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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완상

"멋지게 지신 예수님"

(성서본문: 마가복음 7:24-30)

 

1999.11.07

한완상 형제


[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방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 아래에 엎드리니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 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말을 하였으니 돌아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 하시매 여자가 집에 돌아가 본즉 아이가 침상에 누웠고 귀신이 나갔더라 ]

- 마가복음 7:24-30




  항상 그러하듯 우리 주변 상황을 보면, 극한적인 싸움과 대결이 끊임없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정치계를 보면 참으로 부끄럽고 한심한 싸움이 오늘도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언론문건 사건으로 여야는 한치의 양보없이 정면대결하고 있습니다. 남북관계를 보아도 냉전적 대결은 아직도 부끄럽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냉전 강경세력들이 상대방의 완패를 노리면서 자기편의 완승을 꾀합니다. 종교간의 대결도, 또 한 종교 안에서 벌어지는 종파 안의 대결도 각기 완승을 겨냥하여 극한으로 달리고 있습니다.


  이같은 각박한 현실을 보면서 새삼 여유있는 싸움, 그것도 멋지게 지는 싸움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멋지게 짐으로써 상대방과 자기가 마침내 함께 이길 수 있는 그러한 흐뭇한 게임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져줌으로 함께 이기는 싸움, 그것은 곧 함께 평화를 이룩하는 비법입니다. 왜냐하면, 역사 현실에서 다툼을 완전히 배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싸움은 있기 마련입니다. 비단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말하지 않더라도, 인간사는 다툼의 일로 가득 차 있는 듯 합니다. 이 같은 다툼이 서로 상처를 내고 공멸하는 비극으로 치닫지 않고, 오히려 인간적 공동체로 나아가게 하려면, 멋지게 지는 예기(藝技, art)를 배워야 합니다. 특별히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이 이 같은 예기를 먼저 터득하고, 먼저 실천해야 합니다. 이른바 勝勝의 비법을 알아야 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참으로 이례적인 예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놀라움은 이중적입니다. 첫째, 예수의 첫 말씀이 "예수답지 않아서" 놀랍고, 둘째로 이방 여인의 단호하고 재치있는 믿음의 대응 앞에 굴복하는 흐뭇한 예수의 모습을 보고 또 한번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한 이방 여인의 대응에서 우리는 믿음의 아름다움과 그 힘을 느끼게 됩니다.


  먼저 본문 말씀의 상황을 잠시 살펴봅시다. 예수께서는 당시 가장 신성한 제도로 확인된 청결법에 정면 도전하셨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로부터 공격을 받으셨지요. 그들이 파 놓은 함정을 지혜롭게 피하시면서도, 당당하게 인간이 제도의 주인임을 선포하셨고, 위선적이고 억압적인 관례와 제도에 대해 끊임없이 도전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님은 피곤하셨던지 잠시 두로(Tyre) 지역으로 퇴수하셨습니다. 조용히 혼자 쉬면서 기도하고 싶었습니다.

 

  두로는 페키니아 지방의 항구도시였습니다. 가버나움 서북방 64 Km 떨어진 이방인의 땅이었습니다. 그곳은 당시 자연 방파제가 있는 유명한 요새이기도 했습니다. 한때 여호수아가 지배했을 때는 이스라엘의 영토였으나 예수님 당시에는 시리아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유태인들을 피하여 잠시 이방인 땅에서 쉬시려고 그곳으로 가신 것입니다. 고향 땅에서 헤롯왕 세력에 시달렸고,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로부터 괴롭힘을 당했으며, 심지어 고향사람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하셨던 주님께서 조용히 이방 땅에서 쉬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해프닝이 벌어진 것입니다. 하기야 예수님 가시는 곳마다 이례적인 사건, 곧 해프닝이 자주 일어났으니, 놀라울 일은 아닐지 몰라도, 이번은 정말 놀라운 조그마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한 이방인이 갑자기 예수를 찾아 왔습니다. 바로 그 어린 딸이 귀신들려 무척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놀라운 치유를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마침 두로에 와 계신다는 말을 듣고 일심 달려온 것입니다.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간청했습니다. 바로 이 사건에서 우리가 오늘 배울 수 있는 값진 교훈과 깨달음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예수님의 거친 모습에 주목합시다. 우리가 친근하게 여기고 있는 인자한 예수님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습니다. 대신 굉장히 신경질적인 예수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심하게 말하면 인종차별주의자(racist)나 성차별주의자(sexist) 같은 예수의 모습을 만나게 됩니다. 자기 어린 딸을 낫게 해 달라는 이 불쌍한 희랍여인의 간청을 한 마디로 짤라 이렇게 거절하셨습니다.


  "... 자녀로 먼저 배불리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않다..." 이 말씀이 도무지 예수님 말씀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전형적인 바리새 국수주의자의 말처럼 들립니다. 얼른 보면 예수님은 인종차별자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자녀란 선민 유대인을 뜻하며, 개는 멸망받아 마땅할 이방인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자녀와 개가 모두 떡을 필요로 한다면, 마땅히 그 떡은 자녀인 유대인에게 먼저 주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인간을 개로 격하시키는 편견도 문제이지만, 인간의 기본권 실현에 있어서 인종에 따라 마땅히 차별해야 한다는 발상도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두는 그분의 자녀로서 동등하다는 생각은 증발되고 만 듯 합니다.


  게다가 그와 같은 매정스러운 예수님의 말씀은 성차별주의자의 말 같기도 합니다. 여성의 간절한 청원을 대번에 거절해버린 남성, 그것도 어린 딸의 아픔을 전혀 恤하지 않는 듯한 남성으로 비쳐지기도 합니다. 어찌해서 예수의 모습이 이렇게 나타날 수 있을까요? 적지 않은 주석가들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이 모순을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의 이 잔인한 듯한 말씀이 당시 널리 펴져 있던 상투적인 잠언이라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세상의 모든 어미는 개나 다른 가축보다 앞서 자기 자녀를 먹여야 한다"라는 상식적 말을 예수께서 인용했다는 것이지요. 하기야 이 말은 지금도 타당하지요. 개 같은 동물보다 인간을 더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상식이 아닙니까. 모두가 주린다면, 떡이 생기는 경우 사람에게 먼저 가야하고, 그 중에서도 자녀에게 먼저 그것을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음식이 남는 경우에만 그것을 개에게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특별히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가 아니라는 뜻이지요.


  게다가 예수의 동족인 유대인 환자를 먼저 돌보아 고쳐주고, 그 다음에 이방인 환자를 돌보겠다는 뜻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그것을 구태여 부당한 것으로 비방할 수만은 없겠습니다. 오히려 동족애의 표현으로 볼 수 있고, 자연스럽고 정직한 민족애의 발로로도 볼 수 있겠지요. 개에 대한 당시의 인식은 좋지 않았습니다. "개이게 거룩한 것을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개는 불명예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개는 당시 난폭한 들개들을 지칭한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개는 그러한 들개 같은 동물이 아니라 집에서 애완용으로 키우는 작은 개인 쿠나리아(kunaria)를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 개를 불명예의 상징으로 볼 필요 없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웃으시면서, "애완용 개보다 자녀를 먼저 먹이는 것이 순리가 아니겠습니까"하는 식으로 말씀하셨다면, 예수를 꼭 잔인한 인종차별주의자나 성차별주의자로 볼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좋게 해석한다고 하더라도 유대인과 이방인을 동등하게 다루지 않은 뜻의 말을 예수님께서 하신 것은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특히 동족의 땅에서 여러 가지로 시달리시다가 겨우 두로 지방에 와서 홀로 조용히 쉬고 계신 예수님을 귀찮게 한 희랍여인에게 반갑게 웃으면서 말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인간이신 지라 오랫만에 잠시나마 즐기고 있던 조용한 자유가 침해된 데 대해 언짢게 신경질적으로 대응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더 현실적인 해석이 아닐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지극히 자존심 상하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 헬라 여인은 정말 뜻밖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 여인의 감동적인 모습에 주목해 봅시다. 먼저, 그녀의 겸손과 인내가 보통수준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잔인한 듯 들리는 말씀에 그녀는 결코 신경질적으로 대응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착 가라앉았습니다. 자기를 개로, 비록 애완용 개라 하더라도 개로 비하시킨 예수님 앞에 흥분하지 않고 더욱 겸손한 자세를 취하면서 놀라운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예수의 모멸적인 말씀에 화를 내기는커녕 "예, 그렇습니다. 나는 개와 같은 존재입니다" 라고 차분하게 시인했습니다. 깜짝 놀랄 일입니다.


  이렇게 나올 때 어찌 상대방이 미안해하지 않겠습니까. 어찌 상대방이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겠습니까. 가장 어리석고 효과 없는 대응은 공격적 언어에 더 공격적 표현으로 맞대결하는 것입니다. 증오의 회오리바람이 거칠게 불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둘다 패배하게 됩니다. 이 헬라여인은 바로 이 같은 증오의 에스칼레이션 법칙을 너무나 잘 파악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자기비하를 통해 예수님과의 대화를 단절시키지 않고 계속 대화를 유도해 나갔습니다. 스스로 개요, 부스러기를 얻어먹어 마땅한 존재임을 차분히 시인하면서 예수님을 이라고 부른 최초의 유일한 사람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 헬라 여인의 믿음, 그 깊은 믿음에 놀랍니다. 비록 예수님이 거친 말씀을 하셨으나 예수님만은 반드시 자기의 어린 딸을 귀신으로부터 해방시킬 수 있음을 확신했습니다. 흔들리는 자존심을 차분히 관리해 낼만큼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강한 믿음이 예수님의 놀라운 원격치료의 기적을 불러일으킨 셈입니다. 대체로 치료는 의사가 환자와 면대면(face to face) 접촉을 통해 이뤄지는 행위인데, 이 경우 예수님의 치료는 거리의 장애를 뛰어넘는 놀라운 효력을 지녔습니다. 그것도 무료의 치유였습니다. 이 여인의 깊은 믿음이 마침내 이 같은 기쁨의 기적을 낳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 여인의 恤 곧 사랑의 모습에 주목합시다. 이 여인이 보여준 여러 가지 놀라운 자질, 곧 겸손, 인내, 믿음, 재치 등이 그녀의 깊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하겠습니다. 귀신들려 고통 당하는 어린 딸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체휼했던 그 위대한 사랑이 그녀로 하여금 아름다운 자질을 갖게 했습니다. 이 같은 사랑이 그녀를 부드러운 인내의 여성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단호한 의지의 여인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했습니다. 유대인과 남성들이 예수님의 치유의 카리스마를 다 먹어 치우기까지 결코 기다릴 수 없다라고 단호한 결심을 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 이 헬라여인은 예수님을 마침내 이겨냈습니다. 이 여인은 예수님과의 논쟁에서 승리한 최초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눈을 예수님에게 돌려봅시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은 대단한 논객이었습니다. 한번도 진 적이 없었습니다. 공생애 시작하기 전 광야에서 마귀와의 논쟁에서 주님은 훌륭하게 이겨냈습니다. 세금문제로 논쟁을 걸어 왔을 때 주님 또한 통쾌하게 이기셨지요. 영생에 대한 문제로 예수를 시험했던 율법학자를 주님은 선한 사마리아 비유로 크게 깨닫게 하셨었지요. 안식일에 선한 일 하는 일로 논쟁이 벌어졌을 때에도 장엄한 인권선언을 함으로써 물리치셨습니다. 현장에서 잡힌 간음한 여인에 대한 논쟁에서도 주님께서는 뛰어난 지혜로 논쟁을 걸어 온 사람들을 물리 쳐셨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주님은 아무도 당해낼 수 없는 일당 백, 일당 천의 논객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보잘것없는 헬라여인, 이방여인과의 논쟁에서는 지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의 대응에 주목해야 합니다. 여인의 겸손하고도 당찬 대응에 주님은 자신을 활짝 열었습니다. 여인의 그러한 대답에 주님은 자신을 열 뿐 아니라 비우셨습니다. 그 여인의 주장이 전적으로 옳음을 시인하셨습니다. 마치 그러한 응수를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주님은 `당신의 말이 옳소'라고 인정하시면서, "돌아가십시오. 당신의 딸은 막 나았습니다"라고 선포했습니다. 선포가 아니라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지셨음을 시인했습니다. 그는 패배하셨습니다. 놀랍고 놀라운 일은 이렇게 지심으로써 주님은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어린 딸의 아픔을 제거해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기적, 그것도 원격치유의 기적이 바로 그의 패배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의 멋진 패배가 엄청난 치유의 효과를 낸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그 여성과 어린 딸은 모두 승리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패배는 바로 복음이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복음의 뜻을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도무지 멋지게 지는 일을 볼 수 없고 듣지도 못합니다. 멋지게 짐으로써 이긴 자를 겸손케 하여 마침내 모두가 승리하는 것이 얼마나 흐뭇하고 아름다운 일인지를 깨달을 수록 우리의 현실은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정치갈등, 지역갈등, 노사갈등, 남북갈등에서 우리는 오만한 완승을 위해 악다구니같이 날뛰는 탐욕의 모습들을 너무 자주 보게 됩니다. 언제 우리는 이 악순환에서 해방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에 스스로 여시고, 비우시고, 지심으로써 모두를 이기게 하시고, 놀라운 치유의 구원행위를 감동적으로 보여주신 예수님이 더욱 그립습니다. 우리가 예수의 지심을 우리의 개인의 삶, 가정의 삶, 직장의 삶, 교회의 삶, 민족의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다면, 서로를 건강하게 하는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서로 지는 지혜, 서로 지는 믿음, 서로 지는 사랑을 실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회에서조차도 완승을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교회는 우리를 귀신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예수의 몸이 아니라, 우리를 탐욕의 귀신에 사로잡히게 하는 마귀의 몸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끊임없이 추악한 분열을 거듭할 것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철저하게 패배하셨던 우리 주님께서 그 엄청난 힘으로 오늘도 우리를 치유케 해 주심을 감사 드립시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 넘어 오늘도 온갖 고통의 족쇄에 매어있는 우리를 해방하여 낫게 해 주시는 예수님, 스스로 멋지게 지고 계신 예수님을 똑바로 쳐다봅시다. 그 멋진 예수님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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