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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길희성

 "예수는 다시 오시나"

(성서본문: 마가복음 13:28-31 ;  9:1)

 

1999.10.17

길희성 형제



[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일어나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하시니라 ]

  - 마가복음 13:28-31 ; 9:1

 

 


  날씨가 제법 쌀쌀해지면서 다가올 겨울을 예고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이제 서서히 저물어가고 있습니다. 머지 않아 연말 분위기에 휩싸이게 될 것이며, 벌써부터 망년 행사를 위해 호텔 예약이 다 차버렸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올해 맞는 연말은 아무래도 여느 해와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금세기 마지막 연말, 아니 한 밀레니엄을 마감하고 새로운 밀레니엄을 앞둔 연말이기 되겠기에 각별한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은 개인대로 특별한 감회에 사로잡힐 것이며, 세계의 내노라 하는 지성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그리고 언론매체들은 언론매체대로 앞을 다투어 한 세기, 한 천년기를 마감하고 새 천년을 전망해보는 특집기사들을 쏟아 낼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호재를 만났다고 생각하는 각종 예언가들과 종말론 신도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더욱 기승을 부릴 것입니다. 이미 예루살렘에는 수많은 종말론 신자들이 집결해 있다고 합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세기가 바뀌고 천년대가 바뀌는 2000년이 된다 해도 1999년과 특별히 다를 이유가 없습니다. 새롭다면 모든 해가 다 새로우며, 2000년 말에도 역시 사람들은 1999년 말과 마찬가지로 또 하나의 다사다난했던 해가 저물었다고 말할 것입니다. 역사엔 엄밀히 말해 비약이란 없습니다. 만약 2000년에 어떤 특별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 원인은 이미 1999년과 그 이전에 마련되어 있던 것이 곪아터지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역시 1999년은 특별한 해로 우리들의 기억 속에 남을 것입니다. 세기의 전환과 밀레니엄의 전환을 경험한 우리 세대는 무언가 특별한 역사의 시기를 살았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우리가 2000년을 목전에 둔 현 시점에서 전 인류의 역사와 삶에 대하여 하나의 총체적 반성을 해 보는 것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역사의 시점이 우리로 하여금 특별한 역사의식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 인류 역사는 다음 세기에 어떤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막다른 골목, 아니 어떤 낭떠러지를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인가, 우리 인간들이 현재 살고 있는 이러한 방식대로 계속해서 살아가도, 그리고 지금의 추세대로 역사가 계속 진행되 나간다 해도 인류 문명은 별 문제 없이 계속될 것인가, 등의 근본적인 질문이 우리 속에 자꾸만 일어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굳이 종말론을 들먹이기 전에, 이미 어떤 종말적 불안감 내지 위기감 같은 것이 20세기를 마감하는 우리들을 무겁게 누르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종말론은 이제 어느 특정한 종교적 가르침이기 전에 어쩌면 전 인류에게 이미 현실로서 다가오고 있는 문제이며, 특정한 부류의 신도들만의 관심사이기에 앞서 생각을 하며 사는 사람들 모두의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종말이라는 관념이 자아내는 어떤 절박성, 위기감이 특정 종교의 교리와 상관없이 세기말을 당하여 인류 역사 전체를 압박해오고 있다는 생각이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토록 새로운 세기를 앞둔 인류 역사를 불안하게 만들며, 낙관보다는 비관, 기대보다는 염려, 희망보다는 오히려 절망 쪽으로 기울게 합니까?


  21세기는 무엇보다도 지구 자체의 종말, 적어도 인간과 여타 생명체들이 살 수 있는 환경으로서의 지구의 종말이 현실화 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되며, 아마도 이것은 인류가 해결해야 할 다음 세기 최대의 시련이요 도전일 것이라는 데 많은 지성인들이 의견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가 이렇게 엄청난 양의 물건을 만들어 내고 펑펑 써대도 괜찮을까 하는 의구심이 의식 있는 사람들 사이에 보편화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대인들은 마치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이 있는 재산 한 번 싫건 써보기나 하고 죽자고 작정이나 한 사람처럼, 다음 세대야 어떻게 되건 지구를 마구 착취하고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20세기의 인류는 그 이전 어느 시대보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살았지만, 바로 이 풍요가 지구 자체의 생존을 담보로 한 엄청난 불장난이 아닌지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모두가 어쩔 수 없이 어떤 거대한 힘과 체제에 의해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생각해 보면 아직도 인류의 절반이 되는 30억 정도의 인구가 하루에 2달러 미만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는 비참한 가난을 면하지 못하고 있는데도 이러니 말이다. 세계 인구의 5분지 1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 사람들은 머지않아 미국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우리 나라 사람들 정도의 소비생활을 하게 될 것이 뻔하며, 그렇게 되면 이미 몸살을 앓고 있는 지구, 특히 한반도는 아예 중병에 걸려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돌입할 것 같습니다. 요지음 핵발전소 사고가 사람들에게 큰 불안을 자아내면서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지만, 사실 이 핵 발전이야 말로 우리가 처한 모순의 단적인 예 입니다. 할 수도 없고 안 할 수도 없는 괴물이 핵 발전이며, 현대 과학이 안겨준 첨단 성과물 가운데 하나지만 동시에 현대 과학이 풀 수 없는 고민거리이기도 합니다. 아무튼 우리 현대인들은 지구의 시한부 생명을 담보로 하여 지극히 위험한 게임을 벌이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불안하기는 하나 그 불안을 감추면서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한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어쩌면 이 위험한 게임을 도박군의 심정으로 즐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세계 인구는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과거 40년 사이에 세계 인구는 30억에서 60억으로 갑절이 증가했으며, 이러한 추세로 가면 머지 않아 100억 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전망입니다. 이 100억의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하여 우리는 어머니 대지의 젖을 얼마나 더 빨아대야 할 것이며, 그 몸을 얼마나 더 닦달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너무나 불쌍하고 미안합니다. 그래도 말없이 참고 인내하는 어머니 지구는 하루에도 24만 명의 아기들을 태어나게 하고 있으니, 축복인지 재앙인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입니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러한 인구 증가가 주로 가난한 나라들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들 나라들의 경제발전 속도를 앞지르고 있으니 그들이 언제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하겠는지 절망적인 생각이 듭니다. 날로 파괴되는 환경, 날로 늘어나는 인구, 날로 커져 가는 빈부의 격차, 이 모든 것들이 새로운 세기의 전망을 어둡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공포의 핵전쟁의 위협은 여전히 인류와 지구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냉전체제가 끝났다고 하나 세계는 오만하고 안하무인격인 미국이라는 나라를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결코 남겨두지 않을 것이며, 예측하기 어려운 러시아의 불안한 정치상황, 초강대국을 지향하여 한풀이라도 하듯 앞 뒤 안 가리고 돌진하고 있는 중국, 이에 맞서 언젠가는 핵무장을 할 것이 뻔한 위험한 나라 일본, 그리고 이미 핵무장을 한 인도와 파키스탄의 앙숙과 같은 대립, 이 모든 것이 오히려 냉전시대보다 세계정세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냉전시대에는 오히려 큰 형님 둘이 버티고 있어서 그야말로 군기를 잡았지만, 이제는 첨예화된 국가간 경쟁과 벌거벗은 민족주의만이 발호 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세계는 더 위험한 곳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핵무기가 언제 마피아들의 손에 넘어갈지 모른다는 소리마저 들립니다. 남북한 관계는 최근에 좀 차가운 얼음이 녹을 것 같은 기운이 돌기는 하나, 아직도 살얼음을 걷는 듯 조심스럽고 불안하기 짝이 없으며, 언제 벼랑 끝 대치상황으로 돌변하여 전면전으로 비화될지 모릅니다.


  본래 시대의 징표를 읽고 예민한 감각으로 역사에 경종을 울리는 것은 세계 종교들 가운데서 기독교가 지닌 특성 가운데 하나이며, 기독교의 본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때가 찼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는 예수의 메시지와 더불어 시작한 예수 운동과 기독교는 종말론적인 신앙운동으로 시작했으며, 지금은 이 종말론적 성격이 많이 약화되고 그 충격적 메시지가 둔화되었지만 여전히 기독교는 종말 신앙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신학적 성찰을 무시한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사회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지만, 분명히 말하건 데 이들은 기독교 종교 자체의 산물이며, 어디까지나 기독교가 책임져야 할 문제입니다. 기독교는 종말론과 함께 시작한 종교이며 종말 신앙을 심어준 것이 바로 기독교이며, 시한부 종말론에 그럴만한 빌미를 제공한 것도 성경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세기의 모퉁이를 돌아가며 새로운 밀레니엄을 목전에 둔 시점에서 기독교 종말 신앙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새겨 보는 일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흔히 시한부 종말론을 비판하기를, 예수는 종말의 때는 하나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했기 때문에 종말의 시기를 못박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합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가 13:32). 마치 여행 떠난 집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것과 같이, 혹은 도둑이 언제 침입할 지 모르는 것과 같이 인자가 올 것이니 항시 깨어 있으라고 예수께서 말했지 언제 특정 시간을 종말의 순간으로 예언하라 하셨는가 라는 비판입니다. 종말은 오되 특정한 날짜를 못박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옳은 비판이지만, 그러나 문제가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습니다. 복음서의 다른 곳을 보면, 분명히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가 시간적으로 임박했다고 믿고 선포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사람도 있다"(마가 9:1)고 말씀하셨는가 하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이스라엘의 도시를 다 다니기 전에 인자가 올 것이다"(마태 10:23), 혹은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런 일들이 다 일어날 것이다"(마가 13:30)라고 하는 말씀이 복음서들 여기 저기에 실려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말들이 어떤 성서 해석가들의 주장대로 예수님 자신의 말씀이 아니었다면, 복음서는 이러한 당혹스러운 말들을 굳이 만들어서 기록했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서가 쓰여진 70년, 80년 당시에는 종말은 오지 않았고 따라서 예수의 이러한 예언들이 이미 잘못된 예언, 틀린 예언들로 판명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자기들이 믿는 주님의 권위에 먹칠할 이러한 얘기들을 굳이 지어낼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종말의 임박성을 예언했던 이러한 말들이 실제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당혹스러움에도 불구하고 충실히 기록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예수께서는 종말의 때를 몇 년 몇 월 몇 일이라는 식으로는 아무도 그 시간을 모르지만 자신의 당대에 임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은 틀림없었다고 저는 봅니다. 문제는 예수님조차 실수하셨던 종말의 예언을 오늘날 종말론자들이 남발하고 있으며, 그것도 날짜까지 예언하다가 큰 망신을 당했는데도 계속 시도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거짓말을 하셨단 말입니까? 물론 아닙니다. 거짓말이란 의도적으로 누구를 속이려고 한 말이지만, 예수의 종말 발언은 누구를 기만할 의도에서 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결과적으로 잘못된 혹은 틀린 예언으로 판명되었을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예수를 주님으로 믿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그리스도인들로서는 20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당혹스러운 말씀들이 엄연히 복음서에 실려 있고, 사실 예수께서 종말의 시기에 관해서 잘못 판단을 하셨는데도 불구하고 기독교 2000년의 역사가 그대로 계속된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신 말씀이 한편으로는 오류로 판명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더 깊은 차원의 사실로서, 진리로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즉,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과 초대 교회 신자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적, 그의 십자가 상의 죽음,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의 부활 사건 속에 이미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역사가 분명하게 시작되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가 곧 이루어진다는 예수의 말씀은 실제로 예수 자신과 더불어, 그가 일으켰던 운동 속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예수 자신도 모르게, 아마도 그가 생각하고 의도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라는 종말이 현실화된 것입니다. 적어도 초대교회 신자들에게는 예수 사건은 그 자체가 하나님의 권능의 역사였으며 하나님 나라 실현의 분명한 시작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 사랑과 은총의 역사, 그리고 죽음마저도 넘어서는 부활과 생명의 새로운 역사가 예수와 더불어 개막되었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는 시작될 수 있었고 그 엄청난 박해를 견디고 성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와 더불어 종말은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확신이야 말로 기독교의 근본적 믿음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렇게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역사, 종말적 역사를 계속하고 확장할 사명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 나라를 순전히 앞으로 올 미래적 사건으로만 간주하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자신의 활동과 제자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역사가 성취되기 시작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비록 지금은 겨자씨 하나와 같이 작지만 그 안에 생명력이 있어 점점 자라날 것이며, 밀가루 반죽을 부풀게 하는 누룩과도 같이 지금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곧 그 힘을 발휘하게 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또 그는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누가 17:21)고 했으며,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누가 11:20)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확실히 예수의 제자들은 그 분의 권능 있는 말씀과 행동 속에서, 그리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꼈고 하나님의 권능과 다스림, 하나님 나라의 공의와 사랑을 이미 현세에서 확인하고 확신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과거의 삶에 과감히 종지부를 찍고 감사와 기쁨으로 충만한 새로운 삶, 종말적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하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이 실행해야 할 하나님의 뜻입니다"라는 말씀은 이러한 종말에 대한 확신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 말입니다. 사실 신약성서의 어느 한 곳도 이러한 예수와 더불어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종말 신앙이 자아내는 흥분 없이는 이해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오심과 더불어 이미 이루어지기 시작했다는 확신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을 비롯한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께서 생전에 예언하신 대로 언젠가는 - 곧 혹은 얼마간 교회의 역사가 진행 된 다음 - 하나님 나라가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완전히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올 이 종말은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대로 묵시문학적 종말의 주인공 인자와 더불어 임할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 믿음으로 박해와 시련의 시간들을 견딜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이 종말의 주인공은 이제는 다니엘서 같은데서 예언한 `인자'가 아니라 당연히 하나님 나라의 참 모습을 생전에 그렇게도 선명하게, 그렇게도 강력하게 보여주신 예수님 자신일 것이라는 데에도 하등의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2000년이 지난 오늘날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의 전통에 따라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이 예수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신앙을 여전히 간직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때로는 자칭 예수라는 자들이 출현하여 교회와 성도들을 혼란스럽게 하기도 했으며,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거짓 예언으로 혹세무민하기도 했지만, 교회는 이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 여전히 예수 재림을 고수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예수님 자신도 그리고 교회도 하나님 나라를 `이미, 그러나 아직은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시간적 긴장 구조 속에서 파악했습니다. 교회는 이미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역사를 뜨겁게 기억하면서 앞으로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날 하나님 나라를 간절히 기대하는 희망 가운데 사는 기억과 희망의 공동체입니다.


  종말론에 대한 그릇된 신앙은 대체로 이 `이미'와 `아직 아니'라는 두 시간적 측면 가운데서 하나만을 강조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우선,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이미'를 무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 째 오심으로 이미 종말의 새로운 역사, 하나님 나라가 구체적인 모습으로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도외시합니다. 이 사실을 망각하고 앞으로 올 종말만 생각하고, 거기에 집착하고, 거기에 모든 것을 걸고 사는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분명히 그릇된 신앙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첫 번째 오신 예수가 저들의 삶에 아무런 변화도 초래하지 못했다면 앞으로 예수가 두 번, 세 번, 아니 수백 번 더 오신다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가 이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확인하지 못하고 산다면,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 역시 우리들의 몫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외면하고 산다면 우리는 앞으로 올 하나님 나라와도 인연이 없는 존재가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현대 신학자들 가운데는 종말이란 불확실한 어떤 미래적 사건이 아니라 영원이 시간의 세계로 뚫고 들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사건 자체가 종말이며, 우리가 지금 여기서 예수의 메시지를 듣고 새로운 삶을 결단하는 그 순간이 종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종말의 미래적 성격을 포기하고 과거나 현재적 성격만을 강조하는 이러한 사상도 문제가 있는 치우친 견해지만, 종말을 순전히 미래의 것으로만 생각하고 이미 시작된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기억하지 못하고, 또 현재도 하나님의 백성들을 통해 세계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외면하는 것은 더욱 더 잘못된 신앙입니다.


  교회는 종말적 신앙 공동체로서, 지금 바로 여기 우리가 처한 현실 속에서 예수와 더불어 시작된 강력한 하나님 나라의 운동을 계속해야만 합니다. 다가올 미래를 걱정하기에 앞서 지금 여기서 종말적 삶을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사건화 시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어둠의 세계에서 빛을 발하면서, 죽음의 역사 속에서 생명의 역사를 창출하는 운동의 주체로서 살아야 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우리 새길교회도 바로 이와 같은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모이는 종말적 공동체이며, 매 주일 이러한 각오를 다지고 조금이라도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공동체입니다. 한국교회의 근본적 문제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역사를 창출하는 힘과 생명력을 상실하고 현실에 안주하며 교회 조직만 살찌우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미 종말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그것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처럼 세상을 등지고 보따리 싸서 산 속이나 숲 속으로 들어가서 자기들끼리 공동생활을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적 삶은 예수와 그의 제자들처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이 현실 한 복판에서 빛과 소금으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 바로 삶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대안적 공동체로서 살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세상을 등지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입니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는 다른 대안적 삶을 사는 일이 더 힘듭니다.


  언젠가 텔레비죤에서 우연히 말로만 듣던 거창 고등학교에 대한 소개를 접할 수 있었는데, 저에게는 실로 참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학교는 어느 장로님에 의해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는 민주시민 양성"을 목적으로 창립되었고, 그 정신을 철저히 추구하는 학교인데, 우리 교회가 하나의 대안교회를 지향한다면 그 학교는 그리스도의 정신에 따라 교육하는 하나의 대안학교인 것 같습니다. 이 학교의 교훈은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는 것이고, 자기 삶을 사는 사람, 양심에 따라 정의롭게 사는 사람, 나눔으로 섬기는 사람,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 잠재력을 최대로 계발하는 사람, 어두운 곳을 비추는 등불 같은 사람이 교육 이념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정작 이 학교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직업선택의 십계명이었습니다:

1. 월급이 적을 쪽을 택하라.
2.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을 택하라.
3. 승진의 기회가 거의 없는 곳을 택하라.
4. 모든 조건이 갖추어진 곳을 피하고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황무지를 택하라.
5. 앞을 다투어 모여드는 곳을 절대 가지 마라.
6. 장래성이 전혀 없다고 생각되는 곳으로 가라.
7. 사회적 존경 같은 것을 바라볼 수 없는 곳으로 가라.
8. 한 가운데가 아니라 가장자리로 가라.
9. 부모나 아내나 약혼자가 결사반대를 하는 곳이면 틀림없다. 의심치 말고 가라.
10.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라.

  물론 실천이 얼마나 따르는지는 우리 새길교회와 마찬가지의 고민이 있겠지요. 하지만 이러한 교육이념을 표방하는 대안학교가 대한민국에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만도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것은 보통 말하는 기독교 학교, 이른바 `밋숀 스쿨'이 아니라 진짜 예수를 아는 학교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사회에 이러한 대안학교, 그리고 대안 공동체, 대안교회들이 많아질 때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역사가 지금 여기서 현실화될 것이라는 데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비전을 지금 여기서 현실화하는 공동체이지만,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도 확실하게 손에 잡히지는 않는 미래의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기다림의 공동체임도 기억해야 합니다. 아직은 부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 희미하고 약하기 짝이 없는 하나님 나라 운동, 너무나도 약해 때로는 어둠의 세력에 질식되고 꺼져버릴 것만 같은 이 생명의 역사가 언젠가는 만인들이 보는 앞에서 완전히 실현되어 마침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날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희망 가운데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또한 종말론적 신앙의 빼놓은 수 없는 측면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 어디서나 만인에게 이루어질 보편적 종말에 대한 희망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기독교 신앙의 유산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아름다운 창조세계인 지구 자체가 비극적 종말을 맞을지도 모르는 세기 말과 천년 말을 맞아 이와 같은 희망을 키운다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이러한 종말적 희망 없이 우리는 역사의 궁극적 의미와 희망을 간직하고 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의 삶이 그러하듯이 인류의 역사도 시작이 있고 끝이 있으며, 하나의 전체로서 모습이 드러날 때 비로소 그 과정 속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이 최종적 의미를 드러내는 법입니다.


  한 인간에 대한 평가는 죽을 때 보아야 합니다. 어떻게 그가 인생을 마치는가에 따라 그의 삶 전체가 달리 해석되며 그 의미가 드러납니다. 죽기 전에는 그 사람의 인생을 함부로 평가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생을 중도에서 하차한 사람, 자기 인생의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간 사람의 경우 그의 삶을 평가하지 않습니다. 할 수가 없습니다. 하다가 만 이야기에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역사도 종말에 가서야, 그리고 종말이 있어야 비로소 그 전체적 의미가 드러나는 법입니다. 역사가 완성이 없고 끝없는 과정뿐이라면 역사는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맹목적인 것이 되어버리며, 끝없는 갈등과 투쟁의 장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며, 다시 오셔서 그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모두 거두어 하나님께 바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첫 번째 오심은 역사를 새롭게 하시려는 것이었고, 두 번째 오심은 역사를 완성하려고 오시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끝내 빛이 어둠을 이기고 진리가 거짓을, 정의가 불의를 이기는 세상이 이루어지고 말 것이며, 수없이 많이 흘렸던 억울한 눈물과 피의 울부짖음이 마침내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마치 50년이 지나 노근리와 그 밖의 한반도 곳곳에서 흘렸던 무고한 양민들의 피가 이제 보상을 받을지도 모르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억울하게 죽은 자들, 의로운 자들의 깊은 한이 풀려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세상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것이 기독교의 종말적 신앙입니다. 만약 이러한 종말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우리가 과연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에 대한 헌신을 계속할 수 있을지 정직하게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결과에 대한 보장 없이 그냥 투쟁하고 노력하는 것 자체가 인간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하면서 기독교의 종말 신앙을 비웃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정의를 보지 못하고 죽어간 과거 세대의 무수한 인간들에게 그것이 도대체 무슨 위로가 되겠습니까? 역사의 진정한 완성은 죽은 자들이 다 함께 깨어나서 변화된 세상에서 함께 축제를 벌일 때에 비로소 이루어집니다. 부활이 없다면 실로 역사는 이길지도 질지도 모르는 헛된 싸움터일 뿐이며 인생은 끝없는 수고의 연속일 뿐입니다. 종말은 결코 산 자들만의 축제이어서는 안 됩니다. 산 자들의 축제를 위해 제물로 죽어간 자들과 함께 하는 축제만이 진정한 축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 천년은 과연 우리에게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올까요? 지옥이나 재앙으로, 아니면 보다 안정된 평화와 번영의 시대로 다가올까요? 어떻든 우리 기독 신앙인들에게는 한 가지 분명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래는 끝내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역사의 마지막 말, 최종 발언권은 하나님께 달려 있지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기다림의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신앙입니다. 이 미래는 저주와 재앙이 아니라 예수의 첫 번 째 오심과 같이 하나님의 다스림, 곧 그의 공의와 평화가 실현되는 복음, 즉 기쁜 소식으로 우리에게 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다만 2000년 전에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들에게 이미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그 실현 가능성을 확신하게 해 주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면서, 희망 가운데 참고 견디면 언젠가는 주님의 얼굴을 직접 대하는 축제의 날이 오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면서 한 세기, 한 밀레니엄을 마감하려는 시점에서 우리가 보는 세상이 아무리 어둡고 전망이 불투명하다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 주신 하나님께서 그가 손수 지으신 우리 인간과 모든 피조물들을 향한 그의 사랑의 손길을 거두시지 않고 다시 한번, 아니 몇 번이라도 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구해주실 것이며, 그의 구원의 역사를 끝내 완성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우리는 가지게 됩니다. 역사의 밤이 깊어질수록 하나님이 친히 다스리시며 그의 뜻이 해처럼 밝고 투명하게 실현되는 그의 나라를 향한 우리의 갈망과 열정은 더욱 더 불타오를 것입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오소서"(고전 16:22)라는 우리들의 탄원은 더욱 깊어만 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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