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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정진홍 교수

지난여름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8)

 

2013년 10월 20일 주일예배

정진홍 교수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지난 7월에 섬나라 피지(Fiji)에 다녀왔습니다. 남태평양에서 환상적인 여름휴가를 보내고 온 것은 아닙니다. 그곳에서 열린 태평양과학협회에 참석한 것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매우 ‘환상적’이었습니다.

 

이번 모임의 전체 주제는 ‘태평양 섬들과 주변의 인간안전 및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과학’이었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제 발표가 없는 ‘한가한’ 참석이어서 가능한 한 많이 보고 듣고 배우고 싶어 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제 5주제인 ‘사회, 문화, 그리고 젠더’ 분야에서 열리는 22개의 발표에 모두 참석하였습니다. 발표 장소는 시원하고 안락했습니다. 한낮 높은 기온이 25˚C 정도였고, 바람도 무척 시원했습니다.

 

이번 모임의 자연과학 쪽에서 많은 관심을 기울인 문제는 기후변화에 의한 ‘재앙’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위기감 못지않게 태평양의 여러 섬나라들의 문화의 지속가능성 여부도 중요한 의제였습니다.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어 다과를 나누는 담소의 기회도 있었지만 하루 여섯 시간씩 꼬박 이레 동안 걸상에 앉아 긴장을 했더니 회의 중에는 몰랐는데 귀국 길에서는 허리가 아파 무척 괴로웠습니다. 나이는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세상살이에 대한 지적 천착을 게을리 하던 터라서 이번 회의 참석이 제게는 ’환상적‘인 기회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전체 회의 분위기는 즐겁지 않았습니다. ‘기후변화와 인간의 안보’라는 문제를 기저로 한 다양한 주제들은 답답하고 암담한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지난 10년간 피지의 해수면은 1.8센티가 높아졌습니다. 바닷물의 높이가 늘어나는 만큼 육지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전에는 바닷물이 들지 않았는데 이제는 물이 든 곳’을 그곳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러한 경험은 섬뜩한 일입니다.

 

뿐만 아니라 해양생물계의 변화로 인해 사라지는 어류들, 식물의 변종, 숲의 소멸, 새로운 질병, 그 밖에도 전통문화의 붕괴, 자립불능의 경제, 다른 문화권에서 일컫는 ‘발전’이라는 개념의 ‘변화’를 적용할 수 없는 제한된 현실, 새로운 정치적 욕구, 여성지위의 변화, 젊은이들의 ‘섬 탈출지향성’ 등 문제는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제들에 대한 ‘전문적인 발언’이 회의 내내 흘러나왔지만 제가 보기에는 다만 위기의식의 표출일 뿐 실질적인 출구의 마련이기에는 한참 모자라는 것들이라고만 판단되었습니다. 발표내용들이 ‘잘만 하면 잘 될 거야’하는 당위론적 동어반복 이상의 어떤 실제적인 해답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닷물이 언제 어떻게 땅을 뒤덮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사태의 ‘진전’이 분명한 상황 속에서 제가 궁금한 것은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태도’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발표장에서도 제 이러한 궁금증에 대한 메아리를 들을 수는 없었습니다. ‘그곳 사람들을 위한’ 발언은 있었지만 ‘그곳 사람들의’ 발언은 없었습니다.

 

회의가 열린 ‘남태평양 대학’은 남국의 자연을 그대로 간직한 아름답고 안락한 곳이었습니다. 늦은 저녁 대학 도서관은 무척 시원했습니다. 도서관과 마주해 있는 구내서점은 서구의 신간은 물론 자국의 출판물들도 고루 갖추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저는 사텐드라 난단이라는 피지 시인의 《섬들의 외로움(The Loneliness of Islands)》이라는 시집을 만났습니다. 저는 그 시집을 통해 그곳 사람들의 발언을 듣고 싶었습니다.

 

태어난 자리(Place of Birth)〉라는 시가 있었습니다. 그 시는 다음과 같이 시작됩니다.

 

모든 형상은 공간을 가지고 있지

하지만 네가 태어난 곳은,

오직 네가 태어난 곳만은,

이제 형상도 없고, 공간도 없어

 

(그러니)

희망도 없고, 절망도 없어

 

(그저)

아무 목적도 없이 탑승시간입니다 하니까 탑승하듯이

자고 일어나 하던 버릇이니까 아침세수를 하듯이 (그렇게 살고 있을 뿐이야)

........................

 

그러면서 시인은

 

‘어쩌면 본능처럼 그저 살다가 여울처럼 흐른 아득한 슬픔의 계보, 그 조류를 따라 멀리 멀리 날아가는 것이 삶일지도 모른다’ 고 말합니다.

 

태어난 곳은 이제 살아갈 곳이 아닙니다. 살아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는 그들의 경험을 읽으면서 저는 어쩌면 그것을 ‘존재기반의 상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읊음은 이보다 더 절실한 황량함일지도 모릅니다. 잃을 수밖에 없는 존재의 기반에서, 아직 스스로 존재한다고 하는 것을 확인해가며 살아야 하는 삶의 경험은, 그 삶의 삶다움을 어떻게 추스를 수 있는 것인지, 저는 숨이 막히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도 시인은 담담하게 일상의 관성을 읊으면서 소멸이 약속된 땅위에 여전히 자기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언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향해 ‘탈출’을 선언해도 모자랄 상황에서 그는 지나치게 조용합니다. 저는 그의 한가함이 거북하기조차 했습니다.

 

그런데 갑작스럽게 시인은 다른 발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참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반전(反轉)이라고 하기에도 어색한 근원적인 선회(旋回), 아니면 이어짐 안에 내장된 단절의 표출이라고 해도 좋을 그런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삶을 이어 묻지 않습니다. 갑작스럽게 그는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읊습니다.

 

(그런데)

장례는 (아직도) 피지에서 (늘) 일어나는 일

 

태어난 자리의 소멸을 이야기하는 맥락에서 ‘죽음자리’를 확인하는 일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것조차 아무런 전조(前兆)없이 불쑥 나타내는 것은 조금은 무모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시의 완성도가 떨어지는 거 아닌가하는 느낌조차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설익은 제 인식은 그 뒤에 이어지는 시인의 발언과 만나면서 얼마나 초라한 가난을 들어냈는지요. 죽음자리를 확인하는 일, 그런데 그것이 태어난 자리의 확인임을 천명하기까지, 시인의 에두름은 그대로 단장(斷腸)의 아픔이라고 해야 겨우 그려지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이어 읊습니다.

 

(그런데)

너 고맙다

너는 네가 죽을 자리가 어딘지 묻지 않았어

너는 언제, 어디서, 누구와 더불어 죽음을 맞고 싶은 지도

 

태어난 자리의 잃음은 죽음자리에의 물음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야 합니다. 태어나 살아가던 자리가 없어진다면 그 삶이 도달해야 하는 죽음은 과연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물어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오히려 그 물음 없음을 고마워합니다. 그 ‘고마움’이 저에게는 견딜 수 없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연히 예상되는 물음, 그런데 다행하게도 그 물음을 묻지 않아, 그 물음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아도 되는 안도(安堵), 그래서 발언하는 고마움, … 그것은 그대로 처절하게 아픈 과정입니다. 왜냐하면 태어난 자리를 잃은 삶의 주체가 죽음 자리를 묻는다면, 그것은 또 한 번 태어난 자리의 상실을 되 발언해야 하는, 그러니까 상실을 거듭 강화하는 답변에 이를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것은 무의미한 자학(自虐) 이상일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시인은 이에 이어 살던 도시의 번잡함을 묘사합니다. 활기차게 ‘움직이는 삶’이 읊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사람들이 살던 집들의 문이 모두 닫혔습니다. 사람살이의 흔적이 가셨습니다. 강물도 이제는 더 흐르지 않습니다. 숨바꼭질을 하던 아이들도 당연히 없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말합니다.

 

‘나는 (죽음자리를 묻지 않는) 너를 다 안다고,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소멸이 실증되는 자리에서 조차 죽음자리를 묻지 않는 데 대한 공감, 죽음자리를 묻지 않고 죽어가겠다는 의지에 대한 어쩌면 경외일지도 모를 시인의 정서는 이렇게 그 죽음자리에 대한 물음의 거절에 대한 아픈 공감을 다음과 같이 읊습니다.

 

너는 괴로움 속에서 홀로 죽기를 꿈꾸고 바라고 있는 거야

 

그러나 죽음자리를 묻든 묻지 않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아무튼 우리는 죽습니다. 태어난 자리의 소멸이 태어남마저 되 거두어드려 아예 죽음조차 없애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마디에서 시인은 조용히, 그리고 살며시, 자기의 죽은 누이를, 틀림없이 사라진 피지의 자연을 지칭하는 누이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은 갑작스레 멀리서 들려오는 레퀴엠(Requiem) 같은 것인데, 제게 그렇게 들리는데, 그것이 도무지 슬프지 않았습니다. 하긴 그렇습니다. 레퀴엠은 슬픔을 ‘말갛게 슬퍼하기 위한 것’일 뿐, 슬픔에 의해 자지러지는 마음의 표출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존재하는 것의 ‘소멸을 기리는 종곡(終曲)’입니다.

 

내 누이는 여름의 나라에 살고 있었어

............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도 않았어 (못했어. 처음부터 하나였으니까)

물결 속에서 출렁이는 우리의 운명도 몰랐어 (하나였으니까, 동일한 운명을 지닐 거라는 것을)

 

‘글을 읽을 줄도 몰랐고, 더하기 빼기도 못한’ 그 누이는, 그런데 삶을 행복해 했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그녀는 모든 자연과 어울릴 줄도 알았다고 시인은 그녀가 찬탄했던 온갖 꽃과 풀과 나무 이름을 들며 말합니다. 시인은 그녀의 모든 삶이 ‘그랬었노라’고 짙게 회상합니다. 그런데 그 누이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 누이는 태어났었으니까 그랬다고 말합니다. 시인은 이를 이렇게 담담하게 읊습니다.

 

누이는 작은 집에서 죽었어

작은 공간에서

작은 나라에서

많은 지도들이 그려놓지 않는............

(She died in a small house

In a small place

In a small country

Missing from many maps............)

 

태어난 자리(Place of Birth)〉라는 시는 이렇게 끝납니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언젠가는 사라지지 않을 자리에서 태어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니? 살아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지도위에도 그려지지 않을 공간에서 죽음을 맞는 것인데, 굳이 삶의 자리의 소멸과 죽을 자리의 모색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을까? 그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피지의 내일과 피지 아닌 곳의 내일이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쩌면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피지의 시인이 시적 정열을 가지고 자기들이 직면한 사태를 초극하려는 의지를 점화하면서 새 누리를 찾아 떠나는 장엄한 서곡을 자기 동족들에게 울리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역사적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멀리는 앞에서 언급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의 탈출’도 그러했고, 가까이는 그러한 ‘탈출에의 충동’이 대륙을 향한 자기 확장의 기본적인 동인이었다는 우리 이웃 일본의 이야기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익히 아는 상식이니까요.

 

그러나 피지의 시인은 그렇게 삶을 직면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태어난 곳이 있다면 그것이 소멸된다 할지라도, 묻힌 경험이 내 안에 기억으로 살아있다면 그곳이 지도 위에 그려지지 않는 곳이라 할지라도, 어차피 삶의 흐름이 그런 것이라면, 소멸을 슬퍼하면서 묻힐 곳을 묻지 않는 침묵보다 더 성숙한 삶이란 달리 기대할 수 없다고 시인은 ‘자기 삶을 겪었는지’도 모릅니다. 틀림없이 그랬던 것 같습니다.

 

아니, 이렇게 달리 이야기해도 좋을 듯합니다. 누이의 무덤과 그 장례를 기억하는 한, 그녀의 삶과 행복이 가득한 자연이, 풀과 나무, 하늘과 바다, 사람들의 소음이, 살아있는 이들의 마음에 사라지지 않고 머무는 한, 사라질 땅은 아직 없습니다. 없어야 합니다.

 

소멸을 예상하는 아픔이 죽음으로부터의 도피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의 조용한 침잠 속에서 승화하는 아름다움으로 꽃피면서, 죽음자리를 묻지 않는 ‘고마운 자아’로 탄생하는 감동을 읽으면서, 저는 어떻게 제 마음에 그 감동을 고이 담아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웠습니다.

 

그의 또 다른 시, 〈안에서의 죽음(An Inward Death)〉은 이를 더 분명하게 전해주고 있었습니다. 그 시의 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느 날 오후,

이 끊임없는 빗속에서

짐짓 그 비가 그치리라 여기면서

너는 사랑을 꿈꾸며 바다를 바라보고

외롭게 홀로 있었지

 

물방울 하나, 창문에 떨어져 적도만큼

긴 금을 긋네

그렇게 보아서 그럴까

그 금이 바다를 갈라 놓네

 

그러자

네 살아있는 자아가

아이의 죽음, 개와 새와

너 자신의 죽음을 우네

 

네가 그 죽어가는 온갖 것 구하려고 뛰어 오르네

그런데 길 한 복판에서,

인간의 온갖 폐허 한 복판에서

죽음이 너를 멎게 하네

네 가슴이 찢어지고

네 머리에서 피가 흐르고

태양은 파편 되어 흩어지네

 

너는 이제 죽어 감을 아는 사람

너한테는 격렬한 폭발이 일어나

세계가 처음 원자로 되돌아갈 필요가 없어

그것은 죽음이 매 순간 하고 있는 일인 걸!

 

그러니 이제

아무 것도 없어, 정말 필요한 것은

(Now

Nothing is really necessary)

 

저는 이 시인이 피지의 정서, 남태평양 여러 나라의 사유를 대표한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에는 학술발표에서 들을 수 없었던 하나의 선언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온갖 학술발표가 ‘죽음을 향해 가는 삶의 자리에서 죽음 피하기’를 의도하는 것이었다면 이 시는 ‘죽음 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며 그 삶을 온전하게 하기’라고 하고 싶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를 저는 조금은 서둘러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죽음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면 삶의 자리에서 죽음을 간과하고 살아갈 때보다 우리는 조금 더 겸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좀 더 잘난 체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쓰고 먹고 입고 치장하고 과시하는 일보다 아끼고 절제하고 염치가 있는 삶이 더 나아지리라고 생각됩니다. 서로 못났고 모자라고, 그래서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 있으니 서로 돕고 채우고 힘이 되어주어야 사는 삶이 삶다워진다는 의식도 더 뚜렷해질 것 같습니다. 불원간 죽어야 할 삶인데, 그러니까 사랑하고 살아도 한없이 짧은 세월이어서 미워하고 게걸스럽게 살고 힘이나 권위를 드러내려다보면, 한없이 초라하고 가난하고 불쌍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삶인데, 그렇다고 하는 것을 죽음자리에서 삶을 바라보면 알 수 있게 되리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말처럼 ‘죽어 감을 아는 사람’에게는 ‘정말 필요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처럼 아무 것도 정말 필요한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삶도 있는 법입니다.

 

삶이 죽음을 안고 있는 것이라면 언제든 소멸되는 것이 생명인데, 그래도 살아있는 한, 땅이 물속에 잠긴다는 것을 여러 원인을 찾아 밝히고, 이에 대한 대처를 하는 것도 매우,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죽음을 안고 사는 존재라는 겸허한 자리에서 삶을 영위해 나간다면 이른바 존재의 소멸이라는 ‘근원적인 문제’도 그야말로 근원적으로 풀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골똘하게 했습니다.

 

제가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은 너무 현란한 발표와 발언들이 쏟아지는데, 나중에는 그 발표와 주장들이 우리의 인식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할지도 모른다는 겁이 나기 시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주장 자체의 스타일에 발표자도 매료되고 청자도 그렇게 되는 어색한 분위기를 느끼면서, 그래서 이른바 국제학술회의라는 것이 지닌 자기 과시적인 묘한 속성이 서서히 역겨워지기 시작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그 시인의 시가 없었다면 모처럼의 ‘환상적’인 기회가 어쩌면 ‘환멸적’이게 되지 않았을까 하고 불안했던 저 자신의 모습을 지금 그 모임을 회상하면서 지울 수가 없습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저는 다시 그의 시집을 폈습니다. 〈(The House)〉이라는 그의 시 마지막 구절을 읽으면서 저는 새삼스레 도대체 학문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학문의 잔치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스스로 되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저 자신에 대한 오랜 만의 되살핌이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곤혹스러울 만큼 저 자신이 아팠습니다.

 

속고, 속이고, 스스로 자기를 속이면서,

우리는 왜 새가 모두 날아가 버렸을까 하고 물으면서

자라왔다.

(Deceived, deceiving, self-deceived we have grown

Asking why from the nest the birds have flown?)

 

빤히 까닭을 알면서도, 짐짓 그것을 모르는 양 그 까닭을 눈가림하면서, 온통 현학적인 논리와 개념들로 진정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속고 속이고 마침내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이 학문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래저래 제게 지난여름은 ‘환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출애굽기 3장 8절에 보면 여호와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하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시인이 이 말씀을 들었다면 그는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감격했을까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만약 시인이 ‘이제 아무 것도 없어요. 정말 필요한 것은. 우리는 죽음을 아니까요.’하고 말했다면 신은 무어라 반응했을까요. 그리고 만약 가나안 족속과 헷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하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이 신의 이 말씀을 들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지금 이 말씀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요.

 

속고, 속이고, 스스로 자기를 속이면서

우리는 왜 사람들이 서로 싸움을 하며 사나 하는 것을

물으며 자라왔는지도 모릅니다.

 

빤히 까닭을 알면서도 짐짓 그것을 모르는 양 그 까닭을 눈가림하면서 온통 현학적인 논리와 개념들로 진정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속고 속이고 마침내 자기를 속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라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
    문우 2013.10.23 20:54 (*.161.118.142)

    지난 말씀은 '환상적'이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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