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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
2002.01.16 22:09

[1997.08.10] 땅 위의 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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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길희성

"땅 위의 나그네"

(성서본문: 히브리서 11: 8∼16)

 

1997.08.10

길희성 형제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

- 히브리서 11: 8∼16


  집 떠나면 고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확실히, 집을 떠나면 모든 것이 불편한 것이 사실이며, 여행은 사서하는 고생입니다. 집을 떠나 보면 집이 얼마나 고마운가를 여행을 해 본 사람들은 다 느낄 것입니다. 가끔 신문이나 방송에서 가출 소년소녀들의 이야기 - 한 때 충동을 이기지 못해 집을 뛰쳐나오기는 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되면서 겉잡을 수 없이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이야기 - 를 우리는 텔레비죤 인터뷰 등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뒤늦게 집이 얼마나 편하고, 부모가 얼마나 고마운 존재인가를 절감한다는 고백을 하는 것을 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탕자의 비유도 이것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집을 떠나 타향에서 고생하는 탕자,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가지 못하는 탕자의 모습에서 집을 떠난 자의 외로움과 고생을 봅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떠나면 고생인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가끔 이 의 유혹을 받습니다. 가출은 10대 청소년들만의 유혹이 아니라 우리 멀쩡한 어른들도 가끔은 집을 탈출하고 싶은 가출의 유혹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집을 떠나면 돌아오고 싶고, 돌아오면 또 떠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인가 봅니다. 요즈음 휴가철이라 많은 사람들이 여행길에 오르거나 이미 갔다 왔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휴가고 뭐고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여 아예 집에 죽치고 앉아 쉬는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도 아마 마음 한 구석에는 떠나고 싶은 충동이 여전히 남아 있을 것입니다. 기차가 떠나는 것을 보기만 해도 괜히 마음이 설레고, 공항에 누구를 바래다 줄 때면 훌쩍 떠나는 사람이 그냥 부러운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정작 떠나는 사람의 마음이 그리 편한 것만은 아닐 터인데도 그러한 생각이 듭니다. 막상 자기가 여행을 하는 처지에 놓이고 보면, 홀가분한 마음 못지 않게 허전하고 불안한 마음도 들며, 또 불편하고 고생스러운 일인데도 말입니다. 그런데도 돌아온지 얼마 안돼서 또 어딘가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을 보면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이 취미라 하며, 얼마 동안 집에 있으면 좀이 쑤셔서 못 견디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을 두고 방랑벽이 있다, 혹은 역맛살이 끼었다고 합니다. 이란 것은 편안함을 뜻하는 곳이지만 동시에 속박과 구속을 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편한 줄 뻔히 알면서도 우리는 가끔씩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여행자, 나그네가 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무언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막연한 갈망과 동경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집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우리의 일상성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고, 더 나아가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사회와 세계,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 우주 그 자체를 떠나고 싶은 마음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집이라는 것은 깊은 의미에서 우주의 축소판이요 복사판입니다. 집이나 사회는 우리 인간이 나그네 인생 길에 안주하기 위해서 조화롭고 질서 있는 안정된 코스모스를 모방하여 구축해 놓은 하나의 소우주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끔 바로 안정된 집과 코스모스를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갑자기 집이 감옥처럼 여겨지거나, 자기가 하던 사회적 역할에 회의가 생겨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이 세상이 타향으로 아니면 답답한 감옥으로 여겨져서 탈출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 인간은 아무리 이 세상에 안주하려 해도 우리가 거하는 집과 사회와 세계 속에 안주하지 못하고 과도 같이 소외감과 외로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이 지속되고 참을 수 없이 될 때, 결국 어떤 사람들은 아예 인생 자체를 철저한 이방인으로, 영원한 방랑객으로 살기를 결심하고 집을 떠나 그야말로 수도자의 길을 걷습니다. 스님들, 신부나 수녀들, 수도자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인생에서 가정 만들기를 포기한 자, 이 세상에 안주하기를 포기하고 이방인으로, 나그네로, 변두리 인간으로 살기를 스스로 자초한 사람들입니다.


  여행이란 사실 일상성의 거부, 즉 친숙한 것, 당연하게 여기든 것 - 가족, 친족, 친구, 집, 직장, 고향, 친숙한 인간관계 등 - 을 모두 떠나서 전혀 다른 세계,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연히 여행에는 흥분과 불안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여행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깨닫게 해줍니다. 여행이 주는 이로운 점을 우리는 몇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우선, 여행은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함으로 해서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고, 박식하게 만듭니다.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아는 것이 많지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아무리 책자를 통해서 보아도, T.V. 프로그램에 여행자들이 찍어온 비디오를 소개하면서 여행담을 얘기하는 프로가 있지만, 아무래도 남의 얘기이지 실감은 나지 않는 법입니다.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축복 가운데 또 하나는 무엇보다도 일상적인 것의 고마움을 새롭게 깨닫게 해줍니다. 일상으로 누리는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고 축복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해줍니다. 여행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해보고 반추해 볼 수 있는 여유를 주고 지혜를 줍니다. 자신의 삶, 그리고 자기가 속한 사회와 세계를 한 번 먼발치에서 대상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럼으로써 초월의 지혜를 갖게 합니다. 이렇게 보면 여행은 은총의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여행은 좋은 것입니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서도 여행을 시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부모도 많이 있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 어떤 사람이 다니던 직장을 아예 집어치우고 온 가족 4명이 일년 동안 세계 여행길에 나섰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 과외공부 시킬 돈으로 세계여행을 시키겠다는 생각입니다. 과연 잘한 짓인지, 그 사람의 지혜가 약간 의심스럽기는 했으나 용기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도 뭔가 방랑끼가 있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하튼 떠나면 돌아오고 싶고, 돌아오면 떠나고 싶은 것이 사람들의 마음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하면, 이에 못지 않게 떠나고 싶은 마음 또한 인간에게 있습니다. 인간의 이 마음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어디서 이렇게 정착을 거부하고 떠나려는 충동이 끊임없이 생기는 것일까요? 나는 이것을 종교적으로밖에 해석할 길이 없다고 봅니다. 결국 이것은 사람들이 보이는 것으로는 완전한 행복을 못 얻고, 이 세상에서는 항구적으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한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인간은 이 땅에 거하는 동안 항구적으로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 화성에 안착한 장난감 같이 깜찍한 탐사기를 영어로 Sojourner라고 이름했는데, 참으로 이름을 잘 지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Sojourner라는 말은 '거하는 자'라는 말로서, 나그네와 같이 잠시 머무는 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항구적인 주민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서, 객으로서 머물다 떠날 사람이라는 의미를 지닌 말입니다. 그 화성 탐사기 제작팀은 이 탐사기의 이름을 무엇으로 할까 공모를 했습니다. 그런데 뉴욕에 있는 어느 흑인 소녀가 sojourner truth라는 흑인 인권운동가의 별명에 착안하여 응모한 것이 당선되어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진리를 탐구한다, 보다 나은 미지의 세계를 향해 나아간다는 뜻이 담긴 말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민감한 종교적 영혼의 소유자들은 모두 지상에서 sojourner가 되기로 한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 탐사자, 관찰자, 사색가, 잠시 머물다 떠날 객으로서 살기를 작정한 사람들, 아니 작정했다기보다는 그럴 운명으로 타고난 사람들이라고 해야 더 적합할 것입니다. 그들은 아예 가정 만들기를 거부하고 영원히 땅 위의 방랑자로 살기로 작정하여 를 감행한 것입니다. 이들은 흔히 일찍부터 부모를 잃었다든지 - 스님들의 전기를 보면 조실부모하고 라는 표현이 흔함 - 삶의 좌절이나 시련을 맛보았든지 혹은 어떤 충격적인 경험을 했든지 하여 이 세상이 결코 발붙이고 편안하게 살만한 곳이 못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실존적 불안을 해소하는 길은 없다는 결론을 일찍부터 내린 자들입니다. 그리하여 보다 영구한 집, 땅 위의 허물어질 집이 아니라 하늘의 집, 하늘의 본향을 그리워하며 그것을 찾는 일에 일생을 건 자들입니다. 이것은 스님이나 신부, 수도자들만에 국한 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우주의 sojourner가 되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내리신 선물인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우리 인간은 결코 보이는 세계에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보이지 않는 초월을 갈망하면서 사는 존재일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대로 "내가 당신을 만나기까지는 내 영혼의 안식을 얻지 못했나이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약속,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더 나은 곳을 향해 고향을 등지고 방랑의 길을 떠나는 모험적 결단의 행위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언제나 이러한 면에서 믿음의 원형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신 그 땅", 그러나 아직은 현실이 아닌 그 약속의 땅에서 오직 그 약속 하나만을 믿고 타향살이를 했습니다. 믿음이란 보이지 않는 미래에 희망을 걸고서 현세를 마치 타국에서 타향살이를 하듯이 사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허물어지기 쉬운 인생 설계가 아니라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라는 생활입니다.


  이 번 KAL기 참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인생이 어마나 허물어지기 쉬운 것인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이 아무리 확실하게 계획하고 자기 인생을 안전하게 하려고 애를 쓰고 설계도를 그리고 집을 지어도, 순식간에 어처구니없는 한 순간의 우연은 이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고 헛된 꿈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순례객이 된 자들은 결코 지상에서 안주할 곳을 찾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결코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보다 나은 곳을 갈망하여 하늘의 본향을 향해 나그네 길, 순례자의 길, 아니 추방자(exile)의 생활을 자취하는 자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자신의 전 인생을 영원을 향해 도박을 거는 엄청난 모험과 용기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끔씩 하는 여행은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오는 여행이지만, 신앙으로 하는 인생의 여행은 결코 떠나온 곳으로 되돌아오려는 여행이 아니라 보다 나은 곳을 갈망하는 여행, 인생 자체에 미련을 두지 않고 떠나는 영원으로의 여행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고향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아브라함에게 들려진 하나님의 부름, 이 부름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다시 듣게 됩니다. 곧 예수를 통해 우리에게 들려진 하늘 나라, 하나님 나라로의 부름이며, 우리 믿는 자들은 모두 이 부름에 믿음으로 응답하고 나선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라는 미지의 세계, 영광스러운 미래를 갈망하면서 현세적 질서에 안주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도성을 향해 순례의 길을 떠난 순례객들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마련해 주셨습니다."(히 11: 13-16).


  그러면 이렇게 인생의 순례자, 구도자로 사는 삶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띠는 삶입니까? 그것은 무엇보다도 현세적 삶의 질서와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 초월적 삶입니다. 초대교회의 삶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종말적 기대 속에서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양식의 삶을 살았습니다. 세상에 있되 세상에 속하지는 않은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의 말대로: "형제 자매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아내 있는 사람은 없는 사람처럼 하고, 우는 사람은 울지 않는 사람처럼 하고, 기쁜 사람은 기쁘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무엇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하고,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처럼 하십시오. 이 세상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고전 7: 29-31). 그야말로 세상일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세상 일로 인해 너무 속상해 하거나 휘둘림을 당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더 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고 사는 사람은 세상의 고통과 시련에 좌절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환난을 당해도 곤경에 빠지지 않으며, 난처한 일을 당해도 절망에 빠지지 않으며, 박해를 당해도 버림을 받지 않으며, 거꾸러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고후 4:8-9).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 가나, 우리의 속 사람은 나날이 새로워 갑니다. 우리가 지금 겪는 일시적인 가벼운 고난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원하고 크나큰 영광을 우리에게 이룩해 줍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고후 4:16-18).

 

  "우리는 속이는 사람과 같으나 진실하고, 이름 없는 사람 같으나 유명하고, 죽은 사람 같으나, 보십시오, 살아 있습니다. 징벌을 받는 사람과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사람과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사람과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고후 6: 9-10).


  이런 것들이 모두 이 세상을 나그네로, 객으로 사는 신앙인들의 진정한 삶의 모습입니다. 시련을 당하나 쓰러지지 않고, 가련해 보이나 영광스럽고, 죽는 것 같으나 참 생명을 키우고, 겸손하나 비굴하지 않은 참 신앙인의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현세에서 가끔씩 하는 여행은 인생 자체의 여행을 위한 준비들입니다. 인생 자체가 여행이며 순례길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하나님의 은총의 기회로 삼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행을 할 때마다 우리는 이 세상의 객이며, 인생은 떠나야 할 때가 있다는 것, 어디까지나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 떠나고 싶지 않아도 떠날 때가 있다는 진리를 상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합니다. 는 어느 시인의 말은 우리가 가끔씩 하는 여행이 어쩌면 이러한 인생 여행의 연습, 영원한 떠남의 연습임을 암시하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잠깐 동안의 여행을 통해서 우리는 인생의 나그네 됨을 그나마 한 번쯤 진실하게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여행을 하는 사람은 간편한 것이 최고이며, 구질구질하게 모든 것을 다 가지고 갈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갖추고 편하게 지내려면 아예 여행을 떠나지 않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고생을 각오하고 불편을 감수하고 하는 것이 여행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을 여행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은 인생에서 편함을 누리려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갖추고 살려 하지 않습니다. 될 수 있는 대로 간단하고 간편한 생활, simple life를 삽니다.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이며, 항시 다른 곳으로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너무 정을 주지도 않고 너무 집착하거나 아글타글 다투지도 않습니다. 만났다고 너무 기뻐하지도 않으며 헤어진다고 너무 슬퍼하지도 않습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인생이며 헤어지면 만날 때가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 것이라 붙잡으려 하지 않고, 자기만의 아성을 쌓으려고 노심초사하지 않습니다. 현세에서 쌓는 성은 곧 허물어질 수밖에 없는 모래성일 수밖에 없음을 그는 알기 때문입니다.


  분당에 최근 어마어마한 규모의 주거형 오피스텔을 짓기로 해서 큰 인기를 모았는데, 그 이름이 입니다. 오딧세우스는 와 더불어 그리스 제일의 시인 호메루스의 양대 서사시의 제목이자 그 서사시의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서양 문학에서는 오딧세우스는 항시 인생의 방랑자, 유랑자, 긴 여행을 하는 자를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주택 이름을 지은 사람들이 뭘 알고 지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들 손자 거느리면서 오순도순 이 세상에 편안히 안주하고자 하는 우리 한국 사람들의 전통적인 인생관과 주거 개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오히려 그 반대의 저주스러운 이름일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괜찮은 이름입니다. 세상에 너무 안주하지 말고 sojourner처럼, 순례객의 지혜로 이 세상을 살아가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지겹도록 무더운 한 여름도 이제 슬슬 끝나가고 여행으로 흩어졌던 우리들의 마음도 다시 안정을 되찾고 삶을 추스를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상에 살고 있는 한 인생 자체가 여행이며, 우리는 영원한 방랑자이며 나그네라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하지만 우리는 목적 없이, 정처 없이 방황하는 떠돌이들은 아닙니다. 우리는 갈 곳을 아는 여행자, 아니 갈 곳이 있는 나그네입니다. 나그네 여행자의 자유와 초월, 여유와 지혜를 누리면서 삽시다. 삶에 너무 몰두하지 말고, 여행객으로서 관찰자로서의 여유를 가지고 삽시다. 이것이 하늘의 도성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에 신앙으로 응답한 자들의 삶입니다. 나그네 삶을 자취한 나그네 인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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