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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한완상

복음의 감동 어디서 오나?

(요한3서 1:2-4, 빌립보서 4:4-5)

 

2013년 7월 7일 주일예배

한완상 형제

(새길교회 신학위원,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오늘의 기독교의 위기, 특히 한국교회의 위기는 무엇보다, 복음의 감동이 실종된 데서 찾아야 합니다. 인간과 사회를 온전한 실체로 변화시켜주는 예수의 복음은 천박한 자본주의적 출세와 성공을 도우는 일종의 미신으로 전락한 듯합니다. 이런 복음이 한국에서는 박정희 시대 ‘잘 살아 보세’의 정치 흐름에 조응했었지요. 군사정부의 외피적 경제성장에 발맞추어 한국교회는 폭발적 양적 성장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여기저기서 메가처치(mega-church)들이 치솟아 나왔지요. 세계가 이런 기현상에 주목하게 되었습니다만, 그 외피적 성장은 복음의 진수를 실종시키고만 듯하여 안타깝습니다. 이런 시류 속에서 역사적 예수의 참모습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의 모습도 도무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복음은 사사화(私事化)되었고, 탈역사화 되었고, 추상화 되었습니다. 개인의 영혼의 안녕과 개인의 종교적 명상의 고즈넉함이 관심을 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 썩은 역사현실을 올곧게 고쳐내고 어두운 역사를 밝게 변화시키는 일에는 아예 외면하고만 듯합니다. 신앙이 깊고 신학이 열렸다 해도 감동의 복음과 복음의 감동을 역사 현실 속에서 실천적으로 육화(肉化, embodiment)시키는 일에는 소홀히 한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이런 복음에는 공공적 감동과 공공적 열정과 헌신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비극의 조국분단 현실, 날로 후퇴하고 있는 민주주의 현실 속에서 공공적 헌신을 불러일으키는 역동적 동력이 교회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기에 예수님께서 그토록 갈망하셨던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워 보려는 복음적 움직임이 교회에서 더욱 희미해지고 있는 듯합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오늘 저는 이런 안타까움을 가슴에 품고, 내가 겪었던 몇 가지 흐뭇했던 체험, 감동적으로 저를 깨닫게 한 소중한 체험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먼저 지난 달 중순에 저는 한 젊은 엄마로부터 흐뭇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2년 전 쯤 제가 주례자로서 한 쌍의 젊은이의 결혼을 축하했는데, 지난 6월 15일 그들은 첫 아들의 돌잔치를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돌잔치 비용을 모두 지구 반대편에 있는 짐바브웨에서 에이즈에 걸린 엄마 때문에 고아가 된 어린이를 위해 기부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한 살이 된 그들의 아들 태윤이에게 다음과 같은 값진 메시지를 남겼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우리 아가 태윤아!

엄마랑 아빠는 소중한 우리 태윤이의 첫 생일을 맞이해

돌잔치 대신 짐바브웨 ‘포스코 어린이 센터’에 있는

형, 누나의 손을 잡아주기로 했단다.

앞으로, 인류, 국가, 사회 그리고 이웃을 위해 큰일을 하는 어린이로 자라나 거라."

 

엄마 염은애 씨는 첫 아들에게 이같이 감동적 공공의 진리를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주례할 때마다, 축복의 메시지에서 첫 신랑 아담이 첫 신부 이브를 보자마자 그의 입에서 터져 나온 기쁨의 탄성이 갖는 깊고 심오한 뜻을 축복 선물로 해석해주고 있습니다. 아담이 이브를 보자, 감동한 나머지 그녀를 자기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고백합니다. 여기 ‘뼈 중의 뼈’라는 표현은 뼈아픈 고통을 함께 나눌 동반자란 뜻이고, ‘살 중의 살’이라는 고백은 육체의 쾌락을 함께 나눌 동반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부부가 하나 된다는 뜻은 동고(同苦)와 동락(同樂)을 함께하는 동반자란 뜻인데, 여기서 중요한 메시지는 동고와 동락의 순서에 있습니다. 연애할 때는 동락이 앞장서겠지만, 결혼 하는 순간부터는 동고가 동락을 이끌어야 합니다. 동고의 그릇에 동락이 담겨질 때에야 비로소 부부가 감동적인 기쁨을 영원히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지요. 중요한 것은 동고 없는 사랑에는 감동이 없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젊은 엄마는 말도 못하는 한 살 백이 아들에게 동고의 복음적 사랑을 벌써부터 실천으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일잔치 비용을 기아대책 본부에 기부한 것이지요. 참 훌륭한 예수따르미지요.

 

이 동고의 사랑은 바로 아빠 하나님의 사랑이요, 그것이 바로 갈릴리 예수의 삶에서 육화되어 구체적으로 그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서 나타났습니다. 온갖 치유선교와 밥상 평등 공동체 운동이 바로 그 동고 사랑의 실천운동이었습니다. 동고 사랑은 나누고, 비우고, 내려놓고, 우아하게 패배할 수 있는 참 여유 있는 사랑입니다. 동고 사랑을 함께 나누는 분들은 이겨야만 직성이 풀리는 세상의 기쁨 보다, 양보하고 사양하고 심지어 멋있게 짐으로써 서로가 갖게 되는 기쁨을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나라의 싹이 돋아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동고의 사랑이야 말로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열쇠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공공의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마치 내가 젊은 엄마의 동고사랑실천에서 시원한 가을바람을 더운 한여름가운데서 느끼듯 말입니다.

 

둘째 얘기는 1980년 어느 더운 여름 남산 지하 2층에서 제가 느꼈던 감동입니다. 저는 그때 사망의 골짜기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남산 지하 2층에서 갇혀 지옥심문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었지요. 그해 5월 12일 어머님께서 소천 하셨고, 상가에는 여러 성직자들, 교수들, 변호사들, 언론인들, 정치인들이 다녀갔었습니다. 그런데, 전두환 신군부는 이들이 시끄러운 상가에 모여 김대중 선생을 대통령으로 옹립하기 위해 내란을 음모했다고, 이 분들을 잡아간 것입니다. 정말 기가 찰 노릇이지요. 공개된 상가에서 내란을 음모했다니... 여하튼 저희들은 5월 17일 밤늦게 일망타진 당했지요. 우리의 행방은 한 달 가량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미 총살당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가족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이 알려진 계기가 바로 6월 중순에 생겼습니다. 그때 얘기를 잠시 하겠습니다.

 

저를 심문했던 정보부 요원들이 모친상의 상주였던 저의 형을 조사하겠다고 했습니다. 아버님이 계신 형의 집을 찾아간다기에 나는 그들에게 내가 친필로 쓴 편지를 아버님께 보내고 싶었습니다. 한 달 전 아내를 잃은 아픔과 둘째 아들의 행방을 몰라 슬퍼했던 아버님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해 저는 쪽지편지를 아버님께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한 마디로 거절했지요. 참으로 서운했습니다. 그들이 형님을 조사하고 돌아오면서 저에게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아버님의 친필로 쓰신 편지이겠구나 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그 쪽지를 열어 보았습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언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함을

듣는 것 보다 더 기쁜 일이 없도다." (요한3서 2-4절)

 

아버님께서도 자식이 살아 있음을 아시고 친필로 간단한 편지를 쓰고 싶어하셨는데 조사 요원들이 허락하지 않자 성서의 이 말씀을 아버님의 메시지로 써서 보냈던 것입니다. 저는 이 쪽지의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이 쪽지를 2000년 전 사도요한이 쓴 편지로 읽기 보다는, 1980년 6월, 자식의 일로 노심초사 하셨던 아버님의 친필 사랑 편지로 읽었습니다. 그 어려운 한국의 ‘사자 굴’ 속에서 죽지 않고 믿음과 소망을 깊이 간직하면서 그 시련을 감당해내고 있음에 아버님은 감사하셨습니다. 바로 아버님의 그 감사와 기쁨을 성서 말씀을 통해 저에게 전달해 주셨습니다. 혹시 내가 시련을 이겨내지 못할까 노심초사하시면서 설령 내가 좌절 하더라도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겨낼 수 있기를 기도하는 아버님의 따뜻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역경 속에서도 예수 안에서 그 진리를 행하는 일을 포기하지 말라는 아버님의 간곡한 뜻도 읽어 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육신의 부친의 사랑과 격려가 바로 예수님의 아빠 하나님의 사랑과 격려로 저에게 다가 왔습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의 그 따뜻한 사랑의 격려로 다가왔습니다. “아, 부활의 주님께서 사자 굴에 갇힌 우리들과 동고하고 계시는 구나” 하는 깨달음이 저의 가슴을 따뜻하게 해 주었습니다.

 

사실 저를 그렇게 눈물 흘리도록 감동을 준 이 요한3서의 말씀은 한국교회, 특히 초거대 교회들이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소중히 여기는 성서 메시지입니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 중에는 이 말씀을 ‘3박자 축복’의 말씀으로 확신하면서 이것이야말로 기독교 복음의 진수라고 역설 합니다. <개인의 영적 축복>, <개인의 만사형통>, 그리고 <개인의 육체건강>을 보장해 주는 복음의 축복, 곧 순복음의 핵심 축복으로 더 높입니다. 그런데 서글프게도 여기에는 공공적 감동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진리가 주는 자유의 기쁨이 없습니다. 여기에는 사랑, 공의, 평화의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종말론적 확신과 환희가 없습니다. 만물이 새롭게 되는 기쁨이 없습니다. 나사렛 선언(Nazareth Manifesto)의 해방 메시지, 곧 희년 메시지도 없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비전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공공적 감동, 새 인간, 새 역사, 새로워지는 만물에 대한 감동과 기쁨이 없습니다. 게다가 자기를 비워 남을 채워주며, 자기를 낮추어 남을 높여주며, 자기는 죽어도 남을 살려내는 예수의 아름다운 실체가 없습니다. 자기는 십자가 지며 처참하게 패배하면서도 무지한 폭력의 권력을 용서하셨던 그 사랑이 없습니다. 원수를 사랑함으로써 원수관계를 근원적으로 없애버리는 사랑의 감동이 없습니다. 그리하면 모두가 마침내 승리할 수 있는 진리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님이 여기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세 번째 얘기로 넘어가겠습니다. 1951년 여름의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62년 전 일입니다. 아버님과 저는 시외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철길의 침목을 밟으며 함께 걸었습니다. 퍽 낭만적이었습니다. 전쟁 중에 겪었던 일들을 회상하며 철길을 신나게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경찰인지 철도 역직원인지 알 수 없으나 우리에게 다가와서 다짜고짜 아버님의 멱살을 잡고 얼굴에 폭행을 가했습니다. 중학생 아들 데리고 철길의 침목을 밟고 걷는 것이 심각한 범죄는 아닐 터인데 그들은 아버님에게 거침없이 폭행을 가했지요. 저는 분했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흐트러짐 없이 조용히 맞기만 했습니다. 그때 아버님은 학교 교감 선생님이셨지요. 한 마디 저항이나 변명도 하시지 않고 조용히 철길에서 내려오셨지요. 너무 분해하는 저의 손을 꼭 잡어주시며 조용히 걸어가셨습니다. 내 손을 꼭 잡아주실 때 저보고 ‘분하게 여기지 말아라’ 하고 타이르는 듯 했습니다. 이때 나는 아버님의 그 무력함과 그 점잖음에 화가 나 있었지요. ‘내가 뭐 잘못했소. 아들 앞에서 이렇게 폭행해도 되는 거요. 당신 어디서 무엇 하는 사람이기에 교육자에게 함부로 폭행하는 것이오.’ 라고 강하게 대응하셔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내가 신앙의 철이 조금 들기 시작하고, 신학도 조금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 특히 예수님의 말씀과 삶, 그의 실천과 고난의 삶을 조금 더 가슴으로 만나게 되면서 아버님의 그 무력함이 결코 무력한 것이 아닐 수 있다고 희미하게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겟세마네에서 맥없이 제사장들의 졸개들에 의해 체포되어 조용히 끌려가시고, 로마 군인들의 비웃음과 채찍질을 말없이 당하시는 예수님을 멀찌감치 훔쳐봤던 제자들의 그 심정을 이해 할 수 있는 듯 했습니다. 게다가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라고 절규하시는 예수님 모습 보고 제자들은 더더욱 절망하고 좌절했을 것이라 이해했지요. 그런데 희한하게도 이 모든 처참한 광경을 목도 했던 사형집행관 로마 백부장은 놀라운 고백을 쏟아냅니다. 그는 로마 황제만이 진짜 유일신이요, 신의 아들이라고 믿는 로마제국의 핵심 군 장교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 십자가 처형의 집행관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선언했지요.

 

“참으로 이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마가복음 15장 39절)

 

이 같은 고백과 선언은 엄청난 뜻을 담고 있습니다. 사형집행관이 감히 국가반역죄에 해당하는 발언을 한 것이지요. 로마의 허락도 받지 않고 예수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참칭(僭稱)했다고 하는 제사장들의 거짓 고소를 받아들여 예수를 사형시켰는데, 그 처형당한 피고인을 진정한 신의 아들이라고 선언했으니, 그는 대단한 실수를 했지요. 아마 그도 이 고백으로 십자가 처형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그가 반역적 발언에 더하여 항복의 선언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로마제국의 장교로서 로마의 막강한 군사적 패권과 법률적 지배권이 처참하게 처형당한 예수님 앞에서 항복한 셈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같은 예수의 승리는 사흘 후 부활사건으로 확인됩니다. 로마의 거대권력을 무릎 꿇게 한 예수 사랑의 힘은 결단코 로마의 힘과는 질적으로 달랐습니다. 로마의 폭력과 전혀 다른 사랑의 힘이었습니다. 초대교회와 기독교의 정체성이 바로 여기에서 나온 것이지요. 이것이 오늘 우리 예수따르미의 올바른 정체성이기도 하지요.

 

우리가 폭력, 독선 그리고 탐욕의 세력과 맞설 때 승리에만 눈이 멀게 되면 심각한 모순이 나타납니다. 악의 세력을 이기려고 악이 즐겨 사용하는 수단을 채택하는 순간, 힘으로는 이길지 몰라도 바로 이기는 순간 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악의 수단, 곧 폭력과 독선의 수단을 사용하는 바로 그 순간 악의 졸개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힘으로 보호하겠다고 칼을 휘둘렀던 베드로를 주님은 준엄하게 나무라신 것입니다. 칼로만 원수를 이길 수 없습니다. 특히 원수의 악을 제거 할 수 없습니다. 칼로 원수의 피를 흘리게 하는 순간 악의 똘마니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 주님께서 순 하디 순한 어린 양처럼 골고다의 길로 조용히 십자가 지시고 ‘바보’같이 무력하게 가셨는지를 우리는 깊이 이해 할 수 있어야 합니다. 1951년 여름 저는 아버님의 그 무력함의 뜻을 예수님의 고난의 현장모습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1980년 6월 아버님이 보내주신 쪽지의 성서 말씀에서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은 무한히 무력한 듯해도 근원적으로 막강한 감동의 선한 힘입니다. 이런 감동의 힘이 공공적 힘이기에 새 역사, 새 구조, 새 하늘, 새 땅, 새 사람을 세워가는 힘이라 하겠습니다. 주님의 당부대로 우리는 하늘에서처럼 이 땅에서 이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중심에 바로 교회가 우뚝 서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공공의 마당, 감동의 마당 중심에 서서 변화의 동력으로 작동할 수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교회는 감동의 복음 주체가 될 수 있습니다.

 

끝으로 저는 빌립보 감옥에서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도 바울이 권면한 다음 말씀의 뜻을 깊이 새겨보고 싶습니다. 복음의 본질을 오늘의 상황에서 새롭게 되씹어보고 싶습니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의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 (빌립보서 4장 4-5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열쇠 말(Key word)은 ‘관용’입니다. 이 말의 그리스어는 ‘에피에이케이아(epieikeia)’입니다. 이 단어는 쉽게 번역하기 어렵습니다. 인내, 친절, 부드러움, 겸손, 화합, 절제, 관용 등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오래 참고 온유한 것을 사랑의 본질적 성격으로 지적했던 바울로서는 에피에이케이아를 바로 그 사랑의 다른 표현으로 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어 에피에이케이아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kindness’나 ‘gentleness’ 또는 ‘forbearance’를 사용하는 데, 이 중에서 ‘forbearance'가 본문에 더 가까운 뜻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에피에이케이아를 우리말로 ’관용‘이라고만 번역한다면 그 깊은 뜻이 사뭇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는 듯합니다. 우리말 본문의 ’관용(epieikeia)‘이라는 단어를 'forbearance'로 뜻을 음미해본다면, 이것은 법과 규칙 이상의 따뜻한 마음, 곧 인내로 배려하는 마음, 자기의 법적 관리 행사를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을‘의 딱한 입장을 배려해서 그 권리를 ’갑‘의 입장으로 행사 하지 않는 마음을 뜻합니다. 약자의 어려운 입장을 역지사지, 역지감지, 역지식지(易地食之) 하는 따뜻한 마음이지요. 채권자가 채무자의 딱한 사정을 배려하여 그의 법적 권리를 유예하는 넉넉한 마음이지요. 좀 더 과감하게 말한다면 채무자체를 탕감해주는 따뜻한 마음입니다. 우리 채권자가 채무자의 빚을 탄감 해주듯, 우리의 모든 잘못을 용서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기도의 뜻이 바로 이 관용의 마음입니다.

 

교회가 에피에이케이아 곧 오래참고 온유하며 약자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행동할 때 비로소 예수 복음의 본질이 꽃피게 되는 것이지요. 에피에이케이아는 규칙과 법 보다 더 따뜻하고 더 감동적인 변혁의 동력이 됩니다. 컵에 물을 정말 꽉 차게 부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물이 철철 넘쳐도 된다고 하는 넉넉한 마음을 갖은 사람만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동고의 사랑은 교회라는 컵에 사랑의 물을 철철 넘쳐흐르도록 부으면서 공동체를 하나 되게 만들어 내는 감동적인 변화의 힘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사랑보다 더 진보적인 힘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랑의 힘만이 오늘과 내일을 더 밝게, 더 맑게 향상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평화와 공의의 새 질서를 만들어 내면서 독선과 폭력이 들어설 자리를 처음부터 사라지게 하는 힘입니다. 마치 원수의 존재를 근원적으로 사라지게 하는 힘이 원수를 사랑하는 결단과 실천에서 나오듯 말입니다. 애자무적(愛者無敵)은 예수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바로 그 말씀이 아닙니까. 이런 사랑만이 감동적인 공공의 동력, 참 변혁의 힘을 지닌다는 사실을 새길 공동체는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것을 깜빡 잊는 순간 새길은 헌 길이 될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가슴 아프게 보면서 바울이 가슴으로 온몸으로 토해낸 그의 권면에 새삼 다시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말씀의 깊이를 새삼 가슴으로 성찰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우리 교회에 이 같은 사랑이 살아 움직이는지 말입니다.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린도전서 12장 31절-13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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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구 2013.07.17 15:43 (*.162.134.114)

    정말 훌륭하신 강론으로,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님의 말씀이 생각날 정도입니다.  주변 친구,친지에게 전파하고 싶을 만큼 깊은 울림을 주는 황금같이 귀한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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