다. 내가 내 반에서 1등 했다고, 우리 축구팀이 이겼다고, 내 자식이 일류대학에 입학했다고 기뻐하는 그 기쁨입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적 환희지요. 그런데 더 높은 수준은 타자 중심적 기쁨입니다. 남에게 도움 주는 일로 인해 기뻐하고, 남들이 자기로 인해 기뻐하는 것을 보고 기뻐합니다. 자기는 고통스럽더라도 그 고통으로 남이 행복하게 될 때, 비로소 기뻐하는 그 기쁨입니다. 당신도 허기져 있지만, "얘야, 나는 많이 먹었다. 너나 많이 먹어라."라고 하는 모정입니다. 자기중심적 환희는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타자중심적 환희에서 비로소 죽음도 끝장내지 못하는 아름다운 관계가 형성될 수 있습니다.

숨쉬듯 하는 기도는 타자중심적 환희를 낳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감사하는 마음을 항상 낳기 때문입니다. 감사는 남을 높이고 자기를 낮출 때 나오는 기쁨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진정으로 감사하는 사람은 저절로 상대방에게 몸과 마음을 낮추게 됩니다. 감사받는 사람도 따라서 몸을 낮추지요. 그러기에 참된 감사는 상대방에 대해서 서로 낮춤으로써 비로소 서로 사람이 되게 합니다. 한자로 사람을 人으로 표시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듯 합니다. 人은 두 사람이 감사하다고 서로 人事(사람됨의 짓)하는 모양을 형상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감사에도 자기중심적 감사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남들이 잘해주기 때문에 감사하는 것 말입니다. 그런데 이 수준의 감사는 일시적일 뿐이지요, 남들이 잘해주지 않거나 나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지 않지요. 사도바울께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뜻은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이 나에게 잘해주지 않더라도, 바로 그 쓰라린 경험을 통해 자기 삶을 남을 위해 고쳐 가는 기쁨을 느끼면서 감사할 수 있을 때 바로 그 때 참다운 감사의 마음이 생겨납니다. 바로 그러한 감사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수준 높은 환희를 보장해줍니다. 범사에 감사한다는 뜻이 바로 그런 것이지요. 그러니까 〈때문에의 감사〉가 아니라 〈불구하고의 감사〉가 참 기쁨을 선사하지요, 그것이 사람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관계 형성자로 높여 주는 힘이기도 합니다. 그런 뜻에서 이렇게 고백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감사한다. 고로 존재한다(We thank one another, therefore we are.)."

여기서 감사와 환희를 더욱 확실하게 보장해주는 깨달음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일상적으로 우리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한 경이로운 새 인식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에서 당연시되는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지 않습니다. 눈으로 매일 파란 하늘을 보아도, 꽃을 보아도, 구름과 달을 보아도 당연한 것으로 덤덤하게 넘어갑니다. 제가 작년 여름 작은 수술을 한 뒤 이틀 간 대소변을 보지 못한 곤혹스러운 고통을 겪어 보았습니다. 병원 응급실에 가서 몇 시간 지난 뒤 비로소 신진대사가 이뤄졌습니다. 그 때 저는 당연한 것에 대해 새삼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절박하게 감사했습니다. 하기야 유신시절 칠흑같이 캄캄한 독방에 갇혀 있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자유를 새삼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만.

과연 우리는 매일 아침 우리 눈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그 볼 수 있음에 대해 감사합니까!
바다와 강, 풀과 꽃, 새와 다람쥐를 보며 그 볼 수 있음에 감사할 뿐 아니라,
그것이 저에게 사랑으로 다가오고 있다고 느껴 감사할 수 있습니까!
도대체 내가 숨쉬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 숨쉴 수 있음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까!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이 같은 일상적 당연함을 경탄의 마음으로 새롭게 보고 감사할 때
비로소 생기는 기쁨의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러한 감사의 삶을 살아가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당연한 일에 감사할 수 있는 영적 감수성은 당연하지 않은 일, 엉뚱한 일, 이례적인 일에는 더욱 감사하게 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이 힘은 숨쉬듯 끊임없이 기도하는 삶에서 잉태되어 자라게 됩니다. 왜냐하면 외로우나, 괴로우나, 기쁘나, 슬프나 숨은 계속 쉬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슈바르츠 교수의 말이 다시 쟁쟁하게 제 귀에 들려 옵니다. 해변 가에 가면, 파도가 끊임없이 몰려오다가 순간 잔잔한 물로 부서지고 맙니다. 파도의 생명은 너무나 짧습니다. 잠시 있다가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맙니다. 첫 번째 파도가 그렇게 허무하게 부서져 없어지고 마는 것을 보고 두 번째 파도가 걱정되어 절망하고 불안해합니다. 이때 겁에 질린 두 번째 파도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는 새로운 깨달음을 안겨다 줍니다. "절망하지만. 너는 파도가 아니야. 너는 바다의 일부분이야."

이것은 기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음성이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은 파도처럼 순간적이고, 기복이 심합니다. 우리의 삶은 풀의 꽃과 같이 한순간에 살다가 사라지게 됩니다. 장독대 위의 먼지가 바람에 흩날리는 것과 같이 덧없는 삶이기도 합니다. 허나 우리는 파도가 아니라 바다입니다. 우리는 풀의 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요, 우리는 먼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대지입니다. 우리는 파도처럼 살지만, 하나님 안에서 그의 자녀로 바다같이 넓고 깊은 당신의 큰 사랑의 집에서 영원히 거하게 될 바다 같은 존재입니다.

다만 우리의 짧은 삶 속에서 바다 같은 넓은 하나님의 사랑을 순간 순간 체험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에서 묻어 나오는 하나님의 미소를 보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 거울 앞에 항상 서야 합니다. 그 거울 앞에서 자신의 일그러진 모습, 부끄러운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성찰의 메타노이아를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비뚤어진 모습을 바로 잡는 영적 화장(spiritual makeup)을 숨쉬듯, 쉬지 않고 해낼 수 있습니다. 잔잔하게 웃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확인할 때까지 우리는 거울에서 떠나서는 안됩니다. 미소지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모습을 영적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저희들도 은밀하게 '씨익' 웃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순간까지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에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허락해 주시고, 언제나 어떤 처지에서나 기뻐할 수 있는 바다 같은 넓고 깊은 마음을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선물 주시지 않고 배길 수 없는 사랑의 힘이 바로 하나님의 본체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오늘도 당신의 미소짓는 그 흐뭇한 모습을 볼 수 있는
기도의 은총을 허락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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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 [2002.09.08] 빙그레 미소짓는 하나님 - 기도의 기쁨과 감사 2002.09.12 한완상
31 2002 [2002.09.01] 동족을 위해서라면... 2002.09.07 최영실 교수
30 2002 [2002.08.25]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2002.08.27 길희성
29 2002 [2002.08.18] 와서 보라, 과연 우리는 무화과 나무 밑에 있나 2002.08.23 한완상
28 2002 [2002.08.11] 포도원 품꿈과 품삯 2002.08.13 정형선 교수
27 2002 [2002.08.04] 지식과 지혜 2002.08.07 채수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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