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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2014.01.02 15:06

[2013.12.29] 느낌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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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안인숙

느낌 아십니까?

(마태복음 26:37-38, 요한복음 11:33-35)

 

20131229일 주일예배

안인숙 자매

(새길교회 교우)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과 대화를 나눈 이야기나, 하루종일 일한 일꾼과 한 시간 일한 일꾼을 똑같이 대우한 주인에 관한 예화 등에 대해서, 우리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이해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런데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이 종종 감정을 나타내셨음도 기록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인간적인 모습을, 그가 우리같이 먹고 마실 뿐 아니라,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반응으로서 표현하시는 갖가지 감정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실로 우리같이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에 즉시 떠오르는 예수님의 감정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한 번 찾아볼까요?

 

예수님의 감정 중에는 연민의 감정이 가장 많습니다. 영어로는 compassion이라고 하지요. 컴패션은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해 같은 감정을 느낀다는 말이지요. 더 나아가 컴패션은 도와주고자하는 동기를 유발한다고 합니다. 이 단어는 정말 멋진 단어인데 아쉽게도 한국어로는 정확하게 대입되는 단어가 없습니다. 그래서 맥락에 따라서 연민, 긍휼, 불쌍히 여김, 측은히 여김 등으로 번역합니다. 그러나 어쩐지 한국어 번역은 마음에 썩 들지 않습니다. 연민이나 불쌍히 여김은 대상과의 불평등한 상하관계가 연상되니까요. 저는 컴패션으로 부르겠습니다. 컴패션 이론을 만든 헨리 나우웬은, 그리스도의 마음은 하나님의 컴패션의 마음이고, 컴패션의 삶을 사는 것이 영성이라고 하였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컴패션은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매우 자주 쓰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컴패션은, 작은 아들이 돌아 올 때, 먼 거리에서 그를 발견한 아버지가 가졌던, 측은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이 가졌던 컴패션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병자를 불쌍히 여김(14:14; 20:34), 오천 명이나 되는 큰 무리가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김(6:34), 길에서 먹지 못해 기진할까 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 등입니다(8:2).

 

오늘의 본문인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은 긍휼의 감정으로 슬퍼서 우는 자와 함께 울기까지 하셨습니다. 함께 운다는 것은 함께 고통을 겪는다는 것입니다. 같이 운 경험은 서로의 친밀감을 증가시켜 주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의 성경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깊이 움직였고 괴로워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아직 나사로가 묻힌 무덤에 가기도 전입니다. 누가복음 713절은, 예수님이, 나인성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는 내용입니다. 남편과 사별한 여인이 하나밖에 없는 그 외아들마저 잃어버리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과부의 믿음을 보았다던가 과부가 평소에 좋은 일을 많이 한 사람이라는 설명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저 그 여자를 가엽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과부에게 다가가 "울지 말아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Don't cry" 순수하게 감정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사랑하시는 감정도 있습니다. 젊은 부자가 영생을 얻고자 예수님을 찾아 와서, 십계명을 잘 지켰다 대답할 때, 예수님은 그 부자청년을 바라보고 사랑하였다 하였습니다(10:21). 영생을 얻고자 하는 부자청년을 사랑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신 예수님을 상상할 수 있겠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사랑하셨습니다. 특히 요한복음 2120절에 예수님은 한 제자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제자는 예수님에게 기대어 앉곤 했습니다. 그리고 묻기 힘든 질문도 예수님께 서슴없이 던졌습니다. 누가 선생님을 배반합니까? 라고. 이 제자가 요한복음을 쓴 요한입니다(21:24). 사랑하면 제자들을 아끼게 됩니다. 누가복음 103절에, 예수님은 72명의 제자를 세우시고 둘씩 보내며, "가거라. 내가 너희들을 보내는 것이, 양들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하시며, 제자들이 위태한 지경에 처할지 모를까 염려하셨습니다. 그러나 17절에 그들이 기쁨에 차서 돌아왔을 때, 21절에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쁨에 차서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런 기쁨의 기도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 기도할 때 다시 표현됩니다. 13절에 예수님은 자신의 기쁨이 세상에 남은 제자들 마음속에 온전히 충만하기를 기도했습니다. 어떤 기쁨이었을까요? 그 윗절에 보면, 아버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녀를 보호하고 안전하게 함으로써,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성경말씀을 성취하신 것에 대한 기쁨입니다. 이는 실로 고난가운데 갖는 기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놀라기도 하셨습니다. 병이 나서 죽어가는 종을 둔, 백부장의 믿음(8:10; amazed, 7:9)을 보시고, 놀랍게 여겼다고 했을 때, 이는 영어로는 astonished경악했다는 표현입니다. 놀람 중에서도 매우 심한 놀람이지요. 예수님이 예상치 못했다는 것인데 왜 예상치 못했을까요? 예수님도 이방인의 믿음에 대한 부정적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어쨌든 놀랍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셨던가봅니다. 예수님은 놀람과 동시에 주위를 둘러보며 주저 없이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지금까지,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 아무에게서도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이 정도 칭찬이면, 극찬이라 해도 손색이 없겠지요? 얼마나 감정이 풍부한 예수님입니까?

 

예수님이 분노하신 적도 많습니다. 요한복음 2장에는, 성전에서 환전상과 소, ,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을 향해 분노하여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모두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을 쏟아버리시고, 상을 둘러 엎으셨습니다. 이는 17절에, '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라는, 시편 구절을 인용하여(69:9), 요한복음 저자가 해석하듯, 열정에서 나온 분노이지요. 또한,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향해 책망과 저주를 하셨습니다(23:13).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를 좋아하고, 잔치의 윗자리,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 장터에서 인사받기, 랍비라 불리기를 좋아하는 외식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이나 서기관 뿐 아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기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013절에,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는데, 제자들이 그 사람들을 꾸짖었지요.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분하게(indignant)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에게 속한 것임을 제자들이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분해하셨습니다. 아마도 자신이 어린아이의 심정이 되어 본인이 꾸지람을 듣는 것 같았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비탄에 빠지기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250절에,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라고 하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세례란,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견뎌야 할 고통을 의미합니다. 이같은 고통은, 겟세마네동산에서의 기도로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2637-38절에 예수께서 근심하며 괴로워하셨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심했으면, 그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라고 제자들에게 토로하셨겠습니까. 그러면서 제자들에게 그 자리에 함께 깨어있기를 요청하셨습니다. 조금 지나면, 닭 울기 전에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베드로와 그 일행에게, 같이 있어 달라고 말씀하시면서 지극히 괴로워하셨던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감정에 대한 사례는 많지 않으나,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감정을 상세하게 기록하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감정에 대한 기억이 강렬해서 오래가기 때문에 그랬을 수도 있겠지요.

 

예수의 감정에 대한 연구자 브어윈드(Stephen Voorwinde, 2011)에 의하면, 마태복음에 나타난 예수는 긍휼의 왕(Compassionate King), 마가복음은 슬픔의 인간(Man of Sorrows), 누가복음은 동정심이 많은 하나님의 아들(Sympathetic Son), 요한복음을 사랑의 주님(Loving Lord)으로 각각 다르게 묘사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감정이 다양했음을 알려주지요.

 

우리의 감정은 어떻습니까? 즐거운, 기쁜, 만족스러운, 행복한, 자랑스러운, 그리운, 불쾌한, 답답한, 당황스러운, 속상한, 부러운, 질투나는, 싫은, 증오스러운, 불쌍한, 슬픈, 외로운, 우울한, 창피한, 억울한, 화나는, 놀라운, 두려운, 불안한 등등 하루에도 수 십 가지의 감정이 마음에 오락가락하지요. 연세대 언어정보개발연구원에서 만든 자료집 <현대한국어의 어휘빈도>에서 순전히 감정상태를 표현하는 단어는 434개였다고 합니다. 이중 쾌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는 28%, 불쾌 감정의 표현은 72%였다고 합니다. 감정은 개인에 따라 문화에 따라, 시대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많은 감정은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감정과 우리의 감정에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차이가 있다면 그냥 예수는 신이니까? 혹은 인간인 동시에 신이니까 다르지 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저는 예수의 신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 논할 능력도 없을 뿐 아니라 오늘 이야기하려는 저의 관심사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예수 닮기를 원하고 예수따르미가 되고자 한다면, 적어도 예수님이 느꼈던 감정도 느껴보고 가져보려고 해야 하지 않을까 해서 생각해 보게 된 것이지요. 차이를 깨달았으면 그 차이를 줄여보려고 애쓰면 되지요. 저는 예수님의 감정과 우리의 감정의 차이를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예수님의 감정에는 진정성(authenticity)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정성이란 진실되고 참된 성질입니다. 꾸밈이나 거짓이 없고 신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매우 유연하고 순수하여 상황에 적절하게 사람들과 함께 감정을 나누었습니다. 한번은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사람들은 나를 마구 먹어대는 자요, 포도주를 마시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라고 하네" 하였습니다(11:19). 예수님의 행동이나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의 면면을 곱게 봐 주지 않는 사람들의 험담이지요.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아무하고나 잘 어울렸고 거리낌 없이 사람들과 감정을 나누었을 것을 짐작하게 합니다. 아마도 너털웃음을 날리며 말씀하시지 않았을까 상상해 봅니다.

 

우리가 사는 요즘 세상은 어떻습니까? 서비스산업이 날로 증가하는 이 시대에, 서비스를 주고받는 일은 일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합니다. 고객으로서 우리는, 종업원이 친절하고 상냥하기를 당연하게 기대하기 때문에, 불친절하다고 느끼면 내 기분이 나빠지면서 서비스가 나쁘다고 불평을 하게 됩니다. 고객의 기분은 매우 중요하지만, 서비스제공자의 기분은 살필 필요가 없다고 당연스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 마디로, 종업원이 표현해야 할 감정도 상품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버클리 대학의 사회학자 혹실드는, 이런 보이지 않는 노동을 감정노동이라 하였습니다. 종업원은 자신의 화가 나거나 불쾌하거나 수치스런 진짜 감정은 깊이 숨기고, 직업을 유지하기 위해 가면을 쓰듯이 기업주 혹은 사회가 요구하는 상품화된 감정을 표현해야 합니다. 상업적인 영역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감정에 진정성을 담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활이 갈수록 다양하고 복잡해질 뿐 아니라, 싸이버 상에 얽혀있고 즉시적으로 반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문자로 주고받는 소통이 보편화되어 감에 따라,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감소하고 관계는 갈수록 피상적, 단절적 혹은 일회적이 되어갑니다. 진정한 감정을 나눌 기회나 상대가 점점 감소합니다. 그리고 체면이나 이익을 생각하느라 솔직한 감정 드러내기를 꺼려합니다.

두 번째 차이는, 예수님의 감정은 이타적입니다. 자신의 이익이나 유리한 입지를 확보하려는 감정이 아닙니다.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지요. 자신의 기분이 나빠졌다거나 자존심이 상했다거나, 따라서 상대방에 대하여 비난하려는 감정이 아닙니다. 상황의 뒤에 깔린 다른 의도가 무엇인지 따져보려 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본능과 같은 자기중심성을 넘어서서 타인과 공감하며 타인의 복지를 도모하는 것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의 감정은 행동이 수반되는 감정이었습니다. 감정이 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을 만들어 내셨습니다. 그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병을 고쳐주시고, 떡과 생선으로 먹이시고, 천국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백부장의 믿음에 놀라워하시며, 그의 종을 고쳐주셨습니다. 분노하실 때는 회당을 청소하고, 철저하게 책망하셨습니다. 우리는 불쌍히 여기지만 느낌으로 끝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많지만 실제로 보답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우리의 자존심이 깎여서이지, 정의로운 분노와 그에 상응하는 행동은 갈수록 찾기 힘듭니다.

 

과학자들이 말하기를, 사람들은 외부에서 자극이 오면 즉각적으로 그것이 좋은지 싫은지를 먼저 느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인지과정을 거치며 반응한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증거의 제목인 "느낌 아십니까"가 어디에서 왔는지 눈치 채셨겠지요? 개그콘서트에 등장하는 표현 중, "느낌 아니까"를 인용한 것입니다. 시청하지 않는 교우들께서는 생경스러울 수도 있겠습니다. 저도 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처음에는 개콘의 느낌을 알 수 없었거든요. 자주 보다보니, 느낌 알겠더라고요. 느낀다는 것과 느낌을 안다는 것은 다릅니다. 느낀다는 것은 퍽 주관적이어서 그때그때 달라지는 기분상태나 개인의 성향, 가치관, 고정관념, 선입견 등이 깔립니다. 반면, 느낌을 안다는 것은 느낌에 대한 인식활동이 일어나는 거지요. 즉각적인 느낌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요.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에 근거하여 인식하고 이해하고 규명합니다. 어떻게 그런 느낌이 들게 되었을까, 그 특정 느낌은 옳은 것인가 등 말입니다.

 

저의 이야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지난 3개월여 미국에 사는 딸이 아기를 낳아, 그 산후회복을 돕기 위해 미국을 다녀왔습니다. 귀국하기 얼마 전 저희 부부는, 1990년대에 십여 년 간 살던 북가주 산호제를 며칠 여행했습니다. 첨단산업의 산실인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이 지역에서, 우리는 여러 지인들을 반갑게 만났습니다. 저는 또한 오랜만에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흑인 여성입니다. 처음 그를 만난 것은 약 18년 전 어떤 강의에서였습니다. 오전 강의가 끝나고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식당이 있는가 두리번거리고 있는 내게, 옆자리에 앉았던 그가 자기의 샌드위치 절반을 뚝 떼어 주었습니다. 초면인데 말입니다. 그것을 인연으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를 통해, 미국에서, 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 흑인남자들이, 어려서부터, 어떻게 위협을 받으며 크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작은 도움으로 마음을 같이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저를 만나기 위해, 100마일을 달려왔습니다. 그녀는 어디 가지도 말고 먹지도 말고 그냥 호텔로비에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3시간 밖에 주어진 시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1분도 허비하고 싶지 않았지요. 서로를 바라보며 그동안 밀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실은 저는 그의 이야기를 백퍼센트 알아듣지는 못합니다. 나의 영어가 짧을 뿐 아니라 그는 흑인영어를 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의 감정은 백퍼센트 아니 그 이상 공유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기약 없이 헤어져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나, 앞으로도 우리의 우정은 변함없이 지속될 것입니다. 이 느낌 아시겠습니까?

흔히들 감정은 불안정하고 불합리하여 신뢰할 수 없고, 육체적이고 이성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극복해야 할 요소로 여깁니다. 또한 감정은 여성의 전유물이며 인간을 나약하게 만들기 때문에, 강인해지려면 통제하거나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감정은 본질적으로 좋은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소중한 선물입니다. 창세기에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시면서 보기 좋다 하셨고, 여섯째 날에 창조를 완성하시고는 그것이 참 좋았더라고 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족해하시는 하나님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감정에 관한 성경 구절들을 찾아보면서 다음의 세 가지를 제안해 보고 싶습니다. 아주 작은 희망입니다. 첫째, 감동 있는 말씀증거를 듣고 싶습니다. 새길공동체는 신앙을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그것에 충실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지요. 성경말씀도 논리적 타당성에 근거하여야 만족스럽고 잘 된 말씀증거로 수용하나, 감성적으로, 즉 느껴보려는 노력은 경계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감정이 바뀔 수 있지만, 우리가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향후 우리의 선교부나 봉사부 활동에서의 경험을 말씀증거를 통해 나누어 보면 어떨까 합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감동이 일어나고 따라서 더 열심히 하려는 의지가 생길 수 있지 않겠습니까?

 

둘째는, 우리 개인 혹은 공동체에서, 봉사/선교활동이나, 약자와 연대하는 활동을 할 때에 예수님의 진정성과 이타심과 행동으로 보여지는 컴패션을 닮고자 더욱 노력하는 것입니다. 이미 이와같은 움직임은 시작되었다고 봅니다. 간접적인 후원에서 보다 적극적이고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예수따르미의 모습을 실현하면 좋겠습니다.

 

셋째는, 진솔한 감정을 건강하게 나누며 서로에게 정을 쌓아가면 좋겠습니다. 나이가 좀 차이나더라도, 성격이 좀 달라도, 학식의 많고 적음도 다 극복하고 진정성을 가지고 친해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제자들에게, "샬롬"하며 평화의 인사로 다가가셨으며, 낙담과 좌절 속에 고기잡이 옛 모습으로 돌아간 베드로에게, 미리 생선을 굽고 떡을 준비하여 인자하게 아침식사를 차려주셨습니다.

 

한 해를 마감하며 그동안 개인적으로 괴로웠던 일, 답답했던 때, 안타까운 일, 슬픈 일, 다른 사람에게 말 할 수 없는 크고 작은 고통이나, 역으로 큰 짐을 벗은 듯 시원하거나 후련했던 느낌, 보람된 일, 감사한 일 등을 돌아보며 마음속 감정을 정리해 봄도 좋을 듯합니다. 새길공동체에도 올 한해 변화가 있었습니다. 변화를 겪어가며 우리는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을 느껴야 했고 많은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생각이 달라서 몇 갈래로 갈라졌던 마음을 이제 서로 소통하는 가운데 다 해소하면 좋겠습니다. 공동체를 사랑하는 마음이야 다 같지 않겠습니까? 부정적인 감정이나 느낌을, 느낌 그대로 기억 속에 저장하지 말고 이해하려고 노력합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이 변화의 어려움을 통과하는 가운데, 우리를 좋은 길로 인도하려고, 우리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며, 공동체의 앞날을 위해 따뜻하게 뭉칠 수 있기를 저는 희망해 봅니다.

 

 

기도

하나님, 당신의 컴패션의 은혜로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우리도 그 마음 닮기를 원하며, 당신의 소중한 선물인 감정을 잘 관리하고 활용함으로써 당신이 주시는 새로운 한해를 기쁨으로 살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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