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평생 떨쳐 버리지 못한 충격- 양재복

by 루시사랑 posted Sep 04, 2015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내 평생 떨쳐 버리지 못한 충격

                                                                

                                                                                                                 양재복

 


*이 글은 올해 여든 넷 이신 양재복 선생님이 들려주시는 70년 전 한 사건 이야기입니다

                                                     

 

대동아 전쟁(당시 부르던 이름으로 썼습니다.)이 끝나고 미국함대가 인천항구로 입항을 했어요.

 

전선에서 바로 입항한 미군들은 미친 듯이 시내로 들어와

아무데서나 여자를 만나면 겁탈하던 무서운 때였지요.

우리나라 치안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때입니다.


         

             images.jpg                다운로드.jpg



어느 날 아침에 집에서 전화를 걸고 있는데, 전화기 바로 앞에 있는 거울에 흑인 미군 얼굴이 보입니다. 깜짝 놀라 다시 보니 사라지고 보이지 않더라구요.

그런데 잠시 후 앞대문으로 그가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찌할 바를 몰라 엉겁결에 큰 오빠, 껌둥이!’ 라고 소리쳤습니다.

(당시는 흑인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 순간 총소리가 들리고 그 흑인은 양손을 들고 뒷걸음 쳐 도망 나갔습니다.

그 순간 나는 마룻바닥에 주저앉아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지요.

그 후부터 전화 공포증이 생겼습니다. 전화를 걸지 못하는 형편이 되었고, 대학 졸업 후 미국 유학길이 생겼지만, 그마저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잠깐의 사건 아닌 사건이 평생 내 마음에 큰 공포를 남긴 것이지요.

그 때 권총이 없었더라면 내 인생은 어찌 되었을까 가끔 생각해 봅니다.

 

날 살려준 권총의 사연은 이렇습니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일본놈들은 도망치기에 바빴고, 우리 정부는 아직 수립되지 않은 상태여서 조병옥 박사님께서 치안국(정확한 기관 명칭은 기억 나지 않네요)을 세우시고 비서 겸 영어 통역관을 모집할 때였어요.

내 큰 오빠께서는 전에 은행원으로 근무하였으나, 종전 후 모든 기관이 폐쇄된 상태여서 이 통역관에 응시를 했습니다.

다행히 채택이 되어 권총을 보급 받게 되었는데, 그것이 나를 살린 것입니다.

오빠는 후에 조병옥 박사님의 사위가 되었지요.

 

세월이 많이 지나 70년이란 시간 전의 사건이지만 아직도 그때 받은 정신적인 상처는 남아 있는지, 지금도 전화와는 친하지 않습니다. 전화 통화로 감정의 소통을 하는 것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음에 남아 있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격동기를 살아 온 사람의 흔적인가 봅니다.




** 양재복 선생님은 1931년 태어나셨고, 이화여대 의대를 졸업하신 후 청량리 병원에서 행려정신병 환자들을 맡아 돌보셨습니다.

인천에서 태어나 자라시면서 해방 후 미군들이 들어와 주둔하게 되는 과정을 눈으로 생생히 목격하시고, 대학 입학하자마자 맞은 6.25 전쟁 때는 어렵게 부산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의과대학 실습을 하셨습니다. 은퇴 후 운전면허를 따신 후 전국 국보순례를 하셨으며, 노인대학에서 강의도 하셨습니다.

정광복 선생님과 공저로 이제 겨우 80이다라는 책도 출판하셨으며 교회에서는 비디오반, 의료봉사에 열심히 참가하셨습니다.



Articles

1 2 3