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se_btn
(*.206.75.175) 조회 수 3481 추천 수 1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Extra Form
설교자 한완상

"예수의 열린 밥상 공동체"

(성서본문: 누가복음 14:15-24)

 

1999.08.01

한완상 형제

[ 함께 먹는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이르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밭을 샀으매 아무래도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양해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한 사람은 이르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 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이르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

- 누가복음 14:15-24

 




  새 천년을 눈앞에 두고 우리 기독교 신자들은 지난 천년간 하나님과 역사 앞에 부끄러웠던 일들을 차분히 점검해 보고 심각한 반성을 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독교가 저지른 잘못을 뉘우쳐야 합니다. 그래야만 21세기가 보다 밝고 맑아질 것입니다. 우리가 저지른 잘못 중에는 제도 교회의 근본주의 신앙과 신학이 크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히 역사적 예수를 신앙의 그리스도에 무조건 종속시켰던 신학적 短見을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사도신경같은 전통적인 교회 신앙고백에는 역사적 예수의 자리가 없다시피 합니다. 니케아 신앙고백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신 역사적 사실만 지적될 뿐입니다. 그 모두가 초대교회의 신앙 경험에서 나온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이라 하겠습니다. 부활 이전의 예수에 대한 온당한 관심과 이해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이 부족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역사적 예수에 대한 신학적 관심과 탐구를 마치 이단사설이나 되는 것처럼 가혹한 제재를 가했던 제도교회가 잘못되었다고 하겠습니다. 종교개혁과 계몽사상을 거치면서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었으나, 그 억압적인 제도교회 분위기 속에서 아주 조심스럽게 지속되어 왔습니다. 18세기의 Reimarus나 Strauss등의 신학자들은 용기있게 역사의 예수를 탐구했으며,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수 탐구의 열의가 높아졌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 역사의 예수에 대한 탐구욕은 식어집니다. 이른바 無探究(no quest) 시기가 옵니다. 그것은 예수의 임박한 종말론이 우리 시대에는 낯선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일군의 북미 신학자들이 역사적 예수에 대한 탐구에 다시 불을 질렀습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임박한 종말론적 말씀의 역사성이 희박한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부활사건 이후 초대교회의 상황에서 임박한 종말론이 재해석되고 편집된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인식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같은 탐구결과는 앞으로도 계속될 터인데 새로운 탐구자들은 대체로 역사적 예수를 임박한 종말론자로 보지 않고, 당시의 기존 패러다임을 창조적으로 뒤엎는 예언자로, 스승으로, 개혁자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바로 이 같은 부활 전의 예수(Pre-Easter Jesus)에 대한 새로움 탐구 흐름에 따라, 우리는 예수님께서 무상의 치유(free healing)와 열린 밥상공동체(open commensality)를 실천하시면서 하나님 나라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 주셨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우리의 독특한 상황에서 예수님의 이 같은 실천을 모범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예수님의 열린 밥상 공동체의 문제를 다루면서 여러분과 함께 은혜 받고자 합니다.

  본문의 비유를 보면, 잔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사람과 응한 사람이 대번에 구분됩니다. 먼저 잔치 초대를 거절했던 사람들은 대체로 두 가지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첫째 밭과 같은 부동산이나, 소와 같은 동산을 사고 팔아 경제적 이문을 남기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기나 친구의 결혼식에 참여하려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이스라엘 사회 안에서 상당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기득권을 계속 누리려 하기 때문에 하나님 잔치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의 권력, 부, 그리고 명예를 누리는 일에 바빠 주님의 잔치초대를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로, 이들은 선민의식을 가졌기에 예수의 초대를 가볍게 여겼던 유대인들로 볼 수 있겠습니다.


  주님 잔치를 받아드렸던 사람들은 이들과는 달렸습니다. 길거리나 골목에 서성거렸던 밑바닥 인생들이 잔치초대에 응했습니다. 계급, 성, 지위로 보아 낮았던 사람들, 그리하여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었던 민중들, 흑암 속에서 희망 없이 살 수 밖에 없었던 소외된 사람들. 뿌리뽑힌 채 외롭게 살았던 땅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복수의 미래를 학수고대했을 것입니다. 종말론적 희망을 갖고, 천지개벽을 바랐던 사람일 수도 있겠습니다. 결국 이 잔치 비유에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바로 이 같은 밑바닥 사람들, 民草임을 확인하게 됩니다.


  이 같은 잔치의 모습은 제 1세기 유대사회의 관습에서 보면, 정말 예사롭지 않은 可觀의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바로 이 같은 에 주목해야 합니다. 당시의 유대사회가 그토록 강조하고 강요하고 강행시켰던 청결체계와 성결규범에서 보면, 이 잔치 모습은 하나의 심각한 스캔들이요, 사회적 악몽(social nightmare)일 수가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문제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당시 잔치식탁에서는 보통식탁의 경우와 달리 식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나누고 담소했습니다. 그런데 온갖 잡스러운 사람들이 모여 서로 비스듬히 누워 음식을 즐겼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여자 옆에 남자가, 사마리아인 옆에 유대인이 비스듬히 누워먹고 담소한다는 것은 당시 유대 종교 지도자로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짓거리라 하겠습니다. 엄격하게 집행되었던 정결질서, 계급질서를 문란케 하는 불온한 짓이기도 했습니다.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잠시 제 1세기 지중해 문화의 특징에 주목해 봅시다.

 

  당시 지배문화는 명예와 수치를 중요시했습니다. 그것이 기본가치의 한 축이었습니다. 남의 눈에 벗어나는 행위는 수치스러운 행위이기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수치스러운 행위는 하지 않아야 했습니다. 그것은 금기였습니다. 일종의 이기도 했습니다. 음식을 함께 먹는 행위는 엄격한 사회 신분관계의 틀 속에서 진행되었습니다. 함께 먹음으로써, 집단 소속감과 계급 정체성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식탁을 함께 한다는 것이 단순히 음식을 나누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상의 사회, 정치, 경제적 의미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같은 신분과 계급에 속한 사람들끼리 비스듬히 누워 점잖게 먹으면서 담소하는 일이 명예로운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결하고 정당한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이 잔치 비유는 바로 이 같은 명예롭고 거룩하고 정결한 규범을 정면으로 깨트리는 도전적 뜻을 강하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말씀하는데 끝나지 않고, 실제로 그 비유를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주님은 계급과 성의 경계선을 무시했습니다. 바로 이 같은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당시 경건주의자들은 이렇게 비난했습니다.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마태 11:19)". 우리의 성서는 너무 점잖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먹기를 탐한다는 것은 게걸스럽게 많이 쳐 먹는 사람(glutton)이라는 뜻이요,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란, 곧 술주정뱅이(drunkard)라는 뜻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당시 스스로 깨끗하다고 자임했던 유대 종교 지도층이 그토록 멸시했던 세리와 죄인과 창녀와 어울리며 함께 먹는 상놈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밥상 공동체에는 이 같은 이 항상 펼쳐졌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잔치 비유가 한낱 비유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실천하셨다는 점에 다시 유의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차별받고, 멸시받았던 밑바닥 인생들의 한 맺힌 종말론적 갈망을 열려있고 평등한 밥상 공동체를 베풂으로써 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민초들이 품고 있던 원한과 복수의 미래를 정의의 밥상 공동체의 현재로 대체하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 주님께서 그들에게 추상적 강론으로만 하나님 나라를 설파하셨다면, 그들은 하품을 하면서 그의 곁을 일찍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들이 구름처럼 예수님 곁으로 모였던 것은 예수님의 놀라운 실천, 감동적인 실천이 그들 몸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열린 밥상 공동체가 바로 그것이었고, 무상의 치유행위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열린 밥상 공동체에서 밑바닥 인생은 자기들이 주인으로 대접받게 되는 것을 몸으로 체험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을 주격으로, 주인으로, 존엄한 존재로 대접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비로소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자유를 맛보게 되었던 것입니다. 비록 이 같은 경험이 당시 기득권 층에게는 추문이었겠지만, 그들에게는 복음이었으며, 기득권 층에게는 불온하고 불경한 도전이었겠지만, 그들에게는 희망과 정의의 초대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밥상 공동체는 하나의 강력한 사회적 대안(對案)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열린 밥상 행위와 오늘 우리들의 성찬예식을 연결시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성찬예식은 초대 교회가 그리스도의 죄 사함 행위를 높이 기리기 위해 시행된 것입니다. 예수 부활 이후, 초대 교회가 죄인의 구원을 위해 주님께서 흘리셨던 피를 상징적으로 마시고, 그 몸을 상징적으로 나누어 먹는 예식을 제정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찬 예식은 그리스도(부활 후의 예수)의 구속행위를 기리는 계기였습니다. 죄 사함을 받으므로 천당에 가는 일로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성찬예식에는 부활 전의 예수님, 특히 열린 밥상 공동체를 실천으로 보여 주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없거나 희미합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열린 밥상에는 진짜 음식이 차려져 있었고 진짜 민중이 그곳에 초대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포용성과 평등성이 있었고, 특히 그의 사랑, 곧 함께 아파하는 마음(compassion)이 넘쳐흘렀습니다. 밥상 공동체 참여자들은 바로 이 주님의 사랑을 몸으로 느꼈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도교회에서 의식화된 성찬예식에는 진짜 음식이 없습니다. 그곳에는 예수님 모습은 실루엣으로 희미하게 보이는 듯 하면서도 잘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지난 이천년간 제도교회는 성찬 예식을 통해 신앙의 그리스도만 기려온 셈입니다. 역사의 예수와 그의 열린 식탁 공동체는 잊혀지고 만 듯 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 교회는 주일마다 예수님의 밥상 앞에 나와 그 분의 열린 뜻, 정의로운 마음을 체휼(體恤)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지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침 우리 새길 공동체는 매 주일마다 밥상에 둘러앉아 온 교우들이 밥을 함께 먹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 같은 행위가 한낱 점심 한 끼를 때우는 일로 끝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우리의 밥상은 예수님께서 친히 펼치신 것이요, 우리가 매 주일 주님의 밥상에 초대받은 사람들이라는 깨달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야 말로, 우리는 매 주일 함께 식탁에 둘러앉을 때마다 오늘 비유말씀의 뜻을 되새기는 은혜로운 계기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제야 말로, 교회는 성찬예식과 밥상 공동체를 함께 펼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와 그리스도가 다르면서 하나임을 뜨겁게 확인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그간 초대교회의 그리스도만 섬기고 역사의 예수를 소홀히 했던 잘못을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사건 전의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에서 감동 받을 뿐만 아니라, 부활 이후의 그리스도의 행적에서 큰 위로와 희망을 얻게 됨을 감사해야 합니다. 신약성서에서 예수의 음성을 듣고 기뻐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희망과 용기를 주시고 계십니다.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며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다. 특히 역사적 예수께서 가르쳐 주셨고 친히 실천하셨던 공의로운 대안 공동체로서의 밥상 공동체를 새길 공동체 속에서 구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날짜 설교자
47 1999 [1999.12.19] 그리스도의 탄생 2002.01.16 길희성
46 1999 [1999.12.12] 나누어 갖는 힘 2002.01.16 조혜자
45 1999 [1999.12.05] 예수는 나에게 누구였던가 2002.01.16 한완상
44 1999 [1999.11.28] 하나님의 뜻과 자원봉사 2002.01.16 이강현
43 1999 [1999.11.21] 복음의 소망에서 2002.01.16 성해용 목사
42 1999 [1999.11.14] 카이로스 2002.01.16 권진관
41 1999 [1999.11.07] 멋지게 지신 예수님 2002.01.16 한완상
40 1999 [1999.10.31] 절망과 희망 - 종교개혁 482주년을 맞아 2002.01.16 최만자
39 1999 [1999.10.24] 내 모습 이대로(50.1 대 49.9의 삶) 2002.01.16 최현섭
38 1999 [1999. 10.17] 예수는 다시 오시나 2002.01.16 길희성
37 1999 [1999.10.10] 왜 성만찬인가 2002.01.16 한완상
36 1999 [1999.10.03] 내가 무엇을 가지고 나아갈까 2002.01.16 김이곤 목사
35 1999 [1999.09.26] 미물(微物) 속의 하나님 2002.01.16 김용덕
34 1999 [1999.09.12] 이방인을 옹호하며 2002.01.16 권진관
33 1999 [1999.09.05] 예수를 넘어지게 하는 한국교인들 2002.01.16 한완상
32 1999 [1999.08.29]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 2002.01.16 최만자
31 1999 [1999.08.21-22] 수련회 말씀 증거 2002.01.16 조태연 목사
30 1999 [1999.08.15] 손과 이름 2002.01.16 민영진 목사
29 1999 [1999.08.08] 지극히 작은 자 하나 2002.01.16 한인섭
» 1999 [1999.08.01] 예수의 열린 밥상 공동체 2002.01.16 한완상
Board Pagination Prev 1 2 3 Nex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